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281
281화 대항 1
* * *
2일 차 대륙 회의는 한 차례 소동이 일어나면서 유야무야되었지만, 3일 차 대륙 회의는 순조롭게 개회되었다. 4일 차를 넘어 5일 차, 그리고 6일 차까지도.
하지만 중진들은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조직을 타도하자는 대의명분은 흐릿해진 지 오래였다.
군터는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구속된 카인도 풀려나지 못했다.
본디 시간과 상황이 변하면 보는 관점도 달라지는 법.
대륙 회의에 올라오는 안건도 조금씩 변화하더니 7일 차에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변모했다.
헬라, 그녀가 서슬 퍼런 눈으로 읍소한 게 그 증거였다.
“슈발체베인 공작을 그렇게 가둔 건 부당한 조치였어요. 이제 슬슬 인정하세요. 공작은 누명을 쓴 것뿐이에요.”
“또 그 소리인가, 헬라 왕비.”
벌써 수십 번째 반복된 대화였다. 자비얀은 못 들어주겠다는 듯 손을 저었다.
“혹 이황자 저하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이런 일을 꾸민 건가요?”
“뭐?”
“세라 여왕과 붙여 주기 위해 경쟁자인 공작을 배제하려고 이리 서두르는 거냐고 묻고 있어요.”
“당치도 않군.”
“황태자 저하께서 애용하는 방법일 텐데요?”
“말이 지나치군. 누가 보면 사도에 능통한 줄 알겠군. 감히 말하건데 나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
“증거가 있다면요?”
“그럴 리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자비얀이 코웃음을 쳤다. 한때 그에게는 비수 한 자루가 있었다. 하지만 그 비수는 몇 달 전에 죽었다. 그것도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형태로.
“그렇게 대답하실 줄 알고, 특별히 모신 손님이 있어요. 그분의 말씀을 들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예요.”
“기각. 여기는 사사로운 감정을 푸는 곳이 아니다.”
“그래도 한 번 들어보는 게 어떨는지요.”
갑작스레 하이렌이 끼어들어 자비를 베풀라고 하자 자비얀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너도 헬라 왕비의 편인가?”
“형님께서 편협한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보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자비얀이 무어라 항변하기도 전에 회의장 문이 열리며 한 노인이 들어왔다.
“허허. 대체 무슨 말을 하길래 문을 여는 것도 이리 시간이 걸리는 게냐.”
가뭄을 맞이한 논밭처럼 갈라진 피부. 그 사이로 피어오른 검버섯. 금방에라도 죽을 것 같은 외형에 지팡이까지 짚으니, 산송장이 따로 없었다.
중진들은 입을 조가비처럼 다물었다. 노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괴이한 존재감이 그들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과 다르게 반응한 이들도 있었다.
타나와 후딘, 두 사람은 노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자베론 하스네트.
십좌의 일인이자 암살자들의 왕이 바로 그였다.
“만나서 반갑다고 해야 하나?”
자베론과 마주한 자비얀은 침음을 흘렸다.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아귀에서 땀이 흘러내렸지만, 그는 평정을 가장했다.
“자베론 님에 대한 건 타나 님에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나는 양심선언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네.”
“양심선언?”
“그래. 내가 저지른 짓은 아니지만 부단주였던 하슈겔이 많은 업보를 남겼더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자비얀이 그답지 않게 의뭉을 떨었지만 자베론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품 안에서 한 책자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타나에게 걸어가 그것을 넘겼다.
“하슈겔, 그 녀석이 살아생전 악행을 저지르며 남긴 장부라네. 한 번 살펴보니 베리타 제국과 관련된 항목도 적지 않더군. 부디 공정한 판결을 내리길 바라겠네.”
“영감의 뜻은 알겠지만 말이야. 이런 걸 덥석 넘겨주면 어떡해.”
타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장부를 받아든 것과 자비얀이 발악한 건 거의 동시.
“자베론 님, 장난이 심하십니다. 거기, 헬라 왕비도 마찬가지. 서운한 건 알겠지만 공식 석상에서 십좌의 힘을 빌려 풀려고 하다니 이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그 말에 답한 건 헬라가 아니라 자베론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반푼이 공작이나 구하자고 이렇게 온 거라 이 말인가? 양심선언이라고 미리 언질을 주었는데도?”
