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53
053. 불멸
순백의 화려한 곡선과 은은한 금빛 조명이 굽이치는 자랴디예 콘서트홀.
올해의 바이올린 수상자 레오 뒤보셸과의 리허설을 마친 스베틀라노프 심포니가 잠깐의 휴식시간을 가졌다.
지휘봉을 보면대 위에 내려놓은 안드레이가 묘한 표정으로 단상에서 내려와 빈자리에 앉는다.
앞에선 단원들이 맘 편히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대화의 내용은 이것저것 다양했지만, 공통적으로 하는 주제가 귀에 꽂힌다.
바로, 콩쿠르 결과에 관한 이야기.
불과 발표가 어제였기에 이런 자리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얘기였다.
“솔직히 기교에선 레오가 훨씬 나았지.”
“근데, 한서호 음색이 말도 안 되잖아. 그리고 표현력에선······.”
“둘 다 대단했지.”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의 말에 주변 단원들이 하나, 둘 끄덕인다.
이견을 달 수 없을 만큼 두 사람의 표현은 최고 수준이었다.
“콩쿠르는 공연과 달라서 균형이 중요하잖아. 그러니 심사위원들도 얼마나 골치 아팠겠어. 어느 한쪽의 손을 들면 기교보다 음색이 우선이라는 걸 단정 지어버리는 건데.”
“동감이야. 모두가 납득할 수 없는 결과라면 공동 순위를 매기는 게 낫지. 그렇다고 우승을 두 명할 수는 없으니 아예 2등으로 둘 다 준 것 같던데?”
“평론가들도 대부분 그렇게 말하더라. 평소였으면 순위를 못 나눌 만큼 심사위원 역량이 부족했다느니 그랬을 양반들인데, 이번엔 그럴만했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야.”
공동 2등이란 결과를 놓고 한참을 떠드는데, 누군가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그나저나, 만약에 몇 년 뒤에 다시 붙으면 누가 이기려나?”
재밌을 수밖에 없는 주제에 단원들이 다시 한번 입에 시동을 건다.
“근데, 레오의 음색이 좀 더 유니크해지기만 하면 무게 추가 바로 기우는 거 아냐?”
“그렇게 따지면 한서호는 기교만 갖추면 게임 끝인 거지.”
“갑자기 또 다른 다크호스가 나타나서 꿰찰 수도 있는 거고.”
“결국, 각자 얼마나 성장하냐가 중요하겠지.”
성장······.
턱 끝을 만지작거리며 잠자코 듣던 안드레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창 대화 중이던 누군가를 불렀다.
“필립.”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인 그가 퍼뜩 고갤 돌려 답한다.
“예, 마에스트로.”
“자네가 바이올린을 몇 살 때부터 배웠지? 또래에 비해 늦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네. 12살 때부터였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러시아 최고의 심포니 중 하나에 당당히 단원으로서 자리하고 있다.
대단한 재능이지 않나.
“그래? 그럼··· 보통 15세의 아이가 1년 반 정도 배우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 것 같나?”
“음······ 아무래도 재능이 중요할 것 같은데요?”
안드레이가 짧게 답했다.
“최상이라고 쳤을 때.”
“최상··· 개인적으론 장 오슬로 정도가 최상의 재능이라고 생각하는데, 보는데, 만약 그라면 웬만한 바이올린 소나타 정도는 연주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럼, 콩쿠르에서 입상도 가능했을까?”
“아마추어 콩쿠르에선 충분히···.”
“국제 콩쿠르라면?”
그 순간, 성심성의껏 답하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진지한 질문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넌센스라는 걸 알게 된 사람처럼 어처구니없는 목소릴 낸다.
“예? 그건 불가능합니다. 모차르트가 환생했다면 모를까. 안 그래?”
“그건 솔직히 모차르트도 못 할 것 같은데요? 독주의 존재감도 미약할 거고, 협주에선 그대로 완전히 묻혀버릴 거고.”
