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24)
세 사람은 아르센을 기다리며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수군거리고 있었다.
작전 회의라도 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던 것도 잠시, 심판 역할을 맡은 하인 하나가 깃발을 앞으로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하늘 높이 들어 펄럭이는 것으로, 대련이 시작됐다.
“갑니다!”
대련인 만큼, 아르센은 먼저 소리친 뒤 공격을 시작했다.
처음으로 노리는 상대는 남들보다 한 발자국 앞에 서 있는 키 큰 창잡이, 로논이었다.
그가 대비하기도 전, 순식간에 목 부분을 때려 항복을 받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공격하고자 덤벼든 순간, 아르센은 상대의 반응이 다소 이질적임을 깨달았다.
‘오······.’
놀랍게도, 상대는 아르센이 달려드는 속도에 적절히 반응해 물러섰다.
대부분 정수를 취한 고위 기사의 움직임에 당황하고, 미처 반응하지 못해 당하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이것이 일대일 승부였다면 곧장 쫓아가 끝장을 냈을 것이다. 움직이는 속도 역시 아르센 쪽이 훨씬 빨랐으니.
아르센이 로논을 끝장낼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옆에서 들어온 협공 때문이었다.
“쳐!”
“오른쪽 막는다!”
도끼, 그리고 대검.
아르센은 몸을 살짝 틀어 도끼는 피하고, 대검은 후려쳐서 아예 손에서 놓치게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대검을 든 기사, 샤미는 아르센이 대검을 후려치는 순간에 맞춰 능숙하게 그 힘에 무기를 맡겼다. 마치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한 사람처럼.
결과적으로 무기는 어마어마한 힘으로 튕겨 나갔을지언정, 손에서 빠져나가지는 않았다.
“하압!”
그때, 뒤에서 다시 창이 찔러왔다. 아르센은 고개를 살짝 틀어 피했다.
느릿하게 투구를 스쳐 지나가는 창. 그것을 보며, 아르센은 몸을 돌려 곧바로 로논에게 반격을 가했다.
노리는 부위는 급소가 아닌 몸통. 그중에서도 옆구리.
확실하게 맞추고자, 피격면적이 넓어 피하기 어려운 부위를 노린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르센의 공격은 허공을 갈랐다.
‘또?’
그 이유는 간단했다.
로논은 애초에 창을 찌를 때부터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빗나갈 것 같다 판단한 순간 곧바로 몸을 굴린 것이다.
제대로 공방을 나눴다가는 자신이 상대도 안 될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움직임이었다.
‘뭐 이런······.’
이를 쫓아가 마무리 지을 수도 없었다.
적당히 간격을 유지하고 있던 샤미와 달티스가 미리 아르센이 접근할 만한 위치를 선점했기에.
‘이 인간들.’
아르센은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을 완벽하게 지웠다.
조금 전의 행동 패턴이 암시하는 바는 명확했다.
‘고위 기사를 상대하는 데 능숙해.’
보통 기사는 여러 명이 한 명을 협공하는 기술을 따로 연마하지 않는다.
본래 기사 간의 실력 차이라는 것이 그리 크지 않아, 제대로 훈련받은 기사라면 별도의 합격술 없이도 이 대 일 정도는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는 탓이다.
실제 벨루안에서도 제대로 된 기사 두 명과 싸워 이길 실력자는 라뮌 한 명 정도였으며, 아르센 역시 기사 두 명과 싸워 이길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여기 세 명은 각각의 실력도 출중한 데다, 고위 기사와 수백 번 겨뤄가며 합격술을 연마한 듯한 다 대 일 전투의 달인들이었다.
그런 생각도 잠시.
셋은 아르센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쉰다고 판단한 듯, 재빨리 동시에 그를 쳤다.
* * *
“졌습니다!”
“후아, 정신없이 깨졌네.”
대련을 마치고, 투구를 벗는 네 사람 모두 얼굴이 땀범벅이었다.
