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165
165화 이브 1
* * *
선심을 베푸는 척 마리반의 뇌리에 각인시킨다. 어디까지나 양도하는 것이지 양보하는 게 아니라고.
“인연이 되면 또 찾아뵙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과 멀어진 카인은 길을 걸었다.
예정보다 일정이 늦어졌지만, 얻은 건 많았다.
가장 고무적인 건 아휀의 무용담을 뺏었다는 것.
이제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널리 퍼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카바나가와 포다얀가, 두 세력의 영지전에 나타난 천재 검사에 대한 이야기가.
세버트와 마리반이 안면몰수하고 모르쇠로 일관할 수 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건 아휀이 가져가야 했을 무용담이었다. 갑자기 생긴 공돈을 우량주에 투자한 것뿐이었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솔직히 말해 카인은 자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아휀의 일대기에서 빠지지 않고 나온 에피소드였던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있을 게 분명했다.
거기에 떫은 감을 씹은 듯 사정없이 일그러진 아휀의 표정을 본 것도 성과라면 성과였다. 척 보아도 화를 내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가 평소 만들어 둔 고결하고 순수한 이미지가 걸림돌이 되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하던 그를 떠올리며 희희낙락하던 카인이 발걸음을 멈췄다.
“아직도 따라오는 건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순백의 갑주로 무장한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포다얀가에서부터 쫓아왔기에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잘도 절 속였군요.”
“그게 무슨 말이지?”
“저를 징검다리로 사용한 게 아니냐는 겁니다.”
“이곳에 날 데려온 건 너다만.”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 의도한 것일 테죠. 당신은 이미 카바날류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한 번 보고 그렇게 완벽하게 펼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피해망상도 그 정도면 병이다.
하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어렸을 때 한 번 겨루었던 게 트라우마가 되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게 틀림없었다.
“빙빙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라.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지? 복수전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복수전. 그 강렬한 어휘에 아휀이 정신을 차렸다. 멀찍이 떨어져서 보니, 자신이 독이 바짝 오른 사람처럼 비춰졌던 것이다. 이건 그가 원하는 가면이 아니었다.
고개를 저은 아휀이 어색하게 웃었다.
“복수전이라니, 무서운 소리를 하시는군요. 그저 저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 것뿐입니다. 깨달은 게 많았다고나 할까요.”
“왜? 각본대로 안 흘러가서 서운했나?”
핵심을 관통하는 말에 아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변명하면 자신의 얕은꾀를 드러내는 것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인은 히죽였다. 아마 아휀은 자신을 다루기 쉬운 호구로 보았으리라.
무리도 아니었다. 아휀의 기억 속에 카인이란 사람은 검성 라프만의 등 뒤에 찰싹 달라붙어 호가호위하는 하이에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테니까.
“각본 같은 건 없습니다.”
“무슨 각본인지는 물어보지 않는군.”
순간, 아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무저갱처럼 어둡게.
속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구덩이가 그곳에 있었다.
카인은 그가 폭발할 거라 예상했다. 하나, 아휀의 입에서 나온 건 지독할 정도로 평탄한 말이었다.
“정말 못 당하겠군요. 사부님이 어째서 당신을 원하는 건지 알 것 같습니다.”
“내가 원해서 얻은 관심은 아니지만 말이지.”
저번 만남에서도 분에 넘치는 반응을 보여주었지 않던가. 대륙의 무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영광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조아리겠지만, 카인에게는 부담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비무행이 끝나면 당신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마지막 대련 상대로 날 찍었다는 건가?”
“안 될 건 없지 않습니까.”
죽이겠다는 것보다 더 섬뜩한 선언이었다. 하지만 카인은 코웃음 치며 손을 휘휘 저었다.
“허물없이 대해 주니, 잊고 있나 본데 나는 레서 왕국의 공작이다.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너와 싸워 줄 이유는 없지.”
“어디까지나 제안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그때 가서 고민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다음에 뵙겠습니다.”
