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Doctor RAW novel - Chapter 30
30화 이제 또 다른 곳 (2)
[띠띠띠띠.]‘아오.’
수혁은 내분비내과로 넘어온 첫 주말 아침, 일찍 침대에서 벌떡 뛰어내렸다.
너무 잘 자서, 체력이 남아돌아서는 결코 아니었다.
그저 머릿속에서 울리는 알람 때문이었다.
[일어나셨군요, 수혁. 좋은 아침입니다.]‘미친놈아! 네가 깨워 놓고선 뭐? 좋은 아침? 이딴 소리가 나오냐?’
[제가 깨운 것과 ‘아침이 좋다’라는 명제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라도 있습니까?]‘뭐? 당연하……. 어……. 음…….’
수혁은 마구잡이로 따져 물으려다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누가 깨웠든 간에 이 아침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일어난 김에 어제 공부하다 만 자료를 좀 보시죠. 궁금해서 혼났습니다.]‘나는 졸려서 혼나 뒈지겠거든?’
[졸리다뇨, 수혁. 벌써 오전 6시입니다.]‘어제 2시에 잤잖아!’
수혁은 속으로 볼멘소리를 해 대면서 당직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다고 어제 그를 못 자게 한 원흉이 보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제의 일을 회상할 수는 있었다.
– 야야, 마셔. 어차피 당직도 아닌데. 뒈질래? 이번 달 지옥을 보여 줄까?
– 그래.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술맛을 보냐. 치프 선생님 잔 마다하는 거, 그거 예의 아니다, 너?
이딴 말을 지껄이면서 맥주를 건넨 녀석들은 다름 아닌 지금 내분비내과 서효석 교수를 도맡아 돌고 있는 3년 차 김진용과 2년 차 황선우였다.
‘뭔 병원에서 술이야…….’
[당직이 아니니 딱히 불법은 아닙니다.]‘그래도 말이 되냐? 그렇게 술이 마시고 싶으면 나가서 먹든가.’
[그 의견에는 동의합니다.]당직 방이라는 곳이 물론 환자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술 취한 채 수술복 등을 걸쳐 입고 돌아다니는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다른 병원에서 음주 진료로 물의를 빚은 전공의도 있었으니까.
그러다 환자들이 오해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그리고 마실 거면 저들끼리 먹지……. 왜 1년 차를 붙잡고 먹냐고……. 난 오늘 당직인데.’
[나약한 소리 하지 마십쇼. 단호하게 거절하라고 열 번인가 말했는데 계속 뭉개고 있던 건 수혁입니다.]‘이 새끼야……. 누누이 말하지만 난 1년 차라니까? 내과 의국 밑바닥!’
[그런 말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하다니. 정신 세계가 다소 의심스럽습니다.]‘그런 게 아니라!’
바루다는 남들이 볼 땐 저 혼자 일어나서 발광해 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수혁을 향해 재차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 분석 결과 수혁을 대하는 다른 레지던트들의 태도는 조금 이상합니다.]‘네 그……. 분석은 별로 신뢰가 안 가는데.’
수혁은 전에 하윤이에게 설레발치다가 망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마 앞으로 영영 자다가 이불킥할 만한 사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바루다는 학습을 통해 진화하는 자기 주도 학습형 A.I.입니다. 전보다 훌륭한 분석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뭐……. 그래, 말이나 해 봐.’
이미 잠이 다 달아나 버린 수혁은 천천히 크룩스를 신고는 방을 나섰다.
기왕 일찍 일어나게 된 거 아침이나 든든히 먹겠다는 심산이었다.
실제로 태화 의료원 아침이 호텔식이라 세 끼 중에서는 제일 괜찮기도 했고.
[레지던트들은 수혁을 윗사람처럼 생각한다고 판단합니다.]‘말이 되니? 1년 차를?’
‘그럼 네가 틀린 거겠지.’
[논리가 그렇게 진행됩니까?]‘그렇지.’
[음.]바루다가 생각하기에도 다른 레지던트들이 수혁을 윗사람으로 인식할 만한 객관적인 논거는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해서 정말 자신의 논리 회로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빠졌다.
