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23
솔직히 태화가 볼 땐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정치라는 본업에 충실한 편이 낫지 않을까란 기분이 들었지만, 높으신 분들의 생각은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마지막 전장에서 빠진 상일은 기지에서 돌아올 이들을 기다리며 평소 하던 대로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녔다.
뒤에서 좀 얌전히 있으라고 말하는 호영과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며 외계종의 시체를 연구하는 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처음으로 그들의 문자를 접했다.
그 누구도 심지어 같은 주술사들조차 잡아 내지 못했지만 한없이 주술의 구조와 비슷한 언어를 말이다.
흥미를 가진 상일은 연구원들을 밀치고 몇 가지 문자들을 해독해냈다.
전쟁이 끝나기까지 해석이 불가능했던 언어가 번역되자, 연구원들은 그를 선망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대단하다고 추켜세웠다.
평소처럼 호영에게 ‘어때 나 좀 하지 않아?’라고 잘난 척하던 그는 다른 것보다 유난히 긴 문장을 읽었다.
그리고 외계종이 노리는 게 단순 지구 정복이 아님을 눈치챘다.
상일은 재빨리 연구실을 벗어나 복도를 거닐며 떠난 본대와 남은 시간을 계산했다.
뒤따라 붙은 호영이 일의 전말을 듣고 연락을 취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는 그것은 이미 늦었다고 단언했다.
-안 돼. 거기 있는 건 외계종 최대 전력이 맞아. 본대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지. 게다가 그들 중 한명이 폭발이 있을 장소로 이동한다 쳐도 너무 늦어.
-······그렇다면 별동대를 만들죠. 그분들보단 못해도 유능한 이면 주민들 몇몇이 기지에 남아 있습니다.
-장소에 있는 기폭 장치는 외계인 놈들을 특유의 복잡한 연산과 언어로 가득 차 있을 거야. 누가 가도 해체는 불가능해. 게다가 안전을 고려해서 뭉쳐 간다면 자연히 느려질 거고.
-그럼······.
-어쩌겠어? 잘난 내가 가야지.
그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곤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호영의 볼을 두어 번 톡톡 두드렸다.
그러한 접촉을 시도할 때마다 한 발자국 물러섰던 그녀가, 그때만큼은 장난치는 남자를 밀어내지 않았다.
거대한 전초 기지의 문들을 지나 밖에 도착한 상일은 외계종이 눈속임을 위해 보낸 소형 괴물들을 홀로 막아 냈다.
기지 안에 대기 중이던 방어 조직이 도착하기 전 적들이 던진 건물의 잔해들마저 전부 막아 낸 그는 ‘갔다 와서 고백할게’란 불길한 말을 호영에게 남긴 채, 홀로 적진 심층부, 폭탄이 숨겨진 장소로 향했다.
여인의 딱딱한 가면에 금이 가기 전, 있었던 이야기였다.
***
“이렇게 손해 보는 일을 하는 건 보신제일주의자 브로커답지 못한 일인데······.”
호영과 대화를 끝낸 후 몸을 돌리자 공간이 부서지며 장소가 변했다.
이윽고 싱크홀을 닮은 검은 아가리에 도착한 태화는 작게 휘파람을 불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키지 않아도 되는 시설이기에 이 안에 있는 외계종의 숫자는 상당히 적었다.
때문에 진행 중 여러 번 사망했던 태화도 이곳에서 적들의 손에 아웃당한 경험은 없었으나, 한 가지 관문을 넘지 못해 좌절당한 적은 많았다.
타임 리미트.
이 장소는 일정 시간 안에 통과해야만 하는 구역이었다.
‘어려움 난이도의 난도를 이런 식으로 맞추다니······.’
효율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면 제시간을 맞추지 못해 폭탄이 폭발하고 세계가 멸망한다.
‘협력자들’의 어려움 난이도는 감정적 문제나 내적 갈등이 적은 대신 이런 식으로 게임 오버 요소를 군데군데 집어넣어 보통 난이도와의 차별을 뒀다.
‘튕기는 건 좀 짜증 나는데 이게 또 스릴 넘친단 말이지······.’
다른 작품에 비해 성공확률이 낮고 사망 빈도가 너무 높아 힘들었지만, 태화는 이 혹독한 난이도가 싫지만은 않았다.
본심을 말하자면 연기를 현실처럼 실감나게 진행할 수 있다는 사실하나만으로도 어려움 난이도는 환영받아 마땅했다.
“좋아, 출발해 볼까.”
그는 입꼬리를 올려 여유를 가장한 후, 무저갱 속으로 몸을 던졌다.
***
구미호에서 그러했듯 대본 속에서는 캐릭터가 가진 이능(異能)이 그대로 구현된다.
해조의 현혹이 등장인물들에게 먹힌 것처럼 한상일의 능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구에 의한 주술의 구현.