단원들이 동조한다.
이를 보며 안드레이도 말했다.
“역시 그렇겠지.”
악기를 놓고 지휘봉을 잡은 지 10년이 넘은 그에게도, 너무나 당연한 얘기.
하지만 다른 이도 아닌 파벨이 인증한 이야기였다.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는 건······.
‘그게,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않을 수 있는 이야기였던가.’
콧바람을 뿜으며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는 안드레이.
그리고 백스테이지 쪽에서 휴식의 끝을 알리는 인물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여전히 이상한 발음(-독어) 섞인 러시아어로 인사하며 들어서는 한서호.
안드레이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살짝 피곤한 눈치였다.
그럴 만도 하지. 결과를 듣기 위해 새벽까지 기다렸을 테니.
“괜찮나?”
“네, 오는 길이 좀 복잡하긴 했는데···괜찮았어요.”
“복잡?”
그리 먼 거리도 아닐뿐더러, 대로만 쭉 따라 걸으면 되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한서호가 헛헛하게 웃었다.
“기자분들이 많이 기다리고 계셔서······.”
“아아.”
단번에 납득이 되었다.
그리고 오는 내내 시달렸을 한서호를 안쓰럽게 쳐다본다.
그는 악보를 꺼내 보면대 위에 올렸다.
사실, 저것도 신기했지.
악보에 주석을 달아놓는 경우는 흔하지만, 저렇게까지 작정하고 행간까지 늘려서 빽빽이 적어놓는 경우는 처음 보는 경우였다.
‘엄청난 재능에 저런 노력이라면, 가능하다는 건가?’
이 와중에 소름이 돋는 건, 그 재능이 바이올린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그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피아노로 우승했기 때문이 아니다.
한때 피아니스트였던 그였기에, 그리고 결승을 함께 준비했기에 한서호가 가진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이 바이올린을 들고 연주를 준비하는 한서호.
안드레이도 다시 단상 위로 올라섰다.
그는 지휘봉을 잡으면서도 여전히 한서호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진짜 모차르트라도 되는 거냐.’
#
올해 차이코프스키의 시상식은 갈라쇼와 완전히 분리되었다.
사이에 인터미션을 가질뿐더러, 아예 입장 자체도 제한을 뒀다.
기자나 관계자들은 시상식을 객석에 앉아 볼 수 있지만, 일반인들은 시상식 후의 갈라쇼에만 참석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맨 앞자리에 시상식 무대에 올라설 수상자들을 앉혔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온 첼로와 성악, 관악 분문의 참가자들 때문에 어제보다 그 수가 배로 늘어났다.
그들 사이에 섞여 여러 인사들의 축사를 듣고, 본격적인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차례차례 호명되는 수상자들.
이번엔 그냥 불리고 끝이 아닌, 앞으로 나아가 러시아 문화부 장관에게 트로피를 받는다.
이윽고, 레오가 호명되고.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내 이름이 불리자 참가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레오를 뒤따라 무대에 서자, 장관은 이전 순서와 마찬가지로 상패를 건넸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서 장관이 입꼬릴 올리며 덧붙인다.
“자넨 또 보도록 하지.”
옆에 서 있던 레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곧 그의 말처럼.
피아노 부문 우승으로 다시 무대에 올라섰다.
#
시상식이 모두 끝난 후.
그제야 콘서트홀의 문이 열린다.
객석엔 일반인들이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세진이 대기실로 걸음을 옮겼다.
객석이 모두 들어차려면 20분 정도는 걸릴 테고, 관악기부터 차례대로 진행될 텐데, 마지막인 피아노 부문의 순서까지 오려면 시간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 뭘 하지?’
···그때였다.
“세진!”
갑자기 나타난 레오 뒤보셸.
활기차게 다가오는 그에게 김세진이 어색하게 인사했다.
가로등 아래에서 마주친 이후로 자꾸 아는 체를 한다. 부담스럽게···.
