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Fighter Pilot's Love RAW novel - chapter 16
우혁은 김 소령의 붉어진 눈가와 김 대위의 침울한 표정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그들의 굳어진 얼굴을 뒤로 한 채 우혁은 헬기를 출발시켰다.
“상사. 출발해.”
타타타타타타타
우혁이 탄 탐색구조헬기가 하늘로 날아올라 지윤이 사라진 서해바다를 향해 최대한의 속도를 높였다.
지윤은 구명조끼에 의지해 칠흑같은 검은 바다 위에 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비상탈출 버튼을 누른 것이 너무 늦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갑자기 세게 부는 바람에 의해 낙하산이 밀려 육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에 작은 돌섬이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달이 구름 속에 숨어 버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지만…….
아마도 자신의 KF-16 전투기가 폭발한 점이 돌섬이 있는 부분일 것이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불꽃이 터지는 것이 바닷물과 부딪혀 생기는 현상이 아닌 듯 했다. 그렇다면 지윤에게도 승산이 있었다. 구조헬기가 자신을 찾는 것이 늦어진다면 돌섬으로 그녀가 직접 움직여야 했다.
지윤은 자기의 차가운 손을 비비며 희미하게 다시 나타난 달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이륙했던 시간과 추락했던 시간을 어림잡아 달이 떠 있는 위치로 육지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지윤은 육지가 있을 법한 방향으로 힘껏 팔을 젓기 시작했다. 움직여야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저체온 증으로 죽을 것이다. 열을 만들어야 했다. 아직은 죽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할 남은자의 아픔을 그녀는 안다. 평생 먼저 간 자식을 가슴에 묻은 채 아파하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보며 자란 자신이 아니던가…….그분들께 마지막 남은 손녀의 죽음으로 다시 그런 아픔을 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있었다. 자신이 죽으면 아파할 그의 슬픈 얼굴이 보이는 듯 했다. 그를 슬프게 할 수 없었다. 그가 슬퍼한다면 자신은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지윤은 더욱더 힘껏 팔을 저었다.
“중령님! 저기 전투기가 폭발한 지점입니다!”
탐색구조대 홍상사의 목소리에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우혁은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미 먼저 출발했던 헬기 두 대가 전투기의 일부가 불타고 있는 작은 돌섬 위에 떠 있었다.
“여기는 호크3. 호크1. 나와라.”
“뭔가 보이나?”
“호크2는 계속 돌섬 주위를 살피고 호크1은 돌섬 기준으로 동쪽과 남쪽, 우리는 서쪽과 북쪽을 맡겠다. 이상.”
교신을 끝낸 상사가 중령을 돌아보았다.
“조종사를 발견하더라도 중령님은 가만히 계셔야 합니다. 저희 탐색구조대가 움직이겠습니다. 약속하십시오.”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고서야 상사는 헬기의 방향을 틀어 돌섬 서쪽 바다로 기수를 돌렸다.
지윤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몸은 점점 얼어붙어 가고, 의식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쉬고 싶었다. 하지만 잠시라도 쉬게 된다면 죽는 시간은 그 배로 빨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움직임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지윤은 문득 어젯밤 그의 품에서 잠들기 전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차례 열정을 불태운 두 사람은 거친 숨을 고르며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지윤은 우혁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천천히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의 손이 자신의 벗은 등을 쓰다듬는 것을 느끼며.
조용하고 맑은 밤이었다. 내일 밤에는 우혁과 함께 둘만의 야간비행이 있었다. 별빛 가득한 아름다운 밤하늘을 그와 단둘이 비행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의 가슴은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지윤은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의 행복의 전부인 것 같았다. 더 이상의 행복은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한없이 충만한 행복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 인생의 전부라 생각했던 전투조종사가 되는 꿈조차 무색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행복이었다.
그를 사랑하고, 그의 사랑을 받고, 그의 곁에서 그와 함께 하늘을 나는 일만큼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탁이 있어요…….’
지윤의 속삭이듯 조용한 말에 우혁은 그녀의 등을 쓸던 손동작을 멈추었다.
‘말해.’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집에는 당신이 직접 가요. 공군 제복은 입지 않은 채로.’
‘!’
순간 그가 지윤을 침대에 쓰러뜨리고 상체를 들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왜 그런 말을 하지!’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 일이라잖아요. 내게도 사고는…….’
