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iger follows the wild flowers on the cliff RAW novel - Chapter 93
93. 푸른 물결 푸른 숲
압록강으로 경계가 집중된 동안 의주성 동문을 빠져나온 장호 일행은 푸린과 합류하여 초산으로 향했다.
동행한 네 명의 야인 역시 파저강 유역에서 체탐 활동을 하던 이들로 민첩함 움직임이 상상을 초월했다.
‘늑대도 씹어 먹게 생겼네.’
폭풍처럼 질주하는 그들을 따라 총총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창의 훈련이 없었다면 분명 낙오되었으리라.
산 넘고 강 건너 창성과 벽동을 지나는 동안 중천에 떠오른 해가 기울어 가고, 청림의 도강을 확신하는 장호의 마음은 타들어 갔다.
‘창……. 조금만, 조금만 기다리거라.’
애끓는 기도에도 새하얀 억새풀이 비단처럼 펼쳐진 내비아리 너머에는 이미 네 척의 돛단배가 떠 있었다.
하얗게 흩날리는 억새꽃 사이로 이랑대를 향해 달려가는 장호의 손가락이 쇠뇌의 현도를 당긴다.
팽!
순식간에 날아간 화살이 돌아보는 이랑대의 머리를 관통하자 곁에 선 무사의 외침이 벼락처럼 울려 퍼졌다.
「운장이다! 운장을 죽여라!」
돛단배를 밀어 강으로 띄우던 이랑대가 칼을 빼 들며 달려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전투에 폐사군의 야인들은 둘씩 나뉘어 싸우며 십여 명의 이랑대를 갈라놓았다.
이랑대를 피해 강으로 뛰어든 총총이 있는 힘껏 돛단배를 밀었다. 안간힘 쓰는 그녀에게 달려든 이랑대를 베어 낸 토이모가 총총의 곁에서 힘을 보탰다.
꿈쩍 않던 배가 스르륵 밀려나고 허벅지까지 물이 차오르자 총총을 배에 올린 토이모가 강가를 돌아봤다.
철벅철벅 강으로 뛰어든 푸린의 뒤로 하나둘 배를 향해 달리는 야인들이 보였다.
“운자아아아앙!”
토이모의 외침에 이랑대의 어깨로 손도끼를 박아 넣은 장호가 강물에 밀려가는 배를 향해 달렸다.
뱃전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창은 뺨을 할퀴는 강바람에도 꼿꼿이 선 채로 장호가 올라탄 배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탄 배는 이랑대가 나누어 탄 세 척의 배에 둘러싸여 절반 가까이 강을 건넌 상태였다.
‘낭군님…….’
눈물을 삼키는 창을 바라보던 청림이 완강히 버티는 그녀를 돌려 세우며 귓가에 속삭였다.
“강을 건너면 그는 죽는다.”
“그가…… 모르고 왔을까?”
강 건너로 여진의 땅에 병풍을 두른 이랑대를 노려보던 창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흐르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울지 말거라. 그래도 네 낭군이라 물귀신 안 만들려 애쓰고 있지 않느냐.”
그녀의 눈물을 쓸어 내는 청림의 손을 밀어내는 찰나.
쿵! 우직끈.
섬뜩한 파열음과 함께 우측에서 호위하던 돛단배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밀려들었다. 거친 물살을 가르며 회전하던 돛단배의 후미가 그들의 배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쿠궁! 끼이이이익.
뱃머리가 솟구쳐 오르며 창을 감싸 안은 청림은 너울지는 강물로 곤두박질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전복 사고로 물에 빠진 창은 숨을 참으며 두 눈을 부릅떴다.
‘어디로 간 거지?’
충돌과 동시에 그녀를 감싼 청림은 보이지 않고, 돛단배의 파편들이 떠다니는 수면에는 호위선과 1차 충돌을 일으킨 거대한 통나무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차가운 물속에 잠겨 방향을 짐작할 수 없던 창은 헤엄치는 이랑대의 다리를 올려다보았다.
한쪽 방향을 향해 일률적으로 헤엄치는 이랑대의 몸짓은 조선의 방향을 명백히 가리키고 있었다.
‘흐음……. 너희들이 그쪽이면 나는 반대로 가야지!’
여름이면 얼음장 같은 지리산 계곡에서 놀던 그녀에게 이 정도쯤은 일도 아니었다. 팔을 쭉쭉 뻗어 기분 좋게 헤엄치는 그녀의 배 속에 쑥떡이까지 들썩거린다.
‘헤엄은 나 혼자 칠 테니까. 너는 좀 가만히 있어.’
한편, 돛단배의 고물에 선 무진은 착잡한 심정으로 전복된 배들을 응시했다. 그를 향해 헤엄치는 이들 중에 청림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같은 배를 탔어야 했는데!’
청림의 도강 소식에 요양으로 향하던 말머리를 돌린 무진은 물길을 알려 줄 첫 배에 올라 있었다.
