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Fighter Pilot's Love RAW novel - chapter 14
“상황근무 중인가?”
“예. 대대장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정우혁 중령을 보고 김 소령과 최 소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이 비는군.”
“잠깐 심부름 보냈습니다.”
김 소령의 대답에 우혁은 그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근무지 이탈인가?”
“아닙니다. 잠깐 매점에……금방 돌아올 겁니다.”
“그래? 그래도 되도록 근무지 이탈은 하지마라.”
“네.알겠….”
꽈당!
“헉헉……김 소령님. 큰일 났습니다………이지윤 대위가……..헉!”
김 대위는 급하게 사무실 문을 들어서며 김 소령을 소리쳐 부르다 한쪽에 서있는 장우혁 중령을 발견하고 놀란 숨을 들이켰다.
“뭐야? 무슨 일이야? 이 대위가 뭐?”
급한 숨을 몰아쉬며 혼자 뛰어든 김 대위를 향해 김 소령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김 대위는 김 소령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채 정우혁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조금 전 이 대위의 부탁이…….일이 커지게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이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김유영 대위. 무슨 일이지?”
하지만 정우혁 중령의 어두워진 눈빛과 얼음같이 차가운 목소리에 김 대위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조금 전 등산로의 상황을 급히 보고하기 시작했다.
어두워진 등산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선 윤 소령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뒤따르고 있는 지윤을 향해 갑자기 홱 돌아섰다.
“차렷.”
그의 갑작스러운 구령에 놀란 지윤은 그 자리에서 바로 차렷 자세를 취했다.
별일은 없을 것이다. 그도 대한민국 공군 전투조종사임에는 틀림없다. 그가 설마 자신의 부하인 그녀에게 나쁜 짓은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지윤이었다.
“이지윤 대위. 잘도 나를 따돌리고 피하더군.”
“……..”
“난 처음부터 네가 마음에 안 들었어. 그래도 곱상한 얼굴에 몸매도 봐줄만해서 이뻐해 주려고 했더니………아주 작정을 하고 나를 무시하더군. 엉?”
“소령님을 무시한적 없습니다.”
“입 닥쳐! 무시한 적이 없다고? 밥 한번 먹자고 할 때마다 날 공공연히 무시하고 내 전화는 받지도 않더군. 아닌가?”
“……..”
확실했다. 윤 소령은 술에 취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가 자신의 얼굴을 그녀의 얼굴 바로 코앞으로 들이대자 밀려오는 술 냄새에 지윤은 역겨움마저 느꼈다.
그녀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들이댄 그의 눈빛이 갑자기 끈적끈적하고 음흉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젠장…….
윤 소령의 손이 지윤의 얼굴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녀가 얼굴을 홱 젖혀 버리자 그가 그녀의 뒷머리를 홱 낚아채며 그녀의 입술로 자신의 입술을 밀어붙였다. 지윤은 한쪽다리를 그대로 그의 중심을 향해 힘껏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가 더 빨랐다. 살짝 몸을 피한 윤 소령은 그녀의 어깨를 세게 밀며 바닥으로 넘어뜨렸다. 바닥으로 넘어진 지윤은 급히 한쪽으로 몸을 굴려 그녀의 위로 덮치려는 윤 소령의 몸을 피해 재빨리 일어섰다. 순간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군복을 잡아당기자 그 힘을 이기지 못한 군복 앞단추가 우두둑 뜯어지고 말았다. 지윤은 황급히 군복을 가슴 쪽으로 끌어 모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벌어진 앞가슴을 보던 윤 소령의 눈빛이 더욱 음침해지고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다시 그녀 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동작 그만!”
갑자기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지윤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이런. 젠장……..그였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우혁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어두운 숲속에서도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기운이 지윤이 있는 곳까지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와 단추가 뜯겨져 벌어진 앞가슴을 발견한 순간 더욱 어두워졌다.
“최강우 소령. 이지윤 대위 데리고 의무실로 가.”
