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wants to be an actor RAW novel - Chapter 23
23화
“자작극이어도 상관없단다.”
“녜!”
문희성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보고 확답을 주었다.
나는 종이에 정신없이 무언가를 써내려 가느라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아직 이 문화권에서 다채로운 작품을 보질 못해 RUN의 손자 캐릭터에 딱 맞는 장면을 떠올려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지.
내가 과거에 적어 내려갔던 극본 중 하나를 끄집어내는 수밖에.
“와······. 시우야. 이게 다 뭐야?”
“바뻐요. 쉬잇.”
미안하지만, 지금 말을 걸면 내가 당시 어떤 대사를 썼었는지 제대로 떠올려낼 수가 없었다.
지금 적어 내려가는 것은 내가 바텐베르크의 석탑 꼭대기 방에 갇히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적은 대본이었다.
무려 십 년, 아니, 이 작은 몸으로 환생한 것까지 계산하자면 15년이 훌쩍 넘는 과거에 쓴 대사이지만, 상관없었다.
바로 어제 쓴 것처럼 생생하기만 했으니.
다른 대본도 대부분 그렇지만, 특히나 내가 쓴 대본은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다시 생각해낼 수 있었다.
아직 공작 각하인 아버지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을 때 나온 대사들.
그가 그토록 냉혈한이지 않을 거란 기대감이 남아있을 적에 나온 독백.
적어 내려가는 대사들은 하나같이 바보 같은 미련을 잔뜩 품고 있었다.
이제 보니 말도 안 되는 엉터리 같은 소리였지만, 그때만 해도 믿고 있더랬다.
그가 하나뿐인 막내아들을 이대로 저버릴 리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 믿음은 무참히 깨졌다.
“후하.”
이 정도면 되겠지 싶어서 휘갈기던 연필을 내려놓았다.
“봐, 봐도 되겠니?”
옆에서 커다랗게 놀란 눈으로 내가 하던 짓을 지켜보던 문희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녜, 보세요.”
나는 흔쾌히 종이 뭉치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문희성이 떠다 준 물을 꼴깍꼴깍 삼켰다.
쉬지 않고 극본을 생각해내느라 목이 너무 말랐다.
“······하. 시우야, 이게 진짜 네가 쓴 거라고?”
“우웅, 보셔짜나요.”
소파에 늘어져서 잠시 숨을 돌렸다.
눈앞에서는 문희성이 내가 쓴 네 장의 종이를 휙휙 넘겨보며 연신 헛웃음을 내뱉고 있었다.
“이건 연기뿐만이 아니라······. 세상에.”
뭐라 뭐라 작게 중얼거리는 문희성의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잼잼 하듯이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빠른 시간에 너무 많은 글씨를 쓴 것인지 오른손이 저렸다.
아직 이 작은 손으로는 글씨를 작게 쓸 수가 없어서 생각보다 종이가 많이 필요했다.
그래도 이제 제법 한글도 잘 쓰게 되었단 말이지.
매일매일 어머니의 공책을 빌려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하, 하하. 시우야, 너······. 도대체.”
놀라움에 말을 잇지 못하는 그에게 다가가 톡톡 쳤다.
“고럼 이제 촬영해요!”
문희성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찰칵, 탁.
어두컴컴한 회의실 한켠에는 벽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커다란 스크린이 내려와 있었다.
회의실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우렁찬 톤의 대사가 쏟아져 나왔다.
-아니! 그건 내가 바라던, 게······, 게! 아니야!
특이한 점은 스피커에서 쏟아져 나오는 목소리가 앳되다는 것이다.
광화문 문화센터의 한 회의실.
제시카 브라운과 그녀를 둘러싼 미국인, 한국인 스태프들이 진지한 얼굴로 정면의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오늘은 연극 RUN의 주인공인 ‘손자’ 역 1차 오디션 심사 날이었다.
스크린에서는 10살 이하의 아이들이 차례대로 자유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연령대도 아주 다양했다.
-아녕하세요. 여섯 살, 강······ 민우,입니다.
여섯 살부터.
-안녕하십니까! 저는 백악 초등학교, 2학년, 2반! 최성문입니다! 제가 준비한! 연기는!
아홉 살, 열 살에 이르는 아이들까지.
모두가 긴장된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자신이 준비한 연기를 펼쳐나갔다.
지금까지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의 연기 영상이 틀어졌건만, 제시카는 무료한 표정이었다.
