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158
158. 상산의 전설(5)
“우리 쪽 피해 없지?”
“네, 우리 군의 피해는 없습니다. 우리가 파악한 구간에서 생존자가 931명, 사망자가 765명인데, 생존자 중에 중상자 32명이 간밤에 사망해서 지금은 생존자가 899명, 사망자가 797명입니다. 생존자 중에는 중상 322명, 경상 331명, 나머지 246명은 부상이 없는 자들인데, 그 중에 경상자로 분류되지도 못할 정도의 경미한 부상을 입은 자가 일부 섞여 있습니다. 사망자는 어제 모두 관군에게 인계했고, 간밤의 사망자도 조금 전에 인계했습니다만, 중상자 중에 40명 정도는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선화 상단 쪽 상황은 어떤가?”
“거기하고 관군은 아직 제대로 파악이 끝나지 않아서 결과를 통보받지 못했습니다만, 양쪽 합쳐서 우리가 파악한 정도는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쪽은 왜구의 사상자도 파악해야 하고, 자신들의 피해 상황도 파악해야 한다.
관군들도 많이 죽었고, 상단의 호위대도 많이 죽었으니. 그리고 중국 사람들 느린 것은 익히 아는 것이니까.
아니다. 딱 한 가지 빠른 것이 있구나.
남의 것을 무단으로 베껴서 제 것인 것처럼 하는 거.
“잠자리는 어땠나?”
“아주 좋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하며 극진히 대해 주긴 하더군요.”
“그래, 하긴 우리가 구해 주지 않았으면 이들은 전멸했을 수도 있어.”
“그렇게 많은 사상자가 났는데도 물러서지 않는 게, 가족들이 함께 있어서 그랬던 모양이더군요.”
전쟁이라는 것이, 군인들끼리의 전투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전멸이란 좀처럼 없다고 봐야 한다. 질 것 같으면 후퇴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현실의 전쟁과 영화 속 전쟁의 차이이다.
후퇴한 후엔 전열을 재정비하여 다음에 이길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상단 관계자들의 가족들이 같이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 그들의 생존이 확인될 때까지는 도망칠 수 없었다는 문제가 있었다.
“가족들을 두고 후퇴할 수는 없었겠지.”
“네, 그렇지요.”
“어제 전투에서 총을 사용하는 것을 송나라 관군이 보았나?”
“제법 여러 사람이 본 것으로 압니다. 총기 사용을 본 사람은 저격을 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들이 다였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합동 작전을 하면 이런 게 문제이다.
어제 일은 합동 작전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도우러 온 것이지만.
“추적 가동을 한 것인가?”
“정규하가 추적 가동을 했는데, 완전하지 못한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 전쟁 중의 상황이니 사람의 눈을 믿을 수는 없어 혹시나 싶어 테르를 이용하여 추적 가동을 시킨 것인데, 타깃이 너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럼, 총기를 본 놈들을 어쩐다.
그냥 살려 줘야 해? 아니면 잡아야 해?
소문이 퍼져서 좋을 건 하나도 없는데, 어차피 상산 앞바다를 포격했으니 그것도 있다.
포격으로 인해 상산 앞바다가 불타올랐으니, 총기를 본 사람이나 그런 포격을 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가려내지도 못한다.
“포기하지.”
“네,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송나라 관부에서 연락이 왔는데, 왜구들을 어떤 방법으로 처형할 것인지 묻기에 우리에게 맡겨진 놈들은 우리가 해결하겠다고 했습니다.”
“저희들은 어찌한다는데?”
태영은 아주 오래전의 영화에서 포로들을 모두 십자가에 매달아 성으로 이동하는 길 양쪽에 죽 이어져 있었던 것을 잠시 생각했다.
그것은 다른 적들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려는 방법 중 하나이지만, 여기서는 공포심을 심어 줄 대상이 없다.
“모두 목을 자를 모양입니다.”
“시체 치우기 힘들게 왜 그럴까?”
“신도익에게 들으니 제주를 침략한 왜구들은 모조리 한 줄로 묶어서 바다 한가운데서 수장시켰다고 하던데, 우리도 이번에 그리하면 어떻겠습니까?”
“아냐, 상단 호위대에 넘겨서 그들한테 처리하라고 해.”
그게 좋다.
김웅겸이나 사포의 병사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도와주러 왔을 때는 그냥 도와주고 끝내면 된다.
시대적으로 이때의 중국은 전사자들을 치우지도 않고 그냥 그대로 놔둔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는 제법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이고, 앞에는 평야 지대여서 농사를 짓고 있으니 그냥 두지는 못할 것 같다.
