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4
첫인상만큼 정갈한 메시지.
유라는 슬쩍 볼을 쓸었다.
왠지 그를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온도가 올라갔다.
‘내가 왜 이러지.’
계단에서 구해 줬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연기가 인상 깊었기 때문일까.
-전 걱정 안 해요. 유라 씨의 노력을 믿으니까.
-유라 씨의 노력을 믿으니까.
-유라 씨를 믿으니까.
-믿으니······.
“아, 아니야!”
무한이 재생되는 목소리에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4년이나 연예계를 구르며 못 볼 꼴도 많이 보고 지냈는데 고작 그런 말에 심장이 두근거릴 리 없었다.
“······너 뭐 하니?”
밴의 맨 뒤에서 휴식을 취하던 소연이 이상하단 시선으로 둘째를 쳐다봤다.
갑자기 붉어지고 고개를 흔들고 소리 지르는 꼴이 참 괴상했다.
‘연애하나?’
그녀는 유라의 나이를 떠올렸다.
스물한 살.
남들은 대학이다 뭐다로 청춘을 보낼 시기였다.
‘좋을 때네.’
노인네 같은 생각을 하며 소연은 따듯한 시선으로 멤버들을 응시했다.
혼자서도 잘 노는 유라, 졸고 있는 주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뭐라 중얼거리는 통통, 매니저를 붙잡고 쫑알거리는 에스터까지.
‘개판이구나······.’
그녀는 슬그머니 이어폰을 꼈다.
그룹의 맏언니지만 아이 돌보긴 귀찮았다.
소연이 동생들을 포기하던 그 순간, 유라는 굳은 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이건 흔들다리 효과가 분명해.’
그녀는 명쾌한 해답에 눈을 반짝였다.
그를 떠올리면 사고가 생각나 반사적으로 심장이 두근거린 것뿐이리라.
그렇게 결론지으니 답답함이 쑥 내려갔다.
“후후······. 별거 아니었잖아?”
유라는 가벼워진 기분으로 문자를 읽었다.
주인 말을 안 듣던 심장이 원래의 속도를 되찾았다.
“실례합니다. 연락받고 온 이태화인데요.”
자신만만한 얼굴로 화면을 톡톡 치던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기 좋은 중저음.
유라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한 선탠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에 또다시 심장이 고장 나 버렸다.
***
‘우와, 진짜 아이돌이네.’
태화는 화관과 하얀 드레스를 차려입은 다섯 소녀를 보며 작게 감탄했다.
미추와 상관없이 배우에게선 찾기 힘든 상큼하고 사랑스러운 매력이 그를 반겼다.
‘그룹명이 새턴이라고 했지?’
그는 오는 길에 대충 확인했던 프로필을 떠올렸다.
4년 차 걸 그룹 새턴(Saturn).
원래 4인조 걸 그룹이었으나 1집이 망하면서 한 명이 탈퇴하고 2집 때 두 명을 영입하며 재기에 성공한 아이돌.
우여곡절만큼이나 팬덤이 단단하기로 유명했다.
“안녕하세요! 오빠가 작은 언니가 말했던? 와! 진짜 크다! 180? 185? 배우는 키가 다르네. 오와······.”
문 쪽에 앉아 있던 소녀가 재빨리 차에서 내려 인사를 건넸다.
2기에 합류한 막내 에스터.
새턴의 메인 래퍼로, 언더에서 수상 경력까지 있는 소녀였다.
‘반전미 넘친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새침한 외모와 달리 하는 행동은 한 마리 강아지였다.
“안녕하세요.”
“오오! ······억!”
과한 리액션을 보이던 에스터는 뒤에서 쓰다듬는 손길에 침몰했다.
태화는 어느새 차에서 내린 4명의 소녀를 살폈다.
메인 보컬 소연.
리드 보컬 유라.
서브 래퍼 주아.
그리고 메인 댄서 통통.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소녀들이 마주친 시선 사이로 인사를 건넸다.
“······와 주셔서 고마워요.”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하얀 드레스와 화관으로 장식한 유라가 수줍게 고마움을 전했다.
꽃으로 장식한 탓일까, 오늘의 그녀는 마치 요정 같았다.
“아뇨. 덕분에 도움도 받았고.”
“네?”
유라의 되물음에 태화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었다.
자신이 겪은 일이지만 말로 설명하자니 참 애매했다.
‘밥을 빵으로 때운 게 좀 허전하긴 해도 그 아저씨에게 시달리는 것보다야······.’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뒤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던 중국인 멤버 통통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라와 태화를 쳐다봤다.