혹시 모를 돌발 상황을 대비해 김 소령과 김 대위는 사무실에 남겨두고 최 소령만이 그를 따라왔다. 김 대위로 부터 상황을 듣는 순간부터 얼어버린 정우혁 중령의 표정은 전투를 앞둔 맹수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치지 않았습니다.”
지윤이 앞으로 나서며 우혁을 진정시키려 달래듯 부드럽게 말하자 그는 더욱 험상궂은 표정으로 최 소령에게 윽박지르듯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데려가! 지금 당장.”
“네! 대대장님. 어서 가자 이 대위.”
지윤이 다시 입을 떼려 하자 최 소령이 고개를 가로지었다.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지금의 정우혁 중령을 말릴 수는 없었다.
어두운 산길을 더듬더듬 내려오던 지윤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안되겠어요. 다시 가 봐야겠습니다.”
“진정해. 지금 이 대위가 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 없어.”
“안돼요. 방금 보셨잖아요. 그 표정이…….”
말을 끝맺지 못하며 오던 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지윤을 바라보며, 최 소령은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녀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분명 무언가 이상했다. 김 대위의 보고를 받던 대장의 표정도 부하의 일이라고 하기에는 과한 느낌이었고 지금 지윤의 반응도 상관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제기랄. 분명 둘 사이에 무언가 있었다. 조금 전 지윤을 바라보던 대대장의 표정은 부하를 바라보던 그 눈빛이 아니었다.
최 소령은 지윤과 똑같이 내려온 길을 다시 돌아보았다. 정우혁 중령이 지윤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이대로 윤 소령과 둘만 두고 산을 내려갈 수는 없었다.
“이 대위. 이대로 사무실로 가서 김 소령님께 상황 보고해. 난 다시 현장으로 가 볼 테니.”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말 들어. 지금 우리는 모두 상황근무 중이다. 두 명이나 근무지를 이탈했어. 일을 더 크게 만들고 싶나?”
“……..”
지윤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지금은 근무지를 지켜야 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녀를 살짝 밀며 내려왔던 산길을 다시 올라가는 최 소령을 뒤에서 조용히 불렀다.
“최 소령님 …………….그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최 소령은 그녀가 무엇을 부탁하는지 알았다. 정우혁 중령이 윤 소령에게 당할 사람은 아니었다.
혹독한 훈련과 각종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기도 했고 비록 1년이지만 실전에 참가했던 군인이었다. 아마도 그가 살인이라도 저지를까 그것을 걱정하는 것이리라.
“알았다.”
그녀에게 차분한 답을 들려주고 최 소령을 내려왔던 길을 빠른 속도로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얼어 있는 윤 소령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던 우혁은 돌연 몸을 움직여 윗도리를 벗기 시작했다.
“소령. 웃옷 벗어.”
“!”
계급장이 달린 웃옷을 벗으라는 뜻은 남자 대 남자로 군법을 무시하고 덤비겠다는 뜻이었다. 순간 윤 소령은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군법대로 처벌받겠습니다.”
군복의 웃옷을 벗어 던진 우혁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럴 순간은 이미 지났다. 소령. 나를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면 내 여자를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
윤 소령의 입에서 날카로운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대대장의 여자라니……..
“………..몰랐습니다…………..”
“이미 늦었다!”
말과 함께 우혁의 주먹이 그대로 윤 소령의 턱에 날아들었다.
퍽.
“일어나라. 소령.”
그리고 다시 일어나는 소령의 복부로 날카로운 주먹을 날린 우혁은 그의 멱살을 잡은 채 그의 턱을 향해 연이어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중령님. 그만 하십시오!”
최 소령이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을 때, 윤 소령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우혁이 다시 그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 있는 중이었다.
“…….”
최 소령은 우혁의 팔을 두 손으로 꼭 잡고 버텼다.
“안 됩니다! 이러시면 대대장님도 무사하지 못하십니다!”
우혁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죽이고 싶었다. 내 여자에게 손을 댄 저 자식을 자신의 성에 찰 때까지 패고 또 패고 싶었다. 놈의 살을 발라 들판의 짐승에게 던져 주고 내장을 모두 꺼내 가루로 만들고 싶었다.
“제발요…….대대장님……..”
