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8
018. 악장 (4)
“오케이, 끝!”
합정동 모 녹음실.
프로듀서의 말에 강준서가 벌떡 일어나 덩실거렸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다들 수고했어.
뚝. 토크 백이 꺼지고, 프로듀서가 주섬주섬 짐을 싸서 종종걸음으로 나간다.
커피···커피···를 중얼거리는 게 카페인을 수혈받으러 가는 중독자의 모습이었다. 흔한 일이지.
그때, 기지개를 켠 거구의 남자가 느긋하게 하품을 해댔다.
강준서 등과 자주 녹음을 해온 피아니스트 박승재였다.
“으아아아···그래도 꽤 빨리 끝났지?”
“아, 네. 뭐.”
“지난번이랑 비슷하네요.”
“······.”
함께 녹음을 진행한 이들의 면면이 어색하게 굳는 줄도 모르고 눈치 없이 웃는 그.
차마 뭐라 하지 못하는 반응들을 살피던 강준서가 슬쩍 운을 뗐다.
“형, 근데요. 제발 악보 좀······.”
“알았어. 알았어. 내가 바빠서 그래, 바빠서. 근데 준서 넌 왜 못 본 새에 그리 다크서클이 진해졌냐?”
별거 아니라는 듯 화제를 돌려버리는 박승재.
말문이 막힌 강준서가 금붕어처럼 뻐끔거렸고, 지켜보던 나머지 연주자들도 그러려니-하는 표정을 지으며 포기해버렸다.
“조별과제가 힘들긴 한가 보네?”
쓴웃음을 지으며 묻는 비올리스트.
옆에서 박승재가 이유를 알겠다는 듯 킬킬거린다.
“조별과제? 너도 이제 앙상블 수업 듣냐?”
“눼에···.”
“푸흐흐, 죽어 나가겠구만.”
그쵸. 거기도 형 같은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라고 차마 말할 수 없던 강준서가 헛헛한 웃음을 흘린다.
“근데, 그것 때문에 피곤한 건 아녜요. 요새 살리에리의 마음을 조금씩 느끼는 중이라.”
“웬 살리에리?”
“너무 뛰어난 애를 과외 하고 있거든요. 얘한테 대체 다음 수업엔 어디까질 가르쳐야 하나 그게 앙상블보다 더 고민돼요. 이 상태면 몇 달 안에 밑천 다 드러나겠어.”
“서호 말하는 거야?”
이야기를 쭉 듣던 비올리스트가 알은체하며 물었다. 끄덕이는 강준서. 그러자 박승재가 갸웃거리며 이름을 읊조린다.
“서호···서호···. 너희가 전에 말했던 애 아냐? 나 녹음 못 했을 때 피아노 쳤던, 사운드필름 한 대표님 아들.”
“네, 맞아요.”
그러자 뭔가 탐탁지 않은 표정이 튀어나왔다.
“난 걔 좀 그렇더라.”
“네? 왜요?”
“걔 일반고라며. 예고도 아닌 애가 벌써 부터 프로들이 하는 녹음에 참여하고, 경력 쌓고. 이게 한 대표님 아들 아니었으면 가능한 일이었겠냐? 다 수저 잘 물고 태어나서 그런 거잖아. 안 그래? 한 대표님 그렇게 안 봤는데 쩝. 그치, 수아야? 너도 그런 애들 엄청 싫어하잖아.”
박승재가 투덜거리며 가만히 있던 신수아에게 동의를 구한다.
“형, 그래도 걔가······.”
강준서가 얼른 비호 해보려 했지만,
“싫죠. 실력 없는데 인맥만으로 어려운 길 쉽게 가는 애들.”
신수아가 바이올린을 케이스에 집어넣으며 담담하게 싸늘한 소릴 했다.
그리고 강준서가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덧붙였다.
“근데, 걔. 실력이 없진 않더라고요.”
“어······? 에이, 고등학생이 실력이 있어 봤자-.”
“아, 그리고 오빠.”
“응?”