“네, 그리하겠습니다. 송나라를 침략한 놈들이니 송나라 사람들에게 맡기는 걸 저들이 원하는 것 같은데, 우리에게 요구를 못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럴 거야. 그리고 관군들이 떠나고 나야 우리도 물건 내리고 명주로 돌아갈 거니까, 여기서 체류하는 기일이 좀 길어질 거야. 거기에 맞춰서 계획을 잡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왜구들에게 음식물 일절 주지 말고.”
“네, 왜구들의 처분을 넘길 때 그리하라 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대장님, 여기가 대산도보다 훨씬 땅이 좋은데, 여기에 땅을 좀 확보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나도 그 생각은 했어. 대산도가 명주와 가까운 것이 장점과 단점이 같이 있기도 하지만, 섬이라는 장점도 있어. 그렇다고 해도 기지가 하나 있으면 좋으니 선화 상단주에게 좀 팔라고 해야겠어.”
“네, 무조건 찬성입니다.”
***
“배가 정말 크군요.”
아나이스와 하인 둘이 황룡호에 승선했다.
배 크다는 소리야, 처음 타는 모두에게 듣는 이야기이니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조금만 더 키우면 항모 급인데, 당연히 크지.
그나저나 비행기를 만들 수 있을까?
항모 생각을 하니 비행기를 만들고 싶어진다.
2차 대전 때 사용하던 프로펠러 전투기 정도는, 5년을 잡고 연구 개발에 투자하면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테르에 자료가 있는지, 시간을 내서 확인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다.
자료가 없으면 꿈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있으면 해볼 만하고, 혹시 헬기에 대한 자료가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네, 제법 크지요.”
배도 목선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철선으로 바꿀 준비를 차근차근하고 있다. 그래야 유럽과 미국 땅을 밟아 볼 수 있을 테니.
“저것이, 왜적들의 선단을 폭파시키고 불바다로 만든 것인가요?”
천으로 가려진 자주포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저것을 무어라 부르는지는 모르나, 우리에게 알려 줄 수는 없는지요?”
“이름이 없으니, 원래 나지 않았고, 본 적이 없으니 본래 없었다고 생각하십시오.”
태영이 아무 표정 없이 그렇게 대답하자, 면사 밖으로 나온 아나이스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원을 제지할 생각이 없으시군요.”
태영과 아나이스만 아는 것을 슬쩍 말했다. 아니, 서윤도 지금은 알고 있다.
몽골이 대륙으로 진출해 세력을 더욱더 키우고, 원으로 이름을 바꾸려면 아직도 한참의 시간이 남아 있다.
태영이 현대의 문물을 도입해도 가능한 사포 외부로 내보내지 않고, 현대식 무기를 만들어도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 사용을 자제하는 것은, 언젠가 생각했던 것을 기준으로 나름의 규칙을 정한 것이다.
몽골의 세력은 저 포를 사용하면, 힘은 들어도 꺾을 수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하면 전체의 역사를 틀어 버리는 것이다.
나비의 날갯짓?
그것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지금 이곳은 태영이 살던 지구도 아니고, 어딘지 알 수가 없는 다른 차원의 지구이니 원래 태영이 태어나고 자랐던 지구와는 다른 곳이라고 생각을 굳힌 만큼, 나비의 날갯짓 같은 것을 염려해서 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처럼 살 수는 없다.
아나이스는 자신이 살던 시대에서 이 시대로 날아와 아무리 미래에서 왔다고 해도 사실상 큰 변화를 주기가 어렵다.
이 시대나 아나이스의 시대는 과학 기술 문명의 큰 차이가 없을 테니.
그러나 18세기 말에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 혁명을 기점으로 과학 기술 문명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태영이 라일리의 물건을 발견하기 이전까지는 그 과학 기술 문명이 정점인 시대에서 살다 왔다. 물론 과학 기술의 정점이라 해도 태영으로서는 그 시대 과학 기술진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래도 태영이 하는 일이 미치는 영향은 나비의 날갯짓 같은 것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될 정도의 후폭풍이 예견된다.
그래도 신경 안 쓰고 살기로 했지만, 세계의 역사를 마구 뒤집어 버리는 것만은 조금 자제하자는 생각이기에 이 기술 문명을 가지고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지 않는 것이다.
“바뀌는 것이 너무 많은 것은 후세에 미치는 영향도 크지만, 좋은 결과보다 나쁜 결과가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고려를 건들지 않으면, 이라는 앞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역사를 되짚어 보면, 11년 후에 살리타를 지휘관으로 삼아 고려에 쳐들어올 것이니 건드리는 것이 맞지만 해결 방법을 찾아봐야지.