‘그런 일은 없어. 내가 그렇게 두지 않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에게 다짐이라도 하는 듯 단정 짓는 그의 말에, 지윤은 정말 이 남자라면 그 어떤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더라도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결혼해요.’
‘…..뭐?!’
‘결혼해요.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는 우혁에게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좀 전의 화난 눈동자에는 기쁨의 물결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건가?’
‘그래서 싫어요?’
‘빌어먹을…… 내가 지금 싫어하는 걸로 보이나?’
‘풋. 아뇨……’
‘……올해를 넘기지 않을거야.’
‘그건 너무 빠…….’
이제 한 달 남짓 남은 올해를 넘기지 않겠다는 그의 말에 반대하는 그녀의 입을 막으며, 우혁은 키스하고 시작했다. 곧 지윤은 자신이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잊고 말았다.
지윤은 어젯밤 우혁에게 결혼하겠다고 말한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그 순간에 그에게 자신을 내어준 사실이 무엇보다 기뻤다. 만약……그의 청혼에 답하지 않은 채 지금 이 시간을 맞았더라면…… 그 후회의 깊이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지윤은 다시 힘을 내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추위로 굳은 몸과 희미해진 의식으로 제 속도를 잃은 지 오래였지만 지윤은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할 수 없었다. 그의 품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순간 멀리 하늘에서 희미한 헬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지윤은 이미 감각을 잃어가고 있는 손으로 급히 주황색 연막탄을 터트렸다. 희미하게 멀리 보이는 상공에 헬기가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의 헬기가 자신에게로 오는 것이 느껴졌다. 지윤은 자신의 팔을 들어 올려 위치를 알리고 싶었지만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다가오는 헬기의 불빛이 가물거리고 눈꺼풀은 천근만큼 무거워졌다. 서서히 두 눈을 감으며 지윤은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곧 짙은 어둠이 찾아왔다.
“뭔가 보이나?”
“아직…….”
우혁은 핏발이 선 붉은 눈동자에 힘을 주며 계속 아래를 바라보았다. 다행이 바람은 잦아들었지만 하늘에 가득한 무거운 구름으로 달이 거의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슴푸레 보이는 달빛으로 그나마 바다의 표면을 가늠할 수는 있었지만 헬기에서 뿜어내는 불빛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혁은 이대로 그녀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이젝션(비상탈출) 조차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혁의 본능은 그녀가 분명히 비상탈출 버튼을 눌렀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대로 널 찾지 못한다면…… 이지윤. 너 이런 어둡고 추운 곳에 혼자 두지는 않겠다. 너를 두고 혼자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낙하산입니다!.낙하산이 있습니다!.”
“!”
우혁은 탐색구조대의 상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재빨리 눈길을 돌렸다.
하얀 낙하산이 바다 위에 떠 있었다. 그 말은 그녀가 비상탈출에 성공했다는 뜻이었다. 우혁은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기쁨의 전율로 몸을 떨었다. 희망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낙하산이 펼쳐졌다는 것은 그녀가 제때에 탈출해 성공했다는 의미였다. 우혁은 따끔거리는 눈을 부릅뜨고 낙하산 주위를 살폈다. 분명히 가까운 곳에 그녀가 있을 것이다.
제발…… 이지윤…… 제발……
우혁은 밀려오는 희망의 물결에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저기! 저깁니다!”
또다시 들려오는 상사의 목소리에 우혁은 고개를 돌렸다. 붉은 연막탄이었다. 연막탄의 연기가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우혁은 지금껏 보았던 그 어떤 붉은 빛보다 저기 저 어두운 하늘 위로 떠오르는 연한 붉은빛이 반가웠다.
“속력을 높여!”
우혁은 시끄러운 프로펠러 소리 사이로 목소리를 높여 헬기의 조종사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헬기는 더욱 높은 붉은 연기가 가로지르는 상공으로 날아갔다.
아…..! 그녀였다. 분명히 그녀였다…..! 그녀가 살아 있었다!…… 아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의식이 없어 보입니다! 내려가야겠습니다!”