시종일관 아르센이 몰아치고 셋은 포위했다가 뭉쳤다가 하며 간신히 버티는 일방적인 싸움이었지만, 어쨌든 싸움이 됐다는 것이 중요했다.
덕분에 아르센으로서도 배운 것이 많았다.
아마 다음에 싸운다면, 지금보다 훨씬 빠르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정식으로 무장하고 싸우면 더 금방 끝나겠지만.’
무장 수준에서 비교가 안 되는 만큼, 유물을 자유롭게 사용한다면 일 분 안에 셋 다 죽일 자신이 있었다.
그것을 실력이라 판단할지는 평가하는 사람 나름이겠지만.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요, 그보다······역시 스승님이 그렇게 말씀하셔서 예상했지만, 한계를 넘으셨군요?”
묘한 뉘앙스, 아마 이들 역시 정수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르센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혹시 헤티아 님도?”
“맞습니다. 괜히 한때 영지 최고의 기사로 군림하신 게 아니죠. 뭐, 아르센 경은 젊어서 그런지 신체 능력은 스승님보다도 훨씬 뛰어나신 거 같지만 말입니다.”
로논이 호쾌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서, 삼 대 일로 싸우라고 했을 때 분개하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웃는 것도 잠시, 뒤이어 로논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그건 그렇고, 아직 나이도 젊으신데 대단하십니다. 저희도 열심히 수련하고는 있습니다만, 언제 한계를 넘을 수 있을지.”
“네?”
“음? 혹시 제가 뭔가 잘못 말하기라도?”
“아뇨, 아닙니다. 그냥 좀 쑥스러워서.”
로논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어, 아르센은 얼버무렸다.
‘방금 그게 무슨 의미지?’
아르센이 아는 바에 의하면 그와 같은, 아르센이 ‘고위 기사’라 이름 붙인 존재는 강력한 마력의 정수를 얻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였다.
이 정수는 강대한 마수나 마인, 혹은 고대 유적에 있고.
하지만 로논은 마치 고위 기사가 수련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물어봐야겠군.’
잠시 후, 두 번째 대련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아르센이 아닌, 아눈이 참여했다.
그 상대는 영주의 아들인 디에브였다.
원래는 아르센이 기사 세 명쯤 후딱 해치운 뒤 디에브와 싸울 계획이었으나, 싸움이 예상외로 길어지며 지친 탓이었다.
정확히는, 아르센이 그런 핑계로 물러선 것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한다.”
둘 다 창을 쓰는 탓에, 그 결투는 퍽 시시해 보였다.
서로 꼬챙이 하나씩 들고 거리를 재며 찌를 듯 말 듯 시늉하는 모양새이니.
아르센은 그 싸움을 관전하는 척하며, 은근슬쩍 헤티아의 옆으로 다가갔다.
아르센을 본 헤티아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고생 많았네. 잘 싸우던걸.”
“제자분들의 실력이 뛰어났습니다.”
물론 세 사람을 물리친 시점에서 어떻게 말해도 겸양 떠는 것밖에는 안 되지만, 아르센은 예의상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조금 전 들은 이야기를 돌려 물었다.
“그런데 듣기로, 헤티아 님께서도 한계를······?”
“제자들이 그러던가? 뭐, 그렇지.”
헤티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조에는 자부심이 여실히 담기기는 했지만.
아르센은 조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관해서 따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 다음 단계에 대해서 말입니다.”
“따로? 음······그러지. 저녁 식사 후에 보도록 하세. 아무래도 그때까지는 시끄러울 것 같으니.”
그 사이, 대련은 아슬아슬하게 아눈의 승리로 끝났다.
지긴 했지만 디에브 역시 상당히 뛰어난 실력자였다. 아마 바즈칼이 상대였다면 어렵지 않게 이겼을 것이다.
그간 아르센이 열심히 가르친 만큼, 바즈칼 역시 호락호락한 실력자는 아닌데도 말이다.
