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453
098. 결정의 시간(2)
“뭐 해?”
태영이 수행 비서를 보고 말했다.
이건 약속대로 벽 보고 꿇어앉아 손들고 있으라는 뜻이다.
“최 사장.”
“왜요?”
신윤희의 부름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유 상무 체면도 있는데 꿇어앉기는 좀 그렇지 않아?”
“대신 신 부사장님이 꿇어앉으시면 뭐 봐줄 수 있습니다.”
“아, 취소.”
신윤희는 피식 웃으며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아무래도 오영배에게 점수 따기 발언이었나 보다.
“야, 너무 심하지 않냐?”
오영배 회장이 노기 띤 목소리로 태영을 향해 소리쳤다.
“심하다 생각되면 나가면 돼. 말리지 않아.”
“하, 씨바. 도저히 말이 안 통하네.”
오영배의 투덜거림보다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석인전자 사람들이다.
마치 오영배가 이런 일에 참을 사람이 아닌데, 라는 표정이니까.
태영도 위니가 설명해 준 오영배의 성품을 들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이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커피가 들어왔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라앉으면서 정우찬의 주도로 회의는 시작되었다.
“지난번, 골프 모임에서 합의된 사항들은 잘 알고 계시지요?”
정우찬이 시작하기 위해 이미 이전에 합의된 것에 대해 운을 떼었을 때다.
“뭐? 골프 모임? 그런 일이 언제 있었어?”
오영배의 고함 소리다.
“오영배, 발언권 없다고 했고,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들어왔다.”
태영은 조용한 어두로 오영배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래도, 나 빼놓고 이러면 안 되지.”
대체 왜 안 되는데?
정말 웃긴 놈이다.
“…….”
“…….”
모두의 시선이 오영배를 향했다.
정우찬이 겨우 한마디 했을 뿐인데, 이렇게 태클이 들어오면 회의 진행이 안 된다.
“한번만 더 말해 봐. 내가 제대로 가르쳐 줄 테니.”
이번에는 모두의 시선이 태영에게 돌아왔다.
아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국내 굴지의 그룹 오너이다.
윽박지르는 태영의 모습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씨바…….”
낮은 중얼거림이 있었지만, 그 정도는 넘어갔다.
저 정도면 정말 많이, 아니 죽을 만큼 참고 있는 것이다.
살면서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있을까?
초반에 제법 세게 나오던 김희종 사장.
그 일행들이 조용한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오영배의 콧김이 뿜어져 나올 때면 어김없이 태영의 말이 튀어나왔다.
정우찬이 태영처럼 할 수는 없으니까.
회의는 그것과 상관없이 진행되었다.
“그거 너무하지 않소?”
다른 결정 부분에서 김희종의 불만 어린 표정과 투덜거림이 나왔다.
“그럼, 사준전자는 이 건에서 빠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되죠?”
“아, 젠장. 그런 뜻은 아니오.”
“그럼 무슨 뜻인데요?”
젠장으로 시비를 걸면 또 회의가 개판되겠지?
“그 이야기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진행하죠.”
윤종규 전무다.
“맞습니까?”
태영이 김희종에게 물었다.
야구 방망이로 입술을 얻어맞은 것처럼 튀어나와 고개만 끄덕인다.
그렇게 회의는 계속되었다.
대신에, 협의되는 일을 관망하는 자세다.
관심이 식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직원들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자, 그럼 최종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회의의 마무리다.
내용은 간단하다.
사준과 석인에서 1만 평 규모의 공장을 각각 또는 한곳으로 정하여 터니테크에 제공한다.
기한은 계약일로부터 2개월 이내.
시가로 공급하며, 1년간 대금 지불을 유예한 후에 3년에 걸쳐 분할 상환한다.
터니테크는 공장을 공급받은 때로부터 3개월 이내에 휴대용을 제외한 앳윌 시리즈 제품을 공급한다.
완제품을 만들기 위한 기술 자료와 샘플은 터니테크에서 공급한다.
각 사는 계약의 위반 시, 상대가 요구하는 배상액을 15일 이내에 모두 지불한다.