순간 우혁은 팔을 내리고 돌아섰다.
“윤창호 소령. 내 명령이 있기 전까지 모든 비행훈련은 취소다. 향후 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근신 조치한다. 이상.”
벗어둔 윗옷을 집어 들고 산을 내려가는 우혁의 뒤로 최 소령은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있는 윤 소령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젠장. 윤 소령님. 도대체 어쩌자고……..휴………..”
최 소령은 답답한 한숨을 쉬며 쓰러져 있는 윤 소령을 부축하기 시작했다.
지윤은 김 소령의 명령대로 상황근무를 중간에 종료하고, 우혁의 아파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시계를 다시 쳐다본 지윤은 거실을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05시 17분 아침이 밝아 오는데도 우혁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자신은 전날의 상황근무로 오늘은 쉬는 날이었지만 그는 오늘도 근무가 있는 날이었다. 문득 지윤은 그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지윤은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김 대위와 통화하기로는 어디 한군데 상한 곳 없이 그가 먼저 산을 내려오고 최 소령이 윤 대령을 의무대로 데려갔다고 했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래도 지윤은 걱정스러웠다. 이 일로 윤 소령이 그를 폭력혐의로 고발하기라도 한다면…….아니. 그러지는 못할 것이다. 윤 소령이 자신에게 한 짓이 있는데…….그리고 그럴 만큼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윤 소령이 정말 자신을 어쩌려고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술에 취해 잠시 이성을 잃었을 뿐이었을 것이다. 정말 자신을 어쩌려고 한 것이었다면 기지 내에서, 그것도 김 대위까지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윤은 애써 좋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우선 우혁을 설득해야 했다. 일을 크게 부풀리면 아무에게도 좋을 게 없었다.
찰칵.
현관의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에 지윤은 현관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우혁이 들어섰다. 다행이 아무 데도 다친 곳은 없어보였다.
그가 현관을 들어서며 짙게 내려앉은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왜 안자고 있었지?”
“기다렸어요………”
“다친 곳은?”
“아니 없어요. 다치지 않았어요……….”
“…….그럼 됐어.”
“우리 얘기 좀 해요…….일을 크게 부풀리지 말았으면 해요. 그냥 없었던 일로 해요. 그래야 해요…….”
그가 갑자기 쉬지 않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주방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윤은 급히 그를 따라가며 다시 설득하기 시작했다.
“일이 커지면 당신에게도 좋을 게 없어요. 그가 당신을 때린 걸로 걸고넘어지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하고 거기다 당신 휘하의 대대에서 이런 분란이 일어난 게 상부에 보고라도 된다면 당신 경력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거라고요. 그리고 이번 일이 기지 내에 소문이 나면 제게도 좋을 게 없어요…….”
“……네게도 좋을 게 없다는 게 무슨 뜻이지?”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여자 전투조종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많아요. 그런데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그들 귀에 들어간다면 여자전투조종사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비관적으로 변할 수도 있어요.”
“그게 겁나나?”
우혁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지며 불길은 빛을 띠었지만 그를 설득하려는 데만 정신이 팔린 지윤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겁나는 게 아니에요.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어요. 조용히 전 제 길을 가고 싶다고요. 지금 상황이 소문이 나면 여자 하나에 남자 둘이 주먹 다툼을 한 삼류 영화의 한 장면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결혼하면 돼.”
“!……뭐라고요?”
지윤은 나직하고 단호한 그의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 눈빛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나와 결혼하면 돼. 넌 내 결혼 상대자였고 내 여자를 건드린 놈을 몇 대 때린 나를 삼류영화의 놈팡이로 생각할 놈은 없어 .”
“……..말도 안 돼요.”
“뭐가?”
우혁의 질문에 지윤은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식으로…..어떻게 그렇게 간단할 수 있어요?”
“복잡할 게 뭐가 있지?”
“…….그럴 수 없어요…….”
그가 들고 있던 컵을 천천히 식탁에 내려놓으며 그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지? 나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아뇨. 당신과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에요. 단지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라는 거죠.”
“지금이 가장 적절한 시기야.”
