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33
33 章>
실종된 은봉령주를 대신해 강서 일대를 정찰하고 있던 무림맹 직속 특무대원 연십랑(蓮十郞).
그가 처참한 장내를 살피고 있었다.
조가대상회의 회장이라는 자.
운이 좋게도 골목 어귀에 숨어 그의 모든 신위를 지켜볼 수 있었던 연십랑은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흑천대살.
신비의 모산곡주를 죽인 절대경의 고수이며 사천회와 함께 사파를 삼분하고 있는 절대자.
그런 그가 채 삼 초도 펼쳐 보지 못하고 패배를 시인하더니 결국 꽁지 빠지게 도망을 친 것이다.
그 회장이라는 자의 무공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게다가 흑천대살이 언급한 것은 분명 전설의 검신(劒神).
조가대상회의 회장이라는 자가 진정 검신의 후예라면 그야말로 강호의 대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허공을 수놓던 검은 점들.
흑천팔왕을 차례로 집어삼키던 그 점들을 바라볼 때의 심정이란 정말이지 자신이 알고 있는 무학의 상식이 모조리 부서지는 듯한 충격, 그 이상이었다.
자신이 본 것을 모두 종합하자면 더 이상 이 강서의 지배자는 흑천련이 될 수가 없었다.
절대고수가 갖는 파괴력은 그만큼 지대하다.
강호의 모든 문파가 한 명의 절대경을 배출하기 위해 엄청난 자원과 노력을 쏟아붓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
이제 저 젊은 절대고수의 신위는 들불처럼 일어난 소문에 의해 전 강호를 위진할 것이다.
절대고수의 진정한 가치는 그 주위로 구름처럼 사람이 운집한다는 것.
더욱이 검신의 후예라는 상징성이 더해진다면 무림 역사상 전에 없는 명성을 구가할 것이다.
순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던 연십랑은 더욱 소름이 돋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자신이 이곳에 파견된 이유는 강호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조가대상회의 행보를 살피기 위함이 아닌가?
안휘와 강서로 엄청난 규모의 금(金)이 몰리고 있었다.
게다가 주변 성(省)들의 인구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람들 역시 안휘와 강서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안휘는 정파 영역을, 강서는 사파의 영역을 대표하는 곳.
자연히 그 피해는 정사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미치고 있었다.
첩보에 의하면 현재 이곳 강서에는 사천회의 정보 조직도 대거 들어와 활동한다고 한다.
이렇듯 상회의 영향력 하나만으로도 강호를 풍운으로 몰아가고 있는 마당.
거기에 검신의 후예라는 막강한 명성이 더해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무림의 역사 이래 상계(商界)의 인물이 그와 같은 권력을 거머쥔 예가 있었던가?
그의 영향력이 안휘와 강서를 넘어 북(北)으로 향한다면?
게다가 기이하게도 그와 인연이 닿은 문파들은 모조리 오대세가이지 않은가?
사천당가에서 공급받는 철. 그와 함께 상회를 경영하고 있는 제갈운, 남궁장호, 팽각.
그가 각각의 후기지수들과의 인연을 활용하여 세가들을 규합한다면?
자칫하다가는 맹(盟)이 절반으로 쪼개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조가대상회는 명백히 맹의 위협이었다.
긴장으로 굳은 얼굴의 연십랑이 이내 경공을 시전해 장내에서 사라졌다.
* * *
팽각이 시커멓게 묻은 숯검댕을 닦으며 일꾼들과 탄광에서 돌아왔을 때, 조휘와 한설현도 부상을 입은 사원들을 인솔하며 상회에 들어서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수많은 부상자들로 가득 메워진 대상회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광산에서 내려오며 포양호 변 쪽에서 거센 불길이 일어난 것을 보고 필시 상회에 흉한 일이 일어났다고 예상은 했지만 상황이 너무 심각했던 것이다.
“어떤 새끼들이냐! 흑천련이냐!”
대도(大刀)를 거칠게 뽑아 들며 눈을 부라리는 팽각이었지만, 왠지 모를 앙상함에 남궁장호가 측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개자식들! 내가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과연 근육의 하북팽가답게 굴고 있는 사나이 팽각.
그때, 염상록도 장일룡을 부축하며 대상회의 별채에 들어서고 있었다.
사원들을 인솔하던 조휘가 벼락같이 달려와 장일룡의 상세를 살폈다.
“아……!”
조휘는 장일룡의 두 손을 보자마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두 손에는 살이란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새하얗게 드러나 있는 그의 손뼈를 바라보며 조휘는 우두커니 선 채로 몸을 떨고 있었다.
“이 개새끼들……!”
창도 제법 다루지만 기본적으로 장일룡은 권사(拳士)다.
권법을 주 무기로 하는 무인에게 저런 처참한 상세는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 그의 미래가 짓밟힌 것이다.
남궁장호의 상세를 살피던 생사의문의 의원 소위강이 기겁을 하며 장일룡에게 다가왔다.
“쯔쯔…… 허어……!”
연신 혀를 차며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있는 소위강.
장일룡이 오히려 가슴 근육을 꿈틀 거리며 위풍당당하게 외쳤다.
“싯펄, 거 왜들 그리 병신 취급하는 거요? 뭐 사람이 죽었수?”
곧 어깻죽지를 휘휘 돌리며 씨익 웃는 장일룡.
“난 끄떡없수. 그러니 그런 울상들 짓지 말라고.”