‘이곳 기사들, 수준이 높군.’
그간 아르센이 지나온 영지 중 가장 기사들의 평균 수준이 높은 곳은 벨루안이었다.
그보다 뛰어난 곳이라면 유적 도시 사티엔 정도겠지만, 이것은 사티엔이 워낙 특이한 케이스라 비교하기 힘들고.
그에 비해, 순수한 단일 영지 기준으로는 이곳 기사들의 수준이 제일 높은 것 같았다.
이후, 교류 대련은 흥이 오른 영주의 제안으로 일종의 무술 대회 비슷한 것이 되었다.
영주의 호위를 맡던 기사들까지 나서, 열 명이 넘는 기사들이 차례대로 영주 앞에서 겨뤄가며 무용을 뽐냈다.
교류 대련이었던 대회는, 해가 어둑해질 무렵에야 끝났다.
아르센은 대회의 우승자로서 우스꽝스러운 광대 모자를 쓴 채 영주의 찬사를 받는,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다.
영주는 모자에 우승자의 영광이 담겨 있노라 선언했지만, 아르센은 이 모자를 다음 영지에 가자마자 버릴 계획이었다.
덤으로 그 모습을 보며 신나게 웃던 바즈칼도 응징하고.
* * *
영주가 특별히 맛 좋은 식자재와 술을 제공해준 덕분에, 그날의 저녁 식사는 특히 즐거웠다.
살이 부드럽고 노린내가 나지 않는 어린 양부터 시작해서 온갖 짜고 맵고 달콤한 향신료, 귀한 증류주까지 있어서, 유적 도시를 떠난 이래 가장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식사 후, 아르센은 따로 헤티아를 찾아갔다.
물론 중요한 대화를 하는 만큼,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살짝 얼굴이 불콰해진 헤티아의 모습으로 보아, 저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술은 안 마셨나?”
“네. 취하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아서.”
“이런, 이곳 사람들은 술 잘 마시는 걸 미덕으로 생각한다네. 알아두게.”
마치 아르센이 계속 여기 정착해서 살 거라고 믿는 태도. 아르센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노라 답했다.
그런 뒤, 노골적인 제안을 꺼냈다.
“실례지만, 손아귀 힘을 한번 겨뤄 봐도 되겠습니까?”
“음?”
헤티아는 잠시 뭐 하러 그러냐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노인 특유의 주름진 손을.
“원한다면 그러지. 내 나이를 먹어 자신은 없다만.”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악력을 겨뤘다.
힘 자체는 아르센이 훨씬 더 강했다.
그는 이제 십 대 후반, 한창 강건할 시기이고 상대는 육십도 넘은 노인이니 당연한 일.
그것을 고려해도 상당히 약하긴 하지만, 헤티아의 힘 역시 일반적인 수준을 한참 넘어서 있었다.
아마 아눈이나 바즈칼이 그녀와 손을 맞잡았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비명을 질렀으리라.
아르센은 그녀가 고위 기사임을 확신했다.
“이제 그만, 조금 힘들군.”
“알겠습니다.”
손을 놓은 뒤, 아르센이 물었다.
“헤티아 님은······수련을 통해서 그런 경지에 도달하신 겁니까?”
“음? 물론이지. 자네는 다른 방법을 쓰기라도 했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헤티아는 조금 눈을 크게 떴다. 무슨 황당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반응.
그 모습을 보며, 아르센은 확실했다.
헤티아는 정수를 취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고위 기사가 되었음을.
“혹시 어떤 식으로 수련을 하셨습니까? 제 방법과 좀 비교해보고 싶습니다만.”
아르센의 말에, 헤티아는 묘한 표정으로 그를 보다 말했다.
“대단한 방법이랄 게 있겠나. 매일 무술을 수련하고, 육체를 단련하고, 마수와 죽을 듯이 싸우고. 이 세 가지지. 한계를 넘을 때도 마찬가지였네. 모래 포식자라는 마수와 싸우다 죽을 뻔했을 때 다음 단계에 도달했지.”