통통은 사람들과 대화할 때 분위기나 표정을 살피는 버릇이 있었다.
다른 문화에서 자란 탓에 한국인들이 공감 포인트를 잡아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눈에 둘의 모습은 상당히 미묘하게 다가왔다.
‘수상해.’
항상 오해하지 않도록 칼같이 예의를 차리던 유라가 오늘따라 수줍은 척한다.
태화라는 이름도 어제 하루 종일 유라가 떠들었던 이름이었다.
‘태도가 너무 다르잖아?’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한 통통은 태화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빠, 작은 언니랑 사겨요?”
────────────────────────────────────────────────────────────────────────새턴(Saturn)
통통의 폭탄 발언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유라는 슬쩍 태화를 살폈다. 불행 중 다행인지 태화는 전혀 이해 못 한 눈치였다.
“너, 그게 무슨 실례야!”
“但是看起?像?(그래 보였는걸).”
그녀가 질책하자 통통은 중국어로 투덜댔다.
평소 보이지 않던 얼굴을 했으면서 이런 식으로 화내는 게 서러웠다.
“그런 건 대놓고 묻는 게 아이다. 이때는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게 한국인의 미덕인 거지.”
살며시 다가온 주아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서러워하는 통통의 어깨를 두드리고 충고를 건넸다.
“아, 그런 거야?”
“주아, 너! 통통이에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 그리고 다른 사람 있을 때 그 근본 없는 요상한 사투리 그만하랬지! 사투리로 밀거면 좀 제대로 된, 그전에 너 서울 태생이잖아!”
유라가 두 동생들을 혼내는 사이 그새 기운을 차린 에스터가 태화의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태화 오빠한테 질문! 우리 작은 언니 어때요?”
“······좋은 사람이죠.”
그는 한 발짝 물러서며 답했다.
아까부터 스스럼없이 거리를 좁혀 오는 탓에 역으로 긴장됐다.
‘진짜 개성 넘치네.’
태화는 곁눈질로 주변을 훑었다.
처음 눈인사를 건넨 이후로 무관심한 소연 대신 동생들을 챙기느라 정신없는 유라.
혼돈 속에서도 꿋꿋이 제 할 말을 중얼거리는 세 소녀.
가장 말려야 할 매니저는 이미 포기한 듯 운전석에 앉아 코디로 보이는 이에게 위로받고 있었다.
“그쵸! 울 언니 지인―짜! 괜찮은 여자예요. 소녀 가장인데 항상 꿋꿋한 게 마치, 캔디 같은 여자?”
시선을 돌린 것이 마음에 안 드는지 다시 한번 훅 치고 들어온 에스터가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발랄한 목소리와 달리 안에 담긴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태화는 할 말을 잃은 채 생각에 잠겼다.
한순간에 부모를 잃고 세상에 내동댕이쳐졌던 만큼 타인과 다른 생활이 얼마나 괴롭고 끔찍한지 이해했다.
“에스터 씨,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하······.”
“아, 아니에요! 저희 부모님 살아 계시고 집도 멀쩡해요!”
그가 에스터에게 충고하려던 찰나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힌 유라가 동생을 째리고 황급히 반박했다.
팬도 아닌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꺼낸 에스터가 원망스러웠다.
“흑흑, 우리를 먹여 살리려고 하루도 쉬지 못한 불쌍한 우리 언니.”
유라의 눈빛을 받고서도 소녀는 우는 척 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평소 귀찮아하며 방치하는 소연 대신 맏언니 노릇을 하는 유라지만, 태화가 있는 동안엔 심하게 혼내지 않을 것을 귀신처럼 눈치 챈 것이다.
그런 막내를 보며 주아가 고개를 주억였다. 마치 감동이라도 받은 듯 그녀의 눈은 우수에 잠겨 있었다.
“작 언냐가 우리 관짝에서 나오기 전까지 먹여 살렸어여.”
“너, 그 말투······. 하아, 들으셨다시피 그냥 제가 활동 많이 했던 것 때문에 생긴 이미지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더 이상 말리는 것을 포기한 듯 유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붙잡았다.
고작 몇 분이 지난 것뿐인데도 피곤했다.
‘망했어. 예쁘게 꾸몄겠다, 좀 더 나은 모······. 아니지, 잘 보이긴 뭘 잘 보여? 이건 그냥, 앞으로 자주 봐야 하니까, 그런 느낌. 응! 그런 거잖아.’
번뇌에 빠져 행동 불능이 된 유라를 보며 태화는 안심했다.
동생들에게 휘말려 정신없어 보이긴 해도 얼굴엔 그늘이 없었다.
‘심각한 일이 아니라 다행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