조휘가 소위강을 응시했다.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간절한 눈빛, 하지만 소위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살이 차는 아무리 좋은 약을 처방한다고 해도 저건 무리요. 곧 썩어 들어갈 터이니 차라리 잘라 내는 게 그를 위한 길이오.”
“생사의문의 의술은 천하제일 아닙니까…….”
절망하는 기색으로 가득한 조휘가 장일룡의 거구 앞에 섰다.
천천히 그의 두 손을 잡는 조휘.
“크…… 그렇다고 안 아픈 건 아닌데.”
그렇게 음울한 눈으로 장일룡을 응시하던 조휘가 씹어뱉듯 말했다.
“의원님. 금화는 얼마든지 들어도 좋습니다. 제발 이놈의 손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소위강은 한참이나 고심하고 있었지만 마땅히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의술을 펼치는 자로서는 다소 황망한 말이지만…… 전설로 내려오는 여래진토(如來眞土)라는 것이 있소만.”
의술을 펼치는 자가 기적을 입에 담는 것은 자격이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소위강은 기적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여래진토(如來眞土)? 그게 뭡니까?”
진지한 조휘의 물음이었지만 소위강으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의술을 공부하면서 그저 전해져 내려오는 풍문처럼 들었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마교의 난 당시 한 무사가 크게 부상을 입고 달아나다 어느 심산유곡에 갇히게 되었다고 하오.”
소위강이 긴 수염을 쓸며 다시 말했다.
“당시 그는 화골산(化骨酸)에 당한 것처럼 온몸의 뼈가 다 드러날 정도의 상처를 입은 상태였는데, 유독 초목이 자라지 않는 기이한 영기를 뿜는 땅을 발견하여 그곳에 자신의 몸을 비볐더니 새살이 돋아났다고 하오.”
“그곳이 어딥니까!”
소위강이 나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당시 그 소문을 들었던 의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무사를 추적했으나 무위에 그쳤다 하오. 더욱 황당한 것은 의원들이 그 무사가 있던 계곡을 발견하긴 했지만 기이하게도 그곳에는 나무로 깎아 만든 여래불상(如來佛像)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고 하오. 이처럼 황당한 수백 년 전 이야기에 무슨 신빙성이 있겠소.”
“음…….”
소위강의 말대로 너무 뜬구름 잡는 이야기.
하지만 이어진 그의 음성은 실망하고 있던 조휘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한데…… 혹 월하림(月下林)을 아시오?”
“야접과 더불어 강호의 양대 신비 정보 단체 아닙니까?”
“일설에 따르면 당시의 월하림주가 바로 그 무사라는 풍문이 있소이다.”
“그게 사실입니까?”
소위강이 씁쓸한 얼굴을 했다.
“그야말로 일설일 뿐이오. 당시 월하림주의 별명은 홍인(紅人)이었소. 그를 본 자들은 한결같이 아이의 살결처럼 새뽀얗고 불그스레한 그의 피부를 기이하게 여겼다고 하오. 당시 그의 세수가 칠십이 넘은 점을 감안한다면 기이한 건 사실이지.”
“음!”
“또한 사람들이 더욱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가 여래불상의 목걸이를 항시 차고 다녔기 때문이오. 게다가 그는 무조건 밤에만 활동했다고 하오. 당연히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그랬다고 여겼소. 그의 정보상에 월하림(月下林)이란 별칭이 붙은 것도 그 때문이오.”
과연 당시의 사람들이 의심을 품을 만한 행동이었다.
칠십 세가 넘도록 새살이 돋아난 듯한 살결을 유지하는 것은 주안공(朱顔功) 계열의 무공을 익히고 있어 그렇다 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그런 수군거림을 들으면서까지 굳이 여래불상을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은 그다지 상식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들의 눈을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 자가 어두운 밤에만 활동하는 건 또 뭐란 말인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분명 뭔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튼 그 일로 인해 그 신비의 땅을 일컬어 강호인들은 ‘여래진토’라고 부르기 시작했소. 강호의 전설에 관심이 있는 자라면 한 번쯤은 들어 본 이야기일 것이오.”
조휘의 얼굴은 이내 침중하게 굳어졌다.
‘월하림이라…….’
야접과 더불어 강호의 양대 신비 정보 조직.
현대인인 조휘는 정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간 그들과 접선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터였다.
하지만 마침내 접선에 성공한 야접(夜蝶)과는 달리 월하림은 끝내 인연을 맺을 수가 없었다.
“월하림과 접선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소위강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일개 의원에 불과한 내가 어찌 그런 신비 조직과 연을 맺을 수 있겠소. 무엇보다…….”
그가 장일룡의 손을 쳐다봤다.
“월하림을 추적하고 전설이 사실임을 확인하며 천운이 닿아 여래진토를 확보한다고 칩시다. 그 시간이 도대체 얼마나 걸리겠소?”
“음…….”
“이미 뼈의 변색이 시작되었소. 고사하고 있다는 의미. 사흘 안에 그의 손을 자르지 않는다면 팔 전체가 썩어 갈 것이오.”
냉철하게 고민을 해 본다면 말 그대로 전설(傳說)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만을 믿고서 도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위강 의원의 이야기는 분명 터무니없는 말이었지만 조휘의 감(感)은 달랐다.
왠지 모르게 여래진토가 존재할 것 같은 기이한 느낌.
하지만 장일룡에게 남은 시간이 고작 사흘이란 것이 답답했다.
“그 문제라면 제가 해결할 수 있을 듯해요.”
조휘의 고개가 부서지듯 한설현에게 꺾어졌다.
“해결? 어떤 방법으로요?”
