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wants to be an actor RAW novel - Chapter 90
90화
“저번에 여기서 나오는 관객들이 울고 있는 걸 봤어.”
“우와, 진짜? 어떤 공연일까. 너무 기대된다.”
아쉬워하던 것도 잠시, 금방 기대에 차서 눈을 반짝이는 남연수를 데리고 프리덤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게 된다.
오늘이 영국에서의 마지막이기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럼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떠나온 걸 두고두고 후회하겠지.
극장의 내부는 어떨지.
그 극장에서 올리는 공연은 어떨지 궁금해서 잠도 못 잘 것 같았다.
40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완전히 보존할 수는 없었겠지만, 웨스트엔드 거리에 위치한 대부분의 극장이 최소한의 보수만 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다른 런던 거리보다 조금 더 고풍스럽고 아련한 느낌이 절로 드는 거리이기도 했다.
차분하고 그리 밝지 않은 조명 아래 드러난 극장의 내부는 예스러움이 물씬 묻어나는 고고한 인상이었다.
프리덤 극장 내부는 아담하지만, 아주 깔끔했다.
목재가 깔린 나무 바닥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길이 잘 들어 있어 발을 편안하게 받쳐 주는 느낌이 들었다.
정면에 보이는 티켓 부스 역시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목재로 올린 부스에 대리석으로 짜 맞춰져 있는 데스크.
꼼꼼하게 유지 보수를 해오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다만… 외관을 보면 오스카 극장의 느낌이 남아 있었는데 내부를 보고 있자니 상당히 다르게 느껴졌다.
역시 프리덤 극장이라고 이름이 바뀌고 주인이 바뀐 것일까.
아니면 이것도 다 세월의 흔적 탓일까.
이 극장이 오스카라는 이름을 버리고 프리덤 극장이라는 이름을 단 지는 얼마나 되었을까.
이름만큼이나 낯설게 느껴지는 극장의 전경에 나는 씁쓸함을 애써 집어삼켰다.
티켓 부스에는 두 명의 직원이 앉아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옅게 미소를 띤 직원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다.
“실례합니다.”
나는 티켓 부스에 다가가 나와 남연수, 그리고 스태프들의 표까지 찾았다.
우리는 각자의 표를 들고 로비 한구석에 옹기종기 앉았다.
“입장까지 이제 20분 남았어. 너무 떨린다.”
“으응.”
“영어 대사가 너무 빠르면 어쩌지? 반도 못 알아들을 것 같은데…….”
옆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남연수가 뭐라 뭐라 계속 종알댔지만, 내 귀에는 다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로비 구석구석을 살피며 오스카 극장의 흔적이 남아 있나 찾기 바빴다.
예전의 홀이 이 정도 크기였던가.
이보다는 조금 더 넓었던 것 같은데…….
아, 저 커다란 시계 때문에 실내가 좁아 보이는 탓인가.
포스터와 배너를 이런 식으로 걸 수 있다니.
저렇게 작품을 홍보할 수 있다는 걸 보면 단원들이 얼마나 흥분했을까.
낮이지만 어둑한 실내를 비추는 조명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과거 오스카 극장에 조명 같은 게 있었을 리 없다.
이번에 영국에 와서 영국에서 다른 극장을 많이 가보기도 하고, 심지어 무대에 오르기까지 했는데.
다른 극장에 다 있는 조명이 이곳 오스카…아니 프리덤 극장에 있으니 왜 이리 신기한지.
이제 노아 바텐베르크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이는 여기 없다.
애초에 노아 바텐베르크가 ‘황금가면’이라는 것은 오스카 극단 사람들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으니 다른 어떤 곳에 기록되어 있을 리도 만무하다.
이제 나를 기억해주는 모든 이들은 사라졌지만, 이 공간은 남았다.
나는 기억 속의 천장보다 낮아 보이는 천장을 멀거니 올려다보며, 원래 이 극장의 주인인 오스카를 마음속으로 불렀다.
오스카 피트.
그는 지독한 남자니까 영혼이 되어서도 이곳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되도록 빨리하고 싶었지만, 너무 늦어 버린 말.
