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51
151. 충분한 사람들 (4)
“이번에 스타인웨이 광고 보셨어요?”
밀란 교수가 연구실로 들어서자, 그의 조수 폴라가 대뜸 물어왔다.
모자를 벗어 행거 끝쪽에 비스듬히 걸친 밀란 교수가 끄덕였다.
뭔가 말하려던 게 있었는데, 선수를 당해서 까먹어버렸다. 뭐였더라.
“···봤지.”
“그게 두 번째 앨범 작업 중간에 촬영한 거라던데요?”
밀란 교수가 ‘그래?’라고 되물으며 광고를 되새겼다.
“막 지휘도 하더라고. 그거 좀 소름 돋던데. 근데 한서호가 이번엔 지휘도 한대?”
“아뇨, 그것도 뒷이야기가 있대요. 광고 감독의 부탁으로 잠시 올라가 본 거라 하더라고요. 그냥 흉내만 내달라는 거였는데, 그게 전문 지휘자들이 보기에도 감탄할 정도로 훌륭했던 거죠.”
“허—.”
밀란 교수가 짧은 감탄을 내뱉으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졸졸졸 따라오며 호사가 노릇을 하던 조수도 멈춰선다.
“그래서 다들 두 번째 앨범을 엄청 기대하더라고요.”
“그럴 만도 하지. 앨범에 헌정곡들이 전부 들어갈 거라던데.”
“그러니까요. 근데······.”
조수가 시선을 돌려 책상 위에 따로 보관 중인 낡은 악보를 보았다.
“저 곡도 헌정곡이라 불러야 하는 걸까요?”
밀란 교수의 시선도 자연스레 돌아갔다.
그곳엔 한서호가 준 악보가 올려져 있었다.
“저 미완성 곡?”
“네. 자신이 모시던 백작이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의 문외한이 곡을 만들었다. 낭만이 있잖아요. 결국, 미완성이라는 것도 뭔가 더 여운이 남고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긴 하지.”
“서호 연주자님은 대체 이걸 어떻게 발견한 걸까요? 우연히 일페르소의 일기를 발견한 것도 놀라운데, 고향이라 쓰여있길래 한번 가봤더니 거기서 일페르소의 악보를 발견한다는 게······단순히 운이 좋다기엔 진짜 말도 안 되잖아요.”
“한서호가 말도 안 되는 게 한둘이긴 했나?”
밀란 교수의 말에 ‘하긴···.’이라고 중얼거리는 조수였다.
그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밀란 교수가 커피포트로 향했다. 적당히 데워진 커피를 따르는데, 조수가 말을 이었다.
“이것도 헌정곡이라면 한서호 두 번째 앨범에 들어가지 않을까요? 모든 헌정곡을 다 담을 계획이라던데.”
“그럴 수도 있겠네. 미완성 곡이니까 아예 완성을 시켜서 앨범에 실을 수도 있고.”
“오, 그럼 진짜 멋질 것 같아요! 일페르소를 발견한 한서호가 완성시킨 그의 헌정곡이라니!”
밀란 교수도 내심 기대가 되는 얼굴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컵을 입에 가져갔다.
씁쓰름한 커피 맛을 음미하는데, 브리너 백작과 일페르소 등의 관계에 완전히 이입해버린 조수가 대뜸 물어왔다.
“두 사람, 하늘에서 만났겠죠?”
“누구?”
갸웃거리자 조수가 아련한 표정으로 말한다.
“브리너 백작과 일페르소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밀란 교수가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아!’ 하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만났다니까 떠올랐네. 오다가 도슨 교수 만났는데, 네 대학원 학점 나온 것 같더라.”
“······.”
연구실이 급격하게 조용해졌다.
커피 한잔하기 딱 좋게.
#
부우우우————.
묵직하면서도 맑은소리가 길게 뻗어져 온다.
콘서트홀에 들어서자 조명이 드리운 무대 위에 호른을 연주하는 건장한 실루엣이 보였다.
호르니스트 윤태환.
잠시 지켜볼까 싶었는데,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그가 곁눈질로 나를 발견했다.
호른에서 입을 떼고 풀풀 웃으며 나를 반긴다.
“일찍 오셨네요?”
“연주자님도요.”
“저야 뭐, 작곡가님에 비하면 한가한 편이니까요.”
그의 말에 내가 눈을 가늘게 만들었다.
“요즘 같이 일하는 회사도 있어서 엄청 바쁘단 거 다 아는데요 뭘. 그리고 둘만 있을 땐 편하게 말하기로 했잖아요.”
“아, 이게 왔다 갔다 하니 적응이 안 돼서.”
바로 앞 빈자리에 거꾸로 앉아 윤태환을 마주 보았다.
“동하는요?”
“잘 지내지. 사진 보여줄까?”
이미 핸드폰을 꺼내 사진첩을 눌렀다.
픽 하고 웃으며 의자를 끌어당겼다.
“와···완전 연주자님 판박이네요.”
“그래? 그런 거 같아? 흐흐.”
“그냥 작은 연주자님인데요?”
