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44
044. 본선 (1)
김세진이란 기대주의 본선 진출 소식에 클래식계가 들썩일 무렵,
최성령 기자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인터넷을 훑었다.
우리나란 매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항상 꽤 많은 본선 진출자를 배출해내 왔고, 올해도 비슷하리라 예상되지만.
유독 스포트라이트는 대중들에게 알려진 김세진에게만 몰려들고 있었다.
아직 본선 진출자 명단이 공개되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공개 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았다.
국내 유일이라 불러도 좋을 클래식 잡지사인 월간청중도 김세진에게만 주목하는 분위기인데, 대형 언론사들이라고 다를 리 없지.
콩쿠르 특성상, 그동안의 타 콩쿠르 성적을 통해 확인된 실력이 명확하므로 이변이란 게 존재하기 힘들다.
그러니 기대가 한쪽으로 쏠리는 게 한편으론 당연했다.
그런 가운데,
최성령은 부쩍 음흉하게 웃는 일이 많아졌다.
흐-.
······지금처럼.
그녀는 한서호를 통해 직접 들은 소식을 상기했다.
벌써 몇 번이나 되새김질했지만, 어김없이 또 감탄이 흘러나온다.
“진짜 둘 다 합격했단 말이지······.”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감도 안 온다.
왜냐면 아직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이니까.
처음 두 악기에 모두 지원한다는 얘길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건 정말 모차르트가 살아 돌아와야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놀랐고, 또 이상하게도 이해해버렸다.
‘충분히 그럴 만한 연주였어.’
영상으로 보내졌을 연주를 직접 보았잖나.
다시금 그 장면을 떠올리며 최성령이 입술을 적셨다.
핸드폰에 아직도 그때의 감상이 남아있었다.
‘이것도 도움이 많이 될 거야.’
콩쿠르에 대한 관심도 무르익었겠다, 이제 슬슬 한서호에 대한 기사를 쓰려는데 이런 감상 하나하나가 대중에게 그를 소개하는데 유용할 것 같았다.
하지만.
‘한 번에 풀 필요는 없지.’
문서 프로그램을 바라보던 그녀가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생각해본다.
자신이 가진 정보가 꽤 많다. 아직 본선 진출자 명단도 나오지 않았으니, 한 번에 터트린다면 지금 당장 한서호에게 엄청난 관심이 쏠릴 터.
최성령은 아직은 참아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지금 모든 자료를 다 때려 넣어 쓴다면, 기사 하나의 파급효과는 확실하겠지만 거기서 끝이다.
언론사들이 앞다투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조명하는 마당에 상대적으로 코딱지만 한 클래식 전문 잡지사가 끼어들 여력은 없을 테니.
그러니 한서호가 본선에 들어서기 전까지 조금씩 풀 생각이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모두 지원한 초유의 참가자가 유명세를 얻을 즘엔, 이미 여러 차례 걸쳐 올린 자신의 기사가 재조명받도록.
결심을 굳힌 최성령이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아낸 것들을 조금씩 풀어가며 사진 하나 없는 간단한 기사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잠시 고민한다.
기자에게 가장 중요한 고민.
······어떤 제목이 좋을까?
한참을 생각하던 그녀가 퍽 마음에 드는 헤드라인이 떠올랐는지 생긋 웃었다.
#
정말 오랜만에 찾은 백한길 회장에겐 그마저도 짬을 내서 온 거라 연습 중인 곡들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번갈아 가며 연주했다.
뭐라 한마디 할 줄 알았던 백한길 회장은 당연하다는 듯 음악을 들었고, 내내 흐뭇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꼭 듣고 싶은 걸 듣게 된 사람처럼.
연주곡 메들리가 끝나자 여기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은은한 향이 풍기는 허브 티를 가져왔다.
감사하다며 받아들어 홀짝이는데, 백한길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 들려주고 갔으면 내가 공연장에 찾아가려고 했다.”