그런데 저고여가 살해된 때는 1225년, 그것을 핑계로 쳐들어오기는 1231년.
6년 동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가만있어 봐라.
살리타가 쳐들어올 때, 배신자인 고구려 무신이 한 놈 앞장서서 들어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름은 기억이 안 나고 성이 홍씨였다는 것만 가물가물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놈이 누구인지, 관계가 어찌 되는지 조사를 좀 해서 최세헌을 만나면 상의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말뜻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으시군요.”
“네, 그리고 상산의 땅,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태영이 말머리를 돌렸다.
“우리를 구해 주신데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리고 선화 상단으로서도 그곳을 사포 상단이 맡아 주신다면 아주 좋습니다.”
상산의 땅을 좀 사자는 말에 선화 상단이 보유 중인 땅의 상당 부분의 땅문서를 사포 상단에 무상으로 주었다.
왜구 퇴치에 사포 상단의 도움을 받은 관에서도 서류상 정리를 해 주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유진이에게 지도 놓고 확인해 보라고 했더니, 둘레가 97킬로미터, 면적이 37평방 킬로나 된다. 환산하면 1,130만 평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면적이다.
그래 봐야 선화 상단이 가진 상산의 땅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데 더 놀랐다. 물론 그 지역 중에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중에서 성북촌이라는 곳의 촌장이고, 글을 아는 사람인 임홍위를 총관으로 정해 전체를 관리하도록 했다.
적당히 약삭빠르고, 적당히 돈 밝히는 사람이면 참 좋을 것 같다. 아직은 모르겠지만.
대산도의 총관 유양은 딱 그런 사람이어서 부리기 정말 좋다.
태영은 임홍위에게 성북촌 옆쪽의 오신촌에 터를 닦아서 대형 창고 수십 동을 짓도록 시키고, 호리병처럼 생긴 향포촌의 안쪽에 접안 시설을 만들도록 시켰다.
향포촌은 바다에서 곧바로 보이지 않는 지형이기도 하고, 방파제가 없어도 파도를 막아 주는 형태여서 천혜의 입지를 갖춘 곳이다.
아무래도 밀무역을 해야 하는 사포 상단과 선화 상단의 안전을 위해 이곳을 준 듯했다.
태영이 자주 오지 못하니, 당분간은 선화 상단에서 관리할 것이고, 선화 상단은 석탄과 철궤, 그리고 동괴를 이곳의 창고에 가져다 쌓을 것이다.
태영은 아무 때나 와서 싣고 가면 된다.
“철광석과 철괴를 관의 허가 없이 교역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말이 나온 김에 태영이 확인할 것이 있어 물었다.
“그게 전매 제도의 취약점이지요.”
“관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거래도 안 된다는 것이 오히려 취약점이라구요?”
“네, 상인들의 말을 들어 보면, 소금과 철은 과거로부터 변치 않고 항상 전매해 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세수의 대부분을 전매에서 얻는 것이지요.”
“고려도 소금은 전매를 하고 있습니다. 사포만 제외하구요.”
지난번에 석탄 외에도 암염과 피혁을 왕창 실어 갔다.
그 후로 소금을 살 일이 없다.
“그렇게 나라에서 전매를 하는 물건은 당연히 관의 눈을 피해 밀거래를 하게 되지요. 산주가 운이 좋아 철광산을 발견하면 일약 거부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데, 그때부터 관의 통제를 받고 대부분의 수익을 관에 빼앗기게 되니, 자연스럽게 관에 알리지 않고 독자적인 판로를 만들게 되지요. 수요는 어디라도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일단 관의 통제를 받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중국의 넓은 땅덩어리 어느 구석진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에서 속속들이 다 알지 못할 테니, 태영이 송나라의 통제를 받지 않는 철괴와 철광석을 거래하게 된 것은 정말 운이 좋은 셈이다.
거기다가 피혁을 거래 대상에 포함시키고, 목화는 양에 상관없이 모두를 사 주겠다고 했더니, 자신들의 영역에서 나는 목화는 모두 사들이겠다고 했다.
더불어 추가로 좋은 정보를 받았다.
황하를 끼고 있는 지역과 산동반도 쪽에 목화가 제법 나는 곳인데, 지금 그쪽을 금나라가 차지하고 있단다.
그쪽이 농사를 짓는데 적합하던가, 아닌가?
농산물이 풍부하던가?
금나라에 망원경을 주고 좋은 말 1,100마리를 받기로 했는데, 목화를 거래에 추가하는 방법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고 있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 보아서는 중국 땅에서 목화 재배가 제법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것을 이용하여 면직물 생산을 하지는 못하기에 활용도가 낮고, 그 중요성을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노도 없고, 돛을 올리지도 않고 가는 배라니.”
