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87)
절대회귀-187화(187/424)
제187회 누구 마음대로 사형인가?
달빛 아래 새하얀 백의를 입은 여인이었다. 고결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는 이제 막 하늘에서 내려온 것만 같았다.
천소희는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다시 닦아냈다. 갑자기 난 눈물 때문에 헛것이 보이나 해서였다. 하지만 아름다운 여인은 눈앞에서 활짝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뵈어요. 전 이안이라고 해요. 도련님 전직 호위였죠.”
이안이 씩씩하게 인사했다. 이전에도 밝은 그녀였지만, 근래 더욱 밝아진 그녀였다. 그녀의 행동에 자신감이 넘쳤다.
“전 동권문 흑권의 천소희에요.”
“아! 만나 봬서 영광이에요.”
“저를 아시나요?”
“그럼요. 동권문 제일의 철권이시잖아요?”
천소희는 기분이 좋아졌다. 단지 칭송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이안의 칭송에는 보통의 경우에 흔히 느끼게 되는 여자가 권법을? 특별한데? 이런 느낌을 주지 않았다.
“아까 들어올 때 했던 말은 도련님 놀리려고 농담한 것이니 혹시라도 기분이 상하셨다면 용서해 주세요.”
“괜찮아요.”
“그럼 말씀 나누세요. 나중에 다시 올게요.”
인사하고 돌아서려는 이안을 검무극이 붙잡았다.
“기왕 왔는데 이야기나 좀 나누다 가.”
이안이 천소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천소희는 이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두 여인의 느낌은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고귀한 품격이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이안, 어디에 던져놔도 살아 돌아올 것 같은 강인함은 천소희였다.
“오해는 마세요. 이공자 때문에 운 것 아니니까요.”
“정말요?”
“네?”
이안이 눈빛을 반짝이며 다시 물었다.
“정말 도련님 때문에 운 것 아니에요? 저는 도련님 때문에 자주 우는데.”
이안이 검무극을 바라보며 말했다.
“매번 저를 울리시죠.”
여자의 직감으로 천소희는 느꼈다. 그녀가 검무극을 남자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이공자님의 호위셨다고요?”
“네, 지금은 쫓겨났지만요.”
“왜 쫓겨나셨죠?”
“말씀은 제 행복을 위해서라는데, 핑계겠죠?”
“핑계죠. 조심하세요. 바람둥이들은 말을 잘한답니다.”
“말은 무림에서 제일 잘하시는 분이시라.”
검무극이 웃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죽이 맞나?”
두 여인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다.
이안은 원래부터 천소희 같은 강인한 여인을 좋아했다. 그녀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천소희 역시 이안의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어딘지 모르게 다가가기 어려운 재수 없는 구석이 있을법한데, 그런 점이 전혀 없었다.
이안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수련은 잘되세요?”
“그 소식이 연무장에 틀어박혀서 수련만 하는 네 귀에까지 들어갔으니, 본교에서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네.”
“어제 주방 숙수분들도 도련님이 적권 통과한 이야기 하면서 밥을 짓고 계시던걸요. 제자가 되느냐 마느냐로 내기를 거는 사람들까지 있다고 들었어요.”
그야말로 검무극이 동권문에서 권법을 배우는 것은 교내의 화제였다.
이안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검무극에게 물었다.
“어떠세요?”
“괜찮아.”
천소희는 검무극의 대답에 이안이 미소 짓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신뢰를 느꼈고 순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는 저런 사람은커녕, 저 비슷한 흉내조차 낼 사람이 없었으니까.
“근데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야?”
“수련하다가 문득 도련님 뵙고 싶어서요.”
검무극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불쑥 물었다.
“혹시 왔어?”
뜻 모를 질문에 이안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온 것 같아요.”
그러자 검무극은 바위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마당으로 걸어갔다.
“비무 한 판 하자.”
이안이 천소희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 이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비무를 하는 건 실례였지만, 그녀 자신에게 너무 중요한 일이었다.
분위기를 파악한 천소희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검무극이 떠나려는 그녀를 말렸다.
“봐도 되오. 아니, 보시오. 이 비무가 천 소저에게 큰 도움이 될 거요.”
차기 권마가 될 사람에게 주는 검무극의 가르침이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귀한 눈물까지 흘렸는데, 눈물값은 벌고 가야죠.”
귀한 눈물이란 말에 천소희의 눈시울이 다시 뜨거워졌다.
‘왜 이러지?’
갑자기 막혀 있던 눈물샘이 뚫린 사람처럼 자꾸 눈물이 나려 했다. 처음 겪는 일에 그녀는 당황했지만, 다행히 검무극과 이안은 서로를 마주 보며 비무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권법으로 널 상대할 거다.”
“네!”
