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209
209화 암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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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드를 깊게 눌러쓴 하슈겔이 창틀과 창틀 사이를 뛰어넘었다.
왕궁을 제집처럼 드나들려면 그만한 연구와 노력이 선행되어야 했다. 아무리 그가 모리아티의 부단주라고 해도 처음 보는 곳에서 활약하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하샤 왕국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여러 번 와 본 적 있는 곳이었으니까.
적당한 긴장감과 서늘한 한기가 전신에 스며든다.
당분간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구태여 움츠릴 필요가 없었기에 하슈겔은 곧바로 헬라가 자고 있는 침실로 몸을 옮겼다.
21년 만에 나타난 왕비는 솜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곤히 자고 있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하슈겔은 조용히 허리춤에 걸린 검을 빼냈다.
마검 클로젯.
이성을 대가로 벤 물체의 속도를 늦추는 보구. 그리고 이번 대미를 장식할 주인공이었다.
얽히고설킨 관계를 풀어내기 힘들다면 그 아래에 기둥이 되는 판을 뒤엎으면 되는 일이었다.
이슈는 이슈로 덮는 법. 이 밤이 지나고 나면 혈사에 대한 이야기만 가득할 테지.
검면에 가루를 뿌리자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왔다.
보구의 폭주를 유도하는 물품은 예나 지금이나 사랑받는 베스트셀러였다. 이번에 준비한 건 그중에서도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특제품.
아니나 다를까, 클로젯이 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하슈겔은 섣불리 마음을 놓지 않았다.
앞으로 한 걸음. 자연스럽게 카인과 피아가 있는 곳까지 헬라를 안내해야 소설이 완성되었다.
하슈겔이 클로젯을 헬라에게 쥐어 주는 것과 그녀의 입에서 엄한 소리가 나온 건 거의 동시.
“자고 있는 숙녀에게 이런 장난감을 주는 건 아니지, 밤놀이는 너 혼자 즐기라고.”
지이잉, 지이잉.
요란하게 흔들리는 클로젯을 멀리 던진 헬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그녀의 외형이 바뀌었다.
현숙한 미부가 사라지고, 낯이 익은 사내가 나타나자 하슈겔은 침음을 흘렸다.
후드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헬라, 아니 카인은 그가 놀랐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슈겔은 모를 테지만, 사실 카인은 오늘 하루 종일 그를 따라다녔다. 슬슬 승부수를 띄울 차례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헬라와 잠자리를 바꾼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카인은 하슈겔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남은 건 정면 승부뿐.
눈 깜빡할 사이에 거리를 좁히며 주먹을 내지른다. 정련된 육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흉기.
쾅.
시원할 정도로 경쾌한 소리를 피해 고개를 뒤로 젖힌 하슈겔이 단검을 들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지만, 일단 그는 카인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예정된 일정. 순서만 바뀔 뿐이었다.
하지만 찔러서 동강 낼 생각으로 내지른 검격이 허망하게 튕겨져 나오자 하슈겔은 자신의 계획을 되새겨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수를 쓴 건지 모르겠지만, 카인의 육신은 강철과 다를 게 없는 상태였다.
물론 대비책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암성이 자랑하는 단체의 부단주쯤 되면 싫어도 특기 몇 개는 더 만들어야 했으니까.
카인에게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파악한 즉시, 하슈겔은 독을 풀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또한 정답은 아니었다.
“수인족들이 사용하는 비전독인가. 어렸을 때 자주 먹었지.”
태연하게 반응하는 모습에 하슈겔은 카인에 대한 평가를 수정해야만 했다.
소문 속의 슈발체베인 공작과 소문 밖의 카인 슈발체베인은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숫제 괴물이었다. 그것도 준비된 괴물.
‘얕보지 않는 게 좋을걸? 그는 네게 당할 정도로 무른 사람이 아니니까.’
불현듯 델리아의 경고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 말을 허투루 들은 건 아니었다.
카인이 검성 라프만의 제자였다는 건 알고 있는바, 하슈겔은 반푼이라는 풍문을 듣고도 방심하지 않고 대비했다. 실력을 숨기고 있다면 정예 기사 정도는 되겠거니, 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대비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카인은 이미 경지에 이르렀다.
아예 다른 차원에서 놀고 있었다. 견줄 수 있는 건 암성의 제자인 자넷 정도.
이쯤 되면 지진이나 태풍을 방비하는 게 더 합리적일 지경이었다.
생각해 보면 델리아를 집어넣은 것부터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막힌 길뿐.
결국 카인에게 당해 낼 재간이 없다는 걸 빠르게 인정한 하슈겔이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진정하십시오. 저, 하슈겔입니다. 아시죠? 제레미 백작님의 수족.”
“죽을 것 같으니까 정체를 밝히다니. 뻔뻔하다고 해야 하나?”
“협상의 여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일국의 왕비를 버림패로 사용하려던 녀석이?”
“공작님이 이런 분인 줄 알았다면 이렇게 우둔한 결단은 내리지 않았을 겁니다. 모두가 웃을 수 있도록 계획을 수정했겠죠. 이럴 게 아니라 요구 사항을 말씀해 보시죠.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받아들이겠습니다.”
엿가락처럼 쭉쭉 혓바닥이 늘어난다.
그만큼 구석에 몰렸다는 뜻일 테지만, 카인은 대답 대신 콧방귀를 뀌었다. 하슈겔이 관심종자에 분탕종자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치 혀로 델리아와 거래하고, 두 파벌을 흔들었다.
살려 두면 화근이 될 게 뻔한 데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었다.
“운이 없다고 생각해라.”
방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간격을 좁힌 카인이 검지를 내밀었다. 회생의 여지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져야 했다.
