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50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미 여러 차례 장마르크와 호흡을 맞춰왔던 그의 스텝들은 큰 지시가 없이도 감독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따랐으며 배우들도 무난한 연기력으로 큰 잡음 없이 장면을 채워나갔다.
맑고 높은 하늘은 야외 촬영에 알맞았고 봄과 여름 사이의 선선한 날씨는 작품의 초반 분위기와도 잘 어울렸다.
안개꽃 같은 조연 배우들 사이에서 주연은 맡은 레베카 사니에는 마치 장미처럼 피어났다.
주인공 살로메가 싱그러움과 사랑스러움으로 무장했다면, 레베카는 경쾌하고 에너지 넘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현장의 분위기 메이커이기도 했는데, 장마르크의 섬세한 지시에 신경이 곤두서있는 스텝들도 레베카의 재치에 잠시 피로를 잊고 웃었다.
레베카의 매력은 비단 스텝들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스쳐 지나가는 배역들에게도 그녀는 친절했으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사랑이 넘쳤다.
그리고 작품에 동화되듯, 그녀는 주인공 살로메의 연인 역을 맡은 배우 중 한 명과 사귀었다.
키스를 나누고 밀어를 속삭였다.
‘······사귀는 건 좋은데 여긴 너무 개방되어 있지 않나.’
여전히 남 일에 둔한 태화가 레베카의 연애 사실을 안 건, 그녀가 종종 복도 한구석이나 문이 덜 닫힌 방에서 누군가와 입을 맞췄기 때문이다.
타인의 연애 생활에 관심 없어도 눈앞에서 펼쳐지게 되면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역시 문화 차이가······.’
그런 모습을 태화만 본 게 아닐 텐데, 다들 남의 연애사라 생각하는 것인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레베카가 연애를 하든 키스를 하든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는 것처럼 말이다.
젊은 여배우의 연애사가 스캔들로 이어지는 한국과 정서가 달랐다.
그래도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인 것인지 태화는 곧 남의 연애를 마주하게 되는 민망함에서 벗어났다.
현장에 집중하고 있는 이들을 보며 태화 또한 자신도 모르게 그 안으로 빠져들어 버린 탓이다.
‘효신 누님과 또 다른 느낌이야.’
효신은 사랑 연기로 유명한 배우였다.
그녀는 보는 이들이 ‘사랑스럽다’, ‘매력적이다’라 느낄 여주인공을 완벽하게 소화했고, 그런 효신을 보며 정말 사랑에 빠진 남자 배우들도 많았다.
그러나 레베카의 사랑 연기는 효신과 달랐다.
레베카는 사랑을 연기하는 것이 아닌, 그 사랑에 푹 파묻혔다.
태화가 살로메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 티에리 도우를 연기할 때 그녀는 항상 들뜨고 정열적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째서 너만은 날 사랑하지 않는 거냐는 눈으로, 애타는 감정을 드러냈다.
단지 연기라 보기엔 상당히 깊은 감정이었던 터라, 태화는 감탄하면서도 그녀가 너무 역할 감정에 휘둘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레베카가 걱정된다고······? 리. 자넨 정말 재미있는 친구로군.」
태화가 흘리는 말을 들은 장마르크는 마치 햄스터가 고양이 생각하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장마르크는 특정 배우를 선호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과 잘 어울리고, 가끔 피폐할 수 있는 내용에도 자신을 잃지 않는 배우들을 알맞게 선별했다.
레베카 사니에도 그러했다. 그녀는 자신이 맡은 살로메를 즐길 줄 알았다.
‘오히려 이 친구가 걱정해야 할 거 같은데······.’
장마르크는 의외로 순진한 태화를 힐끔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태화를 작품에 끌어들이기로 결심한 건, 연회장에서 다른 배우들과 노는 모습을 본 후였다.
태화 자신은 알지 모르나 장마르크가 본 태화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배우였다.
마치 성직자의 탈을 쓴 악마와 같이,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사람을 홀릴 줄 알았다.
그것은 장마르크가 ‘살로메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그녀를 유혹에 빠트리는 남자, 티에리 도우’를 구상할 때 가장 바랐던 마지막 조각이었고, 그렇기에 장마르크는 태화에게 배역을 제안했다.
실제 마주한 태화는 성적으로 더 담백하고 고지식한 구석이 있었다.
그가 타인의 애정 표현을 보고 쉬이 넘기지 못하는 걸 볼 때마다 장마르크는 종종 이것이 올바른 캐스팅이었을까 고민하곤 했다.
‘······카메라만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연기를 펼치지만.’
물론 그것은 초반의 걱정으로, 하와의 과실 같은 남자 티에리를 연기하고 있는 태화는 완벽했다.
관심이 없으면서도 살로메를 푹 빠지게 만들고 그녀가 애써 만든 왕국을 무너트렸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내일 있을 ‘그 장면’에서 태화가 어떤 연기를 보일지도 꽤 기대됐다.