오늘 연주한 콩쿠르 준비 곡들을 말하는 거겠지.
내가 웃으며 고갤 저었다.
“장 교수님이 허락 안 하셨을걸요.”
“그 돌팔이 허락이 알게 뭐냐. 나한텐 듣고 싶은 음악을 듣는 게 진짜 치료인데.”
“그럼 오늘 치료 좀 받으셨네요?”
입이 삐뚤던 백한길 회장이 풀풀 웃어버렸다.
그리고 주억거리며 진득하게 말한다.
“좋긴 하더구나. 네가 이걸 그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어떠셨어요?”
“멋졌다. 그리고 전율했지.”
그의 극찬에 덩달아 흐뭇해져 말했다.
“인터넷 중계되니까, 상상이랑 똑같은지 봐주세요. 아, 여기 시간은 너무 늦으려나······?”
6시간 차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특히 내 첫 경기는 여기 시간으로 새벽 1가 넘을 텐데, 요새 또 컨디션이 좋지 않은 백한길 회장에겐 다소 어려운 일이리라.
그러나 백한길 회장은 오히려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걱정 마라. 옆에 장 교수 끌어앉혀 놓고 볼 생각이니까. 선화랑 종우도 온다더구나.”
“벌써 약속까지 하셨어요?”
“약속은 무슨. 명령했다. 네가 자꾸 잊는가 본데, 나 아직 회장이야. 걔넨 계열사 사장, 부사장이고.”
툴툴거리듯 말하는 입꼬리가 힘겹게, 하지만 환하게 올라간다.
“······여하튼. 부디 그날은 조용했으면 좋겠구나.”
“······.”
소음을 말하는 게 아니란 것을 안다.
자신의 몸이 조용하길 바라는 거다.
그 바람이 너무 익숙해서 나조차도 어딘가 저려오는 것 같았다.
“괜찮으실 거예요. 몸은 괜찮아야 하는 날을 정확히 안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그랬지.
음악을 들어야 할 날이 다가오면 귀신처럼 발작이 멎었다.
그때 내가 일페르소에게 했던 말까지도 기억한다.
‘병마(病魔)도 아는가 봐. 날 죽지 않게 오래 괴롭히려면 음악만큼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걸.’
그때 일페르소가 지었던 쌉싸름한 표정이 그려지고,
그 너머로 희끗하게 웃는 백한길 회장이 보였다.
“···넌 참 신기한 아이다.”
나도 내가 신기하긴 하다.
두 가지 기억을 가지고, 세 번째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게 흔한 일은 아닐 것 같으니.
마주 웃다가 내가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며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래, 물어봐라.”
“SJ 문화재단에서 후원할 음악가들은 어떻게 선정하시는 거예요?”
“다양한 방법으로 하지. 학생의 경우엔 직원들이 돌아다니며 선정하기도 하고, 교수나 선생들의 추천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성인의 경우엔 대체로 이미 검증된 프로를 지원하고 있지.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실력이 뛰어난 연주자분들이 묻혀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서요.”
내 대답에 백한길 회장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여전히 입꼬리는 말아 올리고 있었다.
“재단이 일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것 같으냐?”
“앗, 그런 건 아녜요.”
다급히 말하자, 백한길 회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안 그래도 그런 문제를 양 대표도 염두 하고 있다. 그동안은 재능있는 떡잎에 집중한 게 사실이지. 하지만 이제는 묻혀 있던 연주자들을 발굴하는 쪽에도 프로그램을 만들어 제대로 힘을 쓸 계획이란다.”
“그럼, 다행이네요.”
“음? 그게 끝이냐? 추천해줄 연주자들이 있으면 얘기해라. 내가 얘길 해놓을 테니.”
나는 잠시 턱 끝을 매만지며 고민하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을 것 같아요. 재단에 그런 프로그램이 생긴다면 수면 위로 드러날 연주자들이에요. 분명히.”