내가 돌아왔다고.
400년이 지나 너무나 달라져 버린 그의 극장에서 조용히 읊조렸다.
“……우야, 시우야! 내 말 듣고 있어?”
감상에 젖어있던 나는 옆에서 부르는 남연수의 외침에 현실로 돌아왔다.
“우웅, 다 들었어.”
“아닌 거 같은데.”
“아냐. 다 들었어.”
“시우 너 눈 뜨고 잔 거 아니지? 눈도 이렇게 뜨고 있던데. 으에.”
남연수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말했다.
부러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날 놀릴 심산인가 보다.
덕분에 오랜 추억 감상에 젖어있던 몽글한 마음이 달아나 버렸다.
“휴우, 내 팔자야.”
내 한숨 소리를 듣고, 현재의 동료인 남연수는 어떻게 한숨을 내쉴 수가 있냐며 나를 짤짤 흔들었다.
못된 어른인 김산호는 이게 바로 예능이라며 신나게 우리 둘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고 말이다.
***
와아아-!
프리덤 극장에서 관람한 공연이 다 끝나고 커튼콜이 한창인 무대.
나와 남연수도 감명받아 기립 박수를 보냈다.
비록 명작이라고까지는 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웨스트엔드에 위치한 극장에서 여는 공연.
기본적으로 탄탄한 실력이 빛나는 재밌는 극이었다.
“주연 배우들 연기 너무 잘하더라. 무대가 좁다고 느껴질 정도였어.”
연극 연기를 한번도 안 해본 남연수의 혜안에 살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게 확실히 퍼스널 스페이스가 한국과는 다른 영국인만큼 무대 블로킹이 거침없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좁은 무대이긴 하지.”
무대와 객석의 거리.
극장 안의 구도.
이것만큼은 오스카 극장 때와는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좋은 공연도 공연이었지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구도에 가슴이 벅차 쉽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입을 열면 흥분해서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눈물이라도 솟구칠 것 같았다.
비록 객석은 현대식으로 푹신한 쿠션을 깐 모양새로 바뀌었지만, 목재로 만들어진 무대는 그대로였다.
아마 저것도 지금까지 수많은 유지 보수를 했겠지만, 적어도 크기와 모양새는 과거의 그것과 아주 비슷했다.
“그렇지? 그래도 공연 스케일이 하나도 안 작아 보였어.”
“오, 연수 형. 연극 좀 많이 봤나 봐? 평이 제법인데.”
“어어? 헤헤……. 아빠가 평소에 평론 기사 같은 것도 많이 읽으라고 하거든.”
내 칭찬에 남연수는 쑥스러워하면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혹독한 조기 교육의 결정체와 다름없는 남연수다운 대답이었다.
확실히, 자유도는 부족하긴 하지만, 남연수의 아버지가 연기 교육 하나만큼은 열과 성을 다하는 것 같기는 하지.
“영어 공부 열심히 해서 다시 올 거야. 대사를 반은 못 알아들은 것 같아서 아쉬워.”
“그런데도 재미있었어?”
“응! 배우들의 표정이나 목소리 톤이 워낙 명확해서 흐름은 대충 알 것 같던걸? 역시 본고장은 다른가 봐.”
“아 그거 뭔지 알지.”
남연수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김산호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느새 스태프 한 명이 우리의 대화를 담기 위해 카메라를 돌리는 중이었다.
이제는 하도 카메라가 옆에 있는 것에 익숙해졌는지 의식도 못 하고 있었다.
아, 공연 내용은 촬영하지 않을 거라는 전제하에 미리 극장에서의 촬영은 허가를 받아놓았다.
물론, 거기에는 내가 이번 영국 RUN 공연의 조니라는 걸 이곳 극단장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 크게 작용했지만.
“너희 천생 배우는 배우인가보다. 나는 영어로 하도 빠르게 얘기해서 솔직히 이게 좋은 극인지 아닌지 판가름이 안 나. 뭘 알아들었어야 말이지.”