「통나무가 갑자기 어디서 떠내려온 것이냐?」
「사공 말이 떼몰이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다 합니다.」
「떼몰이? 무슨 떼를 몬단 말이냐?」
「조선은 봄가을로 통나무를 수송하는데, 혜산진성에서 뗏목처럼 묶어 의주까지 흘려보낸다 합니다.」
「통나무들이 더 내려온다는 말이냐.」
「오전에 지났어야 했는데, 물길이 더디었나 봅니다.」
“아라리요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루 배 몰아 주세~”
멀리서 들려오는 떼꾼들의 노랫소리에 초조하게 물위를 훑던 그의 귓가에 청림의 목소리가 박혀 들었다.
“차아아아아앙!”
허우적거리던 청림은 미친 듯이 창을 불러 댔다.
차가운 강물이 쉴 새 없이 입 안으로 들이쳤지만, 그녀를 놓쳤다는 절망감에 눈앞에 캄캄해졌다.
“차아아아앙!”
숨을 쉬러 수면 위로 머리를 내민 창은 애타는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강물에 떠내려가며 오르락내리락하는 청림의 움직임이 어딘가 불길한데.
‘헤엄을 못 치는 건가?’
아직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장호의 배를 돌아보던 창은 방향을 틀어 청림에게로 헤엄쳤다.
‘그만 좀 불러 대고 숨을 쉬라고. 숨을!’
눈앞에서 사라진 청림을 찾아 물속으로 잠수한 창은 가라앉는 그의 손을 거머쥐었다. 청림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끼워 반대편 어깨를 움켜쥐며 몸을 틀었다.
수면 위로 떠오른 청림의 물을 토했다.
“하아. 하아아아.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그랬느냐?”
“허우적거릴 때 잡으면 나까지 죽는다고.”
늦게 왔다 타박하는 청림의 말에 창은 빠드득 이를 갈며 그들을 향해 헤엄쳐 오는 무진에게로 향했다.
“너는 또다시 기회를 놓쳤구나.”
“놓아 버리기 전에 그 입 좀 다물어 줄래?”
후방을 호위하던 돛단배에 시야가 가린 장호는 중앙의 배 두 척이 전복된 것을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어느 배에 타고 있는 것일까.’
강 중앙으로 뗏사공의 통나무 떼가 장벽을 이루며 장호의 시야를 또다시 가려 버렸다.
“스리스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루 배 몰아 주세~”
너울대는 강 위로 길게 연결된 뗏목들은 이무기처럼 꿈틀대며 물살을 일으켜 장호의 배를 밀어냈다.
“떼몰이가 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야인의 말에 장호는 두 자 이상 벌어진 뗏목을 향해 몸을 날렸다. 길게 묶인 뗏목 위에 안착한 그는 주저 없이 내달려 반대편 강물로 뛰어들었다.
‘창……. 기다리거라.’
장호가 물로 뛰어든 줄 모르는 창은 힘차게 헤엄쳐 오는 이랑대 무사가 반갑기 그지없다.
‘빨리 와요, 빨리. 나는 돌아갈 길이 멀다고요.’
손을 뻗는 무사에게로 청림을 힘껏 밀어낸 창이 몸을 돌리는 찰나 억센 손길이 그녀의 손목으로 감겨들었다.
청림의 입가에 어린 미소에 창은 소름이 돋아 올랐다.
‘기절할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는데.’
헤엄치는 동안 얌전히 있기에 괜찮을 줄 알았던 창은 또다시 그에게 잡혔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다.
“놔.”
“날 붙잡은 건 너였어.”
맹렬하게 물살을 가르는 무사는 청림에게 잡힌 창마저도 이국의 땅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손목이 끊어져도 나는 갈 거야.”
붙잡힌 손목 아래를 단단히 움켜쥔 창이 몸을 돌려 회전하자 젖은 손목이 쭉 미끄러졌다.
그녀의 손을 놓쳐 버린 청림이 무진을 밀어냈다.
「주군!」
무진의 외침에도 창을 향해 손을 뻗은 청림이 붉은 치맛자락을 낚아챘다. 버둥거리는 창을 끌어안은 청림을 건져 올린 무진은 두 사람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녀를 놓아야 합니다, 주군!」
「그녀 없이는 가지 않는다!」
악착같이 그녀를 움켜쥔 청림의 모습에 무진은 어쩔 수 없이 창의 머리를 내리쳤다. 둔탁한 충격에 눈앞이 아득해진 그녀의 이마로 피가 흘러내렸다.
「무진! 무슨 짓이야!」
「가만히 계십시오! 이러다 셋 다 죽습니다.」
무진은 악을 쓰는 청림의 머리마저 물에 담가 버렸다.
꼬르륵꼬르륵, 물을 삼켜 가면서도 그녀를 놓지 않는 청림과 함께 잠겨 든 창의 입가에서 물방울이 솟구쳤다.