나긋하게 되묻는 박승재에게 신수아가 특유의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적어도 연습은 어느 정도 하고 와주세요. 저희는 시간이 남아서 연습해 오는 거 아니니까.”
사이다를 끼얹은 녹음실에서 박승재만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나가버렸다.
본인한테만 그게 기름이었는지, 얼굴이 활활 타올랐다.
몇 번 정도, 선배한테 버르장머리가 어쩌고, 하는 큰소리가 나긴 했지만 그래 봤자 녹음실.
그들의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는 일 따윈 없었고, 결과적으로 모난 돌 하나가 빠지니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그 돌을 빼낸 영웅은 늘 그렇듯, 별 표정 변화 없이 짐을 챙긴다.
“오늘부터 수아 누나다. 난 그러기로 마음 먹었어.”
“야. 이제야? 난 예전부터 언니였어. 언니. 우리 뭐 먹을까요?”
“나 바로 또 일 있어.”
“바쁘시네, 우리 누님.”
능구렁이 같은 강준서를 홱 흘겨본 신수아가 마저 짐을 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비올리스트가 ‘언니 잘 가요~’라고 인사한 후 강준서에게 묻는다.
“그나저나, 아까 궁금했던 게. 서호가 대체 얼마나 재능있길래 그래?”
“바이올린 음색부터가 다른 애들이랑은 퀄리티가 달라. 그리고 뭘 시켜도 한두 번 안에 턱턱 성공하는데······제 말론 많이 봐서 그렇대. 근데 그게 많이 본다고 되냔 말이지.”
“그치. 그리고 17살이 많이 보면 또 얼마나 봤다고.”
“그니까! 게다가 이번에 보니 작곡까지 하데? 그것도 아주 제대로. 내가 한 곡 연주해 봤는데, 다른 건 몰라도 멜로딘 진짜 기가 맥히더라.”
“작곡까지? 와······걘 진짜 타고났나 보다. 그래서 피아노를 관둔 건가?”
“음. 그건 또 아닌 것 같아. 그렇다기엔 연주를 할 때 눈빛이 뭐랄까. 한 사나흘 굶은 것 같다니까? 연주가 너무 하고 싶은데 강제로 못했던 적이 있는 것처럼.”
“걔가 그럴 일이 뭐가 있어?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 배웠는데.”
“그게 나도 의문이야. 근데, 수아야.”
한참을 비올리스트와 얘기하던 강준서가 고갤 들어 올리며 물었다.
우두커니 서 있다가 움찔하는 신수아.
“으, 응?”
“간다며?”
이내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녀가 바이올린 케이스를 고쳐매며 새침하게 말꼬릴 올렸다.
“어, 어··· 지금 갈 건데?”
#
······작업실에서 나와 사무실을 슥 훑었다.
오랜만에 한산한 사무실에 아버지 자리가 비어있다. 녹음실에 계시나? 하고 발걸음을 돌리는데, 마침 화장실에서 나오던 박재훈 팀장과 마주쳤다.
“서호~. 무슨 일이야?”
푸슬푸슬하게 웃으며 묻는 그를 보며 손에 들린 악보 뭉치를 내밀었다.
이게 뭐냐는 듯 멍하니 보던 그가 입을 살짝 벌린다.
“아? ‘늑대가 된 소년’ 곡 만든 거야?”
“네, 맞아요.”
그제야 악보를 받아든 그가 잠시 당혹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본다.
“이거 두께를 보니 한 곡이 아닌 것 같은데?”
“네 곡이에요.”
“네 곡······. 진짜 다 해왔네.”
이윽고 박재훈 팀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설마 했는데, 벌써 다 해왔냐며. 안 그래도 아버지와 그런 얘길 했었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다시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근데 그렇다고 해도 양이 많은 것 같다? 피아노곡 같지 않게.”
당연했다.
피아노곡이 아니니까.
“피아노곡 아녜요.”
“어? 아냐?”
눈썹을 치켜들며 되물은 그가 표지를 휘리릭 넘겨 확인한다.
