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and actress RAW novel - Chapter 93
93. 정말 고맙다
전날.
입사 후 처음으로 휴가를 낸 수철은 집에서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니터 옆엔.
DVD들이 잔뜩 쌓인 채.
그건 모두-
수철이 출연한 영화와 드라마의 DVD였다.
닦아내지 않아 먼지들이 뽀얗게 쌓인 그건.
어젯밤, 수철이 갈등 끝에 창고에서 끄집어낸 것들이다.
“하아…….”
긴 한숨을 내쉰 수철은 까끌거리는 목구멍에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뒤적였다.
하지만 담배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때 산 담배는 딱 두 대를 피우고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으니까.
얼마나 갈등했을까.
수철은 결국.
지이잉.
구형 컴퓨터의 CD롬을 열고 자신의 첫 번째 작품, 을 재생시켰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다.
풋풋한 얼굴.
앳된 목소리로 대사를 치는 신인 시절의 자신이.
어느새.
수철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랬었지.”
추억을 회상하는 건.
때론 즐거운 일이다.
첫 연기에서 평단의 주목을 받던 그때의 나날들은 그야말로 핑크빛이었다.
지금의 아내도 그때 만났고.
그때는 모든 게 완벽했었으니까.
두 번째.
세 번째 작품을 볼 때도 수철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그리고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를 지나.
일곱 번째.
라는 이름이 적힌 괴상한 재킷의 DVD 패키지를 집었을 때.
수철의 미소는 산산이 조각나고야 말았다.
패키지를 쥔 손이 덜덜 떨리고.
끔찍했던 과거가 떠오른다.
고작 패키지 하나를 다시 마주한 것만으로도 이런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아픈 상처였었으니까.
여섯 번째 작품까지 승승장구하던 수철의 커리어를 단숨에 박살 내버렸던.
그 작품.
누군가는 묻는다.
고작 한 작품으로 배우 커리어가 망가질 정도면, 그 배우가 잘못된 거 아니냐.
하지만.
그중 소속사 대표의 강권에 에 출연해야만 했던 수철의 속사정을 아는 이는 몇 없다.
그렇기에 수철은.
주연 배우라는 이유로 쏟아지는 비난과 멸시, 조롱을 감수해야만 했고.
결국 고민 끝에 은퇴를 택해야만 했던 셈.
그것조차 초라한 은퇴였다.
언론 보도는커녕.
잊을 만하면 누군가 끄집어내 조롱하는.
웃음거리 배우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수철은 다시 그 트라우마와 맞서며.
지이이잉.
고민 끝에 CD롬을 열었다.
수철은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었다.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그래야.
마음을 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을 완전히 외면한 채 결정을 내렸다간…….
후회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손이 떨린다.
두려워서.
“여보.”
그때.
“당신이 원하는 걸 해.”
뒤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인 시절 만나.
5년을 함께하고.
자신을 믿고 결혼해 준 아내.
“당신이 뭘 하든 난 응원할 거야.”
수철의 손을 잡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건.
부드러움이 아니라-
거칠고, 굳은살이 박인 피부였다.
수철은 아내의 얼굴을 보다가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구나.’
수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 생활을 마무리하고 더없이 초라해진 자신 옆에서 함께해 준 아내를 향해.
지이이잉.
수철은 열려 있던 CD롬에 의 CD를 넣었고.
아내가 문을 닫고 나가자 스페이스바를 눌러 재생시켰다.
그리고.
무려 세 시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
탁.
마침내 영화를 끝까지 본 수철은 고문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다 고개를 떨궜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 날의 조롱이 기억 속에 존재하는데.
“하.”
한숨이 새어 나오고.
담배 생각이 간절한 가운데.
수철은 문득.
산처럼 쌓인 DVD 패키지 맨 아래 튀어나온 무언가의 귀퉁이를 발견했다.
스윽.
한 장의 사진이 뽑혀 나왔고.
그 사진에는.
배우 시절, 환하게 웃는 자신과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팬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수철이 문득 픽 웃었다.
‘팬사인회 때였나?’
저런 시절도 있었지.
선글라스랑 모자로는 부족해서 마스크까지 써야 비로소 집 앞 슈퍼에 들를 수 있었던 시절.
인기가 너무 치솟은 나머지 수철에게 온 선물과 편지만 따로 분류하던 직원이 두 명이나 고용되던 시절.