수면 위로 머리를 내민 청림이 창을 부둥켜안았다.
“창, 창……. 괜찮은 것이냐.”
“이렇게까지 해야 해?”
하얗게 질린 창의 입에서 물이 새어 나왔다.
“날지 못하는 병아리처럼.”
아무리 버둥거려도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은 어린 시절 율의 손에 죽어 간 병아리를 떠올리게 했다.
“병아리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려 했다면, 벽이 아니라 하늘로 던졌겠지. 떨어지면 다시 받아 줄 수 있게.”
“위급한 상황이 되면 날아오를 거라 생각했다.”
“벽 아래 피투성이로 죽은 병아리들……. 그저 어떻게 죽는지 보고 싶었던 거야, 너는.”
기운을 잃어 가는 목소리에 청림은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녀의 말처럼 여섯 마리의 병아리는 단 한 마리도 날아오르지 못한 채 모조리 죽어 버렸다.
“날지 못하는 병아리처럼 나도 그렇게 죽이고 싶어?”
“그러지 마라.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다.”
“놔줘. 내가 살기를 바란다면, 제발 놔줘.”
마지막 힘을 다해 버둥대는 창이 그의 손등을 할퀴어 댔지만, 청림은 움켜쥔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살아서는 너와 가지 않아.”
핏기를 잃어 가는 창의 얼굴이 별당 여인과 겹쳐지자 청림이 시선이 너울대는 강물로 향했다.
“놓아주면 살아서 갈 수 있겠느냐.”
“가다 죽어도 널 원망하지 않을게.”
‘병아리도……, 발바리도, 죽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가진 것이 온전하기를 바랐을 뿐.’
뜨거운 무언가가 청림의 가슴에 휘몰아쳤다. 말갛게 눈물이 차오른 청림은 그녀를 움켜쥐었던 손을 놓았다.
‘잘 가거라. 나의 나비야.’
물살을 헤치는 창의 모습이 뿌옇게 흐려지자 청림은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잦아드는 물결처럼 그를 안고 헤엄치는 무진 역시 지쳐 가고 있었다.
「유서가 열렸습니다. 4대 태화당주를 척살하라 적혀 있었습니다. 성화 6년에 작성된 유서였습니다.」
「나를 죽이려던 것이 아니었던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청림은 배에 오르기 전 끼웠던 왕희의 청옥 가락지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아귀다툼을 했을까.’
청옥 가락지를 빼낸 청림이 그의 어깨 자락을 움켜쥔 무진의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요양 태화당 식솔들을 부탁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숭왕부의 좌백이 요양에 와 있습니다. 친왕부와의 혼담이 성사되면, 왕희의 책사들도 주군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무진의 말에 청림은 허탈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나는 아비와 다르게 살기 위해 그녀를 놓았는데, 너는 원치 않는 여인과 혼인하여 아비처럼 살라 하는구나.」
「주군!」
「무진아…… 이제 그만 쉬고 싶다.」
옷자락을 틀어쥔 무진의 손길에 이상하게도 장호가 떠올랐다. 죽일 만큼 미웠는데, 술에 취해 고꾸라지는 청림의 얼굴을 감싼 손은 묘하게도 따뜻했었다.
「무진아, 내게 형이 있었다는구나. 어쩌면 그는 너와 같았는지도 모르겠다.」
무진의 손을 토닥이던 청림은 물결 위에 출렁이는 옷고름을 잡아당겼다.
「이러다 둘 다 죽는다.」
「주군이 아니었으면 오래전에 죽었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돌린 청림에게서 무거운 비단옷이 허물처럼 벗겨졌다.
「주군! 주군!」
젖은 옷자락을 움켜쥔 무진은 천둥처럼 울부짖었지만, 그에게 헤엄쳐 온 부하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대장님! 가셔야 합니다.」
「놓아라! 주군께서 저기 계시다!」
청림과 창을 데리고 헤엄치느라 힘을 소진해 버린 무진은 물살에 휩쓸려 가는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살아 돌아가거라, 무진.”
멀어지는 무진의 외침에 청림은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발버둥 칠 때는 끝도 없이 가라앉던 몸이 모든 것을 놓아 버리니 뜬구름처럼 유유히 흘러간다.
“태화당 낙성루의 노을도 이렇게 아름다웠을까.”
어려서는 지나치게 가까운 것들만 보고, 자라서는 지나치게 머나먼 것들만 보았다.
“해서 나를 사랑했던 양부도, 아우 같은 유천도, 누이같이 살폈던 소담화와 홍연도, 모두 잃어버렸구나.”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자 이상하게도 절벽에 선 그를 붙잡던 작은 손길이 기억났다.
수많은 마음들을 떠올리던 청림은 지는 노을이 일렁이는 붉은 물결에 잠겨 들며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