“………..전 이제 겨우 KF-16 대대에 들어온 지 1년도 되지 않았어요. KF-16기 전투조종사로서 아직 제대로 인정받을 정도로 실력이 향상되지 못했다고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를 주시하는지 아세요? 과연 여자가 KF-16 전투조종사로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 보는 눈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고요? 국군의 날 행사에서 여자도 전투기를 훌륭하게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어요. 이제 시작이에요. 이제 사람들이 여자 전투조종사를 인정하기 시작했다고요. 내 실력으로 모두에게 진정한 전투조종사로서 인정받을 때 그때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그게 언제지? 1년? 2년? ………아니면 네가 만족할 만한 수준이 될 때까지 난 너를 기다려야 하나? 이런 식으로 내 아파트를 몰래 드나드는 너를 기다리면서?”
“!”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줄 몰랐어요. 당신 아파트를 몰래 드나드는……..그런 부적할한 관계인 것처럼 말하지 말아요………..당신이 날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요……….”
“아니. 언젠가도 말했지만 넌 여전히 여자라는 자격지심으로 세상을 보고 있어. 네 말대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놈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아 .네가 225대대에 있으면서 여자로서 차별대우를 받은 적이 있었나? 훈련을 덜 받지도 않았고 더 받지도 않았어. 비행시간을 줄이지도 않았고 늘리지도 않았어. 넌 지금까지 충분히 잘해냈고 널 단지 여자로 보는 놈은…….”
갑자기 몇 시간 전의 상황이 생각났는지 우혁은 날카로운 숨을 들이키며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널 여자로 보는 놈은 나처럼 그들도 남자이기 때문이지. 그렇다고 그들이 널 전투조종사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의 나처럼.”
“……….”
한동안 그들의 주위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결혼이 아니면 더 이상 이런 관계를 지속시키지 않겠다.”
“!”
지윤은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게………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야.”
“…………헤어지자는 말인가요?”
“네 선택에 달렸다.”
우혁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와 부딪힌 지윤의 눈동자는 태풍을 만난 격정의 바다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
벌써 1주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우혁의 아파트에서 크게 다툰 이후 그는 그녀를 더 이상 찾지 않았고 그녀를 보더라도 상관으로서의 태도만 보이고 있었다.
지윤의 소원대로 그날 산에서 있었던 일은 없었던 일로 무마되었고 윤 소령은 기지 밖에서 술을 먹고 싸움을 벌였다는, 임시로 만든 죄를 뒤집어쓰고 한 달 동안의 근신에 처해졌다. 소문에 의하면 윤 소령은 근신하는 동안에 헌병에 불려 다니며 무기고에서 없어진 권총에 대한 용의자로서 조사를 받고 있다고 했다.
우혁과 지윤의 사이를 눈치 챈 듯 한 최 소령은 그녀를 위해 입을 다물어 주었고, 김 소령이나 김 대위도 윤 소령을 폭행한 우혁의 과한 행동을 이상히 여기는 것 같기는 했지만 별다른 의문을 표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제법 날씨가 쌀쌀해져 추위가 느껴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없는 시간을 견디어 내는 그녀만이 느끼는 추위일지도 모른다.
복도를 돌아 사무실을 향하여 걸음을 옮기는데 전방에서 걸어오는 우혁이 보였다. 지윤은 걸음을 멈추고 그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필승.”
그녀의 거수경례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우혁이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지윤은 몸을 돌려 돌아보지 않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슴 가득 차오르는 서 슬픔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 모두들 그를 가리켜 얼음 같은 냉혈한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이 그를 보면 자신을 사랑하기는 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가 지금 자신의 항복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포기하고 결혼하겠다고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리라………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가 정말로 그녀와의 헤어짐을 염려에 두고 저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니……..어쩌면 이대로 끝일 지도 모른다. 지금의 그의 태도를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의 품이 그리웠다. 그의 다정한 목소리도 그리웠다. 그의 사랑에 가득찬 눈빛도 그리웠다. 갑자기 후드득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에 지윤은 창밖을 바라보며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이영훈 준장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차를 마시는 우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요 근래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는지 표정이 좋지 않은 그를 차라도 한잔하자며 불렀지만 그의 굳은 표정으로 보아서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을 듯싶었다.
