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wants to be an actor RAW novel - Chapter 24
24화
“어어?!”
“뭐야, 영어를 할 줄 아니?”
어색한 한국어를 하던 제시카가 놀라서 영어로 물었다.
“그럼요. 영어가 더 편하신 것 같은데, 계속 영어로 말하면 될까요?”
나는 싱긋 웃으며 마찬가지로 영어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 한국인 스태프들이 서류를 뒤적거리면서 놀라워했다.
“말도 안 돼······. 여기 어디에도 외국에서 살다 왔다는 말은 없는데.”
당연히 없지.
지금 생의 한시우는 외국은커녕 서울을 벗어난 적도 없는 어린아이였다.
“아니··· 다섯 살짜리가 뭐 저리 발음이 좋아?”
“어디서 영어를 배웠길래 저렇게 고급스럽게 발음하지···?”
속에 영국에서 29년 동안 산 노아 바텐베르크가 들어있는데, 고급스러움을 지우는 게 더 어려울 거다.
나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니랑 TV를 즐겨봐서 그래요. 외국 영화를 즐겨보거든요.”
“TV? 그걸로 이 정도 실력이 된다고?”
“많이 봤어요. 정말 많-이.”
나는 두 팔을 쫙 뻗어 이마안큼 많이 봤다고 말해주었다.
“임 감독, 어학 연수 다녀왔다고 하지 않았어? 그거 다 헛거네.”
“허허, 참. 나도 우리 애들한테 이제 TV 열심히 보라고 해야 하나?”
“저건 재능 아니야? TV 많이 본다고 저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는데.”
유창하게 술술 쏟아져 나오는 내 말에 심사위원들은 다들 입을 떡 벌렸다.
휴, 오랜만에 영어로 이야기를 하니까 속이 다 시원했다.
확실히 쓰던 언어라서 그런지 한국어보다 발음도 더 수월하다.
여기서는 어머니도 삼촌도 없으니 영어를 이만큼이나 잘한다는 걸 딱히 숨길 필요도 없었다.
뿌듯한 표정으로 오랜만에 내뱉는 악센트 하나하나를 음미했다.
“하하, 이것 참. 내가 통역해주려고 했는데. 반대로 제가 여러분께 통역을 해드려야겠군요.”
가운데 여성의 바로 옆에 앉은 동양인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가운데 여성에게 뭐라 뭐라 영어로 말을 했다.
응? 저 사람은 한국인인 것 같은데 영어를 되게 잘하나 보네.
신기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데 가운데 앉은 여자가 입을 열었다.
물론 영어였다.
“그래, 시우 군. 다시 인사할까? 반가워. 나는 제시카 브라운. 이번 공연의 총책임자라고 볼 수 있지. 만약 시우 군이 오늘 오디션에 합격한다면 내가 총괄해서 연출을 맡게 될 거야.”
“제시카. 알았어요. 잘 부탁드려요.”
대번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 저 여자가 보스군.
금발의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넘기고 화장기 없는 얼굴을 한 제시카는 내가 그녀를 바라보듯 내 모습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을 숨기고 입술은 호선을 그리고 있다.
제시카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나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이토록 큰 공연의 연출가를 맡은 걸 보니 경력도, 실력도 상당하겠지?
풍겨 나오는 아우라도 대단한 게, 제법이겠어.
어렴풋이 제시카의 실력이 굉장하리라고 예측하며 나는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았다.
폴짝 올라앉으니 아직 다리가 짧아 허공에 다리가 동동 떴다.
“TV만으로 그 정도 언어 구사가 된다니. 수많은 아카데미는 문을 닫아야겠어?”
“저만큼 많이 보지 않은 거 아닐까요? 제가 즐겨 보는 드라마가 하나, 두울, 세엣······.”
여전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손가락을 하나씩 굽혀 가며 세었다.
어디 드라마만 봤겠는가.
최신 영화부터 화질이 안 좋은 예전 영화까지.
안 보는 영화가 없었다.
아, 어머니가 조용히 리모컨을 뺏어가는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는 제외였다.
어머니, 제가 이래 봬도 속은 29살이나 먹은 청년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없고.
항상 조용히 앞부분을 몰래 보고 있으면 어떻게 아셨는지 와서 채널을 돌려 버리신다.
저번에 한 번은 자꾸 이런 식이면 리모컨을 압수하겠다고 불호령을 내리셨다.
밤에 하는 영화는 대부분이 그런 관람가인데 말이다.