순간순간 적절한 물건을 꺼내야 하긴 하나 이미 수십 번의 시도로 자신이 가진 물건의 소모량, 위치, 적들이 잠복한 위치, 가야 하는 루트까지 전부 외운 태화는 거침없이 공간을 뛰어넘었다.
-크아아아―!
“역시 이 몸의 인기란! 근데 난 이미 임자 있는 몸이거든!”
여전히 장난기 섞인 대사를 뱉은 그는 공중제비를 돌아 거리를 확보한 뒤 허공에 주술 문자를 그렸다.
현실에서라면 와이어의 도움을 받아야 할 동작들이 무중력을 유영하듯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미안하지만 조금 바빠서, 먼저 가마!”
다른 등장인물 없이 홀로 연기하는 것임에도 태화는 시간 분배에 신경 쓰랴 알맞은 순간에 혼잣말하랴 바빴다.
누군가와 주고받는 대사가 아닌지라 묵묵히 진행해도 탈락하진 않으나, 그럴 경우 동기화 정도가 떨어진다.
항상 최고점을 노리는 태화에겐 쉬이 넘길 수 없는 부분이었다.
‘여기서 오른쪽.’
어려움 난이도가 혹독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진행에 필요한 부분까지 스스로 알아내라고 강요하진 않았다.
태화는 골목길마다 떠오르는 투명 화살표를 꼬리 삼아 움직였다.
반짝이는 그것은 폭발 장치까지 향하는 길을 알려 주는 지표였다.
‘현혹되지 말자. 눈으로 확인하면 늦어.’
물론 절대 상냥한 건 아니었다. 화살표를 따라 가게 되면 제한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걸치거나 늦었으니까.
두어 번의 시도 이후 친절의 함정을 눈치챈 태화는 그 뒤로 가는 길을 완전히 외웠다.
앞에 있어야 할 표지가 꼬리가 되어 따라붙는 이유였다.
마지막 잔챙이까지 단번에 갈라 버린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푸른빛으로 빛나는 공간을 응시했다.
벽면 전체를 감싸고 있는 외계종의 문자와 중앙을 장식한 거대한 크리스탈은 클리셰 그 자체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진짜 예쁘단 말이지······.’
촬영장에서는 녹색의 벽일 뿐, CG로 입혀진 화면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리라.
이 감동을 느끼지 못할 동료 배우들을 애도하며 태화는 품에 있는 마지막 도구를 꺼냈다.
이제 끝을 낼 시간이었다.
***
[동기화 142%를······.]제단에 무사히 태화는 기둥에 떠오른 글귀를 확인하며 입술을 핥았다.
점점 실수나 놓치는 대사가 없어지자 동기화 수치는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새로운······.]클리어 보상은 대본을 두 번째 성공했을 때 이미 고른 뒤라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대신하듯 후원하고 싶다는 신들의 목록이 기둥 위를 채웠다.
그는 신들의 이름을 임원 목록과 대조한 뒤 전부 거절했다.
요즘 들어 후원하고 싶다는 신들은 많아졌지만 죄다 악신에 가까운 이들이었다.
후원자에게 여러 조건을 걸어 입맛에 맞게 움직이려 하는 신들.
그들이 사사해 줄 재능들도 그리 탐나지 않았기에 태화는 미련 없이 그들의 유혹을 뿌리쳤다.
로키의 조건 때문에 지인들 사이에서 장난꾸러기가 된 것도 서러운데, 여기서 이상한 기행을 더 더하고 싶지 않았다.
“재능 목록 확인.”
제단을 벗어나기 전, 그는 버릇처럼 자신의 재능을 확인했다.
크게 변하는 수치는 없어도 태화에게 뿌듯함을 주는 과정이었다.
[사용자 이태화의 재능]대본 이해Ⅱ(99%)
암기력Ⅱ(91%)
딕션Ⅱ(98%)
시선 처리Ⅲ(4%)
굳건한 정신Ⅱ(91%)
의지Ⅱ(99%)
눈빛Ⅲ(21%)
발성Ⅲ(52%)
무대 장악Ⅲ(99%)
······
순발력Ⅰ(99%)
방언Ⅰ(89%)
관능Ⅱ(52%)
균형 감각Ⅰ(75%)
동안 (-%)
동체 시력Ⅰ(68%)
유연성Ⅰ(37%)
*제단에서만 확인 가능합니다.
이제는 스크롤로 움직여야 할 길이의 재능목록이 그를 반겼다.
끝
ⓒ 마늘소금
축복에 의해 재능을 늘릴 수 있는 태화는 자신의 재능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눴다.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재능과 작품들을 클리어하면서 얻게 된 재능으로 말이다.
정확히 하자면 선천적인 재능, 신들이 인정할 정도의 노력으로 개화한 재능, 그리고 축복을 통해 얻게 된 재능으로 나눠야 하나 태어나는 순간 이성(理性)을 자각하고 재능을 확인할 수 있던 게 아닌 이상 일개 인간이 거기까지 아는 일은 요원했다.