쿵.
그가 지팡이로 지면을 내리찍자 회의장 전체가 출렁거렸다.
“큭.”
“자네는 아카데미에 다녔을 시절, 단 한 학기만 빼고 모조리 수석을 유지했더군. 웃긴 건 그 시기에 이름난 인재들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모두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는 게야. 마치 누군가 중간에서 훼방을 놓은 것처럼.”
“억측입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니나, 그 아이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할 거지?”
니나 웬더스. 긴 시간 동안 돌덩이처럼 남아 있는 그 이름이 자베론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자 자비얀은 숨이 멎는 듯했다.
“유일하게 자네를 제치고 수석을 차지한 그녀는 얼마 뒤, 마차 사고로 안타깝게도 그 삶을 마감했네. 보이지 않은 손이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우연의 일치입니다.”
“자네가 빌려준 마차인데도?”
자베론에게 항변해 봐야 밀릴 뿐이라는 걸 깨달은 자비얀은 고개를 돌려 헬라를 노려보았다.
“그동안 이걸 준비한 거였나? 어처구니가 없군.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거래가 오고 갔는지 모르겠지만 전부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장부는 드렸을 텐데요?”
“모함일 뿐이다.”
“그렇게나 사리 분별을 잘 하시는 분이 슈발체베인 공작은 어찌 그리 매정하게 집어넣은 건가요? 그의 객실에서 발견된 병은 공작의 것이 아닐 수도 있었는데요. 저 장부에 황태자 저하의 치부가 없을 수도 있듯이.”
송곳보다 날카로운 지적이 자비얀의 목덜미를 찌르고 지나갔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
그때, 퀘이사가 나섰다.
“형님에게 못 하는 말이 없네. 결국 짜 맞춘 이야기뿐이잖아.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어.”
“그걸 증명해 줄 사람이 있다고 해도?”
자베론이 날카롭게 낚아채자 퀘이사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런 그를 놓아 줄 자베론이 아니었다.
“들어오게.”
자베론의 뒤를 이어 등장한 인물은 중년의 신사였다.
하나둘씩 나기 시작한 흰머리를 매끄럽게 뒤로 넘긴 그는 청년 시절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중년인의 이름은 구안 드로마니.
5대 상단 중 하나인 드로마니 상단의 주인이었다.
군수품을 주력으로 삼아, 3차 대륙 전쟁 때 제국을 지원한 구안은 그 공을 인정받아 다른 상단주들과 다르게 후작위를 하사받았다.
여러모로 소홀히 대할 수 없는 인물.
아니, 타나를 제외하면 대적할 이가 없는 이였다.
“드로마니 후작. 자네까지 여기엔 무슨 일인가?”
“제가 아니면 누가 오겠습니다. 니나, 그 아이는 제 딸인 걸요.”
“그게 무슨…….”
“젊은 시절, 헤어졌던 연인이 저 몰래 아이를 품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애석하게도 그녀는 끝까지 제 마음을 몰라주었던 것 같지만요.”
“사생아란 이야기가 아닌가. 미안한 말이지만 연결 고리는 없다시피할 건데?”
“오늘 호적에 넣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발언에 자비얀의 미소에 금이 갔다. 어린 날, 치기로 벌였던 일이 목을 옥죄이고 있었다.
한낱 평민인 줄 알았는데 후작가의 영애였다니.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참고로 자베론 님이 가지고 계셨던 장부는 이쪽에서 이미 검수가 끝난 상태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실제로 거래가 이루어졌더군요.”
“알았으니 그쯤 해라. 사과하지, 후작도 알다시피 그건 불행한 사고였다. 황태자 책봉을 코앞에 둔 시기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내렸을 뿐이다. 지금도 내 가슴 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다면 믿겠나?”
이 지경이 되었는데 과연 누가 그 말을 믿을까. 악어의 눈물일 뿐이었다. 허망하게 스러져 갔을 딸에 대한 속죄로 구안은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지기로 결심했다.