“놓아주지 않겠나.”
갑자기 나타난 노인이 지팡이로 검지를 밀어냈으니까.
쿠콰아앙!
표적을 잃은 오의가 애꿎은 허공을 강타했다. 저릿거리는 손가락을 쥐었다 편 카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은 처음부터 있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뭄을 맞이한 논밭처럼 갈라진 피부. 그 사이로 피어오른 검버섯.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기에 누구 하나 데리고 간다 해도 위화감이 없을 것 같은 노인이었다.
그야말로 괴이한 존재감. 노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카인은 불청객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자베론 님입니까.”
자베론 하스네트.
십좌의 일인이자 암살자들의 왕. 세간에선 암성이라 알려진 자였다.
“자네는 내가 아끼는 제자를 종신 계약으로 엮은 장본인이고?”
“종신 계약이라니요. 듣기 민망하군요. 전략적 제휴라고 해 주시죠.”
과연 암성. 전후 사정은 모두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 입은 아프지 않지만, 관자놀이가 따가웠다.
“시선이 매섭군요.”
“왜 아니겠는가. 내가 아끼는 수하가 방금 명을 달리할 뻔했는데.”
“그 수하가 여기에서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의미 없는 살인은 하지 않는다. 그게 모리아티의 모토 아니었습니까? 어째서 이렇게 변질된 건지 알 수 없군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건 내가 벌할 일이지 자네가 벌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설마 자넷과 인연이 있다고 내가 좋게 볼 거라 생각한 거라면 큰 착각이라 말해 주고 싶군.”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걸까.
하슈겔 또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첨언했다.
“단주님. 적어도 팔 하나는 가져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언제 빌었냐는 듯 자베론을 등에 업은 그는 태세를 전환했다. 하지만 카인은 동요하지 않고, 생각을 정리했다. 역전할 수 있는 패가 아직 손안에 있었다.
“벌하는 게 자베론 님의 권한이라면, 소속까지 옮겨 가며 제 잇속을 챙기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 안에 포함됩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엔지니어란 단체에 부단주가 소속된 건 알고 계셨는지 묻고 있는 겁니다.”
그 말에 자베론이 멈칫했다.
아무리 제 사람에게 너그러운 그라도 박쥐 노릇을 하는 사람까지 수용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일 터.
카인은 자베론이 하슈겔을 내칠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 현실은 상상을 초월했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의문이지만 뭐,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모르는 건 아니네. 좋든 싫든 내가 시킨 거니까.”
‘젠장.’
눈앞이 캄캄해지는 발언이었다.
여태껏 박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중 스파이였다.
무리도 아니었다.
자베론이 말년에 정립한 암월진천은 전자기력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했다. 평생 사람만 죽이고 살아온 자베론이 그에 대한 지식이 있을 리 없었다. 해당 정보는 아마 엔지니어에서 나온 것일 터.
이쯤 되니 자넷이 정말 자베론에게 사랑받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니면 늦둥이를 아끼는 마음과 강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은 별개라는 걸까.
“그러면 저 녀석이 모리아티의 암살자들을 데리고 사익을 추구하는 건 알고 계셨습니까?”
“부단주가 개인적으로 종종 일탈한다는 건 알고 있네. 그래도 어떻게 하겠나. 어려웠을 때부터 함께한 수하인 걸. 다 내 허물인 게지.”
“그러니까 끝까지 책임질 생각은 없다는 거군요.”
“설마 내게 죄를 묻겠다는 겐가?”
그러지 못할 것도 없었다. 모리아티 때문에 입은 피해가 만만치 않았으니까.
“저 녀석이 노린 곳이 슈발체베인 공작령이라는 것도 아실 텐데요?”
“하.”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지팡이로 바닥을 내려친 자베론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내가 자네의 말에 경청한다고 해서 착각하지 말게. 나는 강자고, 자네는 약자니까. 선과 악은 의미가 없어. 선을 넘으면 그걸로 끝. 자네가 얻을 수 있는 건 죽음밖에 없네.”
순간 머릿속에 있는 선 하나가 뚝, 하고 끊어지는 듯했다. 어째서 자넷이 그 기나긴 세월을 도망쳐 다녔는지 알 것 같았다.
자베론이 베푸는 건 배려와 자비가 아니었다. 그에게 있는 건 오직 방관과 방치뿐이었다. 악의보다 더 무서운 무관심. 자유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지는 방임이었다.
그는 미련이 없는 거다.
어차피 인생 막장이 아니겠는가. 아등바등 내가 옳다, 네가 그르다, 싸우는 이들이 같잖게 보일 테지.
어쩌면 십좌란 이름에 매몰된 걸지도 몰랐다. 명패만 내밀면 모두 벌벌 떨며 도망칠 테니까.
그래, 십좌.
너무나 높은 이름이다. 성장한 지금도 닿을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하지만 다른 이라면 몰라도 자베론은 예외였다. 3년 후에 죽을 운명이었으니까. 그에게 죽음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지금도 무릎이 삐거덕거리고, 눈이 침침할 테지. 경맥도 예전만 못하고, 기량도 떨어졌을 터.
그저 압도적인 마력이 미진한 생을 지탱하고 있을 뿐.
암성이란 명성은 여전해도, 자베론이란 무인이 명을 다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무인은 그저 암성이라는 이름에 짓눌려 물러날 테지만, 카인은 달랐다.
눈앞에 있는 건 호전적인 무인이 아니라 인생을 정리하는 노인이었다.
즉, 씹고 뜯을 수 있는 먹잇감에 불과했다.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카인이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듣자 듣자 하니까 못 하는 말이 없군. 반성하지 않고 상황만 더 어지럽힐 거라면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