“무슨 고민거리 있나?”
우혁은 자신에게 질문하는 준장을 바라보며 들고 있던 잔을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표정이 왜 그런가? 아까 회의 때도 그렇고 ……..”
“별일 아닙니다.”
준장은 자르듯 단정 짓는 우혁의 대답에 그가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하긴 사생활이니 더 이상 캐묻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이지윤 대위는 어떤가?”
우혁은 준장의 입에서 이지윤이라는 이름 석 자가 나오자 눈썹을 치켜 올렸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 보아하니 대위가 생각 외로 아주 적응을 잘하는 것 같더군. 국군의 날 행사 때도 기대 이상으로 좋은 실력을 보여줬고 다른 조종사들과도 별다른 말썽 없이 잘 어울리나 보더군. 그래서 말인데 내년쯤에 블랙이글스 팀에 추천해 볼까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공군 특수비행 팀인 블랙이글스는 비행시간만 1,000시간 이상이어야 하는 조건이 있었다.
“이지윤 대위는 블랙이글스 팀이 원하는 조건에 맞지 않습니다.”
“알아. 알아. 하지만 공군에서는 여자 조종사가 블랙이글스 팀에 들어가면 민간인들에게 아주 좋은 홍보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지. 그리고 그들에게 친근감도 줄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니겠나?”
“그건 준장님 생각이십니까? 아니면 공군 홍보실에서 원하는 사항입니까?”
이영훈 준장은 지나치게 메마른 어조로 묻는 우혁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공군 홍보실에서도 원하는 일이고 그 보고를 받은 공군본부 측도 긍정적으로 승인하는 눈치야. 이지윤 대위가 그 정도로 실력이 있다고 자네가 인정하고 또 본인이 원한다면 나야 이견이 있을 리가 있나?”
“전 반댑니다.”
준장은 그의 명백한 의견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무엇보다 부하들의 승진에 성공을 위해서 앞장서 주는 그가 아무 이유 없이 이지윤 대위의 의견도 묻지 않고 저렇게 자르듯 결론짓는 것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유는?”
“아직 이지윤 대위는 비행시간이 1,000시간에 미치지도 못하고 이제 겨우 기종 변경을 완료한 상태입니다. 그런 이 대위를 무리하게 블랙이글스팀에 넣었다가 치명적인 실수라도 한다면 우리 공군으로서는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됩니다. 이지윤 대위의 실력을 낮게 보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좀 더 경력을 쌓아야 할 때입니다.”
“흠………중령의 생각이 그렇다면야………..”
“그래도 이지윤 대위의 생각을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게. 그리고 이건 다른 이야긴데, 미국 파견 조종사로 가는 일에 대해 생각해 봤나?”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흠……..긍정적으로 생각하게. 자네야 혈혈단신이니 자네만 생각을 굳히면 뭐 복잡할 것도 없지 않나? 혹시 빠른 시간 안에 결혼할 예정이라도 있나?”
“……..아직 없습니다.”
이것 봐라………즉각적인 부정의 대답이 나올 거라고만 생각했던 준장은 한 템포 느린 대답을 하는 우혁을 의심스러운 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게다가 ‘아직’은 또 무엇인가.
“혹시 사귀는 여자는 있냐?”
단지 군의 상관으로서만 아닌, 우혁을 어릴 때부터 보아온 이영훈 준장으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
대답 없는 우혁을 바라보며 준장은 놀란 숨을 들이켰다.
“이런. 뭐야? 대답이 없다는 것은 긍정인가?”
“지금은 아무 것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준장은 지금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대답하는 우혁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분명 사귀는 여자는 있는 것 같았고 그 아가씨와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듯 보였다. 하! 이러다 정말 결혼이라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아닌가.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말할 시기가 되면 해. 그래도 미국 파견은 꼭 자네가 가주었으면 한다. 결혼을 하고 아내와 함께 다녀와도 좋고.”
“알겠습니다. 진지하게 생각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