적당한 순간에 내가 이러이러한 프로그램이 있다고 언질만 해주면 충분할 거다.
그러자 백한길 회장이 툴툴 거렸다.
“누가 뭐라느냐. 난 내 직원들 발품 파는 수고를 덜어주려는 거다. 무조건 뽑으라고 압력이라도 넣을 것 같아?”
“회장님이 말씀하시면 그게 그냥 압력이죠 뭐.”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백한길 회장이 헛바람을 내뱉으며 입맛을 다신다.
“넌 정말 학생 같지가 않단 말이지.”
그러면서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한길 회장.
그가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입을 뗐다.
“아 참. 이 얘기가 나온 김에 말해줘야겠구나. 어제 재단 양 대표에게 연락이 왔었다. 그 친구가 참 의외인 제안을 하더구나.”
“무슨 제안이요?”
“양 대표는 과르네리를 6개월마다 연주해 관리했었다.”
후원자의 밤 때 들었던 얘기였다.
알고 있다는 듯 잠자코 있자 말이 이어진다.
“작년 말엔 후원자의 밤에서 네가 과르네리를 연주했었지. 그리고 딱 6개월째가 되는 날, 이번에도 네가 연주해줬으면 좋겠다는구나.”
그의 얘길 듣던 나는 날짜를 계산해보았다.
그리고 갸우뚱했지.
“하지만 전 그때 러시아에 있을 텐데요.”
“그러니까.”
“···?”
내 의문을 낚아챈 백한길 회장이 씩 웃었다.
“거기로 보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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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어디 이민 가?”
회사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온 아버지가 헛웃음을 지으며 거실을 훑는다. 뒤따라 들어온 나도 새삼 놀랐다.
콩쿠르에 베이노프 심포니와의 만남까지.
한 달 이상으로 길어질 외출인 걸 감안하더라도 엄마가 싼 짐의 양은 상당했다.
“곳곳에 기자들이 있다더라고 인터뷰 제안이 올 수도 있고. 그러니 옷은 매번 다르게 입혀야지.”
“콩쿠르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해도 그 정돈 아니야. 게다가 아직 서호는 유명하지도 않고. 본선 진출자 명단 공개되고 나서도 다들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하던데 뭘.”
“그건 아직 얼굴도 안 알려져 있고 콩쿠르 참가 전적조차 없어서 그런 거라며. 본선 1차 끝나면 반응 완전 달라질걸?”
엄마의 반박에 아버지가 결국 수긍했다.
“그렇기야 하겠지.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푸흐.”
아버지가 내 쪽을 돌아보며 헛웃음을 터트린다.
졸지에 말도 안 되는 일을 한 말도 안 되는 아이가 된 나는 멋쩍게 웃었다.
그나저나···.
칫솔이랑, 치약···.
엄마가 차곡차곡 정리해 놓은 캐리어 위에 밖에서 사 온 여행용 물품들을 올려놓았다.
컵라면에 고추장까지 챙기며 엄마가 픽 하고 웃는다.
“당신이 가져가라 그랬어?”
“아니, 서호가 먼저 챙겨야 한다고 그러던데?”
“저런 거 챙겨가야 한다는 건 또 어디서 봤대?”
여행 한 두 번 가보나. 물론 이 시점엔 초딩 때 한 번만 가본 게 맞지만···.
“이 정도는 다 알죠. 음식이 입맛 안 맞을까 봐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꼭 챙겨가라던데요?”
내 대답에 귀엽다는 듯 웃는 엄마.
“되게 담담해서 우리 서호는 이럴 때도 어른스럽구나, 했는데. 그래도 아직 애는 애네.”
헤실거리며 당연하다고 맞장구쳤다.
어쨌든, 설레고 있는 건 분명하니까.
그동안 연습해온 연주를 사람들 앞에 보여줄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랜만에 맑아진 하늘을 보며 집을 나섰다.
