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00
100. 준비 (3)
······신기한 기억이 하나 있다.
내가 기차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게 뭐가 그렇게 신기하냐고?
한서호였을 때가 아니라, 브리너로서 기차를 보았다는 거다. 바로, 런던에서!
이는 현대인들이 고전파 음악가들이라 하면 굉장히 옛날 사람이라 생각하는 경향과는 달리, 생각보다 그들이 우리와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 살았다는 걸 반증한다.
200년이란 시간은, 사실 역사로 본다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니까.
하물며, 일 년. 아니, 반년이란 시간을 얼마나 짧은 걸까?
시간이란 건 그토록 빠르다.
문명의 이기를 뛰어넘은, 마치 괴물처럼 보였던 기차. 녀석이 보여주던 속도보다도 더.
······12살이라며 좋아하던 내가 어느덧 성인이 되기 직전이잖나.
그렇게, 날씨가 따뜻해지는가 싶더니 금세 아스팔트가 달궈질 정도가 되었다.
덥다. 적어도 나그네의 옷을 벗긴 게 어째서 태양일 수 있었는진 확실히 알 것 같다.
그리고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학교 분위기도 점점 과열되어간다.
생전 공부라곤 담쌓은 친구들이 갑자기 두꺼운 입시자료집을 가져와 서너 번째 넘기는 모습만 봐도 그렇다.
드르륵—.
“흐아······.”
점심시간. 교무실로 불려갔던 아이가 돌아오자, 아이들의 시선이 쪼르르 따라붙었다.
“뭐라셔?”
“그냥 지금 성적으로는 컴공 쪽은 무리고, 신소재 가면 철강 말고 반도체 쪽도······.”
회귀 전, 저 대열에 합류했던 입장으로써 저 부담감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기에, 마냥 홀가분하지만은 않다.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다. 이쪽도 타고 있는 건 마찬가지거든.
어제부터 머릴 쥐어뜯던 양한길이 무념무상인 표정의 이호익에게 묻는다.
“호익아.”
“응?”
“넌 상담 때 담임선생님이 뭐라셨어?”
“뭐가 하고 싶냐고 하시길래, 고민 중이라고 했지.”
“그랬더니?”
“찬찬히 고민해보래.”
“그래서 고민 중?”
이호익이 끄덕인다. 덩달아 양한길도 주억거렸다. 자긴 어쩌냐며 음울해 하는 목소리까지 들려오니 확 미래를 스포하고 싶어진다.
양한길, 넌 번듯한 회사에서 네가 원했던 대로 평범하게 아주 잘 먹고 살고.
이호익, 넌 기획사 매니저가 된다고. 그것도 아주 유능한.
이른 고민이란 걸, 저땐 모른다.
막연한 불안감이 당연한 시기라서.
물론 그 고민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낙관적으로 살기엔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지 않나.
다만, 그게 부담에 짓눌려야 하는 이유인가 싶은 거지.
드르륵—.
다시 한번 문이 열리며 채이연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온다. 자신의 자리를 지나쳐 곧장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불려갔던 이들 중 드물게 밝은 표정이다.
“서호야, 이제 네가 차례야.”
“네가 우리 반 마지막인가?”
“그런 것 같은데?”
덤덤하게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앞에서 학과별 경쟁률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반장이 부러운 눈으로 날 본다.
“어느 대학 플랜카드 걸면 되냐고 물어보시는 거 아냐?”
#
잠시 후.
한서호가 있는 3반 담임이 머릴 이쪽저쪽으로 기울이며 상담실을 빠져나와 바로 옆 교무실로 들어섰다.
진이 다 빠진다. 안개를 좀 걷어내려고 반 아이들과 상담을 했는데, 어째 안개가 더 짙어진 느낌이다. 고민이 많아지겠는걸······.
“휴. 힘드네.”
“왔어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자 옆자리 1반 선생이 슬쩍 물어왔다.
“반 애들 상담은 다 끝난 거예요?”
“일단은요.”
“깝깝~하죠?”
“매년 느끼는 거지만, 착찹하네요. 일단 과를 정해야 하니 뭘 하고 싶냐고 물어보긴 해야 하는데, 애들이 어떻게 알겠어요. 이런 곳에 갇혀만 있었으니 지금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건 당연한데 말이죠.”
그렇기에 고3 담임 선생들에게 슬슬 수시 공지가 뜨고 있는 여름은 특히나 힘든 계절이었다.
대학 허들이 정해지고, 그 앞에 주저앉는 학생들이 허다하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지만.
“그럼 서호도 했겠네요?”
···지금 거론된 한서호가 그랬고, 채이연도 마찬가지.