자신감 있던 호언과는 다르게 한설현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우리 북해에는 의술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요. 의원들은 눈보라가 치는 북해의 땅을 곧잘 방문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큰 외상을 입을 경우에는 늘 대호랍특까지 병자를 데리고 나가야 했어요. 그리고 알다시피 북해와 대호랍특까지의 거리는 매우 멀답니다.”
조휘가 뭔가 생각난 듯 눈을 번뜩였다.
“설마?”
“맞아요. 북해 사람들은 환자의 환부가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한음빙장을 활용했답니다. 하지만 그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조휘.
“말도 안 돼! 그 한음빙기에 의해 먼저 죽을 겁니다!”
“맞아요. 대부분은 대호랍특에 도착하기 이전에 한음빙기를 견디지 못해 죽는답니다. 하지만 극고의 정신력과 체력으로 견딜 수만 있다면 살 수 있어요.”
뼈가 시리다, 혹은 한기가 골수에 치민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한기가 뼛속으로 침투하기 시작하면 인간이 느끼는 극한의 고통은 상상을 불허하게 되는 것이다.
한데 천빙령을 취하고 빙인의 경지에 이른 한설현의 빙장을 저렇게 뼈가 드러난 손으로 견딜 수가 있단 말인가?
하루는커녕 반나절도 장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때 장일룡이 호쾌하게 웃었다.
“크헛헛헛! 거 그까짓 냉수마찰쯤이야 무어가 대수겠수! 대산의 얼음을 깨고 한나절쯤은 거뜬하게 버틴 사내 중의 사내가 바로 나요! 거 빙장 한번 시원하게 맞아 봅시다!”
“미친놈. 이게 무슨 장난인 줄 아냐?”
욕은 하고 있었지만 조휘의 얼굴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빙백신장이 얼마나 엄청난 한음빙기를 자랑하는지는 오히려 조휘보다 한설현의 곁에서 직접 지켜본 장일룡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에게 걱정을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거 죽을상 할 거 없수다. 칠주야고 한 달이고 내 버텨 보겠수.”
조휘가 진지한 얼굴로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제갈운을 쳐다보았다.
“이제 사원들은 모두 수습하신 겁니까?”
“위벽호 단주가 인솔하는 사원들만 오면 끝이에요. 곧 도착할 거예요.”
조휘가 멀리 장원 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진법은요? 어느 정도까지 진척된 거죠?”
“형님의 실력으로 미뤄 볼 때 반나절이면 끝날 거예요. 아침에 시작했으니 곧 완성될 것 같아요.”
“식량은 얼마나 확보해 놓았습니까?”
제갈운이 다소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우리는 조가대상회예요. 조 소협이 그런 질문을 하다니 황당하군요.”
하긴 조가대상회의 창고에 있는 곡물과 상품들을 이 할만 가져오더라도 이곳 사람들이 몇 달은 거뜬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사불여튼튼이라지 않는가?
한번 실수를 경험한 조휘로서는 조그만 것 하나라도 놓칠 수 없는 심정이었다.
“형님의 진법이 절대경도 버틸 수 있습니까?”
“흑천련주를 말하는 거라면…… 제가 장담드리죠.”
제갈운의 두 눈이 현기로 반짝거렸다.
“형님과 제가 전력으로 변환생문(變幻生門)을 전개해서 그놈에게 지옥이 뭔지 보여 주겠어요. 사흘이고 한 달이고.”
제갈세가의 천재 형제가 진법 하나에 매진한다면 분명 엄청난 진법이 탄생할 것이다.
절대경인 흑천련주를 두고도 제갈운이 저리도 자신만만하게 장담을 한다면 안심할 수 있었다.
조휘가 음울한 눈을 한 채로 한설현에게 말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고운 입술을 꼬옥 깨물던 한설현이 장일룡에게로 다가가자.
“자 빠, 빨리 해 주슈.”
꽤나 말을 더듬는 것이 호탕한 척하면서도 쫄리는 모양.
부우우웅.
한설현의 고운 섬섬옥수에 새하얀 한음빙기가 서리기 시작하자, 갑자기 장일룡이 온몸을 비틀며 뒤로 물러났다.
“자, 잠깐! 해 보고 싶은 것이 있수!”
조휘를 비롯한 모든 동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 보고 싶은 것?”
“그게 뭔데?”
장일룡이 근엄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강렬한 안광을 빛냈다.
“바둑판! 그리고 술!”
조휘의 두 눈이 가늘어진다.
이 미친놈이 지금 이 와중에 관운장을 흉내 내겠다는 건가?
천하의 명의였던 화타가 관운장의 어깨에 치민 독을 치료하기 위해 칼로 뼛속을 깎았을 때 관운장은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웃으며 바둑을 뒀다.
염상록이 혀를 끌끌 찼다.
“하…… 여기에는 진짜 정상인이라곤 없어.”
진가희가 힐끔 그를 쳐다본다.
“응, 니가 제일 미친 놈.”
“뭐래, 핏물 핥는 귀신 년이.”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는 그들을 뒤로하며 조휘가 한설현에게 재촉했다.
“그냥 빨리 해 주시죠.”
“네. 알겠어요.”
부우우우웅.
한설현은 그대로 쌍장에 맺힌 한음빙기를 장일룡의 두 손에 갖다 댔다.
순간, 장일룡이 두 눈이 더 이상 크게 뜨지 못할 만큼 벌어졌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렇게 빙백신장의 기운이 두 손에 닿자마자 장일룡은 바둑을 두고 술을 마시려던 생각을 깨끗이 비워 냈다.