“나 지금 서호 대기실로 가려는데, 같이 가요.”
“···거길 왜 가는데요?”
“심심하니까?”
난 안 심심하다고 말하려는데 레오가 덧붙였다.
“아, 혹시··· 서호랑 불편한 건 아니죠?”
무슨 말인가, 하고 잠시 벙쪄있던 김세진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그럼 가죠!”
······가불기에 걸렸다.
‘뭐, 나도 궁금한 사람이긴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결국 도착해버린 한서호의 대기실.
두 눈 동그랗게 뜬 한서호가 자신들을 보고 있다. 책을 읽고 있었는지 한 손엔 두툼한 차이코프스키 자서전을 들고서.
딱 봐도 여기 왜 왔냐는 물음표가 둥둥 떠다닌다.
아무래도, 방해된 것 같은데?
레오를 쳐다봤다. 이 상황을 만든 그는 헤죽헤죽 웃고만 있을 뿐이다. 역시 나랑 안 맞아······.
“그게, 레오가 같이 가자고 해서······.”
“아, 들어와요.”
생각 외로 한서호는 자신들을 흔쾌히 반겼다.
그렇게 넓지도, 좁지도 않은 대기실에 둘러앉은 세 사람은 물병을 홀짝이며 이런저런 얘길 시작했다.
적당히 있다가 슬쩍 나가려 했던 김세진도 어느새 대화에 푹 빠져들었다.
주제는 당연하게도 음악.
특히 한서호가 곡을 만들기도 했었다는 사실을 이미 기사를 통해 보았기에 작곡에 대한 얘긴 더욱 흥미로웠다.
작곡하면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영감’.
자연스레 그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갔을 때쯤, 한서호가 말했다.
“사실, 이번 콩쿠르에서 두 분의 연주를 보면서 영감을 받았었어요.”
그러자 레오가 눈을 반짝이며 탁상을 가볍게 쳤다.
“와, 신기해. 나돈데! 나도 서호에게 몇 번이나 영감을 받았어요.”
듣고 있던 김세진도 얼떨결에 말을 얹었다.
“나도 조금은···.”
“역시! 그래서 그날 밤에 교정을 걷고 있었구나!”
“아, 뭐 그것 외에도 이런저런 생각 하느라···.”
괜히 얘기했나 싶어 둘러대는데, 시선에 한서호가 들어왔다.
눈동자가 점점 커지고, 입 끝이 극적으로 올라간다.
그는 어젯밤 1등에 호명되었을 때보다 더 기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으스대는 느낌은 전혀 아닌.
마치 오랜 시간 바라온 꿈을 이루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 멋진 일이라며 활짝 웃는다.
······갑작스레 들이닥쳤던 레오와 김세진이 떠나가고.
즐거운 음악 얘기 끝에 남은 여운에 나는 조금 들뜬 기분을 느꼈다.
‘영감.’
그게 이토록 가슴 벅찬 말인 줄 몰랐다.
전생이 떠오른 시점부터 나는 무수히 많은 영감을 받았고, 그걸 통해 악상을 떠올려 곡을 만들어왔다.
어느새 그게 너무나 자연스러워졌다.
그런데 이번 콩쿠르에서 그런 생각들이 조금씩 깨어졌다.
영감이란 게 타인의 연주를 보면서도 받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비단 곡뿐만 아니라 연주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도 경험했지.
그리고 이렇게 영감을 교류하는 게 콩쿠르의 순기능이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갖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그래서인지, 이젠 정말 이해가 간다.
과거, 나에게 영감을 강조했던 수많은 음악가들의 말들이.
누군가는 영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영감을 얻기 위해 자신은 영혼도 팔 수 있다고 했으며.
누군가는 영감이 영혼 그 자체라고 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유독 유난스러운 음악가가 있었다.
삶의 마지막까지도 영감을 말하던 음악가.
불과 얼마 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누군가에게 영감으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천재.