함께 영상을 지켜보고 있는 스태프들의 얼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국인 스태프들은 역시 무리였지, 라는 혼잣말과 함께 안색이 점점 어두워져만 갔고, 함께 자리한 레인보우 픽처스 측 스태프들 역시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다들 대화는 없었지만, 연령 제한을 높여야 하지 않을까 고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렇게 따분하고 형편없는 연기 영상을 보기를 수차례.
결국, 제시카는 잠시 쉬어가자며 영상을 멈추려 했다.
그러던 그녀의 손이 멈칫 허공에 멈춰졌다.
참가번호 36번.
단출한 번호가 지나가고 바로 시작되는 영상.
-아니야. 이대로 나를 버리시진 않으시겠지.
쓸쓸한 음성이 회의실 안을 가득 메웠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덧붙인 간단한 인사말조차 없었다.
자신의 이름마저 무엇인지 밝히지 않은 참가자는 많이 어려 보였다.
그런데, 초등학생 참가자들보다 발음과 발성이 또렷했다.
제시카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책상에 팔을 기대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행복했던 시절도 있었잖아? 처음 내가 시를 썼을 때. 맑은 웃음과 함께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었지.
허공을 바라보며 황홀하다는 듯이 눈을 즈려감는 참가자.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다시금 쓸쓸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초점 없이 허공을 바라보며 대사를 이어나갔다.
-아아······ 그런 시절도 있었건만, 왜 이렇게 됐을까. 그땐 내가 무얼 하든 행복해하셨는데.
-어쩌면, 어쩌면 그때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긍정적인 기대를 품은 듯 옅은 미소를 지은 화면 속 아이가 표정과 같은 감정을 담은 목소리로 대사를 이어갔다.
-지금이라도 저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아들아 보고 싶었다고 말하며 안아주시지는 않을까.
-내가 하는 모든 말을 사랑해주실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아마 그러지 않으실 거다.
하지만 기대에 찬 얼굴도 잠시, 아이는 이내 푹 고개를 떨구었다.
여러 차례 고개를 가로저은 그는 다시금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중얼거리며 느린 걸음으로 좌우를 왔다 갔다 가로지른 참가자가 어느 순간 가운데에 우뚝 멈춰 섰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아버지를 위한 시를 써 내려갈 수 있을 텐데.
애정이 담겨 있는 음성이었다.
동시에 서글픔이 잔뜩 묻어있는 음성이기도 했다.
참가자는 끝까지 카메라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순간도 제 얼굴이 가려지게 한 적은 없었다.
대 회의실에 앉아 있는 모두가 참가자의 변화무쌍한 표정을 지켜볼 수 있도록 안정된 시선 처리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프로의식도 보여주었다.
“이거지.”
제시카는 아이의 연기를 지켜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말에 그녀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놀라서 제시카를 돌아보았다.
그가 뭐라고 물으려던 찰나, 제시카가 손을 들었다.
“잠깐 쉬자.”
“네?”
총책임자인 제시카의 말에 일단 영상은 일시 정지되었다.
이제 막 36번 참가자의 연기가 끝났을 때였다.
무슨 평이라도 내릴 줄 알았건만.
다소 뜬금없는 그녀의 휴식 선언에 다들 뭔가 싶어서 눈을 깜빡였다.
그 시선을 오롯이 받던 제시카는 잠시 머리를 굴리더니 말했다.
“식사! 점심 드시고 오시죠.”
제시카는 그렇게 말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의 입구로 향했다.
“이수! 지금까지 본 영상 가지고 따라와.”
나가면서 떨어진 제시카의 불호령.
그 말에 그녀의 바로 곁에 앉아 있던 남자, 조이수는 헐레벌떡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는 제시카 바로 밑에서 일하는 조연출로 한국계였다.
걸출한 실력으로 브로드웨이에서 제시카의 눈에 띈 조이수는 레인보우 픽처스로 스카우트되어 그녀를 보좌하고 있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한국어를 잘하는 만큼 이번 공연에서 제시카 다음으로 중책을 맡았다.
조이수는 재빠르게 회의실에서 벗어나 벌써 저 멀리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 제시카 옆으로 향했다.
“제시카, 아직 열한 시예요. 무슨 점심을 벌써 먹으라고 해요?”
“응? 하지만, 핑계가 필요했는걸.”
“무슨 핑계요?”
“이수. 방금 봤잖아. 36번의 놀라운 연기를.”
“······네. 지금까지 참가자들과는 확연하게 달랐죠.”
해당 참가자의 연기를 본 스태프 전원은 입을 떡하니 벌렸었다.
물론 조이수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 연기를 보고 나서 어떻게 다른 참가자들의 연기를 볼 수 있겠어? 리프레쉬가 필요해. 지금 다른 연기를 보면 아무도 성에 차지 않을 거야. 객관적일 수가 없어.”