“아니, 이안! 내가 검도 없이 싸운다는데 걱정 안 돼?”
“걱정은요. 도련님이라면 양쪽 손발이 다 없이 싸워도 제가 못 이길 거예요.”
“그건 맞지. 요 입이 있는 한.”
지켜보던 천소희가 살짝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뒤돌아 서 있던 검무극이 그녀에게 말했다.
“고개 끄덕이지 마시오.”
그러자 천소희가 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통수에도 눈이 붙은 사람이니 역시 검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닌 사람이다.
비무가 시작되고 처음에는 이안이 비무에 집중하지 못했다. 말은 믿는다고 했지만, 혹시라도 검무극이 맨손으로 싸우다가 다칠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하지만 몇 수 교환한 후에 정말 기우도 이런 기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검무극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지금 휘두르는 검이 열 개라도 검무극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 같았다.
‘정말 누가 누굴 걱정해!’
검무극은 세차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맞으면 턱이 부서질 위력의 주먹이 그녀 얼굴로 날아들었다.
간신히 피했을 때 옆구리로 날아드는 또 다른 주먹. 이번 역시 몸을 틀어서 간신히 피했다. 맞았으면 늑골이 다 부러졌을 공격이었다.
후욱! 후우욱!
검이 일으키는 칼바람 소리만큼이나 경쾌한 소리가 검무극의 주먹이 날아들 때마다 들렸다.
간신히 막고 피하면서 어떻게든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검무극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한 번 접근을 허용하자 떼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아, 이렇게 죽는 거구나!’
이안은 권법 고수와의 싸움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거리를 확보하지 못했기에 검술의 위력은 반도 발휘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검무극의 주먹은 사정없이 그녀의 급소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정말 그녀의 모든 것을 다 발휘해서 간신히 피했다.
이렇게 피하기만 하다간 당하고 만다는 생각에 이안은 어떻게든 반격을 하려 했다.
결정적인 순간, 그녀는 검무극의 빈틈을 찾았고 그것을 이용해서 거리를 벌렸다.
‘지금이야!’
오직 한 번의 기회!
그녀의 검이 허공을 수놓았다. 비천검법 제이식 변천식이 발휘되면서 그녀의 검이 열두 번의 변화를 일으켰다.
천소희의 입에서 싸움 내내 참았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아!”
절대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공격을 검무극은 흑권 권법의 보법을 이용해서 피했다.
그 보법이 저 보법이라고?
자신이 배운 권법이 이렇게 대단한지 그녀는 새삼 실감했다. 지켜보는 내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자신도 뛰어들어서 함께 싸우고 싶었다. 검무극이 펼치는 것처럼 자신도 펼쳐내고 싶었다.
이 비무가 그녀에게 준 영향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절대고수의 실력에 교주의 이공자임에도 권마를 찾아와서 무공을 배우려는 검무극.
천하제일미라 해도 좋을 외모임에도 이 야밤에 찾아와서 검술을 배우고 있는 이안.
부끄러움과 존경심이 동시에 들며 이들 두 사람 모습이 마치 그림 속의 한 장면처럼 그녀의 마음에 각인되었다.
“잘했다!”
검무극이 이안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붙이면서 빠져나올 기회를 주었는데, 그녀는 놓치지 않고 활로를 찾아낸 것이다. 모진 수련을 해온 결실이었다.
“아직도 뭔가 간질간질한 느낌이에요.”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구 성에 거의 다다라서 그 입구를 찾고 있음을.
“내일부터 매일 밤에 나를 찾아와라.”
“감사해요, 도련님.”
검무극은 아버지가 자신을 풍신사보의 대성으로 강제로 이끄셨듯, 그녀의 비천검법을 구 성으로 집어 던져 버릴 작정이다. 비천검법이 구 성에 이르면 어디에 내놓아도 안심할 수 있을 테니까.
검무극과 이안이 대화를 마쳤을 때 천소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공자가 제게 날렸던 그 검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무섭지 않았어요. 한데 모두가 잠든 이 밤에 이 무인이 휘둘렀던 저 검은 무서웠어요.”
밤늦도록 수련하는 저 검을 이길 수 있을까?
비슷한 또래의 여자 중에서는 자신이 무림에서 가장 강하다고 내심 자신했다. 한데 비무를 보고 나자 그건 자만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양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녀의 마음에도 불이 옮겨붙는 순간이었다.
뜨거운 열기를 느끼며 천소희가 불쑥 말했다.
“저도 가르쳐 주세요. 사형.”
사형.
그녀는 알 것이다.
저 말이 권마에게 들어가면 얼마나 큰 곤경에 빠지게 될지. 파문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의 인생을 건 한 마디였다. 사형.
어쩌면 이 순간 이 말을 한 것을, 그녀는 자신의 거처에 돌아가서 밤새 후회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기에 검무극은 따스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 너도 와라. 사매.”