곧바로 뼛속을 감싼 극음의 기운!
이런 걸 ‘고통’이라는 단순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정신이 아득해져 곧바로 혼절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고통이 극에 이르면 오히려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부처의 말씀이 떠오를 지경.
이렇게 죽는 건가 싶을 정도로 장일룡은 도저히 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장 부장!”
“안 돼! 정신을 잃으면 안 돼요!”
빙백신장의 한음빙기를 맞이한 인간은 기본적으로 정신을 잃지 않고 깨어 있는 채 맞서 싸워야만 살 수 있었다.
한설현이 크게 소리쳤다.
“내공을! 어서 내공을 일으켜 한음빙기와 맞서요!”
“크르르르르……!”
장일룡이 힘겹게 눈을 뜨며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괴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저런 고통을 몇 주씩?
아무리 장일룡이 사내라고 해도 결코 불가능할 것이다.
조휘의 철검이 곧바로 두둥실 떠올랐다.
“다녀오겠습니다!”
사뿐하게 철검에 올라탄 조휘가 곧 별채 밖으로 휘익 하고 날아가더니 이내 머나먼 창공으로 사라졌다.
촤아아아아아!
공기를 가르는 엄청난 굉음!
병상에 누워 있던 남궁장호가 두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지,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제갈운도 충격으로 섭선을 떨어뜨린다.
“저, 저, 저게 말로만 듣던!”
염상록과 진가희도 얼이 빠진 건 마찬가지.
“와 씨 미쳤네. 그새 더 쌔졌네. 어검비행이라니! 하하하하!”
“와, 겁나 멋져!”
전설의 어검비행(御劒飛行)은 검신의 전유물.
이를 함께 바라본 조가대상회의 간부 하나가 읊조리듯 음성을 흘렸다.
“검신(劒神)…… 소검신(小劒神)…….”
강호에 소검신이라는 단어가 마침내 처음으로 언급되는 순간이었다.
* * *
조휘가 사흘을 날아와 도착한 곳은 남궁세가였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가장 믿을 만한 곳은 남궁(南宮).
지금으로서는 남궁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창천원로원의 후원에서 오수(午睡:낮잠)를 즐기고 있던 남궁성찬이 깜짝 놀라며 침을 닦는다.
“허억! 쓰으으읍!”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져 기겁을 한 것이다.
휘이이익!
탁!
가뿐하게 철검에서 내린 조휘가 창천원로원의 후원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옛 생각이 난 듯 흐뭇하게 웃었다.
“여긴 여전히 아름답네요. 잘 지내셨죠? 사부님?”
남궁성찬은 몇 번이나 두 눈을 비비고 있었다.
도대체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창천담로원의 후원.
여전히 희뿌연 운무 속에서 졸졸 흐르는 청량한 시냇물과 만발한 기화이초들의 향 역시 그윽하기 그지없었다.
조휘는 처음 남궁세가에 찾아왔을 때의 추억으로 감회가 새로웠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가주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가주? 아니 그것보다……!”
아직도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조휘의 철검.
분명 저건 단순한 허공섭물 따위가 아니었다.
“……그새 또 다른 경지를 개척했단 말이더냐?”
황당함을 넘어 경악, 아니 이건 그냥 말이 되지 않았다.
한 인간의 무공이 이렇게 빨리 발전하는 것이 당최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이기어검술의 경지가 극에 이르러 권장술로 공수를 수발하듯 자유로운 수준에 이르게 되면, 시전자의 의념과 검이 하나가 되어 비로소 검령(劒靈)을 이루게 되는데, 이때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어검비행이다.
이것은 뜻이 일면 절로 강기(罡氣)가 일어나는 의형강 너머의 경지.
아직 원로원 최고수인 자신이나 세가주 남궁수조차도 이루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같은 무혼을 이룬 절대경이라 할지라도 발휘할 수 있는 역량에 따라 그 경지가 네 단계로 구분된다.
절대지경(絶大之境) 무혼(武魂).
절대지경(絶大之境) 무령(武靈).
절대지경(絶大之境) 무극(無極).
절대지경(絶大之境) 무량(無量).
자신은 무혼의 경지를 겨우 이루고 있었고, 세가주 남궁수는 무혼과 무령의 중간쯤.
한데 어검비행을 저리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조휘의 경지가 무령을 넘어 무극을 바라보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대체 무극의 경지가 어떤 경지인가!
천하제일인을 다투는 무림맹의 무황과 화산의 자하검성.
그들이 이룩한 천외천의 경지인 무량(無量)을 제외한다면 소림의 공공대사가 강호의 유일한 무극(無極)이다.
이 말인즉, 이미 조휘가 칠무좌의 최정상을 달리는 강호의 절대자들과 실력을 나란히 하고 있다는 소리.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내공만 무식하게 훌륭했지 머릿속의 초수(初手)조차 제 몸으로 발휘하지 못했던 놈이 아니었던가.
그로부터 십 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절대경의 무혼을 넘어 무극에 이르렀다니!
‘가주의 말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강서행을 마치고 돌아온 가주 남궁수가 희열에 찬 얼굴로 말했었다.
-조 봉공이 검신(劒神)의 후인이었습니다!
과연 길고 긴 무림사, 세 명밖에 없었던 신(神)이라더니!
신의 흔적이 이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단 말인가!
한데 그런 조휘의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다급해 보였다.
“사담은 나중에 나누면 안 되겠습니까?”
조휘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남궁성찬이 정자에서 내려와 길을 잡았다.