“그래서 점심을······?”
“응, 겸사겸사.”
그게 무슨 겸사겸사냐고 묻고 싶었지만, 유능한 보좌는 입을 다무는 걸 택했다.
제시카가 이런 식으로 나올 때면 잠자코 그녀의 말을 따르는 것이 나았다.
“아무튼. 영상 가지고 왔지?”
“네, 여기 있습니다.”
“그럼 샌드위치라도 먹으면서 다시 보자구.”
제시카는 매일 먹던 곳으로 샌드위치 두 개를 시키라고 지시하며 자신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36번의 연기를 말이야.”
***
고전극을 하던 친구인가?
제시카는 샌드위치를 베어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다시 한번 36번 참가자의 연기를 보는 중인데, 묘하게 다른 참가자들과는 결이 달랐다.
그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는데.
다른 참가자들과는 다른 면모가 눈에 도드라졌다.
방송계로 진출하려는 야망을 품은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역 배우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특징.
자유로우면서도, 발성과 같은 기본기가 아주 제대로 잡혀 있다.
외모도 귀엽고 잘생긴 편이었지만, 이 아이에게는 화면 속에서 자신이 제일 각광 받으려는 억지스러움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연기를 자연스럽게, 잘 들리게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수. 이 아이는 무조건 데려가야 해. 분명 다른 아이들보다 무대 경험이 있을 거야.”
“그걸 영상만 보시고 알 수 있습니까?”
객관적인 평을 위해 참가자들의 프로필은 영상을 다 본 뒤 확인하기로 했었다.
조이수는 아무리 그래도 대여섯 살 남짓해 보이는 아이의 짧은 영상을 보고 너무 속단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제시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직접 보면 알 수 있겠지. 오디션 날짜 최대한 빨리 잡아보자고. 이 아이를 메인 캐스팅으로 두고, 더블 캐스팅은······ 한번 보자. 누가 이 아이와 함께 서고도 괜찮을지.”
“네, 알겠습니다.”
***
극의 해석을 바탕으로 자유연기를 선택했고,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연락이 올 줄이야?
“시우야, 잘할 수 있지?”
“후하, 시, 시우야. 청심환 사다 줄까?”
“애한테 그걸 하나 다 먹여도 되나?”
1차 오디션에 당당히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지금 나는 어머니, 삼촌과 함께 광화문 문화센터에 와 있었다.
2차 오디션을 보기 위해서.
“시, 시우야. 이거 일단 마시자.”
커다란 건물을 둘레둘레 지켜보며 신이 난 나와는 다르게 어머니와 삼촌은 긴장해서 계속 나에게 말을 거셨다.
특히 삼촌은 왜 자기가 더 긴장한 건지···. 이렇게 심장이 작아서 무대에는 어떻게 서나 싶다.
또 자꾸 뭔가를 마시라고 하는데······.
“윽. 시러. 삼촌 머거.”
뭐냐, 이 쓴 향은.
나는 다시 삼촌에게 내밀었다.
“와, 시우야. 너는 안 떨려?”
“움, 괜차나.”
떨리는 것보다는 얼른 이번 공연의 연출가를 만나보고 싶었다.
이렇게 거대한 건물 안에 있는 무대는 어느 정도일지도 궁금하고.
“헉! 시간 다 됐다. 얼른 가자!”
열심히 두리번거리던 나는 삼촌의 손에 이끌려 오디션장으로 향했다.
“36번 참가자 들어가세요.”
뽀짝뽀짝.
안내 스태프의 말에 따라 오디션장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 대형극이라 그런가.
오디션장부터 ‘비상철또’ 극장과는 다르게 깔끔하고 넓었다.
정면에 보이는 긴 테이블에 심사위원들이 앉아 있었다.
총 다섯 명.
금발의 여성을 중심으로 양쪽에 두 명씩 앉아있다.
오우, 저 사람이 미국인인가?
정말 유럽인과 비슷하게 생겼군.
나는 동양인 세 명과 미국인 두 명으로 이뤄진 심사위원들을 훑어보았다.
“안냐세요.”
일단 배꼽인사를 했다.
내 인사에 가운데에 앉아 있던 여성, 제시카가 입을 열었다.
“반카워요. 나는 제시카 브라운. 아녕하쉐요? 씨우 군, 여기 안좌요.”
어라, 이 사람 한국어가 아직 서툰 모양이다.
나는 제대로 발음이 안 되는 그녀의 한국어를 듣고는 다시 인사했다.
“Hello, lady.”
정중한 영국식 인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