헬기의 프로펠러 소음에 상사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우혁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를 발견한 헬기가 고도를 낮추며 바닷물 표면에 큰 원을 그리고 있었다. 우혁은 고개를 돌려 구조대의 분주한 움직임을 보았다. 줄사다리를 내리고 구명조끼를 입은 채 호이스트(헬기용 인양기)를 자신의 허리에 묶는 두 명의 대원을 바라보았다. 우혁은 순간 옆에 있는 호이스트를 자신의 허리에 묶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중령님……! 안됩니다……!”
말리는 상사를 뿌리치고 우혁은 그대로 검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지윤은 희미한 의식 속에서 가늘게 눈을 떴다.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헬기 소리가 마치 자장가 소리처럼 들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자신과 조금 떨어진 곳에 커다란 물보라가 일고 누군가 빠른 속도로 헤엄쳐 오고 있었다.
언제였던가…… 수영장에서 자신에게 헤엄쳐 오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
지윤은 얼음같이 차가워진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군요…… 올 줄 알았어. 당신이 올 줄 알았어…….’
얼마 후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그녀를 향해 팔을 뻗자 지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어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우혁은 이제 눈앞에 있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흔들리는 파도로 몸은 자꾸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그의 뒤로 탐색구조대 대원들이 뒤 따라오고 있었다. 우혁은 더욱 팔을 저었다. 있는 힘껏. 죽을힘을 다해 팔을 저어 앞으로 나아갔다. 지윤의 팔이 힘없이 늘어지고 그녀의 몸이 구명조끼의해 물 위에 떠오르는 것을 보며 우혁은 더욱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의식을 잃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우혁은 초인적인 힘으로 파도를 헤쳐 앞으로 나아갔다. 드디어 우혁은 그녀의 손끝에 자신의 손끝이 닿는 그 가슴 저린 감각을 느꼈다. 이윽고 그녀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움켜쥐고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그녀를 두 팔에 안았다. 우혁은 두 눈을 꼭 감았다.
‘아, 하느님……감사합니다.’
***
“맥박이 느려지고 있습니다!”
“담요 더 가지고 와! 빨리! 빨리 움직여!”
지윤은 주위의 시끄러운 소음에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뿌옇게 흐려 보이는 시야로 하얀 가운을 걸친 사람들이 보이고 군복을 입은 군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 우혁이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온통 젖은 채 그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지 말아요. 그렇게 슬픈 얼굴 하지마…….’
그를 소리쳐 부르고 싶었다. 그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져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지윤은 다시 무거운 눈꺼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눈을 감고 말았다.
“……! 심장 박동이 멈췄습니다!”
“비켜!”
한 군의관이 지윤의 가슴에 두 손을 대고 율동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마치 정해진 박자에 맞추듯 그렇게 규칙적으로 압박을 계속했다.
우혁은 떨고 있었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멈추었다는 소리에 자신의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이성은 모두 사라졌다. 오직 그녀가 죽는다면 자신도 살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미치도록 두려웠다.
‘이지윤. 넌 할 수 있어. 일어나. 숨을 쉬어! 넌 대한민국 공군 전투조종사다! 전투조종사는 이 정도로 죽지 않아!”
우혁은 소리치고 있었다. 가슴으로 그녀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안 돼…… 지윤아, 제발…… 숨을 쉬어….. 제발……’
그때 우혁의 간절한 기도가 전해지기라도 한 듯이 군의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움직입니다! 심장이 다시 움직입니다!”
“됐어! 중환자실로 옮겨!”
우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눈을 꼭 감았다. 의료진들이 지윤을 중환자실로 데려가고 혼자 남게 된 우혁은 복도 벽에 기대섰다. 눈을 뜨고 그녀가 사라진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는 벽을 타고 서서히 자신의 몸을 내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중환자실 복도에 주저앉은 우혁은 고개를 숙였다.
‘제발, 신이시여…… 그녀를 살려주십시오. 그녀를 제게 돌려주십시오……’
***
2003년 11월 21일. 04:22:05. 공군병원 중환자실.
제20전투비행단 단장인 이영훈 준장은 군병원의 중환자실 복도의자에 앉아 있는 우혁을 보았다. 양 무릎에 두 팔을 걸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의 모습은 과연 제20전투비행단의 자랑인 전투조종사 정우혁 중령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자신의 뒤로 255대대의 블랙울프 편대장인 김 소령이 따라왔지만 그도 별말 없이 침울한 표정이었다.
“중령…….”
중장의 목소리에 우혁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힘없이 일어나 준장에게 경례를 붙였다.
“필승.”