“지금은 가주께서 정무를 볼 시간이다. 일단 가주전으로 가 보자꾸나.”
“예.”
* * *
남궁수가 일찍 정무를 마치고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후원을 찾았을 때, 남궁성찬과 조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 봉공?”
갑작스런 조휘의 방문에 잠시 놀라긴 했으나 남궁수는 이내 푸근한 얼굴을 했다.
“어찌 기별도 없이 이리 찾아오셨는가?”
“가주전의 위사에게 물어보니 후원으로 발걸음하신다기에 먼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휘가 정중하게 예를 다해 포권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궁수가 그런 조휘의 다급한 심정을 바로 알아차렸다.
“혹, 강서에 무슨 일이라도 터진 겐가?”
조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서의 남궁 무사들에게 아직 따로 소식을 받지 못하셨습니까?”
“여일포에 무슨 변고라도 생겼단 말인가!”
그때, 세가로 날아드는 전서구를 담당하고 있는 기별각의 무사가 정신없이 후원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가주님! 급보입니다!”
남궁수가 기별각의 무사가 손에 들고 있는 서찰의 색깔을 보며 크게 놀랐다.
적색(赤色).
큰 위기나 급변을 알릴 때만 사용하는 붉은 서찰이다.
“어서 가져오라!”
무사가 바로 부복하며 서찰을 내밀자 남궁수는 낚아채듯 서찰을 취하더니 곧 펼쳐 읽기 시작했다.
“아니!”
서찰을 읽는 그에게로 조휘의 잦아든 음성이 날아들었다.
“보시는 대로 흑천련 놈들이 조가대상회를 쳤습니다. 남궁의 무사들은 물론 저희 쪽도 인명 피해가 꽤 심각한 상황입니다.”
“허!”
흑천련은 간단한 조직이 아니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파인의 특성상 수많은 정보원들을 점조직으로 운용하고 있을 터.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조가대상회를 보호하고 있는 무사들이 남궁에서 왔다는 것을 끝까지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조휘는 세가의 무인들을 은밀하게 운용하자고 제안했지만, 오히려 남궁수는 그 반대로 그 점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조가대상회를 보호하고 있는 무사들이 남궁(南宮)이란 것을 알아차린 이상 무림맹과의 마찰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데 망설임 없이 공격을 하다니!
흑천련으로서도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안의 경중과 조휘의 성향을 종합해 봤을 때 예상되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혹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았는가?”
“…….”
조휘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 흑천련을 향한 공급을 끊은 지 채 이틀도 지나지 않아 이렇게 대대적으로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자신이었다.
가장 큰 실수는 그들에게 공급하던 해약을 너무 확고히 믿었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목숨이 조가대상회의 해약에 달려 있다고 믿는 이상 섣불리 쳐들어오지 못할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결전(決戰)을 다짐하리라고는 도저히 예상할 수가 없었던 것.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었다.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다 보면 오로지 앞만 보이는 법.”
남궁수의 음성은 조금씩 착잡해져 가고 있었다.
“옛 성현께서 이르기를, 실패해 보지 못한 자의 신념이 가장 무서운 법이라 했네.”
“…….”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조 봉공의 성정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네. 허나 그렇게 뒤를 보지 않고 달려가기엔 이제 그 어깨에 너무 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달려 있지 않은가?”
조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섣불리 공급을 끊은 자신의 서툰 결정이, 마신의 무공을 익힌 후 들뜬 자신감의 발로였을지도 모른다.
그 자신감이 가짜 해약 따위를 맹신하는 우를 범하게 만들었고, 삼패천(三覇天)에 속해 있는 흑천련을 깔보게 했다.
분명 좀 더 치밀하고, 사려 깊었어야 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한 인간이 모든 곳을 동시에 방비할 수는 없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남궁의 무사들이 죽었네.”
남궁수의 진득한 두 눈.
그의 힐난에 조휘는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제 그들에게 답을 할 차례지.”
어?
힐난이 아니란 말인가?
남궁수가 남녘을 바라보며 육중한 제왕(帝王)의 기도를 드러냈다.
“조 봉공, 이번 일로 부디 많은 성장을 이뤄 내길 바라네. 자네의 모든 결정이 수백, 수천의 생명을 담보로 하고 있다는 것을 꼭 명심하도록 하게.”
조휘가 깊이 예를 표했다.
“정문일침(頂門一針)과도 같은 말씀, 깊이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창천검협(蒼天劒俠).
겪으면 겪을수록 그의 별호에 어찌하여 협(俠)이 들어서 있는지 느끼게 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꾸지람을 들으니 조휘는 바위처럼 무거웠던 마음이 오히려 한결 가볍게 느껴진다.
마치 없었던 이정표가 생겨 버린 듯한 기이한 감정.
정도명가의 가르침이란 원래 이렇게 가슴을 울리는 건가.
“창룡단주.”
남궁수의 곁에 시립해 있던 창룡단주 남궁명이 예를 표했다.
“충! 하명하십시오!”
“대남궁세가, 강서로 출정한다. 흑천련과의 개전(開戰)을 준비하라.”
조휘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맹의 지원 없이 가능하겠습니까?”
일개 가문과 세력 간의 전투다.
승산이 그다지 많지 않은 싸움.
“맹의 지원이 없다고 누가 그러던가?”
“예?”
조가대상회가 맹령을 거부해서 자연적으로 남궁세가도 맹과 틀어진 것이 아니었던가?
“얼마 전 무황께서 본 세가에 다녀가셨네. 조가대상회에서 오는 길이라더군.”