지금쯤 등교했을 친구 녀석들의 톡이 밀려 들어온다.
[이호익: 한길이네 가서 네 무대 보기로 했어.] [나: 한길이 부모님이 허락하셨어?] [양한길: 응. 친구가 대회에 출전한다고 하니까 허락해주시더라고. 엄청 궁금해하시고. 아마 엄마 아빠도 같이 볼 듯] [이호익: ???]이호익에겐 퍽 불편한 시청이 될 것 같네.
킬킬거리며 웃는데, 채이연을 비롯해 박동진 감독, 송은혜 작가까지 톡이 연달아 들어온다. 아무래도 영화 ‘소프라노’ 촬영 때문에 다 같이 있는 것 같지.
고맙다는 인사를 돌리며 공항으로 향하는 내내 이 사람, 저 사람과 톡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문득 고갤 돌리면 한강에 비친 햇볕이 금박지처럼 부서져 떠다녔다.
떠오르는 영감을 막을 순 없었고, 잠시 모두 스톱하고 오선지 서너 줄을 메웠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연락들.
마지막으로 윤 교수와 통화를 마쳤을 때쯤, 우리는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스케줄 최대한 맞춰볼게.”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 긴장하지 말고. 안 할 거 알지만.”
“넵.”
아버지의 응원을 받으며 수속을 밟았다. 아쉬움 그득한 얼굴로 끝까지 아버지와 이런저런 얘길 하던 엄마도 내 뒤를 따랐다.
그렇게 게이트 앞 카페에서 수다를 떨다가 비행기에 탑승한 게 10시.
9시간에 걸친 비행 끝에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날이 당연히 저물어있을 거란 생각과는 달리 오후 7시가 대낮처럼 밝았다.
그 광경에 엄마나 나나 신기해하는 것도 잠시.
우리는 곧장 가이드를 만나 호텔로 향했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주최 측에서 연습실을 제공하기 때문에 최대한 그곳에서 가까운 호텔을 잡아야 했고, 그렇게 정해진 곳이 바로 메트로폴 호텔.
사악한 가격대만큼이나 입이 떡 벌어지는 로비를 지나 체크인하려는데, 방금 지나온 로비가 웅성거렸다.
“···?”
여기저기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 곳을 바라본다.
대부분이 동양인. 그것도 얼핏 한국말이 들려 더욱 시선이 따라갔다.
‘기자들인가?’
그렇게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로비를 가로질렀다.
그들이 향한 곳은 호텔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
거기서 나온 건 지금의 내 또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애였다.
새하얀 얼굴에 마른 체구, 사뭇 귀공자의 느낌을 풍기는 그가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간다.
굳이 누군가 이름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도 알 수 있었다.
김세진.
‘저 애도 여기서 묵는구나.’
일면식도 없지만 인터넷에 하도 얘기가 많아 익히 알던 사람처럼 반가울 지경이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꼭 한번 보고 싶긴 했었다.
거의 모든 연주 영상을 다 봤지.
끝내주게 잘 치더라.
이건 어떤 생각으로 쳤는지, 저건 무엇에 중점을 뒀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부럽니?”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 고갤 돌렸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일행처럼 붙어 선 여자.
최성령 기자가 팔짱을 낀 채로 서 있었다. 시선은 김세진 쪽으로 향해놓고, 입꼬릴 올리며.
온다는 연락을 받긴 했는데···.
“뭐가요?”
“저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거 말이야.”
가만히 그녀를 보다가 다시 김세진 쪽을 바라봤다.
러시아에 도착한 소감이 어떠냐며 한마디라도 들으려는 기자들.
뭘 어때. 쟤도 신기하겠지. 9시가 넘어서야 노을이 지고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부럽긴커녕,
“좀, 피곤할 것 같은데요?”
최성령 기자가 ‘그래?’라고 되물으며 날 본다.
그리곤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앞으로 넌 더할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