한 장 넘길 때마다 그의 표정이 점점 더 극적여지는데, 그걸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악기들이 여러 개 들어가 있네?”
“네, 현악 4중주로 편곡했어요. OST인데 전부 피아노곡으로 만들 순 없잖아요.”
“당연히 피아노곡 가져올 거라 생각하고 편곡 좀 도울까 했는데······어떻게 갑자기 이런 편곡할 생각을 했어?”
“바이올린 배우잖아요.”
“그치. 배우지. 근데 너 한, 3주 배웠나?”
“그 정도 된 것 같아요.”
그래, 3주···하고 중얼거린 박재훈 팀장이 픽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악보를 흔든다.
“···어쨌든, 이거 대표님 보여드리려고?”
끄덕이자 복도 끝 녹음실을 슬쩍 본 그가 말했다.
“근데, 지금 대표님 동창들이 잠깐 얼굴 보러 와서 녹음실에서 얘기 중이시거든.”
“동창이면······?”
“예대 동창들.”
자연스레 고개가 녹음실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한국대 예대를 졸업하셨다. 국내 최고라고 여겨지는. 박재훈 팀장도 마찬가지. 거기서 두 분이 만나셨다고 했지.
거기에 윤석호 교수님도 과거 그곳의 교수님이셨고, 지금 바이올린을 가르쳐주고 있는 강준서와 녹음을 함께했던 신수아도 현재 한국대를 다니고 있다. 아, 신수아는 휴학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그런 곳의 동창분들이라고 하니 흥미가 당긴다.
아마도 음악 쪽에서 다들 한 자리씩 꿰차고 있지 않을까?
“대단한 분들이시겠네요.”
슬쩍 묻자, 박재훈 팀장이 끄덕인다.
“그치. 한 분은 화원예고 선생님, 다른 한 명은 발라드 음악 작곡가셔.”
화원예고는 익히 들은 바 있지. 윤 교수님 제자 중 7할이 그곳에 들어간다고 했다. 나머지 3할은 선림예고. 일반고를 가버린 난 돌연변이쯤 되려나.
게다가 발라드 음악 작곡가까지. 영화 음악 회사다 보니 다른 장르의 작곡가를 만날 일이 없었던 나로선 참 구미가 당기는 조합이다. 나도 함께 들어가 귀동냥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지금은 얘기가 한창인 것 같으니, 이따가 인사드리러 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안 불러도 가야지.
나는 끄덕이며 손을 뻗었다.
“그럼 악보는 제가 책상 위에 올려놓을게요.”
그런데 박재훈 팀장이 잠시 망설인다. 악보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입매를 스윽 올린다.
“아냐.”
“네?”
그리고 뭔가 재밌는 생각이 든 얼굴로 말했다.
“지금 드리지 뭐. 내가 가져갈게.”
#
“근데 회사에 왜 너만 있어? 김 대표는 요새 뭐하고 돌아다녀?”
차콜색 정장 차림의 남자가 커피잔을 들며 물었고.
맞은편에 앉은 한기준이 으쓱거리며 답했다.
“똑같지 뭐. 충무로에 작은 사무실 구해서 영화 만들려고 발품 팔아.”
“허, 이미 몇 번이나 말아 먹어놓고선. 포기를 모르는 양반이네, 진짜.”
고개를 내젓는 정장 차림의 남자.
그러자 민머리 남자가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괜찮은 거냐?”
“김 대표가 알아서 하겠지. 자기 일인데 뭐.”
“아니, 여기 말이야. 이 회사도 김 대표 자금이 대부분이잖아. 김 대표가 까딱 영화 하나 크게 말아먹으면 여기도 문제 있는 거 아냐?”
“안 그래도 계속 내가 얘기하곤 있어. 이쪽엔 피해 없게 하라고. 그랬더니 알겠대. 못 미더워서 계속 확인하고 있긴 한데. 뭐, 본인 돈을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한기준이 말끝을 흘린다. 이에 민머리 남자가 주억거리며 커피를 홀짝였다.