두툼한 검지로 작은 화면을 어설프게 넘기며 자식 자랑을 쏟아내는 윤태환.
함께 사진첩을 구경하다가 내가 물었다.
“사모님이 광고는 뭐라셔요?”
“요즘 거실 TV에 하루 종일 틀어져 있어. 누가 언제와도 자랑할 수 있게. 내가 몇 분 몇 초에 얼굴 잡히는지까지 외우고 있더라.”
“뿌듯하시겠네요.”
“흐, 그렇더라. 고맙다.”
“뭐가요?”
“또 불러줘서.”
그의 말에 내가 고갤 저었다.
“도움을 요청한 건 저인걸요.”
그러니 내가 불러준 게 아니다.
그들이 와준 거지.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한다.
베를린 필하모닉 대신 이 사람들이라니.
꿩 대신 닭이 아니라 참새 아니냐고.
애초에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앨범을 만든다는 건 루머였을 뿐더러, 설사 그게 가능했다고 해도 나는 이 사람들과 앨범을 만들었을 거다.
내가 만들고 싶은 앨범은 작곡가들의 특색이 모두 살아있어야 하니까.
그러기에 베를린 필하모닉은 역설적으로 너무 뛰어나다. 프랑코가 일궈온 색도 너무 강렬하고.
그걸 모두 지우고 새로운 특색을 입힐 자신이 없다.
반면, 내가 모은 연주자들은 전문 오케스트라도 아닐뿐더러 실력 면에서 베를린 필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일 테지만.
그들은 나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나도 그들의 작은 습관까지도 전부 알고 있고.
그러니 두 번째 앨범을 함께 만들기에.
이들은 모두 충분한 사람들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연습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점차 자리가 찼고, 연습 40분 전엔 모두가 도착해 악기 점검에 들어갔다.
나는 올라설 때마다 기분이 묘한 지휘대 위에 서서 연주자들을 기다렸다.
그때 점검을 마친 연주자 중 한 명이 감회가 새로운 얼굴로 말했다.
“이제, 진짜 한 곡 남았네요.”
주변 연주자들도 덩달아 비슷한 표정이 된다.
무려 서른네 곡이다. 가장 짧은 곡이 13분 남짓이라는 걸 생각하면 전체적인 플레이 타임은 10시간을 가볍게 넘을 거다. 게다가 각 곡의 디테일을 완벽히 해내기 위해서 수없이 반복했지.
수 개월간의 강행군이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으니 저런 묘한 표정들이 이해가 된다.
“그나저나, 이 음악가는 정말 정보가 별로 없더라고요. 애초에 음악을 하던 분이 아니라는 얘기도 있고요.”
“맞아요. 요 며칠 밤에 자기 전마다 찾아봤는데, 꽤 흥미롭더라고요. 최근에 서호 작곡가님 덕에 일기가 발견돼서······.”
마지막 곡에 대한 이야기가 원형 탁구대 위에 올려진 공처럼 이리저리 튀었다.
그 모습이 그냥 좋아서 한참 동안 가만히 듣기만 했다.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는 게 너무 좋다. 살짝 코끝이 찡할 정도로.
그러다 시간이 되었다 싶어 보면대 위에 올려진 악보 뭉치를 집어 들었다.
미리 연주자들에게 나눠주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완성을 시켜야 했으니까.
마지막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여 작업을 마무리했다.
나는 그런 악보를 천천히 연주자들에게 나눠주었다. 모두가 악보를 하나씩 가져가고 보면대로 돌아왔을 때, 내 꼬부랑 글씨들로 빽빽이 채운 악보만이 보면대에 남았다.
“크, 곡명이 너무 멋지네.”
“뭔가 편지의 앞부분 같지 않아요?”
“딱 중세, 고전 이런 분위기가 나서 좋아요.”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간다.
‘그러게.’
연주자들의 말처럼, 제목은 마치 편지의 서두 같았다. 그래서 더 내게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면, 내 연주는 답신이 되는 걸까?
답가이고,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걸 모두 여기에 담았다.
하늘에서가 아니라면, 나처럼 새로운 삶으로라도 그대는 이 곡을 듣게 될까.
일페르소.
나를 음악 앞으로 이끌어준.
내 전생의 은인이여.
#
노트북 앞에 앉아 까치집 지어진 머리를 슥슥— 정리했다.
녹음에 대한 여러 아이디어로 어제 새벽 늦게 잠들었지만, 반드시 이른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띠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화면이 바뀐다. 격자로 나누어진 화면에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내 지난 앨범을 유통했던 로얄 클래식 직원들과 SJ 직원들, 그리고 방금 들어온 나.
약속된 화상 회의 시간에 늦진 않았는데, 이미 모두가 들어와 기다리는 중이었다.
“자 회의 시작할까요?”
반갑게 인사를 마치고, SJ 직원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회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녹음 일정부터, 앨범 패키지에 나라별로 차이를 둘지, 언제부터 프로모션을 진행하고 언제 보도자료를 뿌릴지 까지.
나도 내 나름대로의 의견을 내며 회의에 참여했다.