“드로마니 상단은 황태자 저하의 만행을 묵과하지 않을 겁니다. 필요하다면 항전도 불사하겠습니다. 설령 제 손으로 이룩한 상단이 산산이 부서진다 해도.”
“아니, 나는…….”
구안의 기세에 짓눌려 뒷걸음질한 자비얀은 타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사방이 꽉 막힌 상황. 믿을 건 그녀밖에 없었다.
“타나 님.”
타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회의가 진행되는 사이, 장부를 훑어본 그녀는 끔찍한 진실을 여럿 알게 되었다.
하이렌의 어머니, 이황비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수인족 시녀를 협박해 등 뒤에서 찌르게 했다라. 단검에 사용된 독은 현지 조달. 그 말은 곧 제도에서 구했다는 뜻일 터. 네놈이 진정 사람인지 궁금할 지경이구나.”
“제가 저지른 짓이 아닙니다. 믿어 주십시오.”
“그 외에도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일일이 부정할 셈이느냐.”
“다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애당초 일방적인 주장이지 않습니다. 제 말을 듣고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자비얀이 처절하게 변명한 순간, 회의장 밖에서 고함성이 들려왔다.
“그만!”
단호하고 엄격한 목소리에 모든 이가 그 자리에서 굳었다.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군터가 마리에트의 부축을 받으며 나타난 것이다.
호흡은 가쁘게 쉬면서도, 발걸음은 느릿하기 그지없으면서도 눈빛만은 형형한 군터였다. 모든 이들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더구나.”
“아바마마.”
“대륙 회의를 허가한 건 교류의 장으로써 활용하라는 거였지 네 멋대로 날뛰라는 뜻이 아니었다.”
17년 동안 겨우 쌓아 놓은 신뢰가 단번에 무너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소식은 온 대륙에 울려 퍼질 터. 베리타 제국의 위상은 진창에 처박힌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바마마가 위급하신 상황에서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슈발체베인 공작에 대한 것도?”
“네, 슈발체베인 공작을 구속한 건 그의 객실에서 독이 담겼던 병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독이 무엇인지 알아냈나?”
“그건 아직…….”
“그렇다면 해독제는? 유입 경로는? 독살을 시행한 방법은? 동기는? 그로 인해 얻는 이득은?”
군터의 물음이 길어질수록 자비얀의 대답은 짧아졌다.
“왜 말이 없지? 설마 어느 것 하나 알아보지 않고 일만 저질렀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누가 보아도 걸리라고 남겨 놓은 함정에.”
“그건 아직 모릅니다.”
“황궁은 네 놀이터가 아니다! 자비얀!”
서릿발처럼 차가운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수십 년 동안 베리타 제국을 통치한 군터의 연륜은 하나의 개념에 다다라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했다.
자비얀이 꼬리를 내리자 군터는 짧게 혀를 찼다.
“네가 황태자 자리에 걸맞은 인재인지 다시 한 번 고려해 봐야겠구나.”
“아바마마.”
“시끄럽다! 게 누구 없느냐. 가서 슈발체베인 공작이나 불러와라.”
그 말에 기사들은 마법에서 풀려난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멈췄던 제국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 * *
회의장에 입장한 카인은 자신을 둘러싼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인지했다. 철저한 외면에서 일방적인 관심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구안과 시선이 마주친 그는 나지막이 고개를 숙였다.
일찍이 자비얀을 죽였던 독은 이번에도 톡톡히 활약한 듯싶었다.
‘더욱더 악랄해질 테지.’
회귀하기 전에는 제국 대란이 일어난 뒤였다.
피치 못하게 하이렌의 힘을 빌려 자비얀을 처단해야 했기에 구안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세력도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이가 살아 있었으니까.
군터 베리타.
저번 알현 때는 눈길도 주지 않았던 황제가 정념이 타오르는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잠들어 있던 사이에 모진 고초를 겪었다지. 어디 한 번 원하는 걸 말해 보아라.”
과연 평정제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군터가 내놓은 건 달콤한 과실이었다.
카인은 밝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저하가 폐위되었으면 합니다.”
그에 군터 또한 맞수를 두었다.
“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