“뭐, 어찌 됐든. 시우 군이 영어를 잘 쓰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그건 그거고 연기는 따로 봐야겠지? 소통 이전에 연기를 잘해야 하는 건 당연하니까. 그럼 우선 연기부터 보고 시작할까?”
“네. 물론이죠.”
고개를 끄덕이며 폴짝 의자에서 내려왔다.
앉아서 해도 되는 것 같지만 내가 택한 장면은 서서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것이 분명했다.
2차 오디션은 1차와는 다르게 자유연기가 아니다.
공고문을 줬을 때 같이 나눠줬던 오디션용 대본 속 한 장면 연기하라는 지시였다.
“준비되면 편하게 시작하면 돼.”
고개를 끄덕이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가 택한 장면은, 극 중 주인공인 손자가 할머니와 처음 둘이 남겨졌을 때, 눈치 보며 슬쩍슬쩍 말을 거는 상황.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쉰 나는 우물쭈물한 제스처를 취하며 슬쩍 연기를 시작했다.
“할머니······ 저는 어디서 자면 돼요?”
대사를 뱉음과 동시에 옅게 젖은 눈으로 다섯 명의 심사위원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정말 그들이 나를 거둬줄 마지막 구명줄이라도 된 것처럼.
대본상, 할머니가 대꾸 없이 흘깃 나를 노려본다고 되어 있다.
움찔.
진짜 그 시선을 받은 것처럼 살짝 몸을 움츠렸다가 다시 용기를 내어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아빠가 자신을 버리듯이 이곳에 맡겼다는 것을 잘 안다.
이 무책임한 아빠와 자신에게 무관심해 보이는 할머니는, 둘 사이의 살벌한 대화를 이 어린아이 앞에서 아무렇게나 하는 위인들이었으니 말이다.
자신은 이곳에서 나가면 이제 더 갈 곳이 없다.
일찍이 도망친 엄마를 찾으러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아빠가 버리듯 맡긴 할머니 집에서 할머니는 자신을 쫓아 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들어오라고 살갑게 말해준 것도 아니지만.
할머니의 집 안은 캄캄하다.
노년의 아무런 낙이 없이 이 집만이 남은 노인의 공간이다.
나는 캄캄한 집안이라는 지문을 곰곰이 떠올리며 주춤주춤 낯선 공간을 탐색하듯 오디션장을 돌아다녔다.
“하, 할머니······ 제가 이 램프를 조금 켜도 될까요?”
쌀쌀맞은 할머니의 대꾸가 들려올 차례.
물론, 지금은 상대역이 없기에 오롯이 내가 상대의 목소리를 상상해야 한다.
[할머니 : (퉁명스럽게) 기름 닳아. 뭣 하러.]대본에 쓰인 할머니의 대사를 떠올리며 고개를 살짝 수그린다.
“······네. 죄송해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대로 풀이 죽어 있으면 할머니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 이후 때로는 어색한, 때로는 진짜인 것 같은 미소를 지어가며 여러 이야기를 조잘거렸다.
하지만, 그런 내 목소리는 할머니의 침묵 속에 고스란히 묻힌다.
할머니는 이제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이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불편한 걸음을 옮긴다.
잠시 시무룩해졌던 나는, 그런 할머니의 모습에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는 아빠의 집에서 나올 적에 둘러맸던 배낭을 서둘러 뒤적거렸다.
실제 소품은 없는, 마임으로 된 연기.
과거 400년 전의 무대에서는 소품이 없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내게는 무리 없었다.
“할머니!”
볼일은 끝났으니 어린 손자에게 어떠한 할 말도 없다는 듯이 저 안쪽 작은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할머니를 붙잡듯 부른다.
나는 할머니가 뒤돌았다고 생각하며 표정이 환해진다.
“이것 좀 보세요. 제, 제가 할머니 드리려고 아빠 집에서 가져온 거예요.”
며칠 새에 밀려오는 수마를 견뎌내며 발음 연습을 한 보람이 있었다.
또박또박 흘러나오는 손자의 대사는 원래 원작의 7살인 아이의 성장 속도에 얼추 맞는 것처럼 들린다.
여기서 나름대로 내가 포인트를 준 게 있다.
원래 대본에서 손자의 대사 속 집에 대한 설명은 그냥 ‘집’이었다.
그걸 보고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아이에게 진정한 집이란 게 있었을까?
짐짝처럼 자신을 두고 나가버린 엄마와 있던 곳도 아니고.