그는 실전뿐 아니라 연습을 할 때도 최선을 다했다.
어차피 100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보통 난이도를 진행할 때조차 발음과 악센트, 의도에 신경 썼으며 카메라가 있을 방향을 언제나 머릿속 한구석에 상정하고 연기를 펼쳤다.
그리고 그런 노력은 숙련도 상승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범인이라면 평생 가도 마주하기 힘든 벽을 그는 10개 가까이 마주하게 되었으니까.
축복으로 남들과는 다른 시간을 가지고 부족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연마할 수 있어 그 정도 속도가 가능한 것이었지만 그렇다 하여 그 노력이 평범하다고는 폄하 할 수는 없었다.
‘일단 연기와 관련된 내용은 거의 다 99에 가깝고······.’
Ⅲ단계에 진입한 재능들은 숙련도가 상당히 느리게 올라갔다.
무대 장악 능력도 원래부터 70퍼센트가 넘는 상태였기 때문에 99를 찍은 것이지, 회귀 초를 제외하면 상당히 더딘 속도로 상승했다.
그리고 99에선 ‘깨달음이 필요합니다’란 글자만 덩그러니 남긴 채 성장을 멈췄다.
도대체 무슨 깨달음이 필요하다는 것인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지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았다.
조금 아쉽기는 했으나 태화는 일단 그것을 밀어뒀다.
최근 그에게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부분을 갈고닦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상당한 집중과 시간을 요하는 작업을 위해 현재를 내버려 둘 순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답보 상태로 둘 수는 없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저것이 정상을 향한 마지막 관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Ⅳ단계를 찍고 어떤 일이 일어날진 몰라도, 그것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경지라는 건 어렴풋이 느꼈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누구도 닿지 못한 길을 가기 위한 새하얀 눈밭일지도.’
태화는 자신이 탐욕스럽다는 것을 알았지만 피어오른 욕심을 참았다.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물 들어와 노를 저어야 하는 이 시기에 손을 놓았다간 강을 타고 가는 게 아닌 휩쓸려 사라질지 몰랐다.
아무리 연기를 잘하고 누구도 밟지 못한 경지에 도달할지라도 그것은 관객이 있어야 소중한 것이었다.
그는 그 점을 잊지 않았다. 그렇기에, 당장이라도 깨달음을 위해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육체적 재능과 차기작으로 돌렸다.
그런 시도는 퍽 성공적이어서, 요즘 태화는 자신의 육체적인 부분을 가다듬기 위해 노력했다.
‘체력이나 근력 같은 본격적인 재능이 있으면 더 빠를 것 같은데······. 그래도 주객이 전도 되는 건······.’
보조에 가까운 감각만으로도 그는 몸을 움직이는데 상당한 재능이 있다고 평해지고 있었다.
그러니 근본에 가까운 재능이 있다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무(武)와 관련된 대부분의 신들은 내기를 좋아하고 연기와 동떨어진 능력이 너무 많았다.
배우로서 그리 필요하지 않은 부분이었기에 태화는 그들의 후원을 언제나 거절했다.
역시 도움을 받는 건 이 정도가 좋다고 생각하며 태화는 제단을 나섰다.
***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서나래예요. 꽤 많이들 오셨네.”
진한 스모키 화장을 한 나래가 순식간에 늘어난 인원수를 확인하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티스트인 자신이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라는 불만이 그대로 드러난 표정이었다.
[이태화 방임? 창룡제 독점방송일텐데 갠방 가능?] [낚시인 듯]쭉쭉 올라가는 스마트폰 속 채팅창의 내용은 대부분 ‘방제를 보고 왔는데 장소가 영 이상하다’, ‘모르는 여자를 보니 낚시방인 거 같다’와 같은 글들이었다.
별말 없이 올라가는 글들을 응시하던 그녀는 한 댓글을 보고 눈에 띄게 인상을 찌푸렸다.
[얘 ㄴㄱ? 화장 ㅈㄴ 진하네.]“어쩌라고요. 예쁘니까 됐지.”
이러고 있는 것도 짜증나는데 외모와 화장까지 품평받자 나래는 그대로 화면을 꺼버리고 싶었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카메라의 사각에서 새파랗게 질린 채 만류 중인 매니저와 보너스 때문이었다.
그 두 가지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성격대로 말싸움을 벌이고 방을 폭파시켰으리라.
기획했음에도 소심한 성격 탓에 진행을 그녀에게 맞긴 현규가 원망스러웠다.
‘태화오ㅃr4랑해요’라는 아이디의 주인이 나래를 알아보자, 그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너머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낚시 방송이 아님을 깨달은 이들이 적당히 댓글의 수위를 조절하거나 분탕을 그만두고 방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