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218
218화 천년제 1
* * *
“아무래도 천년제 때문에 그런 것 같아.”
“시기가 공교롭군. 아니지, 노린 건가.”
천년제라면 카인도 알고 있는 기념일이었다. 베리타 제국은 물론이고, 대륙 전체가 휴일로 지정한 날이었으니까.
이 세계에 마법이라는 기적을 전도한 마신 제로원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명절. 평소에는 칩거 중인 천년동자가 밖으로 나와 활동하는 시기이기에 각국의 인사들도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벤트였다.
그런 날에 보란 듯이 돌아다니는 건 노렸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발 아프게 뛰어다니지 않아도 사람들의, 그것도 권력자들의 시선을 한 번에 휘어잡을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문제는 신의 인형들이 그만한 활약을 보여 줄 수 있느냐는 것인데―
‘그러고 보니 이번 천년제에 대범람이 일어났었지.’
워낙 규모가 큰 사건이라 기본 교육을 수료하고 나서도 간간이 수면 위로 떠오르던 주제였다.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무지막지한 재앙이었다고.
만약 오토마타가 거기에 참전하게 되면 그들의 입지가 드높아질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준비해라. 도시 국가, 나힘달에 갈 거니까.”
“성황교의 거점엔 왜? 예성녀라도 데려오게?”
뜬금없는 호른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린 카인이 한 박자 늦게 아, 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예성녀(豫聖女).
그게 예비 성녀를 뜻하는 단어임을 눈치챈 것이다.
오토마타에 정신이 팔려 깨닫는 게 늦었지만, 천년제는 예성녀들이 성과를 쌓기 위해 속세로 나오는 날이었다. 당연하지만 그녀들을 포섭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이기도 했다.
‘선별식.’
예성녀의 후견인을 선별하는 자리. 원하는 이는 누구든지 참석할 수 있었다.
천년제 때, 나힘달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수가 꾸준히 늘어나는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애석하게도 카인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애당초 그가 나힘달에 가려는 건 오토마타를 저지하기 위함이었으니까.
“흥미 없다.”
“그래도 있는 편이 낫지 않아?”
예성녀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 어디까지나 교육을 받는 입장이기에 직급상으로는 수습 신관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성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인재였다.
“차라리 치료액을 끼고 사는 게 낫다. 백해무익한 녀석들뿐이니까.”
“마치 보고 온 것처럼 말하네.”
“구태여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능력과 사상은 정비례하는 법이니까.”
회귀하기 전, 아리아와 붙어 다녔기에 성녀가 어떠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신념의 괴물.’
대륙을 구원할 수 있다는 명분만 세워진다면 끓는 양잿물도 포도주처럼 마실 이들이었다.
아리아가 이단자로 낙인찍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천벌을 내리겠다며 득달같이 따라붙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
그래서인지 카인은 성녀란 족속을 곱게 볼 수 없었다.
“후우.”
딱 잘라 말해 질색이었다.
* * *
천년제가 벌써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성황교 최대 행사인 만큼 나힘달 전체가 들썩였다.
백합의 사원이라 불리는 화령원 또한 마찬가지.
다가올 선별식을 기다리는 예성녀들의 자세는 천차만별이었다. 하지만 온실 속에서 자라나 세상 물정 모른다고 해도 그녀들이 공유하는 감정은 비슷했다.
우위에 있는 이를 의식하는 건 인간인 이상 지닐 수밖에 없는 본능이었던 것이다.
모든 예성녀들의 시선이 비수처럼 내리꽂혔지만 비에나는 보지 못한 척 눈을 감았다. 시기와 질투는 그녀에게 향신료와 비슷했다. 일상의 한 부분,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구였다.
“싸우는 것밖에 못 하면서 점수는 압도적이라니, 정말 불공평해요.”
“예성녀가 아니라 기사라고 해야 해요.”
“불길하게 검은 머리카락은 또 뭐람.”