마침내 머릿속이 조용해진 틈을 타, 수혁은 자신의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하윤에게서 온 문자를 바라보았다.
아마 종이에 쓰여 있었더라면 마르고 닳아서 죄 지워져 있을 터였다.
[거, 고만 좀 하십쇼. 제 분석상 우하윤은 이수혁에게 전혀 감정이 없습니다.]‘손 잡으라고 한 건 너거든?’
[제가 인정합니다. 그건 명백히 제 실수였습니다. 사과합니다.]‘사과받는데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건 또 처음이네…….’
수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식당 아주머니가 건네주는 달걀을 받았다.
태화 의료원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데, 무려 프라이가 되어 있었다.
그냥 삶은 게 아니라.
‘이거에 케첩 뿌려서 먹으면 그게 또 별미지.’
[인정합니다. 병원 밥 중에서는 가장 훌륭하죠.]이에 수혁과 바루다는 실로 오래간만에 의견의 일치를 본 후, 나머지 반찬을 담아 식당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어차피 워낙 이른 시간인 데다가 주말이기도 해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 수혁아.”
그런데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이야, 이렇게 이른 시간에 아침을 먹고. 몸 챙길 줄 아는구나?”
그것도 무려 둘이나.
“워, 원장님. 과장님. 안녕하십니까.”
이현종 원장과 신현태 과장이었다.
늘 그렇듯 주말 회진 후딱 돌고 골프 치러 가는 일정이었다.
확실히 태화 의료원 아침밥은 썩 괜찮아서 이 둘도 온 김에 아침이나 먹고 가자고 해서 온 참이었다.
둘은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수혁을 보며 껄껄 웃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옆에 앉았다.
“당직이야?”
먼저 말을 걸어온 사람은 이현종이었다.
처음엔 미친놈이니, 또라이니 하면서 멀리하던 주제에 지금은 다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네, 원장님. 당직입니다.”
“과가 어딘데?”
“내분비내과 서효석 교수님 주치의 맡게 되었습니다.”
“아, 서효석이.”
서효석이라는 이름 석 자에 이현종 교수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실력이 아니라 뒷구멍으로 들어온 녀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신현태 과장의 얼굴도 그리 좋지 않았다.
뒷구멍으로 들어올 수는 있겠지만, 그 이후로 보여 준 행보도 최악이었으니까.
서효석 교수에게 그나마 말이라도 붙여 주는 게 서글서글한 조태진 교수뿐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굳이 일일이 서효석의 행적을 짚을 필요도 없을 지경이었다.
“수혁아.”
“네.”
“힘내라. 아, 치프는 누구야? 쓸 만한 놈인가?”
“김진용 선생님입니다.”
“야…… 진짜 힘내라.”
이현종은 숭늉을 들이켜면서 수혁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너무 힘들게 하면 나한테 말해. 내가 해결해 줄게.”
신현태도 허허 웃으며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자 이현종 또한 비로소 웃음을 회복한 후 말을 이었다.
“그래. 서효석이 백이 암만 대단해도 여기 신현태 장인어른한테 비하면 뭐…….”
“아니, 또 왜 얘기가 거기까지 갑니까. 제가 과장이니까…….”
“네가 과장인 것도 상관이 있지.”
“네?”
신현태의 반응을 보며 이현종 원장이 눈알을 빙글빙글 굴려 댔다.
너무 신이나 보여서 이게 정말 육십 넘은 노인이 맞나 싶을 지경이었다.
“장인 아니었으면 과장이 가당키나 해?”
“와……. 그렇게 따지면 원장님은요? 아버지가 태화 의대 초대 학장 아닙니까?”
“난 NEJM에 심심하면 논문 내는 사람이야. 너랑은 입장이 다르지.”
“그놈의 NEJM, NEJM. 거기 못 낸 놈은 서러워서 살겠어요?”
“살면 안 되지. 이렇게 큰 병원 교수인데 거길 못 내?”
“와……. 나 골프 안 쳐.”
