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12
11화. 통밀 식빵(4)
***
해준은 한 걸음 다가가 낯선 동물을 관찰했다.
하얀 털이 전신을 뒤덮고, 귀엽게 쳐진 귀에 턱에는 이방 수염이 난 거로 미루어 녀석의 정체는 염소가 분명했다.
아버지의 노트엔 저 동물에 대한 설명이 없었지만,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이 염소를 키우며 젖을 짜는 걸 본 기억이 떠올랐다.
“염소다.”
“염소? 귀엽다. 근데 쟤 임신한 것 같은데?”
불룩하게 튀어나온 염소의 배를 보며 클로에가 말했다.
엄마 염소는 부지런히 울타리 주변을 돌아다니며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염소에게 접근했다. 녀석은 둘을 신경도 쓰지 않고, 여유롭게 풀만 뜯었다.
“곧 새끼를 낳겠어.”
“그럼 울타리가 필요하겠네.”
“만들 수 있어?”
“당연하지. 저기 닭장도 내가 만든 거야.”
“해준은 손재주가 있구나. 하긴, 이렇게 좋은 농장을 만든 걸 보면 당연한 이야기인가?”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암튼 염소 보면서 잠깐만 기다려.”
해준은 창고를 향해 달려갔다.
울타리 안쪽 적당한 위치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판자로 지붕을 만들었다. 바닥에 지푸라기를 깔아주고, 먹이로 나뭇잎과 풀을 잔뜩 뜯어 줬다.
“와, 실력자.”
“군필자라면 이 정도는 껌이지.”
“군필자? 껌?···”
생전 처음 듣는 단어에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세히 설명한 방법이 없는 해준은 묘한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하고, 양배추를 가져와 염소를 살살 유혹했다. 풀을 뜯어 먹던 염소는 해준이 주는 양배추를 먹으며 자연스럽게 우리로 들어왔다.
‘노트에 적힌 대로네. 양배추는 염소의 먹이라더니···.’
해준은 노트를 꺼내 염소에 대한 정보를 추가로 적었다.
그 사이 클로에가 염소 우리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귀여워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어?”
클로에가 묻자 염소가 메에에- 하고 울며 그녀의 손등을 핥았다.
“얘도 여기가 마음에 드나 봐.”
“그러게.”
쉴 곳이 생겼으니, 어미 염소에게도 곧 태어날 새끼에게도 다행인 일이다.
다만,
“그런데 어쩌지?”
“뭐가?”
“클로에가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아서.”
일이 끝나면 해준은 현실 세계로 돌아가면 된다.
그러나 클로에는 여기에서 머물러야 하기에 밤이슬을 피할 장소가 필요했다.
“넌 어디서 자는데?”
“사정이 있어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난 농장을 관리할 뿐 여기서 지내지는 않아.”
“그곳에 함께 갈 수는 없고?”
그렇다는 대답에 클로에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살려주고, 이 농장으로 데려온 것만으로도 해준에게 충분히 고마웠기에 말하기 곤란한 비밀에 대해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정령사도 아니면서 정령과 함께 다니며, 사람이 쉽사리 드나들 수 없는 곳에 혼자 있는 걸 보면 ‘해준’은 뭔가 특별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클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 거기서 지내면 되겠다.”
“어디?”
“베이커리. 거기에 작은 쪽방이 있었거든.”
화덕과 조리대가 있는 공간 옆으로 작은 방이 하나 더 있었다.
재료를 모아놓는 장소로 추측됐지만, 대충 치우면 당분간 지내기에 부족하지 않아 보였다.
클로에가 방을 치우는 사이 해준은 나무 상자에 지푸라기를 쌓아 간이침대를 만들었다.
“불편하더라도 일단 여기서 지내.”
“이 정도면 훌륭하지. 네가 아니었으면 숲에서 노숙했을 거 아냐.”
“하하. 그런가?”
“응.”
어색한 웃음이 끊기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때 두 사람의 배에서 동시에 민망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꼬르륵-
꾸륵-
“배고프다.”
“그러게.”
[저도요!]“빵이 남긴 했는데.”
해준이 딱딱한 빵을 꺼내자 포테와 클로에가 애써 시선을 피했다.
“···.”
[···.]그건 절대 못 먹겠다는 완곡한 거절.
해준도 이해 가는 반응이다.
“역시 이건 무리겠지?”
[다른 것도 많잖아요. 달걀도 있고, 양배추, 오이, 감자···.]‘윽, 감자 모양 정령이 감자를 먹겠다니!’
“맛있겠다. 감자.”
‘클로에 너까지?··· 포테를 감자라고 생각하는 건 나 혼자뿐인가?’
[삶아 먹읍시다!]“구워도 맛있는데.”
‘잔인하네.’
상의 끝에 저녁 메뉴는 삶은 감자와 달걀 프라이 그리고 양배추와 오이로 만든 샐러드로 결정됐다.
해준이 화덕에 불을 지폈다.
지켜보던 클로에도 팔을 걷어붙였다.
“나도 도와줄게.”