금액과 시기에 대해서 이의 제기는 할 수 없다.
그 정도로 정리되었다.
샘플은 무료가 아니라는 말에서 기함을 했다.
그것도 가격이 아주 무지하게 비싸다.
“계약 위반을 하지 않는다면, 1년 이내에 타사와는 계약서에 명시한 제품의 공급 계약을 체결하지 않는 것으로…….”
“네, 맞습니다.”
그렇게 계약은 체결되었다.
김희종 사장이 한발 뒤로 물러서 있어서 쉽게 타결되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들을 전송하기 위해 엘리베이터 룸으로 나왔다.
오영배와 비서는 회의실에 남았다.
복도에 오영배의 보디가드들이 재빨리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지만, 그 정도는 봐줘야지.
“최 사장, 잘 좀 부탁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신윤희의 말이다.
“그쪽에서 잘하시면 우리는 문제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래, 그래. 힘 합쳐서 잘해 보자고.”
“사단 법인 ‘별이 되어’ 아시죠?”
“그런 곳이 있어?”
모를 수 있다.
이 사람들이 그런 일에까지 관심을 가질 일은 아니니까.
“나와 같이 이유도 모른 채 사라져 버린 군인 가족들이 결성한 사단 법인입니다.”
“아, 언제 만들어졌는데?”
“얼마 전에 발족했습니다. 거기 후원 좀 많이 해 주십시오.”
이건 부탁이지만, 부탁을 빙자한 강요?
그런 거다.
‘별이 되어’에 후원을 어떻게 하는지는 앞으로의 일에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이들과 협력할 범위도 달라질 터이다.
‘후원 안 해 주면 협력 범위를 많이 제한할 것입니다.’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그래, 최 사장 면을 봐서도 많이 후원해 주도록 할게.”
***
다들 떠나는 것을 보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오영배는 회의실 의자를 잔뜩 뒤로 젖히고 앉아 있다.
“이제 회의 끝났으니 발언권과 상관없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태영에게 말했다.
수행 비서도 의자에 앉아 있다.
“할 이야기가 있어?”
“많아. 그리고 넌 아까 그 사람들에게는 반말 안 하더니 내게는 왜 반말하냐?”
“그래서?”
“나이도 어린 게.”
“나이가 몇 살인지, 어찌 알아?”
“하, 새끼가 진짜.”
“자꾸 새끼새끼 할 거야?”
“안 하면 되잖아? 안 하면.”
“암튼, 그 사람들 중에 내게 반말하는 사람은 그 이전에 만났을 때, 양해를 구했거든. 난 내게 양해를 구하지 않고 반말하면 같이 반말해 줘. 그래서 반말하는 거야.”
“와, 씨바, 너 또라이냐?”
“또라이는…… 유 상무라고? 당신 오너가 또라이지?”
유 상무라는 비서를 향해 물었다.
당연히 답 못 한다.
“진짜 돌겠네. 단 한마디도 안 지네.”
“내가 아쉬울 것이 없는데, 그냥 얼굴만 보고 져 줘야 하는 거야? 네가 그리 대단해?”
“아이고야.”
오영배가 뒷목을 잡았다.
“그러니까 나에게서 존대를 들을 생각 같은 건 앞으로도 영원히 안 하는 것이 좋을 거야.”
“야, 유 상무.”
“네, 회장님.”
수행 비서에게 말이 돌아갔다.
“넌 어찌 생각하냐?”
“지금까지 이야기로 봐서 제 의견은 아무 의미가 없을 듯합니다.”
그래, 그게 잘 하는 처신이다.
그 부분에서 뭐라고 깝죽대 봐야 얻을 거 하나도 없다.
“나, 밥 먹고 학교 가야 해. 그러니 이제 가라.”
수요일에 강의 한 개가 있다.
시간은 이미 지났으니 핑계다.
“학생? 나이 어린 거 맞네.”
“학생이면 다 어린 거야? 아주 이상한 편견이 있네?”
“뭐?”
“또라이 맞네.”
~웅~
(태영아, 청림이와 상규 전역…….)
폰이 진동하며 잠시 메시지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메시지가 오는 흔적만 보여 주는 것이기에 모두 나타난 것은 아니다.