모두 귓등으로 흘러 넘긴다. 물지 않고 짖기만 하는 개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으니까.
귓가에 발걸음을 붙잡는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
“오, 비에나 예성녀인가. 잘 됐구나.”
“선생님이군요.”
익숙한 얼굴이었다.
몬타 구르스인.
직급은 주교.
담당 과목은 시약 제조. 신성 마법에는 조예가 없는 그녀이기에 친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였다. 다행히 몬타는 인격자였다.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대하고, 긍정적인 감정이 충만한 이였으니까.
신관의 표본과도 같은 사람이라 비에나도 어렵지 않게 그와 친해질 수 있었다.
“선별식을 앞두고 떨고 있을까 해서 와 봤더니 괜한 걱정이었나 보구나. 하긴 자네는 이번 기수 수석이니 누구나 데려가려고 할 테지.”
“허울뿐인 성적입니다.”
예성녀야 많다지만, 그중에서 성녀가 될 수 있는 이는 극소수였다. 그야말로 모래 한 줌.
수석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세상에 나가면 다른 예성녀들과 같이 철저한 검증을 받아야 할 테니까.
선별식에서 고른 후견인이 앞으로의 일을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한 명 추천해도 되겠나.”
아니나 다를까, 몬타가 그 주제를 거론했다.
소년처럼 맑은 두 눈에는 기대가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비에나는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미래, 아니 인생이 걸린 일이 될 수도 있었다.
무턱대고 수긍하기엔 걸린 게 너무나 컸다. 그리고 몬타가 누구를 추천할지 훤히 보였다.
“선생님이 추천할 사람이 슈발체베인 공작은 아닐 거라 믿습니다.”
속내를 들킨 몬타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떻게 알았나?”
“슈발체베인 공작령에서 오셨지 않습니까.”
마침 그가 맡고 있는 신전도 그곳에 있다고 했던가. 유추하지 말라고 해도 단서가 이렇게 많아서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혹시 소정의 사례라도 받은 겁니까?”
“아니네, 아니야. 정말 아니야. 그저 자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을 뿐이네.”
“기회?”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비에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몬타가 가까이 다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자네를 특별히 아끼기에 말해 주는 건데, 공작은 소문과 다른 사람이라네. 자네도 만나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걸세.”
친애하는 몬타의 말이라고 해도 비에나는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카인 슈발체베인. 모두가 인정하는 반푼이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여색을 밝히고, 포악한 것도 모자라 오만하기까지 한 인물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스승인 라프만과 대조되어 그러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설령 그가 개과천선했다고 해도 그다지 끌리는 제안은 아니군요. 구설수에 오르지 않은 인물도 많으니까요. 그리고 선별식에 온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항상 의심하고 물음을 던져야 했다. 이런 경우엔 더더욱.
갑자기 일어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혹시 아는가.
몬타 또한 카인에게 속고 있을지.
세상은 악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항상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아무튼 공작이 참석하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가만히 두면 언제까지고 말할 기세라 비에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슬그머니 물러났다.
그렇게 걷고 있자니, 저 멀리 자신들을 신의 인형이라고 칭한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화령원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천년제에 맞춰 나타난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과 가까운 자들.
시기만 보면 꿍꿍이가 있는 게 맞았다. 하지만 천년동자가 인정했다는 말 한마디에 모두가 하하 호호 웃으며 그들을 받아들였다.
애석하게도 비에나는 그럴 수 없었다. 평소에도 앓고 있던 의심병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으니까.
그들의 곁에 서 있는 붉은 머리도 그 판단에 한몫했다.
‘마리에트 노뮈르.’
성녀 중 한 명으로 이번 선별식을 진행하는 이였다. 하지만 맡은 일에 비해 이렇다 할 명성은 없었다. 특출난 재능 또한 없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미진한 건 아니었다. 어느 것 하나 모난 것 없이 평범한 수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중책을 맡을 만한 인재는 아니었지만 수완이 좋은 건지, 항상 제 몫을 챙기고는 했다.