둘은 확실한 진로가 있었다. 그리고 실력도 있었다. 한서호는 말할 것도 없고, 채이연도 천만배우라는 화려한 이력이 있지.
“이연인 한국예대에 지원한대요?”
교무실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답게 1반 선생의 질문을 따라 시선들이 줄줄이 딸려온다.
“네, 그럴 것 같아요.”
“요즘은 이미 성공한 배우면 굳이 대학 안 가기도 하고 그러지 않나요?”
“아역으로 연기 수업도 안 받고 시작한 거라 꼭 다니고 싶나 봐요.”
“아, 그럴 순 있겠네요. 그럼, 서호는요?”
이쪽은 더하다. 시선들이 더욱 반짝인다.
요즘 선생들은 물론이고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이 학교에 최초로 해외 명문 대학 이름이 플랜카드로 걸리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들려올 정도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글쎄요······.”
“음? 서호가 어디 간다고 별말 없었어요?”
“아직 확정은 못 지었나 봐요. 부모님이랑 얘기해보겠다네요.”
“당연히 해외 명문대로 가겠죠? 줄리어드? 버클리? 아니면 유럽쪽이려나?”
“골고루······.”
“아, 골고루 지원해보겠대요?”
“아뇨, 서호가 가겠다는 게 아니라······.”
담임 선생이 고갤 저었다. 그리고 눈을 끔뻑이며 좀 전의 상담을 떠올렸다.
분명히······.
“자기들 학교로 오라고 연락이 왔대요. 방금 말씀하신 그 학교들이.”
“버클리가요?”
“네.”
“주, 줄리어드는요?”
“거기서도요.”
“또 있어요?”
“많았어요. 여기—.”
담임이 가져온 파일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내려다본다.
“어머, 어머. 이게 지금 다 몇 개야?”
“사실 이것도 적다가 포기했는데······.”
몰려든 선생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버클리나 줄리어드처럼 정말 유명한 음대가 아니고서야 태반이 모르는 학교였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 많은, 아니 이것보다 더 많은 대학들이 자기네 학교로 와달라고 러브콜을 보냈다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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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에선 귀하의 음악적 발전 가능성을 인상 깊게 보았기에 입학을 제안하며 입학과 동시에 장학생으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을······.]학교의 문장이 옅게 보이는 편지를 읽으며 다른 손으론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붉은색 실링이 오랜만이라 나름 감동하고 있는 중이다. 확실히 유럽 학교라 그런지, 미국과 성향이 다르다. 그쪽은 대부분 이메일이던데 말이지.
편지를 내게 준 아버지가 식탁 앞에 앉으며 말했다.
“집 주소를 모르니 회사로 보냈더라고.”
“다행이네요. 모 대학처럼 아예 날 원한다고 기사를 띄우진 않아서.”
그것도 나한테 직접적인 연락을 주기도 전에 말이다. 무슨 권유를 그런 식으로 하나.
뒤이어 물기 묻은 과일을 식탁에 올린 엄마도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에 가족 회의가 시작되었다.
······나는 잠자코 눈치만 보다가 슬그머니 물었다.
“두 분 생각은 어떠세요?”
“우린 네 생각이 가장 중요해. 어떤 게 가장 너에게 도움 될지는 네가 가장 잘 알 테니까.”
“그럼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일단, 전 유학은 가고 싶지 않아요.”
혹시라도 유학을 권할까. 얼른 선수를 쳤다.
부모님의 표정을 살폈다. 생각보다 충격을 받았거나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묻는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가족하고 몇 년씩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서요.”
그러자 엄마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더니 두 분 모두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왜요? 진심인데···.”
너무 어린애 같은 생각처럼 보인 걸까.
그런 게 아니라 전생의 트라우마 같은 이유가 있는 건데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설득할 준비를 하는데, 전혀 의외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우리도. 우리도 그런 얘길 했거든.”
“···?”
“모르겠다. 우리가 부모로서 이상한 건진 모르겠지만, 왠지 엄마도 나도 몇 년씩 떨어지는 건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우리가 먼저 말하면 네가 유학을 가고 싶은데도 못 가고 부담 느낄까 봐 먼저 말해보라고 한 건데, 똑같은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네.”
한동안 웃던 부모님이 질문을 바꿨다.
“그럼 어느 학교에 갈 생각이니?”
나는 딱히 고민하지 않았다. 애초에 마음을 정했었으니까.
“한국예대요.”
“거긴 아직 입학 권유도 안 왔잖아?”
“그럼, 수시를 봐야겠죠. 사실 좀 궁금하기도 해요.”