“그럼 감자 좀 씻어줄래?”
“알았어.”
밑 준비는 끝났고, 조리만 남았다.
화덕 한쪽에 냄비를 올려놓고, 다른 쪽엔 프라이팬을 올렸다.
“소금만 있으면 딱 인데. 감자 삶을 때도 넣고, 프라이에도 넣으면 좋겠다.”
이곳에선 소금을 구할 수 없으니 몇 끼 째 강제 저염식이었다.
땀도 많이 흘린 터라 몸에서 염분을 원했다.
“그런데 그 가방 안 무거워?”
발견 당시부터 클로에가 메고 있던 크로스 백을 힐끗 보며 해준이 물었다.
“아!···”
클로에도 해준의 지적에 가방의 존재를 눈치챈 듯했다.
“뭐 중요한 거라도 들어있어?”
“아니··· 음, 몰라.”
“몰라?”
“응.”
기억상실증에 걸려 이름만 기억하니 무엇을 지니고 있는지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호기심이 동한 클로에가 가방을 열었다.
정체불명의 작은 병이 한가득.
“뭐지?”
“뭘까?”
[뭐예요?]투명한 유리병엔 여러 가지 가루들이 담겨있었다.
‘하하. 클로에가 설마 마약상은 아니겠지?’
해준의 뺨에서 땀이 삐질 흘러내렸다.
라벨링도 되어있지 않은 가루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아주 곱거나, 거친 표면을 가졌다 정도로 구분이 가능했다.
해준은 유리병 중 하나의 뚜껑을 열어 킁킁 냄새를 맡아보고, 손바닥에 덜어 모양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도대체 뭘까?”
“궁금하네.”
“먹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독이면 어쩌려고?”
“설마 네가 독을 지니고 있었을까?”
“혹시 모르잖아. 내가 위험한 일에 휘말려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도망치다 기억을 잃었을지도.”
[타당한 추리입니다.]클로에와 포테가 해준을 말렸다.
그러나 해준의 생각은 달랐다.
어쩐지 정체불명의 가루가 위험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먹어본다.”
짧은 말과 함께 조심스레 혀를 내밀었다.
할짝-
!!??···
혀끝을 타고 강렬하고, 짜릿한 기운이 전신에 퍼졌다.
‘진짜 독?··· 이 아니고, 짜다. 짜.’
“짜···. 이거 소금인데.”
“소금?”
“어. 짭조름해. 음, 맛있다.”
맛을 봤을 때 짜릿했던 건, 온종일 땀을 흘리고 저염식을 한 상태에서 염분을 섭취했기 때문이다.
강렬한 자극을 더 느끼고픈 해준이 다시 소량의 소금을 찍어 먹었다.
“확실해. 소금이야.”
“소금을 내가 왜 가지고 있지?”
“글쎄. 그럼 다른 것도 조미료인가?”
“아마 그럴지도.”
하나씩 먹어본 결과 소금과 설탕을 구별해냈다.
나머지 가루는 아직 정체불명.
“뭔지 모르겠지만, 역시 양념 가방이겠지?”
[확신합니다.]“양념 가방을 소중하게 멘 채 기억을 잃고 쓰러진 소녀라···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거지?”
해준이 턱끝을 매만지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셜록 홈즈처럼.
꼬르륵-
“일단 먹고 생각하자.”
“응.”
[넵!]냄비 뚜껑을 열어 보글보글 끓고 있는 감자 위에 소금을 한 꼬집 넣었다. 달걀 프라이에도 소금을 톡톡톡.
소금만 넣었을 뿐인데, 어쩐지 향이 다르게 느껴졌다.
‘기대된다.’
푸짐한(?) 요리를 차려놓고, 셋이 둘러앉았다.
간이 된 음식을 먹는다는 생각에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맛있겠다.”
“냄새가 좋아.”
[꼴깍-]“잘 먹겠습니다.”
뜨거운 감자를 한 알씩 집어 후후 불며 껍질을 벗겨 그대로 입에 넣었다.
“하흐··· 뜨거.”
“옴뇸뇸, 맛있다.”
[완전 꿀맛이에요!]한입 넣자마자 포슬포슬한 감자가 화악- 하고 터져 나왔다.
짭조름하고 달콤한 맛. 혀가 델 정도로 뜨거웠지만, 황홀한 맛에 턱관절 운동을 멈출 수 없었다.
달걀 프라이도 소금 덕분에 노른자의 고소함이 배가 됐고, 소스가 없어 밋밋했던 샐러드도 짠맛이 만나 특유의 달큰한 맛이 더 살아났다.
와구와구-
냠냠냠-
두 사람과 정령은 감탄사도 잊은 채 씹기에 매진했다.
오늘 저녁, 해준은 간만 제대로 해도 훌륭한 음식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현실 세계로 넘어 온 해준은 책상에 앉아 휴대전화 검색창을 열었다.
클로에가 설탕과 소금을 가지고 있으니 이스트만 구하면 아버지의 레시피대로 식빵을 만들 수 있을 거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스트라는 게 정확히 뭘까?”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정확히 빵을 만드는 데 왜 이스트가 필요한지 궁금했다.
