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20
120. 행방 (6)
“2014년에 모차르트 자필 악보가 헝가리 도서관에서 아주 우연히 발견되었었지. 관리인 중 한 명이 고서들 사이에서 찾았다더군.”
사서의 뒤를 따라가며 체코 필하모닉의 마에스트로, 데이빗이 갈색 머릴 쓸어 넘기며 말했다.
사실 이곳에 있는 이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사건이었다. 워낙에 유명했던데다가 그 악보의 이름이 무려 ‘터키행진곡’이었으니까.
“그때와 같은 일이 오늘도 있을까?”
데이빗이 말꼬릴 올리자, 거장들이 큰 기대 없는 얼굴로 웃었다.
저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일페르소의 일기에 대해 말해주긴 했지만, 베토벤이니 모차르트니 그런 얘긴 오히려 안 믿을 것 같아 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것만으로 도서관을 뒤지는 이 황당한 짓(?)에 동참해주는 게 신기한 일이지.
심지어 세계적 거장이라 불리는 양반들이.
그만큼 무료했던 건지, 손자뻘 되는 아이랑 여흥을 즐기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혼자선 막막했던 나에겐 아주 잘된 일이었다.
앞서가던 알렉스가 덧붙였다.
“아는 녀석이 관련된 일을 하고 있어서 물어봤는데, 브리너 백작 같은 경우엔 음악가들과 주고받은 편지 몇 장이 전부라 학자들 사이에서도 그다지 인기가 많은 인물은 아니더라고요. 물론 모차르트까진 아니어도, 나름 이름있는 음악가의 헌정곡들이 발견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어 보이진 않아. 어제 서호가 찾은 일기장만 봐도.”
프랑코의 말에 바이올린 거장 니콜라이가 신기한 눈빛으로 내 쪽을 돌아본다.
“그걸 어떻게 찾았대. 딱 거기에 있는 걸 알았던 사람처럼.”
“하긴, 그게 브리너 백작의 집사가 쓴 일기일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하겠어. 몇 장 넘기다 뭐야, 하고 덮어버리지.”
동조하는 알렉스에 나조차도 웃으며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초반엔 그저 상심하여 술을 마신다거나, 고향에서 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밖에 없었으니.
한 권을 끝까지 읽지 않는다면 결코 모를 사실이었다. 나야 일페르소의 필체가 확실하니 마냥 감격하며 읽었지만 말이다.
“여깁니다.”
앞장서던 사서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가 카드키로 열고 들어간 곳은 천장고가 높은 방.
오히려 본관보다 더 낡은 별관 느낌이 나지만, 여러 현대적인 기계들이 눈에 띄고, 피부에 닿는 습도가 뽀송뽀송한 걸 보니 확실히 관리 중인 장소라는 게 티가 난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 나가실 때 사인 한 번씩만 좀······.”
“네, 알겠습니다.”
사서가 흡족스러운 얼굴로 입구 쪽 의자에 앉았다. 관리인 한 명이 반드시 동행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시선을 돌려 고서(古書)들이 가득한 책장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공간이 작은 게 위안이랄까.
“흩어져서 찾을까요?”
“그게 좋겠군.”
느긋한 발걸음으로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는 거장들을 보며 입꼬릴 올렸다. 그리고 나도 얼른 빈 책장으로 달려들어 눈을 굴린다.
목표는, 브리너의 헌정곡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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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훑는데, 손과 눈만 있으면 충분했고.
입과 귀는 자유로우니 다들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래도 찾는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자연스레 그런 종류의 대화가 나온다.
“헌정곡으로 가장 음악적 호사를 누린 건 루돌프 대공 아닌가?”
“그렇지. 유럽 최고의 후원자잖나. 베토벤에게 받은 헌정곡만 해도 몇 곡이야. 그만큼 많이 투자를 했겠지. 그 양반 베토벤한테 과외도 받았다더만.”
데이빗의 말에 프랑코가 끄덕였다.
뒤이어 베토벤이라면 빠질 수 없는 알버트가 한목소리 거들었다.
“그건 부럽군···.”
“누가 베토벤 신봉자 아니랄까 봐.”
“그나저나, 이거 꽤 흥미롭네. 별의별 게 다 있어. 이건 또 뭐지. 족보 같은데.”
“재밌어. 내가 오래된 책을 뒤지고 있다니.”
퍽 즐거운 목소리들이었다. 보물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편, 건너편 책장에선 동년배인 알렉스와 니콜라이가 책장을 살피는 중이었다.
“이건, 영수증 같은 건가?”
“악보 찾으라니까 뭐해.”
니콜라이의 물음에 알렉스가 핀잔을 준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질문을 던졌다.
“50굴···굴덴. 50굴덴이면 어느 정도지?”
“시대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다르겠죠?”
내가 두툼한 고서 한 권을 빼내며 말하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1797년.”
“그쯤이면 꽤 큰 금액인데요. 일반 시민이 몇 달은 먹고 살 수 있는.”