안 열어 봐도 되는데, 일부러 톡 창을 열었다.
(태영아, 청림이와 상규 전역했다. 오늘 저녁에 모여서 한잔할 건데, 가능하지?)
드디어 전역했군.
(그래, 참석할 거니까 시간, 장소 알려 줘.)
그렇게 답을 보냈다.
“넌, 씨바 사람 앞에 앉혀 놓고…….”
“또라이에 욕쟁이에, 입에 걸레까지 물고 다니는구나?”
“그래도 사람을 앞에 앉혀 놓고 딴짓하는 것 아니…….”
오영배가 톡에 회신하는데 불만을 표한다.
“불청객인데? 약속하고 온 것도 아닌 걸? 쫓아내지 않는 것만 해도 충분히 대우해 준 거야.”
중간에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아욱, 정말 너하고 말 계속하다가 혈압으로 죽을 것 같다.”
“나하고 상관없어.”
“아, 씨바, 이걸 조져 버릴 수도 없고. 정말.”
“쓸데없는 소리 말고 꺼지라니까, 나도 점심 좀 먹자.”
“알았어, 알았다. 나도 점심 약속 잡혀 있으니 오늘은 그냥 가고, 언제 나하고 따로 좀 보자.”
오영배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내년 봄까지 약속 밀려 있어. 4월이나 돼야 가능해.”
“아우…… 정말. 그럼 아까 그 사람들처럼 골프를 한번 하든지.”
“이 엄동설한에 무슨 골프냐? 그리고 난, 그때 머리 올린 사람인데, 나 같은 쌩 초보하고 골프 치고 싶어?”
“크리스마스 날 안 돼?”
태영의 말을 무시하고 물어온다.
“가족들과 보내야지.”
“그럼 다음 날.”
“……좋아, 난 차 없으니까 기사 한 명 딸려서 나 태우러 와. 우리 회사 앞으로.”
끝까지 거절할까 하다가, 그쯤해서 그만하기로 했다.
그룹 회장쯤 되면 골프 부킹도 마음대로 되는 모양이다.
아, 엄동설한이라서 골프 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아침 10시.”
그렇게 말하며 수행 비서에게 시선을 주었다.
“네, 준비하겠습니다.”
“가자.”
비서의 답을 들으며 오영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가지 더.”
“뭔데?”
“앞으로 저 개들 데리고 오면, 다시 안 보는 건 기본이고, 저 개들 다리몽둥이를 모조리 분질러 놓을 거야.”
“씨발 놈. 할 수 있으면 해 봐.”
입에 걸레 물고 다니는 저 욕쟁이 놈.
끝까지 욕 한마디 하고, 휘적휘적 회의실을 나간다.
“시험해 봐. 정말 그리되는지 아닌지.”
결국 뒤통수에 대고 한마디 더 했다.
{야, 일어나.}
{경호원? 밥값도 못 하는 것들.}
{저 애송이에게 한 방에 떨어지면서 니들이 경호원 맞아?}
밖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와…….”
정우찬이 가슴을 쓸며 작은 탄성을 뱉었다.
“왜요?”
“심장 쫄려서 숨을 못 쉴 것 같았는데, 이제 좀 편해졌습니다.”
“뭘 그걸 가지고.”
“사장님이 약자에겐 편하고 부드러우며, 강자에게 더 강한 분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눈치채면 안 되는데.”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오늘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보고 나니, 정말 감탄밖에 안 나옵니다.”
“정 부장님도 어디 가서 기죽지 마세요. 우리가 아쉬울 건 하나도 없으니까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자, 점심이나 하러 갑시…….”
회의실 문을 열고 나가다가 말을 마치지 못했다.
사무실 파티션에 한쪽 팔을 올린 채 서 있는 류지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위니는 왜 알려 주지 않았지?
“아까 그놈, 오영배지?”
류지현이 인사 대신에 태영에게 던진 첫마디다.
“사장님, 그럼 저는 직원들과 가겠습니다.”
“불청객이 또 있어서 어쩔 수 없네요.”