과하다 싶은 귀족적 문체로 편지를 보내오던 괴짜.
······나는 아까 읽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책이지만, 그 안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기에.
차이코프스키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대가 가운데 나는 모차르트를 가장 좋아한다. 그날 이후 쭉 그래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전생의 나는 그를 몰랐다.
알 수가 없지. 애초에 내가 죽은 후에야 그가 태어났으니까.
‘내가 완전 옛날 사람이긴 하네······.’
그런 내가 지금 그를 기리는 콩쿠르에 와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신기하다.
어쨌든.
현대에서 음악을 하게 된 나는, 그를 알게 되었고, 그의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다.
차갑고 역동적이며 동시에 낭만적이까지한 향수.
그의 음악을 듣다 보면 러시아만의 색채가 분명하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몇몇 곡들은 내가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데.
내가 갈라쇼로 선택한 곡이 바로 그중 하나다.
내가 차이코프스키의 곡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이며,
언젠가 꼭 한 번은 오케스트라와 연주하고 싶었던 곡.
그렇기에 독주 파트가 따로 없는 곡이고 내가 돋보일 수도 없는 곡이지만, 그럼에도 갈라쇼에 들고나온 곡.
모차르티아나(Mozartiana).
차이코프스키가 자신이 존경했던 모차르트에게 영감 받아 만든 곡을 연주하기 위해, 나는 무대 위로 올라섰다.
······지휘자 안드레이에게 인사 후, 열띤 박수를 보내주는 객석을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바이올린을 들어 올려 턱에 맞추고, 어두컴컴한 객석에서 과거의 편린을 들춘다.
그곳에서 내가 왜 이 곡을 그토록 연주하고 싶었는지 이유를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문득, 편지 한 통이 떠올랐다.
그래. 조금······
그답지 않은 편지였지.
······.
그리고 문득 두려워졌습니다. 나는 어떤 음악가로 기억될까. 그저 병약한 음악가로 남지는 않을까. 후대의 음악가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이 병색처럼 깊어져 가는 밤입니다.]
“그게 정말 볼프강의 편지라고?”
나는 일페르소에게 다시 한번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정말 그가 보낸 건지.
발신인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그가 확실했다.
항상 자신감에 차 있고, 유쾌하며, 괴상하기까지한 그의 편지가 이토록 음울한 건 너무나 낯설었다.
심각성을 느낀 나는 곧장 답장했다.
[이미 당신은 위대한 음악들을 수없이 만들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후대에도 기억될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그런 고민보단 어서 몸이 났는데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가장 빠른 방법으로 편지를 붙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이제는 글씨조차 쓰기 힘든 걸까?
내가 알던 볼프강의 필체가 아닌, 대필한 편지였다.
[나는 이름이 남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내가 죽은 뒤, 누군가 내 이름을 들었을 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느낄 수 있을까요? 그건 나란 사람을 증명하는 수단일 수 없습니다.
음악도 마찬가지. 결국, 고전이란 이름 속에 갇혀 옛것으로 치부될 터.
나는 영감이고 싶습니다.
내가 하이든의 교향곡을 듣고 무수히 많은 영감을 얻었던 것처럼, 나도 시간이 흘러 누군가에게 그런 음악가이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고, 그가 곡을 만든다면. 내 영혼은 그 곡에 남아 삶을 영위할 것입니다.
그러니, ‘음악의 예언가’라 불리는 나의 후원자여······.
나는 알고 싶습니다.
50년 후···100년 후···아니, 200년 후에도.
내가 누군가에게 영감이 될 수 있을지.]
······.
고갤 돌려 지휘자 안드레이를 바라봤다.
여전히 머릿속엔 볼프강의 마지막 질문이 새겨져 있었고, 은빛 지휘봉이 눈앞에서 반짝거렸다.
연주의 임박.
나는 천천히 활을 내리그었다.
그리고.
───!
······차이코프스키가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