회귀 전에 수시를 보기야 했지만(-두 번 할 정도로 좋은 기억도 아니지만), 그땐 클래식은 커녕 음악과도 관계가 전혀 없었잖나.
정확히는 실기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게 맞겠다.
“그래. 네 뜻대로 하려무나.”
부모님도 허락하셨겠다, 이제 마음이 좀 후련해진다.
“아 그리고요.”
이왕 허락받은 김에···.
“허락 맡을 게 하나 더 있어요.”
얼른 방으로 들어가 노트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독어로 쓴 과거 일기 말고, 여행 계획을 미리 짜 둔 노트였다.
가져와 부모님께 건네자 두 분은 노트를 가운데에 펼치고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나는 과일을 하나씩 입에 넣으며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러니까, 대학 입학하기 전에 한 달 정도 다녀오고 싶다는 거지? 그것도 혼자서?”
“네.”
“친구들이랑 같이 가는 건 싫고?”
“싫다기보단, 혼자 가는 게 목표라서요.”
가서 돌아다녀야 할 곳이 많지.
빅벤 보고, 에펠탑 보고···그렇게 흔히 말하는 관광을 할 시간이 없었다.
다시 끄덕이기만 하며 노트를 확인하는 부모님.
이윽고, 대답이 들려왔다.
“다녀와.”
“정말요?”
“그래. 유럽 여행 가고 싶어서 영어에 다른 나라 언어까지 공부했다며.”
그러면서 노트를 한 번에 주르륵—넘기며 감탄한다.
“게다가 이 정도로 계획을 짜놨으면 가는 게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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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도, 줄리어드도, 바드도, 심지어 파리 고등음악원까지도 모두 러브콜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뺏길까 배가 아파?”
“그런 건 아니지만, 저희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걸로 갑론을박이 좀 있습니다.”
“왜? 대한민국 최고의 예술 대학교가 입학을 읍소하는 것 같아서 교수들이 자존심이 상한데?”
윤 교수의 입에서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한국에서 음악 교육을 하려다 권위적인 대학들에게 데인 게 많은 윤 교수였기에 그런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자 건너편에 앉은 그의 제자.
한국예술대학 최연소 교수, 이종범이 고개를 저었다.
“교수들은 전혀 안 그렇습니다. 누구보다 한서호가 얼마나 대단한지 아는 양반들인데요. 오히려 그런 콧대는 해외 명문 대학들이 더 높죠.”
“근데?”
“입학사정관이 문제예요. 굳이? 라는 반응입니다. 어차피 해외로 나갈 학생을 못 먹는 감 찔러보는 것도 아니고 굳이 권유해야 하냐는 거죠. 학교 측도 그 말에 동조하는 분위기고요.”
“그래서 넌 한서호를 잡고 싶다는 거야?”
“마음은 그런데, 머린 또 복잡해요.”
윤 교수가 팔짱을 끼고 젊은 교수의 변덕을 들어주었다.
“만약에라도 한서호가 한국예술대학으로 온다 해도. 그게 그 아이의 발목을 잡게 될까 봐서요.”
“발목을 잡는다라······.”
“학교 다닐 때, 나름 천재라 불렸던 녀석들 모두 유학 가서 지금은 유명한 오케스트라에 있잖아요. 교수님처럼 교육에 꿈을 품고 좋은 자리 마다하기엔 음악가로서 최고의 환경이 거기에 있으니까요.”
“그래서 양가감정이 든다?”
“네.”
주억이는 이종범 교수를 보면서 윤 교수가 픽 하고 웃었다.
한서호는 한국예대를 가려 한다.
그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안타까워하지도.
왜 그런 선택을 했냐고 추궁하지도 않았다.
그건 자신 같은 범인의 생각일 뿐이니까.
‘범인이라고 하니, 좀 억울해지네.’
나름 수많은 오케스트라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셀린 교수가 있는 바드 대학의 교수직 권유까지 잘라내고 한국으로 들어온 건데 말이지.
그건 눈앞의 제자도 마찬가지일 터다.
한국 예술 대학교 최연소 대학교수 아닌가.
남들은 괄목할 만한 위치.
하지만, 진정 천재는 따로 있다.
그리고 녀석이라면, 대학의 질 따위에 좌지우지될 리 없었다.
그렇기에 윤 교수는 걱정보단 기대할 수밖에 없다.
······녀석이 대학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근데, 네가 말한 천재들. 다 내가 가르쳤던 녀석들이잖아?”
“그랬죠, 하하.”
“그렇다면 이 교수, 넌 천재를 본 적 없는 거야.”
“네?”
되묻는 이종범 교수에게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애초에 천재는 발목을 잡힐 이유가 없어. 이미 날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발목을 잡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