무언가 묘안이 있는지 의뭉스럽게 대답한 아휀은 휙 돌아서,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카인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눌렀다.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지만, 5년 후에 십좌가 되는 아휀이었다. 그런 그가 마음먹고 온다니, 걱정이 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
“아무래도 무용담 하나로는 성이 차지 않을 것 같군.”
* * *
포다얀 백작령의 외곽.
아무도 찾지 않는 황무지에 발을 들인 카인은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한 번 온 게 전부지만, 인적이 드문 곳이라 그런지 지형지물은 14년 후와 다를 게 없었다.
이윽고, 올라가는 길을 발견한 카인이 돌연 뒤를 쳐다보았다.
“적당히 하고 나오는 게 어떻지? 너 때문에 일부러 외진 곳까지 왔는데 말이야.”
“쯧, 한 번을 안 속네.”
수풀을 헤치며 나타난 건 한 소년이었다.
이제 막 열여섯이나 되었을까.
짙은 갈색 머리. 우수에 젖은 눈동자와 선이 굵은 얼굴은 전형적인 미남의 상을 띠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카인은 알 수 있었다. 저게 바로 자넷의 본모습이라는 걸.
패배를 인정하지 못한 그가 따라붙을 거라는 건 자명한 바, 놀라울 건 하나도 없었다.
“확실히 자넷이란 이름은 여자 같아서 너와는 어울리지 않는군. 변장하고 다니는 것도 이해가 가.”
“뭐라는 거야, 짜증 나게.”
어려서 그런지 실력에 걸맞지 않게 치기 어린 모습이 자주 보였다. 자넷은 화난 호랑이를 표현하고 싶은 걸 테지만, 보는 입장에선 성난 치와와에 가까웠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길을 잃은 양처럼 내 뒤를 졸졸 따라왔으니 용건이 있을 텐데?”
“너, 나랑 다시 싸우자.”
“굳이?”
“불공평하잖아. 너는 보구를 두 개나 사용했으니까.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대책 없는 억지에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영지전의 주체가 되었던 카바나가나 포다얀가에서 제기할 만한 문제지 자넷이 거론할 만한 주제는 아니었다.
“네가 이긴 걸로 해라.”
“그럴 수는 없지. 나는 꼭 끝을 봐야겠으니까.”
자세를 바로잡은 자넷이 금방에라도 암월을 펼칠 듯 마력을 끌어올렸다.
“보고 싶다면 못 보여 줄 것도 없지.”
일통을 깨우친 덕에 한계를 해제할 수 없는 범위가 늘어났다. 최대 출력이 늘어난 건 당연지사. 예전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격을 뿜어낼 수 있었다.
바로―
발파 팔중첩.
이렇게.
쿠쿵, 하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에 닿은 지면이 푹 꺼진다. 원래 물렀던 곳인지 지반의 일부분이 붕괴되기까지 했다.
본의 아니게 극적인 연출이 되었지만, 이 정도가 아니라면 말썽꾸러기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예상대로, 토끼처럼 두 눈을 크게 뜬 자넷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자신이 누구에게 행패를 부린 건지 깨달은 듯했다.
“이래도 내가 보구 때문에 이긴 것 같나?”
“아, 아니.”
분노조절장애가 분노조절잘해가 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3초.
“언젠가 들은 적 있지. 암성의 하나밖에 없는 제자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얼간이라는 걸.”
“그렇지 않아.”
“그러면 이어서 후려쳐도 되나?”
“이, 인정할 테니까 진정하라고. 그래, 내가 좀 심했지?”
“사리 분별은 되는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군.”
자넷도 아휀, 제네갈에 이어 차세대를 이끌어 갈 신성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나이를 감안하면 역대급 포텐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대성하지 못했다.
아휀과 제네갈, 두 사람 모두 비교적 쉽게 십좌에 오른 데 반해 자넷은 제자리에서 걷기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원인은 자넷이 소속된 암살단, 모리아티에 있었다.