태영의 상념을 깨고 아나이스가 말했지만, 배에 대해서는 별로 대답해 줄 만한 이야기가 없다.
“…….”
아무리 아나이스라도 모든 것을 다 말해 줄 수는 없으니 웃기만 했다.
“그런데 이번에 항주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으신다구요?”
“네, 북방에서 할 일이 있어서 곧 가야 합니다.”
선화 상단과의 일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니, 기화 상단과의 일 마무리, 주양세의 가족 데려가기, 개경 손님을 데리고 명주와 항주를 구경하는 일 정도면 중요한 일은 끝난다.
항주의 호장고는 들여다보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주로 보석 종류나 서책 같은 것이 주를 이룬다고 했으니 털어봐야 태영에게는 크게 도움이 안 된다.
그런 후 개경으로 가서 2기로 예정된 철소의 장인들을 데려오는 일과 말을 받아야 한다.
말을 키우려면, 말이 달릴 수 있는 넓은 초지가 있어야 하기에 그것도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온실을 완공했으니 작물 키우는 실험도 해야 한다.
딸기나 토마토 같은 것을 심으면 제격인데, 태영이 알아보니 아직 딸기와 토마토가 뭔지도 모르는 것으로 봐서, 이 땅으로 전래되기 이전인 듯하다.
아직 속이 꽉 차는 배추가 없고, 배추김치를 담지도 않기에 배추 품종 개량을 지시해 두었다.
사포에서의 할 일도 많지만, 이 겨울에 일본에서 해야 할 일들도 기다리고 있다.
봄이 되면 금산으로 인삼 재배를 공부하러 보낸 겸우가 도착할 테니 그것도 준비해야 한다.
이것저것 손으로 헤아려 보니 할 일이 제법, 아니 무지하게 복잡하네.
“많이 아쉽습니다. 최 단주님과 이야기를 나누면 새로운 것들을 꽤 많이 알 수가 있는데 말입니다.”
“잠깐, 자리를 좀 옮길까요?”
“네, 어디로?”
잊고 있던 것을 해결해야 했다.
서윤에게 눈짓을 했다.
“이리로 오십시오.”
서윤이 함교를 벗어나자 아나이스와 하녀가 뒤따랐다.
“두 분은 잠시만 여기 기다려 달라고 해 주십시오.”
1호 선실 앞에서 태영은 아나이스에게 하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나이스가 태영을 쳐다보았을 때, 입모양으로만 ‘케네스’라고 하자, 둘을 기다리게 한 뒤에 선실로 들어섰다.
“유감의 말씀을 먼저 드려야겠군요.”
선실에 들어서자 아나이스가 자리에 앉지도 않고 말했다.
“혹시 케네스 씨가?”
“네, 생각하신 대로입니다. 두 달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
“세상에.”
한서윤도 무슨 일인지를 알았기에 깜짝 놀랐다.
“라일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아무래도 아나이스는 서윤이라는 이름보다 라일리라 부르는 것이 편한 듯했다.
“네, 그렇습니다. 에밀리아나 라일리에게는 비밀이 없습니다.”
“Emilia?”
“My First Wife.”
“Oh, I see.”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봐서 알아들은 것 같다.
그럼, 서윤은 두 번째 아내냐고 물어오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에밀리아도 만나고 싶었는데, 라일리를 먼저 만나게 되는군요. 에밀리아는 잘 지내지요?”
“지금 애기를 낳아서 아들과 함께 지내느라 나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 말을 듣고 한서윤도 빙긋 웃었다.
“후훗, 그렇겠군요.”
아나이스가 한서윤을 쳐다보며 찡긋, 윙크를 한다.
잘 알지. 저게 무엇을 뜻하는 신호인지.
그런데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샜다.
“케네스 씨가 두 달 전에 떠났다구요?”
“네, 케네스 씨가 그리 떠나서 매우 슬프지만, 어쩌면 케네스 씨에게는 잘된 일인지 모르지요. 한 달에 1~2년씩 늙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일 것입니다.”
그건 맞는 말이다. 하루하루 가는 것이 정말 싫었을 테니.
아나이스의 표정에 정말 케네스가 죽어서 안타깝고 슬프다는 느낌은 없었다.
하긴 사는 시대가 달랐고 살아온 곳도 달랐으니, 따지고 보면 미래에서 과거로 날아왔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기도 하다.
아, 하나 더 있구나. 영어를 안다는 것.
“그렇지요. 그건 맞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