“김 대표 또 사람 잘 믿잖아. 그런 것만 좀 조심하라고 해.”
“그래야지.”
“그래, 지금 제일 잘 나가는 애 걱정 그만하자.”
정장 차림 남자가 두툼한 손으로 손뼉을 치며 분위길 환기했다. 한기준이 푸스스 웃으며 손사래를 친다.
“잘 나가긴. 너야말로 명색이 화원예고에 스카웃 되셨잖아. 그래서. 40 넘어서 하는 학교생활은 어때?”
“말도 마라. 애들 가르치는 게 너무 힘들다. 말을 오죽 안 들어야지. 나름 여기저기서 영재 소리 듣고 온 애들이 연습도 더럽게 안 하고. 우리 때도 그랬냐?”
“그랬지. 고등학생도 아니고, 대학생 때까지 쭉-.”
“크흠.”
“그러니까 너희들 윤 교수님 좀 찾아봬. 교수님한테 우린 어땠겠냐. 그런데도 어떻게든 실력 늘려보시겠다고 매번 화내시고.”
“알지. 근데··· 어후, 잔소리들을 생각하면 발걸음이 안 떨어져.”
민머리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풀풀거렸다. 옆에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연신 끄덕거린다.
“들을 짓을 말아야지 그러니까.”
“얼씨구, 예전엔 들을 짓 제일 많이 했던 놈이.”
그때, 스르륵 문이 열렸다. 슬그머니 머릴 빼고 들어오는 박재훈. 한기준을 제외한 나머지 남자들이 반갑게 손을 휘적거렸다.
“여, 재훈이!”
박재훈이 픽 하고 웃었다.
“여기가 녹음실이야 포장마차야? 나름 일류 고등학교 선생님에 히트곡 작곡가님에 회사 대표님이신데··· 아재 느낌 너무 나는데요?”
“쟤 봐라. 넌 뭐 달라?”
“너도 앞자리 4잖아. 그럼 마찬가지지 임마. 얼른 앉기나 해. 근데, 그건 뭐냐?”
정장 차림 남자의 시선 끝에 박재훈이 들고 있던 악보가 걸렸다.
박재훈이 한 손으로 들기도 버거워 보이는 두툼한 악보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 이거요? 서호가 만든 곡들이에요.”
“서호? 기준이 아들?”
두 남자의 시선이 한기준에게로 몰렸고,
한기준은 으쓱거리며 되물었다.
“벌써 완성했대?”
박재훈 팀장이 빙그레 웃으며 끄덕인다.
대충 상황파악이 끝난 정장 차림의 남자가 흥미롭다며 손을 내밀었다.
“한번 볼까?”
“그냥 내가 내준 숙제야.”
“알겠으니까 보자고. 고등학교 선생님으로서 봐줄 테니까.”
엣헴, 하고 헛기침을 한 그가 박재훈에게 악보를 건네받아 넘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 시작한 그의 눈빛이 점점 짙어져 갔다.
“야, 이걸 네 아들이 만들었다고? 네 아들 몇 살이지? 고1이랬나?”
지켜보던 민머리 남자가 고갤 쭉 뺐다.
“대체 뭔데 그래.”
“한 번 네가 봐봐. 나만 거짓말 같은 거야?”
이번엔 악보를 받아든 민머리 남자가 한참 동안 조용하다가 헛웃음을 집어삼켰다. 옆에서 눈을 끔뻑이던 정장 차림의 남자가 재촉한다.
“그치? 말도 안 되지? 짜임새가 이렇게 봤을 땐, 전혀 아마추어 같지도 않고······.”
민머리 남자는 그쪽 대신 한기준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대뜸 다른 얘길 꺼냈다.
“기준아 너네 프로툴 쓰지? 혹시 로직(-작곡 프로그램)도 있냐?”
“있긴 한데, 왜?”
그러자 못 참겠다는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입가를 슥슥 문지르며 컴퓨터를 가리켰다.
“이거 가상 악기로 찍어서 들어보자. 어떤 곡일지 너무 궁금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