신 과장은 정말로 화가 났는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제야 이현종 원장이 몸을 숙였다.
“에헤이. 뭘 또 골프를 안 쳐. 그건 쳐야지.”
“안 해, 안 해. 와……. 더러워서 진짜.”
“야야. 치자. 내가 잘못했어. 나 집에 들어가면 할 것도 없어. 그놈의 NEJM 논문 쓰느라 바쁘게 지냈더니 결혼도 못 했잖아…….”
“아……. 나는 NEJM 못 쓰는 사람이라 결혼도 하고 집에 가면 환영받는다?”
“아이. 얘기가 그리로 가. 너……. 그래, 그, 어. 「란셋」! 거기 냈잖아.”
“언제는 란셋은 쓰레기라며.”
“에이……. 그렇게 좋은 쓰레기가 어딨어. 내가 농담한 거지.”
이현종 원장은 그렇게 한참 위로를 하다가, 끝내 설득에 성공하기는 했다.
대가로 상당한 것을 지불하기는 했지만.
“야……. 아무리 그래도 5타는 좀 그렇지 않냐?”
“그럼 집에 가시든가.”
“에이. 내가 진짜……. 알았어. 가. 아, 수혁아. 너 힘들면 진짜 신 과장한테 말해. 얘 끗발 장난 아니야. 원장보다 나아.”
“아, 네. 원장님. 과장님. 감사합니다.”
둘은 그렇게 식당 안에 수혁을 남겨 두곤 사라졌다.
가면서도 뭐라 뭐라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는데, 수혁으로서는 상당히 복잡한 심경이 되게끔 하는 광경이라 할 수 있었다.
‘멋지네.’
[저게요?]‘성공한 사람들의 여유가 팍팍 느껴지지 않냐? 일단 주말마다 골프 치는 것도 부럽고.’
[수혁이 운동에 대해 부러워하다니 좀 이상하군요.]‘뭔 소리야.’
[시간 많고 몸 멀쩡할 때도 딱히 운동한 적이 없었던 거로 아는데요?]‘아.’
수혁은 난데없는 팩트 폭행에 가슴을 부여잡았다가, 이내 7시가 딱 되자마자 울리기 시작한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3777.
두말할 것도 없이 응급실이었다.
‘얘들은 진짜 귀신같네…….’
수혁은 그렇게 중얼거리곤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또랑또랑한 인턴의 노티가 시작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응급실 인턴 노영태입니다. 노티드릴 환자분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남자 35세 양재원. 내원 두 달 전부터 시작된 발작 및 경련 증세를 주소로 내원한 환자분입니다.”
“음?”
발작 및 경련이라.
어떻게 생각해 봐도 내분비내과와 딱 연결되지 않는 증상이었다.
수혁의 의문에 인턴 노영태는 부리나케 말을 이었다.
성격 급한 레지던트들은 바로 이쯤에서 욕설을 퍼붓기도 했으니까.
“아, 내분비내과 메인이 아니라 신경정신과 메인입니다. 협진 요청 차 연락 드렸습니다.”
“아……. 신경과가 아니라 정신과에서 보나요?”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하.”
그렇다면 신경정신과에서 환자를 보게 된 것이 아주 우연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대체 왜 내분비내과를 찾는단 말인가.
“혈액 검사상 저혈당이 있습니다. 현재 66입니다.”
“66? 진짜 낮네? 식사를 못 했어요?”
“그건 아니라고 합니다.”
“혹시 뭐 당뇨나 이런 거 치료받는 건 없고요?”
“환자분 진술상으로는 특이 병력은 없다고 합니다.
“흐음……. 알겠습니다. 내려갈게요.”
수혁은 전화를 끊자마자 식판을 정리하곤 계단을 향해 이동했다.
‘바루다, 저혈당 유발 가능한 질환 다 추려 봐.’
[공부한 게 없어서 데이터가 한정되기는 하지만……. 노력해 보죠.]‘단서 붙이지 말고.’
[네, 네. 대신 점심에 치킨.]‘콜…….’
[콜.]어쩐지 식충이가 된 바루다를 달래면서였다.
– 31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