“아…….”
조휘도 자신이 사천에 가 있을 때 무림맹주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강서에서 무엇을 보셨는지 갑자기 전폭적인 지원을 약조하시더군. 무림맹 하남지부의 천룡전위대(天龍戰衛隊)를 언제라도 동원할 수 있는 천룡기(天龍旗)를 주고 가셨지.”
갑자기 남궁수가 푸근하게 웃었다.
“백부님과 나, 그리고 조 봉공. 이렇게 세 명의 절대지경 무인과 본가의 최고 정예 무력단 셋. 거기에 무림맹의 천룡전위대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싸움이지. 난 누구처럼 무모하지 않다네.”
“…….”
이 양반은 다 좋은데 뒤끝과 잔소리가 좀 심하다.
조휘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당분간 전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음? 그게 무슨 소린가? 남궁보다 조가대상회가 더 위기가 아닌가?”
점점 조휘의 두 눈이 침울해졌다.
천천히 그간의 사정을 읊조리듯 이야기하는 조휘.
권사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장일룡의 딱한 사정에 남궁수도 제 일처럼 딱하게 생각했다.
“허어! 그런 일이!”
남궁수도 장일룡은 마음에 드는 후기지수였다.
강호의 젊은 후배를 대하면서 그렇게 기꺼운 마음이 들었던 것은 실로 오랜만.
“여래진토라…….”
“혹 아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월하림주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네만. 제법 알려진 이야기니 말이지.”
“그럼 그가 여래진토에 몸을 굴려 목숨을 구한 무사란 풍문이 사실이란 말입니까?”
남궁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말 그대로 풍문이네. 그저 무공을 익혀 젊음을 유지하고 여래불상을 목에 걸고 있다고 해서 그 무사와 동일인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다만 그는 다른 것으로 훨씬 유명했지.”
“어떤 것으로요?”
남궁수가 동편을 응시했다.
“그는 소림(少林)의 역사에 가장 많은 시주를 한 향화객이네. 그의 방문이 예정된 날이면 소림사가 나한들을 보내 맞이할 정도였지.”
조휘는 가볍게 놀랐다.
구파(九派)에 비하면 오대세가의 권위의식은 달빛 아래 반딧불.
그 엉덩이 무거운 소림사의 무승들, 그중에서도 나한(羅漢)의 칭호를 지닌 최고의 무승들이 일개 향화객을 맞이하러 시전에 나간다?
“도대체 얼마나 시주를 했길래 소림사의 그 고고한 나한들이 일개 향화객의 길잡이를 자처합니까?”
“백만 냥.”
조휘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가 평생을 걸쳐 시주한 금액이 금화 백만 냥에 달한다는 소문이 있었네.”
“아,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금화 백만 냥이라니!
합비와 강서를 지배하고 있는 상계의 절대자, 지금의 조휘로서도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는 금액이었다.
“자네도 정보상을 접해 봤다면 그들의 수입을 대충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는 자신의 거의 모든 재산을 소림사의 불전에 시주했네.”
“와…….”
금화 백만 냥이라면 지방 군벌이 군세(軍勢)를 일으킬 수도 있는 엄청난 돈이었다.
그런 엄청난 규모의 돈을 모조리 땡중들에게 바치다니!
새삼 소림사의 명성, 그 위력이 느껴진다.
“아니 도대체 왜요? 그런 엄청난 돈을 왜 모두 소림사에게?”
“그 이유를 모르니 신비한 것이지. 다만 그가 소림과 깊은 인연이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네.”
“음…….”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조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월하림과 접촉할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한데, 이어 들려온 남궁수의 음성은 조휘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맹이 그들을 추적한 세월이 벌써 삼십 년이 넘었네. 그들은 완벽히 강호에서 종적을 감추었지. 그들이 멸문지화를 당했다는 것이 이젠 거의 정설처럼 되었다네.”
“……멸문요?”
허탈한 마음에 멍해져 버린 조휘.
“여래진토가 목적이라면 오히려 소림사로 가 보게.”
“소림사는 왜……?”
남궁수가 기다란 미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일설이긴 하네만 말년에 후계자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한 월하림주가 끝내 소림에 입적(入寂)했다더군.”
소림사라.
조휘는 일단 얼굴부터 구겨졌다.
이놈의 중(僧)과 도사(道士)들은 너무 고고하다.
개중에서도 소림이라면 중원의 무공이 모두 자신들로부터 나왔다는 천하공부출소림(天下功夫出少林)의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문파가 아닌가.
그런 엄격, 진지, 근엄, 도도한 중들을 상대하려니 벌써부터 조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소림의 수뇌들이 절 만나 주겠습니까?”
“자네는 절대경의 무위를 지닌 본가의 봉공이네. 게다가 당금의 상계(商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조가대상회의 회장이기도 하지. 그리고…….”
남궁수가 조휘의 소매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소림은 오는 향화객을 마다하지 않는다네.”
분명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자신의 소매 속 전낭.
조휘의 얼굴이 더욱 구겨진다.
“아니 무슨 중들이 그리도 돈을 밝힌단 말입니까?”
“대부분의 불가와 도가들, 즉 구대문파의 특성이 본디 그러하네.”
구파는 오대세가처럼 적극적으로 세속에 얽혀 사업을 하지 않는다.
불가의 가르침인 공(空)과 도가의 가르침인 무위(無爲)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고 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때문에 속세의 사람들과 어울려 돈을 번다는 것은, 재물을 탐하는 마음인 물욕(物慾)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이니 불가의 계율에 위배되는 행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들로서는 속가제자들의 무관에서 들어오는 시주나, 향화객들의 불전(佛錢)에만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수천 명의 불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소림.