“쇼케이스 장소를 어디로 할지도 중요하겠네요.”
직원의 말에 로얄 클래식에서 나를 담당했었던 올리비아가 물었다.
“이번에도 뉴욕에서 하실 건가요?”
“여러모로 뉴욕이 좋긴 한데요.”
“그러면 뉴욕 시내의 공간들을 한번 추려서 보내드리도록 할게요.”
모두가 철저히 준비해왔기에 속전속결로 진행되는 회의.
하지만 이 부분에서만큼은 내가 브레이크를 걸 수 밖에 없었다.
“저···.”
내가 생각해둔 그림이 따로 있었기에.
“이번 앨범의 쇼케이스는 한국에서 하고 싶어요.”
#
-연주자들 때문에 그런 거야? 뉴욕을 같이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백선화 부사장이 전화로 물어왔다.
직원에게 바로 보고를 들은 것인지 이미 회의 내용을 전부 꿰고 있었다.
“그런 이유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녜요.”
-그럼?
그녀의 물음에 내가 잠시 고민했다. 이유야 많았지만, 나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걸 말했다.
“보여주고 싶어서요. 제가 사는 곳을.”
내 대답에 백선화 부사장이 잠시 멈칫하더니 크게 웃었다.
-자신감 넘치네! 네가 안 가면 다들 올 거다? 넌 한서호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고전 음악가들이······.”
나름대로 이유를 설명했지만, 그녀는 이미 자신의 해석에 꽂힌 것 같았다.
-멋지네!
아니라니까.
-네 말 들어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제대로 안 들은 것 같은데.
-앞으로 SJ 엔터의 이름을 알리는데도 여러모로 괜찮을 것 같고.
······그래.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그녀가 동의했으니 됐다.
아마 큰 문제만 생기지 않으면 앨범 쇼케이스는 서울로 확정되리라.
“선화냐?”
전화를 끊자 앞에 앉아있던 백한길 회장 물어왔다.
끄덕이자 내심 뿌듯한 미소가 그의 입에 그려진다.
“열심히군.”
“엄청 열심이세요. 회의 끝나자마자 바로 온 건데, 이미 전부 알고 계시네요.”
“보고는 빠르게 받을수록 좋다고 누누이 가르쳤거든. 나도 박 실장한테 듣자 하니 요즘 회사에서 퇴근도 잘 안 한다는군.”
앗, 그건 좀······.
줄줄이 아래로 이어질 야근을 생각하며 32살의 직장인 한서호였던 자아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백선화 부사장이 왜 저리 열심인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꿈꾸는 사업이 출범을 앞두고 있었으니까.
“예술 에이전시 때문이죠?”
“그래. 그걸로 SJ 엔터를 세계적인 기업의 반열에 올리는 꿈을 꾸고 있어. 목표를 세계로 설정해 놨으니 점검을 하고 또 해도 부족한 게 보이겠지.”
수십 년 동안 거대 기업을 일군 그에겐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난 참 아무 생각 없이 음악가들을 후원했었구나 싶다. ‘사업’이란 생각 자체가 없었지. 그럴 수 있었던 건 시대가 시대이기도 했지만, 가문의 재정을 관리해준 이의 공이 컸다.
‘여기서도 네 노고가 보이네. 일페르소.’
내가 마음껏 나의 행복인 음악을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일페르소는 끊임없이 가문의 돈을 불릴 궁리를 했을 터.
문득 떠오른 생각에 쓴 웃음을 짓는데, 백한길 회장이 물어왔다.
“그나저나 녹음은?”
“다음 주부터 들어가요.”
“허··· 너무 궁금한데 쇼케이스까지 기다리는 게 낫겠냐.”
미련 가득한 질문에 내가 칼같이 답했다.
“네. 아무래도 그때 오셔서 듣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아요.”
“끙. 제작자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알았다.”
단념한 백한길 회장이 달력으로 시선을 옮겼다.
며칠 남았는지 새는 듯하던 그가 툭 말했다.
“난 특히 그 곡이 궁금하구나. 미완성 곡. 그걸 네가 어떻게 완성시켰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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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클래식과 SJ 엔터테인먼트가 보도자료를 뿌렸다. 기사들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쏟아져 나왔고, 소식은 순식간에 사람들에게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무려 서른네 곡의 녹음 작업이 모두 끝났을 때쯤엔 대대적인 홍보가 시작되었다.
첫 앨범의 성공 덕인지 로얄 클래식은 아예 두 팔 걷어붙이고 지원사격에 나섰다.
시간이 흘러도 폭발적인 관심은 식을 줄을 몰랐다. 계절이 바뀌었고, 떨어지지 않는 관심 대신 낙엽이 바닥에 깔렸다.
그리고 그 위로 첫눈이 내렸다.
그저, 장소만 옮겨졌을 뿐.
내겐 끝난 적 없던 바덴바덴의 음악회가.
[한서호가 그린 고전. ‘과거’가 오는 12일에 공개된다. 당일 인천으로 들어오는 입국자 수가 평소보다 배는 많을 것으로 추정되며······]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