하지만 그 시절은 지나갔고.
수철은 지금 이렇게 자신의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러니 이제는-
선택만 남았다.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하지 않은 채 계속 이 트라우마를 평생 안고 가고 싶진 않았다.
설령.
실패한다 할지라도.
“그래.”
수철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자리에서 일어나 시계를 바라봤다.
하루가 지나고, 벌써 오전이 된 시각.
“도윤아, 지금 갈게.”
결심을 마치고 도윤에게 전화를 건 뒤, 곧장 택시에 올라 회사에 도착했다.
“어, 팀장님. 벌써 나오셨어요?”
“어, 일이 좀 있어서.”
“기왕 쉬시는 거 마음 편하게 쉬시지.”
수철은 걱정스러운 표정의 직원에게 애써 웃어 보인 뒤 대표실까지 쉬지 않고 걸었고.
마침내.
똑똑.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그리고 안으로 들어선 뒤.
자신의 얼굴이 피곤에 절어 있는 것도 모른 채 곧바로 동민과 도윤 앞에 앉았다.
동민은 그런 수철의 모습에 짐짓 놀랐지만, 모른 척 물었다.
“집에서 바로 왔나?”
“예.”
“제수씨도 한숨을 못 잤겠군.”
“…….”
동민이 말을 이었다.
“결정, 내렸다면서.”
“네. 내렸습니다. 굳이 유난 떨고 싶지 않아서 내린 김에 바로 찾아왔습니다.”
“그래? 그럼. 들어보자고.”
그리고 수철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쥐어 짜내듯 목소리를 토해냈다.
“……겠습니다.”
“뭐?”
“해보겠습니다. ‘김석진’ 역.”
수철은.
각오했다.
이 결정으로 이엔 엔터 업무에 공백이 생기는 것과.
가슴에 헛바람이 드는걸.
왜냐하면.
자신의 연기력이 아직 그대로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니즈 역시 당연히 바뀌었고.
때문에 어쩌면, 이 결정을 내린다고 배우로 돌아가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보고 싶었다.
이제라도.
“늦었지만, 다시 해보고 싶습니다. 배우.”
그렇기에.
동민은 드디어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래, 너무 늦었지.”
“…….”
“하지만, 지금만큼 좋은 기회도 없지.”
동민은 환한 웃음을 머금은 채 일어나 동민의 어깨를 잡고.
“잘 생각했다, 이 팀장. 아니…….”
고개를 끄덕였다.
“수철아.”
“…….”
도윤 역시.
오랜만에 기쁨 가득한 웃음을 머금었다.
‘진작, 이렇게 됐었어야 했는데.’
도윤이 겪은 10년처럼.
기나긴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결정했다는 게 중요하다.
“잘 생각하셨어요, 팀장님.”
“도윤아.”
수철은 잠시 머뭇대다 도윤을 향해 말했다.
“고맙다. 그때 그 말 꺼내줘서.”
“고맙긴요.”
도윤은 씩.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손을 내밀었다.
“복귀 성공하면 그 말, 그때 다시 듣겠습니다.”
“……그래.”
수철은 도윤의 손을 맞잡았고.
순간 휘청였다.
“잘한다, 잘해. 잠 좀 자고 오지.”
“죄송합니다.”
“됐어. 가서 쉬어. 그리고 이번 주는 야근 각오해. 인수인계하려면.”
“벌써…… 인수인계요?”
수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뭐가 확정된 것도 아닌데.
벌써 인수인계?
수철이 순간 미간을 좁혔다.
“설마 대표님, 아니 형님…….”
“이럴 줄 알고 사람 벌써 구했지.”
“……진짜.”
헛웃음이 터진다.
자신이 결국 안 한다고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다는 건가?
“사실 어제 네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더라고.”
“귀신같으시네요.”
“내가 너랑 벌써 8년을 봤다.”
동민은 껄껄 웃더니 동민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러다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복귀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잘해라.”
“네.”
“계약서는 인수인계 끝나면 새로 쓰자고. 네가 잘 아니까, 알아서 잘 뽑아놔.”
동민의 말은 즉.
혹시라도 수철이 이번 오강선 감독의 에 참여하지 못할지라도.
배우로서 계약을 맺겠다는 뜻.
수철 역시 마찬가지.