“어떤가?”
중환자실의 빨간 불빛을 보며 준장이 묻자 우혁도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을 바라보았다.
“아직…….”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나?”
“…….”
말 없는 우혁의 표정을 바라보던 이영훈 준장도 답답한 한숨의 쉬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중령님 이지윤 대위는 강한 여자입니다. 대한민국에 몇 안 되는 여자 전투 조종사잖습니까. 여자로서의 체력적 한계를 모두 이겨내고 다른 남자 공사 동기들마저 제치고 조종사가 된 강한 사람입니다. 절대 쉽게 가지 않을 겁니다.”
김 소령의 말에 우혁도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현재 중환자실에 외로이 누워 생사의 갈림길에서 싸우고 있을 그녀의 걱정으로 굳어 있었다.
우혁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제발 그녀가 이겨내기만을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저체온증…… 저체온증으로 심장박동까지 멈추었다. 우혁은 이라크 전에 참전 당시 한겨울의 차가운 물속에 떨어져 저체온증으로 심장과 호흡이 멈추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군인을 보았다. 처음 의식불명 후 심장박동수가 줄고 호흡이 멈추었지만 의사들은 사망 진단을 내리지는 않았다. 박동 수가 줄고 호흡이 감지되지 않는 현상은 중증 저체온증 환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라 들었다. 섣불리 사망진단을 내리지 않는 이유는 얼어있던 뇌와 장기들이 회복할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혁도 그 희망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그 희망이라도 붙잡지 않는다면 이대로 서 있을 힘조차 잃을 것 같았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없게 된다면, 그녀의 차분하고 맑은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면, 자신을 향한 그녀의 아름다운 눈빛을 볼 수 없게 된다면…… 자신이 과연 나머지 삶을 살아 낼 수 있을까……? 그녀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아마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없는 삶은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때였다. 중환자실의 문이 열리며 군의관이 나왔다.
우혁은 재빨리 군의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없이 그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희망의 말을 들려줄 그의 입술을.
“환자가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심장박동수도 정상을 회복하고 있고 호흡도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손과 발에 약간의 동상이 있는데 큰 문제는 되지 않습니다.”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우혁은 눈을 꼭 감았다. 솟아오르는 열기에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다. 우혁은 이 기쁨의 순간을 만끽했다. 그거면 되었다. 그는 지윤의 따뜻한 체온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온 세상을 얻은 듯 행복했다.
그때 군의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약 1시간 후에 일반 병실로 옮기겠습니다. 그전에 환자가 정우혁 중령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심장박동수를 체크하는 기계음만이 울리는 조용한 중환자실의 침대에 지윤이 누워 있었다.
우혁은 하얀 침대에 누워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는 그녀를 보는 순간 울컥하고 무언가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움을 느꼈다.
천천히 지윤의 곁으로 다가가는 우혁의 발소리에 그녀의 눈꺼풀이 살짝 움직이는 듯 하더니 곧 맑은 눈동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눈동자는 곧바로 우혁을 향했다.
지윤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혁은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자신의 볼에 비볐다. 마치 그녀의 따뜻한 체온을 마음껏 느끼고 싶다는 듯.
‘다시는…… 다시는……”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지윤의 손을 양손으로 감아쥐고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댈 뿐이었다. 얼마 후 그에게 붙잡힌 그녀의 손이 젖어들고 있었다.
***
지윤은 병원 침대에 반쯤 몸을 누인 채 침대 옆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는 우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이 의식을 회복하고 처음 그를 본 중환자실에서는 제외하고는, 사고 후 그는 자신에게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일반 병실로 돌아와 긴 잠에서 깨어난 후 처음본 얼굴도 우혁의 얼굴이었지만, 그는 지윤에게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그 후 3일 동안, 손과 발에 생긴 약간의 동상이 나아가면서 지윤이 가려움증을 호소할 때조차도 그녀의 두 손과 발을 따뜻한 물에 담그고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지윤은 마른 가제 손수건으로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꼼꼼히 닦아 주는 우혁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났어요?”
“…….”
“내가 뭐 잘못했어요?”
혹시나 대답을 기대하며 질문을 하는 지윤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가 자리를 정리하며 병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지윤은 벌써 3일째 아무 말이 없는 그를 바라보는 것에 점점 자신의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는 것을 느꼈다.