나중의 후회는 후회고, 지금 천소희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자신의 수련을 방해하는 느낌이 들어 괜한 거부감이 들 만도 했지만, 이안은 기분 좋게 그녀를 반겨주었다.
사람이 바뀌어야 무공도 바뀐다.
검무극은 이안의 이런 넓은 마음이 그녀를 절대고수의 자리로 이끌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이안은 술 모임에 이어 두 번째 모임을 만들어냈다.
“심야수련모임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 * *
흑권에서의 수련은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난 권마와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누가 먼저 백기를 드느냐의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 자신 있었다.
어차피 난 준비하고 또 준비해야 하는 인생이었다.
권마의 권법을 배워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준비를 동시에 해나가는 과정에 권마의 권법도 있는 것이다.
권마의 권법은 지금 배워도 되고, 내일 배워도 되고, 일 년 후에 배워도 된다. 왜냐고? 나는 해야 할 것도 많고 배워야 할 것도 많으며 챙겨야 할 사람도 많았으니까. 다른 것도 끝없이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이런 나를 당신이 이길 거라고?
권마와 중간중간 눈이 마주쳤다. 그때마다 우린 눈빛으로 대화를 나눴다. 포기하십시오. 자네가 포기해. 전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나도 갈 수 있네. 전 젊습니다. 그래서 못 버틸 거야.
수련이 지겨워서 결국 버텨내지 못할 거라 여기겠지만 그건 권마의 오산이었다. 나는 평범한 젊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 * *
밤이 되면 이안과 천소희를 가르쳤다.
무공을 배우던 첫날, 천소희가 내게 물었다.
“사형, 이 무인이 이렇게 중요한 무공을 배우는데 제가 옆에 있어도 되나요?”
그날 간절한 마음으로 함께 가르쳐달라고는 했지만, 막상 함께하려니 미안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저 무공보다 네가 더 중요하다. 지금의 권마는 아버지의 권마고 형의 권마다. 내 권마는 너다.”
미래의 천마와 권마.
그녀의 얼굴에 격정이 스쳤다. 이내 그녀는 최악의 경우를 물었다.
“그럼 저는 권마가 못 되고, 사형은 천마가 못 되면요?”
“그럼 우리 셋이서 무림맹 앞에다 국밥집이나 차려서 살아야지.”
주방에서 허공섭물로 나온 국밥을 이형환위로 나르는 모습을 떠올렸는지 천소희가 크게 웃었다. 그녀를 만난 이후 이렇게 활짝 웃는 모습은 처음인 것 같았다.
“한데 왜 무림맹 앞이죠?”
대답은 이안이 대신했다.
“보고 싶은 여자가 있을지도.”
“아하!”
아니라고 소리쳤지만, 이미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람둥이의 특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심야수련을 시작한 지 오 일째 되던 날, 이안은 드디어 구 성에 이르는 문을 찾아냈다.
그녀의 검이 더욱 빠르고 강해졌으며 화려한 변화를 일으켰다.
고맙다는 말도, 축하한다는 말도 필요 없었다. 이안이 달려와서 내게 와락 안겼다. 나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고생했다, 이안. 이제 대성까지 한고비 남았다.
그때 훌쩍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나와 이안이 천소희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울고 있었다.
“그날 눈물샘이 열렸나 봐요. 평생 안 울었는데, 자꾸 눈물이 나요.”
그녀가 울자 이안도 따라서 눈물을 흘렸다.
“넌 왜 울어?”
“천 무인이 우시니까요.”
두 여인이 서로 몸을 반대로 돌린 채 울었다.
“세상 남자들 다 두들겨 팰 수 있는 억센 여자들이 왜 이래?”
천소희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사형, 저는 계속 가르쳐 주세요.”
이대로 심야수련이 끝나는 것이 너무나 아쉬운 그녀였다.
이안이 그녀를 위해 나서주었다.
“도련님, 이 심야수련모임은 계속해요.”
바로 그때였다. 뒤쪽에서 누군가 차갑게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사형인가?”
천소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사색이 되었다.
우리가 있던 곳으로 악귀처럼 무서운 얼굴로 권마가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차분한 얼굴로 그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사실 나는 권마가 와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전에도 두 번이나 다녀갔다. 그는 몸을 숨긴 채 은밀히 지켜보다 그냥 가곤 했었는데. 과연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권마가 마당에 서서 나와 이안, 그리고 천소희를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특히 천소희는 너무 놀란 상태였다. 사형이라 말한 것을 권마가 들었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동권문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넌 파문이다, 란 말만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권마는 그 악귀 같은 얼굴로 상상도 못 한 말을 내뱉었다.
“이 심야수련모임에 나도 넣어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