허구한 날 친구들을 데려오거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느라 집을 비운 아빠와 함께 사는 집.
그 집을 진정, 자신의 집이라고 여겼을까?
다시금 짐짝처럼 할머니 댁으로 보내졌을 뿐인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대본의 대사를 살짝 수정했다.
그냥 집에서 아빠의 집으로.
그 집은 손자에게 있어서 진정한 자신의 집이 아니다.
이제 극이 진행되면서 할머니의 집이었던 음침한 곳이 손자와 할머니의 집이 되어주겠지.
그때야 비로소 손자에게 집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작은 차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내겐 극을 관통하는 중요한 대사 수정이었다.
그렇게 유독 ‘아빠 집’이라는 걸 강조한 내 손에 들린 건 할머니를 위한 자그마한 선물이었다.
나는 애써 밝게 웃었다.
여기서도 쫓겨나면 아빠 집에도 돌아갈 수 없는 처지이므로.
***
조이수는 눈 앞에 펼쳐지는 36번 참가자, 한시우의 연기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지금 그는 제시카의 밑에서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전에는 한 극단을 책임지는 연출가였다.
브로드웨이에서 ‘조’로 통칭되었던 그는 작은 극단에서 총 연출을 맡을 정도로 실력이 출중한 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아주 젊은 나이에 일궈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이수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요?’
그럼에도 처음 레인보우 픽처스 사의 그 유명한 제시카 브라운의 제안을 들었을 때, 그는 얼른 믿어지지 않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나를?
아무리 자신이 조금 잘나간다지만, 조이수 말고도 내로라하는 연출가들은 브로드웨이에 발에 차일 만큼이나 많았으니까.
왜? 라는 의문은 얼마 안 있어 풀렸다.
제시카는 일을 할 때면 상당히 냉철해지고 한 가지에 몰입해버린다.
나쁘게 말하면 ‘시야가 좁아진다’.
그만큼 빛나는 아이디어를 내놓을 때도 있지만, 보다 넓은 시야를 간과하는 버릇이 있었다.
물론 그걸 상쇄시킬 만큼 그녀의 아이디어나 연출이 독보적이었기에 레인보우 픽처스 사 내에서도 제시카의 명성은 이어져 갔지만 말이다.
조이수는 그런 그녀에게 유일하게 옳은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안목은 비슷하면서도 달랐기에, 제시카는 다른 사람의 말은 바로 이해를 못 해도 조이수의 의견만은 대부분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이 환상의 팀워크는 제시카가 더 큰 연출가가 되도록 도왔고, 조이수 역시 레인보우 픽처스 안에서 이름을 떨치게 되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그런 조이수 이기에 일방적인 제시카의 결정에, 때로는 반기를 드는 역할을 맡고는 했다.
그런데 이번 ‘RUN’의 한국 공연에서 조이수는 제시카와 실로 오랜만에 완벽하게 합치되는 의견을 내놓게 되었다.
참가자 36번. 한시우.
이 작은 아이가 보여주는 연기는 실로 놀라웠다.
영상으로 봤을 때도 그랬지만, 실제로 보니 다섯 살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노련한 연기였다.
그중에서도 그 아이의 상처받은 듯한 표정 연기와 섬세한 제스처는 환상적이었다.
1차 오디션의 영상을 보고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극본을 연기하는 참가자의 매력에 제시카가 이끌린 거라고 생각했다.
후에 확인해보니 그 대본이 자작극이라는 것도 놀라웠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보니 대사의 독창성보다도 제시카를 자극한 것은 저 표정연기가 아닐까 싶었다.
정말 상처를 받아본 자만이 지을 수 있을 것만 표정.
극한의 상황에 처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체념했던 자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
겨우 다섯 살밖에 안 된 아이가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느냔 말이다.
이해하려 할수록 이해할 수 없었다.
“하아······.”
이 탄식에 가까운 숨소리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조이수가 낸 것이 아니었다.
고뇌에서 빠져나온 조이수는 짐짓 놀라며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남의 연기를 볼 때만큼은 냉철하기로 유명한 제시카일진대.
그녀가 저 작은 아이의 연기를 보면서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고 있었다.
아이가 해맑게 웃고 있으면 기특하면서도 안쓰럽다는 듯이.
시무룩한 면모를 보일 때면 미간을 좁히면서 안타깝다는 듯이.
적어도, 지금의 제시카는 오디션을 보고 있지 않음이 분명했다.
그저 한 명의 관객이 되어서 ‘배우 한시우’의 연기를 감상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자기 자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