정우찬이 태영의 옆을 지나 다른 직원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불청객이라니.”
“맞아 불청객, 그리고 그놈을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왜?”
그제야 류지현에게 물었다.
“아래위로 한번 훑고 가잖아. 그것도 아주 느끼하게.”
“그래서 뭐? 날 보고 어찌해 달라는 말은 아니지?”
“한 대 패 주고 오면 안 돼?”
“내가?”
태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그럼 내가 해?”
“권력의 힘을 빌려 봐.”
“내가 말을 말지.”
“아무 데나 가서 잘 휘두르는 힘인데, 아껴서 뭐 해?”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나 점심 좀 사 줘.”
“대체 내가 왜 네 점심을 사야 하는데?”
“야, 그리고 아무리 약속 않고 왔다고. 날 불청객이라고 하냐?”
“시끄럽고, 나가자.”
말씨름 해 봐야 그렇고 해서 어깨를 떠밀었다.
태영과 류지현이 반말을 찍찍 주고받는 모습을 본 직원들의 표정.
어리둥절한 것 같지만, 수행 팀의 심다윤이 해산 정리를 했다.
***
“오빠 일, 정말 고마워.”
류지현이 파스타가 먹고 싶다고 해서, 인근에 꽤 유명한 파스타 집으로 갔지만, 주문을 하고 한참 동안 태영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말했다.
“별일 아니야.”
“오빠……는 ……한강에 갈 생각을 매일 했대.”
“죽으려고?”
“…….”
말로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그 독심으로 살 생각을 해야지.”
“미래도, 희망도…… 아무것도 없…… 오직 두 어깨를 누르는 빚과 무능력자라는 시선만…….”
“그런데 왜 도움은 청하지 않고?”
“내게도 말을 안 해서 그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시작할 때, 아빠에게 제법 큰돈을 빌렸고, 대출도 많았고, 한심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고…….”
“혼자 생각만 했군.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는 줄도 모르고.”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겠지. 일에 가망이 없다고 봤으니.”
“그런 사람이 새벽 3시에도 일을 하고 있어?”
그건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다.
어쩌면 발악일 수는 있다.
그래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은 그 끈질김은 높이 사 줘야 한다.
“내년 봄에 예정된 한 가지 일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죽을 각오로……, 그것도 안 되면 한강 간다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죽음을 두고 만용을 부리진 않았을 것이다.
한강 간다는 것.
충동적일 수 있다.
누적된 스트레스와 자신에 대한 실망감일 수도 있다.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도 크다.
“나와 같이 증발되어 버린 병사들, 그 부모의 마음은 어떨 것 같아?”
“…….”
류지현의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실렸다.
“그들 대부분은 지금도 피눈물을 삼키며 살아가고 있어.”
“……그래, 오빠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 심정이 가슴으로 이해가 되었어.”
“그럼 되었다.”
“아무튼 오빠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여동생이 짜잔 하고 나타나면서 해결된 거지?”
“짜잔 하고 나타난 건 너지.”
“부모님도 이제 걱정 않겠네?”
“부모님은 그 사실을 몰라. 오빠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절대 말 하지 말래.”
눈물은 고이지 않았지만, 눈이 빨개진다.
오빠의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많이 아팠던 모양이다.
하긴, 한강 이야기까지 했으면, 심장이 덜컥했을 수도 있다.
“여차하면 울겠다?”
“…….”
“이젠, 네 오빠 회사와 관련해서 방해 요인들은 모두 정리한 거야?”
“흐읍…… 그래, 방해꾼들도 없으니 나도 옆에서 좀 도와주고, 되어 가는 이야기도 좀 해 주려고 온 거야.”
숨을 깊게 들이쉬고 하는 대답이다.
목적은 그게 아닌데, 핑계를 어렵게 가져다 붙인다.
말속에 있는 방해꾼들이란 자신의 상사들을 지칭하는 거다.
“일 안 하는군. 공주님은.”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코드.”
“코드는 그게 아니지.”
“한글로 바꾸면 맞지.”
류지현을 보면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려고 계속 말꼬리 잡게 된다.
그래도 따박따박 대답은 잘한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