수철은 라는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우로 복귀하기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다시 카메라 앞에 돌아가기 위해서.
“감사합니다, 형님.”
“됐다. 가서 쉬어. 도윤아, 미안한데 너 선배 좀 집에 태워다 줘라.”
“그럴게요. 가시죠, 팀장님. 아니, 선배님.”
왜인지.
‘선배님’이라는 말이.
낯뜨겁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지만.
수철의 입가에 맺힌 건.
분명히 행복의 미소였다.
* * *
수철이 배우 복귀를 결정했다는 소식은.
이엔 엔터 내부망을 타고.
자연스럽게 외부로 번졌다.
사람들은 이수철이라는 왕년의 인기 배우가 10년 만에 복귀한다는 사실에 놀랐고.
복귀를 타진하는 작품이 오강선 감독의 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이수철? 이미지 완전 개판된 배우?”
“미쳤네. 10년 만에 복귀한다고? 그것도 오 감독님 작품으로?”
“오 감독님이 써준대? 그런 배우를?”
“이야, 생각 나네. 충격과 공포였는데. 세상에 어디 그딴걸 SF 영화라고 들이밀어서…….”
“솔직히 배우가 무슨 죄겠냐. 얘기 들어보니까 대표가 시켜서 찍은 거라더만.”
덕분에 수철을 기억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온갖 이야기가 오갔고.
코웃음 치는 사람도 있었다.
10년이나 지난 마당에 어떻게 복귀할 것이며.
하필 오강선의 로 복귀한다는 점에서 이거 다 관심 한번 끌어보려는 수작 아니냐는 말까지.
이엔 엔터가 이제 좀 컸다고 무모하게 군다는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최도윤.
채한올.
그리고 하나둘 영입되는 실력 좋은 배우들까지.
그들만 쭉 돌려도 괜찮을 판에.
굳이 ‘이수철’이라는 배우를?
이런 가운데.
“아니. 이게 아니야.”
수철은 시나리오에 몰두한 채.
이제는 자신이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이 트레이닝시켰던 배우들처럼 대사를 곱씹고 얼굴 근육을 움직였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쉽진 않았지만.
그래도 해야 했다.
아닌 말로 계약서도 썼고.
계약금도 받은 마당인 데다.
오강선과의 미팅이 이제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
“아, 아. 아아. 크흠.”
그나마.
담배를 끊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배우 시절에는 달고 살았던 담배까지 안 끊었다면.
지금 아주 힘겨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다행인 건.
예전에는 그렇게 치기 힘들었던 욕이 섞인 대사가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거?
‘김석진’은 불명예 퇴직한 형사고, 그런 이미지에 걸맞게 입이 아주 걸걸하다.
세상 풍파를 겪어야 욕 섞인 대사가 찰지게 나온다더니.
그런 면에서는 도움이 된다.
“열심이시네요.”
그때 들려오는 도윤의 목소리.
언제 왔는지.
편안한 복장으로 대본을 들고 있었다.
“잘 되어 가세요?”
“아니. 쉽지 않은데.”
“금방 감 잡으실 겁니다.”
수철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도윤에게 물었다.
“너도 여기서 연습하게?”
“아뇨. 괜히 옆에 있다간 주눅들 것 같아서 다른 데 가려구요.”
수철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주눅이 들어? 네가?”
“네. 왕년의 스타 앞에서 신인인 제가 어찌 감히.”
“너 많이 늘었다. 성호한테 배웠냐? 성호 요새 너한테 아부하는 거 보면 보통이 아니던데.”
“그럴지도요.”
도윤은 킥킥대다 한마디 던졌다.
“잘될 겁니다.”
“그래야지. 계약서까지 썼으니까.”
“박 실장님 지금 죽어나시던데.”
“그 이유도 있군.”
귀에 아른거리는 듯한 박 실장의 목소리.
그래.
박 실장 때문에라도.
열심히 해서 오강선 감독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그래도, 보기 좋네요. 선배님 이렇게 하시는 거.”
“……고맙다.”
“감사 인사는 영화 개봉하고 정식으로 듣겠습니다. 그럼.”
도윤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연습실을 나섰다.
덜컹.
문이 닫히고.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정말 고맙다.”
닫힌 문을 향해 중얼거린 수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대본을 바라보며 결의를 불태웠다.
앞으로 일주일.
수철은.
반드시, 오강선과의 미팅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