해준은 초록 창에 이스트를 적어 넣었다.
이스트(yeast)
자낭균류에 속하는 균류. 엽록소가 없는 단세포로 이루어진 원형의 균류로···.
“흠··· 쉽게 말하자면 효모균을 넣어 가공한 제품이구나.”
이스트(효모)는 빵을 부풀리기 위해 쓰는 가공의 균이다. 결국, 다른 재료가 모두 갖춰져 있어도 이스트가 없으면 빵 특유의 모양이나 식감, 맛을 낼 수 없다는 뜻.
인터넷을 뒤져보니 간단하게 효모를 만들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나왔다.
포도나 술을 이용해 만드는 방법 대신 밀가루로 간단히 만드는 법을 찾았다. 농장에서는 술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해준은 노트에 효모 만드는 법을 적어 넣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릴 뿐.
*
<효모 만들기>
-재료 : 밀가루 50g, 물 50ml, 설탕 5g
-순서
1. 볼에 재료를 넣고 섞어주고, 실온에 24시간 둔다.
2. 2일 차에 동량의 재료를 더 넣어 섞어주고, 다시 24시간 발효.
3. 3일 차에 밀가루 600g과 물 600ml를 넣어 실온에 12시간, 서늘한 곳에 12시간 발효하면 완성.
*
“으읏···!”
레시피 공부를 끝낸 해준은 기지개를 켰다.
아무리 체력이 소모되지 않더라도 현실과 다른 차원을 오가는 건 부침이 있었다. 그래도 나름대로의 재미와 성취감이 느껴져 조금은 뿌듯함이 들었다.
고시원 의자에 앉아 성과가 보이지 않는 공부만 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
“조금만 쉬고 빨리 돌아가 효모를 만들어보자.”
애써 수확한 농작물을 창고에 쌓아둘 수는 없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자꾸만 만들어내고 싶었다.
침대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이려는데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오빠. 저 내일부터 벽화 그려도 될까요?>
민주였다.
그렇게 하라고 메시지를 보낸 해준은 스르륵 잠이 들었다.
***
“클로에. 일어났어?”
농장에 돌아온 해준은 클로에를 먼저 찾았다.
“왔구나?”
“별일 없었지?”
“응.”
“잠자리는?”
“덕분에 아주 편하게 잤어.”
“다행이네.”
간단히 클로에의 안부를 물은 해준은 베이커리로 걸음을 옮겼다.
밤사이 다 자란 농작물들이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여기는 왜? 설마 또 맛없는 빵을 구우려는 건 아니지?”
“구울 건데.”
해준의 말에 클로에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도 맛없는 빵을 만드는 해준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밀은 그냥 닭 먹이로 주고, 우린 어제처럼 먹자. 충분히 맛있던데.”
“걱정되는구나?”
“조금.”
“이번엔 기대해도 좋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아버지의 노트를 펼쳐, 레시피대로 볼에 재료를 담고, 천으로 덮었다.
“엥? 이게 다야?”
“시간이 좀 오래 걸려.”
“얼마나?”
“3일.”
“뭘 만드는 건데.”
“빵을 부드럽고, 맛있게 만들 마법의 반죽.”
성공적인 효모 발효를 기원하며 밭으로 향했다.
부지런히 낫을 움직여 밀, 양배추, 오이, 감자를 수확하고, 새롭게 작물을 심었다.
클로에도 부지런히 일손을 도왔다.
덕분에 평소보다 쉽게 일이 끝났다.
“목마르다.”
“물 마셔.”
해준은 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물을 마셨다.
‘응?!···’
물맛이 이상했다.
평소와 다르게 시큼한 맛이 감돌았다.
“물맛이 왜 이러지?”
“레몬수야. 레몬이 탐스럽게 자랐길래 만들어봤어. 이상해?”
“아니, 맛있다.”
“건강에도 좋아. 소화도 잘되고, 노화 방지에도 탁월하대.”
“그런 지식은 어떻게 얻은 거야?”
“글쎄··· 그냥 원래 알고 있던 거 같아.”
클로에는 기억을 잃기 전 요리에 관련된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
혹시 아버지도 클로에처럼 혹시 클로에처럼 기억을 잃고 어딘가 낯선 곳에 계신 건 아닐까?
해준은 좀 더 부지런히 농장을 넓혀야겠다 생각했다.
안개가 걷히면 아버지를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
“이제 뭘 할 거야?”
“밭을 좀 더 만들려고. 작물은 늘어나는데 심을 땅이 부족한 것 같아서.”
“나도 도울게.”
꿀 같은 휴식을 즐기고 다시 일을 하려는 찰나,
[해준 님! 해준 님~!]포테가 황급히 해준에게 날아왔다.
[해준 님! 큰일이에요, 큰일!]“왜? 무슨 일인데?”
[염소가 이상해요.]“염소가?”
[낑낑대는 걸 보니 곧 새끼를 낳을 것 같습니다.]해준은 농기구를 내려놓고, 염소 우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