그의 말에 스태프들 몇 명도 동감한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대사 내용을 몰라도 대충 알 수 있는데. 이상하다.
나 역시 한시우로 다시 살아가게 되면서 어린 나이에 한국어를 잘 몰라도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얼마나 재밌었는지 모른다.
물론, 채널을 돌리다가 외화가 나오면 당연히 그쪽이 더 재밌긴 했지만.
이제는 다 똑같이 좋다.
얼른 돈 많이 벌어서 이사도 하고 TV도 큰 걸로 사야겠다.
우리는 인원도 많고 챙길 장비도 많아, 공연이 끝난 후에 제일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빠져나왔다.
“시우! 잠시만요.”
그런데, 극장을 빠져나가려는 우리의 뒤로 누군가가 나를 크게 부르는 것이 아닌가?
“뭐지?”
돌아보자, 그곳에는 짙은 갈색 머리에 녹안을 가진 여자가 나를 보며 반갑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순간 숨을 참아야 했다.
오스카 극단에서 적응을 못 하고 내게 제일 먼저 다가와 준 한 사람.
내가 힘들 때마다 먼저 단원들을 이끌고 내 걱정거리를 불식시키는 데 일조한 사람.
분명 ‘그 사람’과 닮지는 않았다.
머리 색과 눈 색을 제외하고는 이목구비 그 어떤 곳도 닮지 않았는데…….
바이올렛 피트.
그녀가 떠오르고 말았다.
한때 노아 바텐베르크를 잠 못 들게 했던, 첫사랑의 이름 말이다.
***
바이올렛 피트는 오스카 극단의 단장, 오스카 피트의 딸이었다.
부유한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난 바이올렛 피트는 어디에 있던 자신의 에너지를 뿜어내던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다만, 그때의 런던에서 여자가 배우를 하는 것은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남장을 하고 무대에 올랐다.
미성이 필요한 역할이나 여자 역할을 주로 맡았는데, 남장을 하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더 높은 하이톤의 목소리를 숨겨야 했다.
워낙 바이올렛이 극단원들을 챙기는 걸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녀와 나는 서로 숨겨야 할 비밀이 있다는 걸 매개로 급속도로 친해졌다.
극단에서 그녀가 내 유일한 또래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연기하면서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때면, 항상 그녀의 한 마디에 길이 보이기도 했고, 위안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열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의 내가 끝없는 매력을 지닌 바이올렛에게 빠지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우! 제가 정말 팬이에요. 제가 RUN 공연을 세 번이나 찾아가서 봤다구요.”
우리를 멈춰 세운 그녀는 빠르게 걸어와 내 팬임을 자처했다.
그 말에 남연수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나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오늘 저희 극장에 왔다는 소식에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죠. 저는 프리덤 극장의 극단장, 로엘 차일드예요.”
“반가워요, 로엘.”
“공연은 만족스러웠나요?”
“그럼요.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그거 다행이네요.”
로엘은 내 평에 눈에 띄게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사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시우?”
“그럼요.”
나는 로엘이 건네준 사인지에 정성스럽게 사인을 했다.
사인을 건네면서 나도 모르게 로엘을 빤히 바라보고 말았다.
“왜 그러죠?”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음, 로엘. 이 극장은 언제 생긴 거예요?”
거기다 대고 내 첫사랑을 생각나게 하네요, 라고 할 수 없기에 말을 돌렸다.
그런데 막상 내뱉고 보니, 진심으로 궁금했다.
오스카 극장이 있던 자리에 대신 들어온 프리덤 극장.
이 극장이 언제 생긴 것인지 묻기에 가장 적합한 이가 눈앞에 등장하지 않았는가?
내 질문에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로엘은 나와 카메라를 한번 쳐다보더니 안쪽 복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에 관심이 있으신 거군요. 그거라면 제가 잘 설명해드릴 수 있죠. 이쪽으로 오세요.”
로엘이 가리킨 곳으로 들어서자.
그곳에는 프리덤의 역사가 적혀 있는 기나긴 복도가 나타났다.
……역대 극단장들의 사진이 걸린 회랑 같은 복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