‘자넷을 인정하지 않았지.’
보이는 대로 자넷은 아직 성년도 되지 못한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미숙한 시기. 충성심이 솟아날 리 없었다.
애초 모리아티에는 반골 기질만 모였기에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역사가 증명해 주었다. 본디 암성의 뜻대로 움직이는 집단이었으나, 그가 죽자마자 도적 떼로 돌변했던 것이다.
의미 없는 살인은 하지 않는다는, 암성이 살아생전 강조했던 강령을 지키지 않고 미쳐 날뛰었다. 자넷도 모리아티를 나와 전전긍긍했을 정도니, 그 격류가 얼마나 거셌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한 3년 정도 남았나.’
암성의 입장에서는 인생의 끝자락에 겨우 얻은 제자였다. 자넷이 저렇게 천둥벌거숭이처럼 자란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보나마나 어화둥둥 달래며 가르쳤을 테지.
하지만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그래서는 안 되었다. 모리아티는 귀족가같이 혈통과 명예를 중시하는 집단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필요한 건 압도적인 업적뿐이었다.
“너, 모리아티 내에서 겉돌고 있지 않나?”
“아닌데? 완전 잘 어울리는데. 대체 누구한테 그런 말을 들은 거야?”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확정된 미래보다 더 확실한 정보는 없었으니까.
“뭐, 그렇다 치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의뢰 하나 하지. 너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거다.”
“난데없이 무슨 헛소리야?”
“그러니까 모리아티 소속 암살자 자넷 하스네트, 너에게 정식으로 의뢰를 넣겠다는 거다.”
“돈만 있다고 다 되는 게 아니야. 우리가 움직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해.”
의미 없는 살인은 하지 않는다. 암성의 제자답게 쥐꼬리만 한 신념은 있는 듯했다.
“이유는 충분하다. 잦은 수탈과 높은 세율로 영지민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는 녀석이 있으니까.”
“그 녀석이 누구인데?”
“슈발체베인 공작.”
“아, 그 반푼이? 어쩐지 그럴 거 같더라니. 보아하니 너도 공작에게 당한 것 같은데, 내 말 맞지?”
“그렇다고 해 두지.”
“하지만 공작은 나도 버거운걸.”
언제 시비를 걸었냐는 듯, 침음을 흘린 자넷이 팔짱을 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카인이 슬며시 백지 수표를 내밀었다. 안 된다는 말은 돈이 부족하다는 말과 이음동의어.
“대답은?”
“하, 하겠습니다!”
* * *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살짝 옆으로 빠진 카인은 덩굴처럼 엉키는 잡초를 짓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은커녕, 마수도 오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끝없이 자란 수풀은 밀림을 이룬 지 오래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언젠가 본 적 있는 동굴 앞에 선 카인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2급 살귀로 활동했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검성의 제자가 되어 조직의 등 뒤에 비수를 꽂을 준비를 하고 있다니. 감개무량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감상에 빠져 있을 틈은 없었다.
허리를 숙여 틈 사이로 기어들어 가 조속히 조사에 들어간다. 입구는 비좁았지만, 내부는 천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거기에 말도 못 하게 높낮이 차가 심했다. 무릎을 굽히지 않아도 될 만큼 낮은 곳이 있는가 하면, 펄쩍 뛰어 착지해야 할 만큼 높은 곳도 있었다.
상하좌우, 사방이 불규칙적인 형상을 하고 있었다. 어느 걸 기준점으로 삼아야 할지조차 불분명한 상황. 길도 복잡하게 꼬여 있으니, 자칫 잘못하면 암굴 안에서 평생을 보내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카인에게는 문명의 이기가 있었다.
손목을 흔들어 시계를 깨운 카인은 허공에 떠오른 홀로그램을 보았다. 어린아이가 그린 선처럼 난잡하게 이어진 통로, 그 끝에―
[???]바라 마지않았던 목적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