다시 소파로 돌아와 신문을 펴 드는 그를 지윤은 의문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렇게 오래 자리 비워도 괜찮아요? 사고 시점부터 치면 벌써 4일인데…….”
“…….”
“……내가 당신 명령을 어겨서 그래요?”
“…….”
“…… 당신이라도 그 상황이었다면 그랬을 거예요. 알아요. 화내는 게 당연해요. 나라도 화가 났을 것 같아…….”
“…….”
“좋아요. 다 내가 잘못했어요. 다신 당신 명령 어기는 일 없어요. 그러니 이젠 말 좀 해요. 네?”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신문만 보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지윤도 슬며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우혁의 심정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만약 그가 추락하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것이 자신이었더라면…… 지윤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상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라리 자신이 추락하는 것이 나았다. 고독하고 힘겨운 어둠과 추위와의 싸움이었지만 추락하는 그를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반대의 상황이라면 자신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지윤은 다시 한 번 그를 쳐다보았다. 저 남자처럼 침착할 수 있었을까? 만약 그가 추락하는 장면을 보게 되는 것이 자신이었다면 그렇게 이성을 이대로 가지고 기지로 돌아와 그를 발견할 때까지 이성을 제대로 차리고 있을 수 있었을까……? 아니, 자신 없었다. 아마도 자신은 그가 추락하는 순간 이성을 놓았을 것이다.
후….. 지윤은 우혁의 저런 태도를 이해를 하면서도 함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이런 식으로 보내는 것이 안타까웠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그녀는 그와 함께 매순간이 소중하고 또 소중했다.
지윤은 표정 없는 얼굴로 앉아 있는 그를 살짝 흘겨보았다. 화가 나더라도 뭐라 말은 해야 하지 않는가…….
“물마시고 싶어요.”
그제야 우혁은 들고 있던 신문을 옆에 내려두고 작은 냉장고 위에 놓여 있는 컵에 따뜻한 물을 담아 그녀에게 내밀었다. 지윤은 컵을 받지도 않고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 우혁이 드디어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윤은 그제야 그와 겨우 시선을 맞출 수 있었다.
“얼마 남았어요? 나 벌 주는 거.”
“…….”
“네?”
“…….”
“…… 정말 이럴 거예요? 얼마나 더 이럴 거예요?”
“…… 아주 많이.”
4일 만에 그녀에게 처음 하는 말이었다. 그 한마디에도 지윤은 뛸 듯이 기뻤다. 그의 말문이 터진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요? 네? 내가 어떡해야 용서 해 줄 거예요?”
“…….”
“환자를 이렇게 간호하면 어떡해요? 마음을 편하게 해 줘야지. 나으려던 병도 도로 도지겠다.”
“……마셔.”
우혁이 침대 옆 탁자에 물 겁을 내려놓고 돌아서려 하자, 지윤은 얼른 그의 소매 자락을 움켜쥐었다.
“옆에 있어 줘요.”
그가 천천히 몸을 틀어 지윤을 바라보았다.
“소파도 너무 멀어…….”
잠시 지윤을 바라보던 우혁은 서서히 몸을 내려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 가에 걸터앉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그대로.
“그거 알아요? 나 처음 비행단에 왔을 때 단장님 방에서 당신 처음 봤잖아요? 풋. 꼭 지금의 당신 표정이 이랬던 것 같아. 아니다. 지금보다 그때가 더 무서웠다.”
지윤의 익살 섞인 말에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우혁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서워?”
“네. 내 속을 모두 들여다볼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이 두려웠어요. 그리고 그 눈빛 속에 나에 대한 못마땅함이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더욱…….”
“…….”
“말해 봐요. 중령님. 그때 여자 전투조종사에 대해 못미더워하는 감정이 있었죠?”
짓궂게 묻는 지윤의 질문에 그의 얼굴에 살짝 난처한 빛이 어렸다.
“맞군요. 거 봐. 내 생각이 맞았지. 모두들 여자가 전투조종사라면 못미더워하는 눈빛으로 본다고요.”
“……오래 가지 않았어.”
“어쨌든 당신도 그런 생각 했잖아요. 그러면서 나더러는 여자로서의 자격지심이 어쩌고 하면서 나만 몰아붙였지.”
“…….”
“좋아. 용서해 줄게요. 나도 당신 용서했으니까 당신도 나 용서해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