아무리 검소한 삶을 불제자들에게 다그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기에 그들이 하루에 짓는 밥의 양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거기에 정례적으로 열리는 각종 봉축(奉祝) 행사에 소요되는 경비, 몰려드는 향화객들에게 대접하는 공양 등 소림의 명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품위 유지비도 장난이 아닌 것이다.
“음…….”
하지만 장일룡.
한 사람, 무인의 생명이 달린 일에 돈을 따져서야 되겠는가.
소림의 땡중들이 돈을 그리 밝힌다면 어쩌면 더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조휘가 다시 남궁수를 응시했다.
“지금 바로 출정하실 겁니까?”
“걸어오는 싸움을 피한다는 건 제왕의 도리가 아니지.”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강서로 돌아오는 날까지 교전을 피해 주십시오.”
“음…….”
죽어 간 가솔들의 원혼을 달래는 일.
참담한 마음, 그 복수심을 잠시 누그러뜨리란 말일진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부탁인지 조휘로서도 모르지 않았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남궁수는 오히려 그런 조휘의 마음이 기꺼웠다.
자신이 직접 전장에 합류함으로써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먼저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뛰어난 능력에 도취되기는 쉬우나, 어떤 상황에서도 ‘책임’을 자각하는 것은 쉽지 않은 법이다. 이번 일이 그의 또 다른 성장을 이끌어 낸 계기가 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아! 그리고 또 하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장일룡의 위중한 상세 때문에 결국은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것.
“저희 상회에 이여송이라는 총관이 계십니다. 지금 실종 상태이신데…….”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남궁수.
“나도 안면이 있네. 그는 자네의 철방을 운영하고 있는 인사가 아닌가?”
세가에 찾아와 개천운차의 지붕을 개폐하는 방법, 각종 편의 사양들을 설명하고 점검해 주던 이 총관을 남궁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내 찾아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예를 보이던 조휘.
이어 그가 허리에 차고 있던 철검이 절로 검집을 빠져나와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탓!
사뿐하게 검에 오른 조휘가 다시 한 번 예를 다해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포양호에서 뵙겠습니다.”
쏴아아아아아!
허공을 가르는 철검의 소리가 맹렬히 들려오며 곧 아득히 멀어지는 조휘.
남궁수의 입이 그대로 쩍 하고 벌어졌다.
“아, 아니 저, 저게 무슨……!”
과거보다 더욱 강대해진 그의 의념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무려 어검비행이라니!
남궁성찬이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허허…… 검신의 후예라.”
그런 조휘의 엄청난 경지가 남궁에게 홍복(洪福)이 될지 화(禍)로 남을지 아직은 모르는 일이었다.
* * *
하남성(河南省) 등봉현(登封縣).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
소실봉으로 향하는 중턱, 그 기다란 능선에 자리 잡은 소림사는 화산과는 또 분위기가 달랐다.
화산이 높이 솟아오른 첨봉과 천혜의 협곡으로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들게 만들었다면, 숭산은 너르고 부드러운 어미의 품 같은 자애로운 느낌이 있었다.
인간을, 중생을 한 아름 포용하는 듯한 자연.
중원의 산을 경험하면 할수록, 중과 도사들이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산(山)에 모여 사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조휘는 기다랗게 늘어져 있는 향화객들의 행렬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다란 행렬의 끝, 그곳에 소림사의 산문은 보이지도 않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불전(佛錢)을 가져다 바치는 데도 소림의 중들은 왜 그렇게 돈을 밝힌단 말인가.
행렬의 바깥쪽, 깊게 우거진 수풀에 착지한 조휘가 검을 허리에 패용하고 다시 한 번 행렬을 살핀다.
그제야 조휘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소림사를 향하는 향화객들은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
그나마 행색이 나은 자들이 목피근이나 한 줌의 공양미를 들고 있을 뿐, 대부분의 향화객들은 헌향(獻香)하기 위해 값싼 향만 하나 달랑 들고 있었다.
더구나 그 행렬의 사이사이에는 거지로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필시 향화객들에게 대접하는 공양, 즉 절밥을 먹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일 터.
그런 그들의 면면을 살핀 조휘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적자네. 반드시 적자야.’
돌아가신 아버지의 내세가 평안하길 기원하고, 어머니의 병마가 물러나길 간절히 바라며, 태어나는 자식을 축원하기 위해 몰려드는 향화객들을 어찌 내쫓을 수 있겠는가.
불가의 성지를 자처하는 소림, 그 명성이 건재한 이상 오는 향화객들을 마다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그저 한 번 살핀 것만으로도 조휘는 소림의 고충이 느껴졌다.
장일룡을 생각하면 조급한 마음이 가득 차올랐지만 그렇다고 오랫동안 배를 곯은 자들을 두고 새치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어쩔 수 없이 조휘는 기다란 행렬의 마지막에 섰다.
그러자 향화객들이 일제히 조휘를 쳐다봤다.
추레한 행색의 자신들과는 달리 조휘가 화려한 비단 무복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눈에 봐도 귀공자의 태가 한껏 묻어나고 있는데 옆구리에 철검까지 차고 있으니 누가 봐도 강호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상황.
조휘의 앞에 서 있던 아낙네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입을 연다.
“산문으로 바로 오르시지요!”
“마, 맞수. 공자님 같은 귀한 분이 왜 저희 같은 자들과 함께 줄을…….”