‘속이 시커먼 이들과 정치로 우뚝 선 성녀.’
무시하고 싶어도 자꾸만 눈에 밟히는 조합이었다.
* * *
예상대로 엠을 찾기 위한 여정은 고단했다.
관광지로 유명한 네메시아를 지나, 제일 처음에 등장했던 슈발체베인 공작령, 그리고 최근에 활동했던 하샤 왕국에 이르기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고자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었으나 우라의 손에 잡힌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조직의 뒤를 쫓는 것 같았다. 종국에는―
‘귀신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매튜는 줄곧 슈발체베인 공작령에서 경력을 채운 기사였다. 애당초 그가 귀신이라면 조직에서 먼저 말해 줬을 터.
가당찮은 상념을 털어 낸 우라가 다음 목적지로 정한 곳은 대륙의 동부에 위치한 도시 국가 나힘달이었다.
성황교의 본전, 성황청이 있는 지역.
조직에게는 금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래도 남은 장소는 이곳뿐이라 우라는 멀리에서라도 슬그머니 조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물망에 걸린 건 리벨리온이 아니라 전혀 다른 무리였다.
‘신의 인형?’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에 그녀는 서둘러 전서구를 날렸다. 무언가 터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상부 또한 비슷한 판단을 내렸는지 또 다른 임무가 하달되었다.
‘대대적인 습격을 감행하라고? 아예 전면전을 감수하겠다는 거네.’
그간 조직의 행보를 고려하면 파격적이다 못해 급진적인 결정이었지만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신의 인형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심란한 속마음을 감추고, 접선지에서 책임자를 만난 우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근처에 세워져 있는 마차를 보았을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긴 했다. 하지만 직접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뭐야. 누군가 했더니 크롬 너였어? 하여튼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너와 함께 현장을 굴러다닐 날이 올 줄이야.”
“시끄러우니 입이나 닫아라, 주정뱅이.”
우라가 주절거릴 때마다 술냄새가 화악 퍼지자 크롬은 미간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렸다. 퍼스널 네임인 그에게도 우라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어린 나이에 훈련소를 맡게 된 그녀의 기량은 경이로운 수준이었으니까.
술병을 껴안고 있던 우라가 엘리제의 뒤에 숨어 있는 아리아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아리아잖아? 오랜만이야. 한 3년쯤 됐지? 못 본 사이에 몰라보게 달라졌네. 어른이라고 해도 될 정도야.”
“오랜만입니다, 우라 님.”
쾌활한 인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리아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탓이다.
“그보다 너…….”
얼굴에는 작은 자상이, 팔뚝에는 멍자국이.
척 보기에도 아리아가 지닌 상처는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겉으로 드러난 게 저 정도였다. 안은 얼마나 곪아 있을지 보나마나였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슬쩍 앞으로 나온 엘리제가 아리아를 가리자 우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예 얘, 기를 죽여 놨네.”
“신경 꺼라.”
크롬이 노려보았으나 우라는 휘파람을 불며 제 할 말만 늘어놓았다.
“상부에 보고할 게 하나 더 늘었네. 가르치라고 보낸 아이를 분풀이로 사용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머큐리가 들으면 좋아하겠어.”
“누구 마음대로 분풀이라 정의하는 거지? 가르치는 도중에 생긴 상처일 뿐이다.”
“이야, 나를 바보로 아네. 팔푼이 새끼가. 네 입맛대로 길들이려고 저렇게 만들어 놓은 거잖아.”
짧게 혀를 찬 크롬이 입을 열었다.
“정신을 못 차리길래 혼낸 거다.”
“정신을 못 차려?”
“잠깐 눈을 뗀 사이에 슈발체베인 공작과 필요 이상으로 대화를 나누더군.”
“아, 요주의 인물과 접촉했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다?”
비릿하게 웃은 우라가 크롬의 귓가에 들릴 듯 말 듯 자그맣게 읊조렸다.
“크롬, 남자의 질투는 추한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