그렇게 말하며 방금 꺼낸 책을 펼친다.
어느 주점의 가계부였다. 외상 내역까지 있네.
“넌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야? 하여간 신기하다니까. 어디 보자, 받은 사람이 페르난도 소르?”
대충 훑고서 가계부를 덮는데, 니콜라이의 말에 몸이 뻣뻣해졌다.
“누구요?”
“페르난도 소르.”
“······보낸 이는요?”
“이거 보는 법을 잘 몰라서. 어디에 쓰여 있는 거야?”
“거기 아래쪽에 문양하고 사인이······.”
가계부를 도로 꽂고서 다가갔다.
니콜라이 손에 들린 누렇게 바랜 낱장의 종이를 발견하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이건가? 프리···드리히?”
프리드리히 가문의 문양과, 일페르소가 멋들어지게 적어놓은 브리너의 사인.
분명, 후원증서였다. 일페르소가 악보뿐만 아니라 이것들까지 기증한 건가?
“이거 어딨었어요?”
“음? 이거 저쪽 구석에서.”
얼른 그를 지나쳐 가리킨 쪽으로 다가섰다. 뒤쪽에선 갸웃거리던 니콜라이가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가만 프리드리히. 프리드리히. 브리너 프리드리히!? 그거 그 백작 아냐!?”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손에 후원증서가 뭉텅이로 딸려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 사이에서 하나씩 발견되는 노랗게 변색된 악보들.
“이게 다······.”
어느새 뒤쪽으로 다가온 거장들.
그들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내 손에 들린 악보들을 내려다본다.
“잠깐 줘보겠나.”
프랑코가 두툼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조심스레 악보들을 건넸다.
행여 생채기가 날 새라 천천히 악보를 넘기던 프랑코가 한 악보에서 미간을 좁혔다.
“이게 대체 어느 나라 글자야······.”
손에 힘을 아예 안 주고 쓴 듯한 필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악필.
옆에서 뜨겁게 느껴지는 시선에 프랑코가 고갤 돌렸다.
알버트가 악보를 빤히 보고 있었다.
이게 웬 악보들이냐, 하는 눈빛으로 흥미로워하는 다른 거장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이 글씨······.”
설마, 설마 하던 눈빛이 아주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경악으로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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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뮌헨이야. 지금 가면 밤에 도착한다니까?”
-기차로 오면 되잖나.
“아니,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래?”
이제 막 연구실에서 나가려던 밀란 교수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핸드폰을 고쳐잡았다.
건너편 상대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최근 들어 만하임에 레스토랑을 차린 괴짜. 알렉스였다.
-여기 도서관에서, 악보를 발견했어.
“작곡가가 누군데?”
-그건 안 쓰여 있고.
밀란 교수가 그럼 그렇지란 표정으로 가방 끈을 다시 잡았다. 얼른 퇴근해서 허기부터 달래야겠다.
“그런 거, 오래된 도서관에서 흔한 일인 거 자네도 잘 알잖아. 터키행진곡 악보 발견된 이후로 우리한테 그런 연락이 얼마나 많이 오는 줄 알아?”
-알지. 결국, 다 허탕이었다는 것도. 근데 이번엔 좀 다를지도 모르겠어.
“흐음······악보가 몇 장인데?
-좀 많아. 총 스물여섯 곡이거든.
“응? 뭐가 그렇게나 많아?”
더 기대가 안 되네······.
살짝 놀라면서도 고개를 젓는 밀란 교수였다.
-근데, 필체가 다 달라. 그리고 그중 하나가······.
아무 생각 없이 차 키를 챙기는데, 알렉스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베토벤 곡일 수도 있다는 의견이 나왔어.
“뭐?”
기가 찼다. 시골의 오래된 도서관에서 베토벤의 악보라니!
“대체 누가 그래?”
-알버트님이.
알버트?
순간 밀란 교수의 머릿속에 알버트란 이름을 가진 이들이 떠올랐다. 지난번 학회에서 만난 사회자나, 지나가다 들른 자동차 판매장의 딜러 같은.
당연히 대부분이 알렉스가 알 리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설마. 뉴욕필의 알버트 어거스트를 얘기하는 건—.”
“맞아. 그리고 여기에 그분만 있는 것도 아니야.”
알렉스가 줄줄이 여러 이름을 읊었다. 독일의 거장 프랑코부터, 얼마 전 인종차별 문제로 유럽을 발칵 뒤집어 놓은 한서호까지.
도무지 계산이 안 되는 난제를 만난 수학자의 마음이 이럴까.
밀란 교수는 가장 근본적인 궁금증이 떠올랐다.
“아니, 그 사람들이 왜 전부 거기에 있는 건데?”
-시작은 레스토랑 오픈 기념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음악 얘기가 즐거워서.
“그게 뭔소리냐······.”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되물으며, 밀란 교수가 겉옷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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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의 지인 찬스라고 해야 하나.