조휘는 다소 당황했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지금까지 강호인들이 어떻게 처신해 왔는지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현대인인 자신으로서는 신분에 상관없이 줄을 서는 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사정이 있어 마음이 급하다고 해도 그것은 당연히 지켜야 할 질서.
하지만 이곳 중원은 법보다는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강호인이나 귀족들은 하층민들을 결코 배려하지 않는 것이다.
“아닙니다. 줄을 서겠습니다.”
오기가 치민 조휘.
여타의 강호인들처럼 무공을 익혔다 하여 다른 이들을 무시한다면 현대인으로서의 자신의 신념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는데…….”
강호인이 자신들과 함께 줄을 서겠다고 하니 한껏 이상한 모양.
그때 그들 곁으로 한 무리의 무승(武僧)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마에 계인(戒印)이 선명한 것이 필시 소림사의 무승들.
‘호오…….’
조휘는 가볍게 놀랐다.
외공(外功)의 원조 소림사답게 땀에 흠뻑 젖어 번들거리고 있는 그들의 몸이 하나같이 강건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들 중 하나가 조휘를 흘낏 쳐다보니 정중하게 한 손으로 합장했다.
“아미타불, 혹 시주께서는 어디서 오신 소협이시오?”
조휘는 화답으로 두 손을 모아 합장하려다 다급히 한 손을 내렸다.
다른 불문의 승려들은 모두 합장을 했지만 오직 소림의 예법만은 다르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기 때문이다.
소림의 위대한 불자 혜가(慧可).
눈이 펑펑 쏟아지던 그 옛날, 그는 불존의 가르침을 간절히 바랐지만 끝끝내 달마선사는 거부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혜가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숨에 자신의 팔을 잘라 결의를 보였다.
지금 이곳에 붉은 눈이 내리지 않는 이상 결코 제자로 받아 줄 수 없다던 달마선사.
하지만 그런 결의에 깊은 감동을 받은 그는 결국 혜가를 제자로 거둘 수밖에 없었다.
불존으로 추앙받는 외팔이 혜가 스님 이후, 소림은 그를 기리기 위해 한 손으로 합장을 했다.
조휘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남궁세가에서 왔습니다.”
조휘에게 질문하던 무승이 크게 놀란 얼굴을 했다.
“아니, 남궁세가의 검수께서 어찌 산문에 오르지 않고 이곳에 줄을 서고 계십니까?”
조휘의 어색했던 얼굴이 조금씩 씁쓸하게 변해 갔다.
“저보다 훨씬 먼저 도착한 사람들입니다. 모두 각자의 사정으로 헌향하기 위해 이 험한 산을 올랐는데, 제가 아무리 마음이 급한들 오랫동안 배를 곯으며 기다린 사람들을 앞서야 되겠습니까.”
“그래도 세가에서 오신 소협께서 어찌…….”
“아미타불!”
불문의 사자후가 가미된 강건한 음성이 들려오자 조휘가 고개를 꺾어 그를 바라보았다.
“범승 사조님을 뵙습니다!”
“사조님을 뵙습니다!”
일제히 한 손으로 합장하는 무승들.
고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후학들의 인사를 받아 주던 범승대사(梵乘大師)가 다시 물끄러미 조휘를 응시하고 있었다.
“허허허…….”
조휘의 대답은 범승대사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었다.
조휘의 음성이 마치 중생을 보듬는 불존의 마음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아미타불, 시주는 본 사에 어인 용무로 오셨소이까.”
자애로운 미소.
조휘가 한 손 합장으로 예를 표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조가대상회의 회장 조휘라고 합니다.”
“음?”
하남과 안휘는 성의 경계가 맞닿아 있어 중원 전체로 치면 지척이라고 할 수 있었다.
범승대사도 연일 명성이 높아지는 조가대상회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미타불, 조가대상회의 영웅이셨구려. 노납 역시 그 명성을 익히 흠모하고 있었소. 환영하외다.”
“감사합니다.”
범승대사는 마주 합장하면서도 기이한 눈초리를 빛내고 있었다.
무공을 익힌 태는 분명히 선연한데 그 경지를 도저히 살필 수 없었기 때문.
‘기이한 일이로고.’
기감을 높여 읽고자 할 때면 어김없이 내기가 흩어지고 말았다.
이건 마치 방장(方丈)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럴 리가……?’
소림방장 공천대사(空天大師)가 어떤 인물인가?
지닌 무위가 칠무좌에 근접한 일파의 장문이다.
아직 이립도 안 되어 보이는 눈앞의 청년이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닌 것이다.
‘아놔.’
조휘는 조휘대로 당황해하고 있었다.
뭔 처음 보는 중이 이리도 노골적으로 기파를 보내며 탐색하려 들다니!
물론 의념으로 죄다 흩어 놓았지만 이 중은 도무지 포기를 몰랐다.
조휘가 약간은 짜증 섞인 투로 입을 열었다.
“대사님? 뭐 하세요?”
“아미타불, 아무것도 아니외다.”
이 뻔뻔한 중 좀 보소.
실컷 탐색에 열 올리고 나서도 오리발 내밀듯 태연자약하게 불호를 외다니.
“아미타불, 그만 실례했소이다. 노납은 이만…… 헉!”
갑자기 범승대사가 뒤로 물러나며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그의 경악한 시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조휘의 목 부근.
“그, 그, 귀물은……!”
손에 들고 있던 불장마저 떨어뜨리며 얼어붙고 마는 범승대사.
조휘가 자신의 청옥 목걸이를 꺼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걸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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