저 말대로라면, 그녀는 아르센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고위 기사가 된 것이었다.
아니, 따지고 보자면 그녀 쪽이 오히려 정통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성장 과정은, 일반인이 기사로 각성할 때의 과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기에.
담담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헤티아를 보며, 아르센은 설명을 시작했다.
“저는 정수를 얻어 이런 힘을 얻었습니다. 정수란······.”
아르센은 정수에 대한 비밀을 망설임 없이 공개했다.
그녀와 허심탄회하게, 고위 기사에 대한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었으니.
게다가 이것을 공개한다고 해서 아르센이 따로 불이익을 얻을 만한 것도 없었고.
“저는 그렇게 정수를 취하여 경지를 넘어선 것을 ‘고위 기사’라 칭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가.”
늘 냉담하던 헤티아의 얼굴에, 처음으로 순수한 놀람이 깃들었다.
그 평정이 깨진 모습을 보는 것은 퍽 즐거웠지만, 그보다는 그녀에게서 정보를 얻어 내는 것이 중요했다.
아르센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예전에도 수련을 통해서 다음 경지에 오른 기사가 있었습니까?”
“삼백 년 전에 한 명 있었다고 들었네만.”
삼백 년에 한 명꼴. 확실히, 이 정도면 굉장히 드물다고 할 만했다.
하지만 수백 명의 기사가 모이는 유적 도시에서조차 수련으로 그런 경지에 들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데, 이 영지 하나에서만 두 명이나 태어났다니.
벨루안에 있을 때도 이 ‘다음 경지’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적 없었다.
‘아니, 그냥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나?’
생각해 보면 유적 도시에서도 정수의 존재는 비밀에 가까웠다. 벨루안에서도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었고.
그렇다면, 그저 알려지지 않았을 뿐 다른 영지에서도 이렇게 자력으로 고위 기사가 된 이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좀 이상한 게 있네만.”
헤티아의 말에 아르센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설마, 자네는 내가 그, 고위 기사라는 걸 몰랐나?”
“네? 그야 당연히.”
그렇게 대답하던 중, 그제야 아르센은 깨달았다.
점심 무렵, 헤티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아르센을 기사 세 명과 싸우도록 했다. 그가 고위 기사라는 것을 확신한 듯이.
그때는 그저 눈썰미가 굉장하다고만 생각했건만.
“안 느껴진다고? 이렇게, 근처에 있으면 마력이 묘하게 찌르는 듯하지 않나? 나는 본능적으로 자네가 나와 동류라는 걸 느낄 수 있었는데.”
“저는······모르겠습니다. 전혀.”
아르센이 보기에, 헤티아는 그냥 강한 마력을 지닌 늙은 기사로 보일 뿐이었다.
신체는 잘 단련되어 있지만 그뿐, 그녀의 제자들과 대련하며 단서를 얻기 전까지는 그녀가 고위 기사일 거라고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에 대해 몇 가지 더 이야기를 나누며, 둘은 각자의 방법이 가져온 성장 방향이 미묘하게 다름을 알 수 있었다.
헤티아는 신체 능력이 강해지긴 했으나 아르센처럼 극적인 성장을 겪지는 않았다. 그녀는 전성기 시절에도 아르센과 같은 수준의 힘과 속도를 가지지는 못했다.
그에 비해, 그녀는 마력을 느끼는 감각이 훨씬 예민해지고 오감이 발달했다. 이는 아르센이 가지지 못한 장점이었다.
“어쩌면, 자네의 방식과 내 방식은 비슷하면서도 다를지도 모르겠어.”
헤티아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그 정수라는 것을 두 번 흡수할 수는 없다지. 수련을 통해 한계를 두 번 넘었다는 사람도 없었고. 하지만, 각기 다른 두 방법을 모두 사용해 성장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