음악 분야의 고서를 연구하는 밀란 교수 덕분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가 한달음에 달려왔고, 도서관과 연계해 모든 악보를 가지고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먼저 악보가 언제 만들어진 건지부터 제대로 확인 후에 더욱 세밀하게 분석할 수 있는 곳에 의뢰가 갈 거라고···.
분명 도서관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흥미롭긴 해도 별 기대감은 없어 보였던 거장들의 얼굴이 은은하게 상기되었다. 그들은 벌써부터 분석 결과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분석 결과가 어떨지 이미 알고 있다. 발견된 악보 중 몇몇 개는 이미 생전에 받아 외우고 있던 곡이었고, 그렇기에 악보들이 모두 내 헌정곡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네.’
심장이 요동친다. 그 위대한 대가들의 곡들이 드디어 긴 잠에서 깨어나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 아름다운 곡들을, 우리가 연주할 수 있게 될 테니까.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여느 때처럼 라운지에 모여 저녁을 먹었다. 하지만 여느 때와는 달리 금세 식사가 끝나버렸고, 나는 지금 호텔 연회장에 와 있다.
다들 악보에 대해 얘기만 하다가 결국 알버트가 못 참고 호텔 측에 얘기해 연회장에 있는 피아노를 빌려버린 거다.
······정말이지, 이 양반들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거장들이 피아노 앞에 모여 오선지 하나를 가져다 놓고 씨름 중이다. 베토벤으로 추정되는 악보를 옮겨적으려는 거다. 하지만 이미 악보는 밀란 교수가 가져갔으니 믿을 건 머리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기 다음이 뭐였지?”
“F랑 B 아니었나?”
“그런 느낌이었다고? 아닌 거 같은데······.”
“급하게 외운다고 외웠는데, 이 이후가 기억이 안 나는군.”
“쩝. 피아노를 치면서 암보했으면 어느 정도 외울 수 있었을 텐데······.”
이마를 짚으며 고뇌하는 거장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침묵 위에 말을 얹었다.
“그 마디 전체가, 이전 프레이즈의 변형이었어요. 4도 하행 후에 6도 도약.”
거장들의 고개가 거의 동시에 내 쪽으로 돌았다.
멍한 표정들 사이에서 알버트가 건반을 눌러본다.
베토벤 특유의 정석적인 듯 예측 불가능한 흐름.
알버트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내게 물었다.
“그새 외운 건가? 아니··· 어디까지 외운 거야?”
“전부 다요.”
그러자 니콜라이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다른 곡까지?”
“에이, 이 곡 하나겠지. 그 짧은 사이에 그걸 어떻게 외워. 전부 오케스트라 편곡이었는데. 그건 모차르트가 와도 힘들걸.”
“미세레레처럼?”
모차르트가 시스티나 성당에서만 들을 수 있는 ‘미세레레’란 곡을 딱 한 번 듣고 밖으로 나와 악보에 옮겨적은 건 유명한 일화였다.
“······.”
나는 고민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뭐라고 말을 해야······.
‘건방지지 않으려나.’
입술을 오므리는데, 알버트가 날 빤히 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뒤이어 펜을 들고서 오선지에 프레이즈를 옮겨적던 데이빗도, 어처구니없어하던 니콜라이와 알렉스도 말을 멈추고 날 본다.
마지막으로 팔짱을 낀 채 이 상황을 지켜보던 프랑코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젠 더 놀랄 것도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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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밀란 교수의 연구실에 불이 켜졌다.
뒤늦은 호출을 받고 부랴부랴 이곳으로 달려온 조수가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채로 몇 시간 동안 검사를 진행했다.
검사 결과, 200여 년 전 고서인 것은 확실했다. 남은 건 필체 검증뿐. 밀란 교수는 검사 결과를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하고, 악보들을 스캔하여 세계 각지로 뿌려졌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빈, 독일 베를린, 이탈리아 제노바 등등······.
이는 고전파 시대의 악보가 발견되면 으레 하는 메뉴얼 같은 것이었다. 유명 음악가들의 자필 악보와 필체를 대조해보고 확인하기 위한.
“정말 베토벤일까요?”
이제야 까치집을 툭툭 정리하는 조수를 보며 밀란 교수가 피식 웃었다. 커피를 내려 조수에게 건네고서, 자신도 한잔 호로록 들이켠다.
“모르지. 악필을 가진 음악가가 베토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흉내 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으니까.”
“그렇겠네요. 그나저나 거기에 그렇게 대단한 분들이 전부 거기에 모여있을 줄이야.”
“나도 황당했어. 세계적인 거장들이 왜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보물찾기를 하고 있냐고.”
“뭔가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한데. 막상 진짜 베토벤 자필 악보인 걸로 밝혀지면······엄청난 발견이 되겠죠?”
“그치. 엄청나겠지. 그래선지 나도 조금 떨리네.”
커피잔을 내려놓고 연구실이 붉게 물드는 광경을 바라본다.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어울리는 적막.
그 순간, 연구실에 전화벨 소리가 미친듯이 울려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