「걱정하지 말게. 레베카는 똑똑한 여자니까. 그보다 내일 연기는 괜찮겠나?」
「배우로 살면서 겪는 일이니까요. 전에도 몇 번 촬영했었고요.」
「그으래-?」
담담한 태화의 대답을 듣고 장마르크는 가늘게 뜬 눈으로 태화를 바라보며 히쭉히쭉 웃었다.
과연 이 말끔한 동양인 청년이, 내일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기대됐다.
끝
ⓒ 마늘소금
영화 촬영이 여름까지 이어지는 것과 달리 태화는 5월 마지막 주, 그러니까 오늘 촬영을 끝으로 현장을 떠날 예정이었다.
7월 개봉하는 ‘정조’의 홍보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마르크의 영화는 상업성보다 예술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탓에, 한국으로 떠나면 영화가 개봉할 때조차 프랑스를 찾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지. 한국에서 개봉 안 할지도 모른다던데 개봉하면 잠시 방문하는 게 나으려나?’
상업적 성격이 거의 없다는 건 수익도 거의 남지 않는 걸 의미한다.
수익이 되지 않는 영화를 수입하려 드는 유통사는 거의 없으며, 따라서 ‘젊은 연인의 노래’도 블루레이로만 유통될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프랑스어 번역은 영어보다 수요가 적어서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거장의 작품인 만큼 국내 영화학도들을 위해서라도 번역은 될 것이다.
단지 그것이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모를 뿐이었다.
「오, 자기. 어서 와.」
태화와 비슷한 시간에 도착한 레베카가 그리운 친구를 만났다는 듯 과장되게 팔을 벌리며 그를 반겼다.
그녀는 태화를 ‘자기(chéri)’이라 불렀는데, 딱히 의미가 있다기보다 그냥 친해지면 남녀 상관없이 그리 칭했다.
살며시 어깨를 붙잡은 레베카가 프랑스인답게 양쪽 볼에 쪽쪽 소리를 내며 비쥬를 한 뒤, 환한 웃음으로 태화를 바라봤다.
처음 영화제에서 비쥬를 받고 어색해하던 태화도, 3주 사이 익숙해진 인사 방식을 따라 했다.
「내일 떠난다며? 아쉽다.」
「한국에서 할 일이 있으니까.」
「사랑하는 내 친구, 먼 거리에서나마 널 응원할게.」
2주도 다 채우지 못한 만남. 그것도 일 때문에 만난 사이인데, 그녀는 퍽 낭만적으로 굴었다.
사실 모두에게 애틋한 사람이었던 터라 태화는 담담한 목소리로 ‘너도 잘되기 바라’란 말을 남겼다.
「어서 오게.」
「꽤 아늑한 공간이네요.」
한창 준비 중인 장마르크와도 비쥬를 나눈 태화는 오늘 촬영할 장소를 둘러봤다.
오래된 베이지색 벽지는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한 면 전체를 채운 아코디언 창문은 불을 켜지 않아 어둑한 실내를 은은히 빛냈으며.
흐린 하늘을 닮은 색 바랜 시트는 어쩐지 정감 있었다.
「허름한 게 의외인가?」
「······네.」
잠시 침묵을 지켰던 태화는 작게 대답했다.
장마르크의 말대로, 이 공간은 어쩐지 가난한 느낌이 흘렀다.
여러 남자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그들 모두를 농락하며 화려한 젊음을 즐기는 살로메의 방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프랑스는 집값이 비싸거든. 철없이 집 나온 아가씨가 빌리기엔 좀 많이.」
그 아가씨가 허영심이 심하다면 고달플 수밖에 없지.
현실적인 대답에 태화는 웃음을 터뜨렸다.
살로메는 파티를 사랑하고 치장하길 좋아했다.
대부분의 비용은 남자가 마련했으나 그렇다고 누군가를 물주 삼아 돈을 뜯어내진 않았다.
화려하고 비싼 액세서리와 달리 거주 공간은 허름한 게 당연했다.
「그런 사적인 공간에 남자를 끌어들인 거군요.」
「안타까운 아가씨지.」
살로메를 사랑하는 남자는 많았다.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이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 줬다.
한여름 밤의 꿈은 꿈에 불과했으니, 티에리를 선택한 순간 살로메의 끝도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그나저나 오늘 각오는 했나?」
「······각오요?」
「오늘 베드신을 촬영하는 건 기억하지?」
「네. 그렇긴 한데······.」
태화는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축복 속에서 겪은 일이 떠올라서다.
-그걸로 여자가 넘어가겠어?
-자기, 실망이야.
-흐응-. 내가 좀 가르쳐 줄까? 어때? 고개만 끄덕여 봐. ······칫, 재미없게.
베드신이라곤 해도 구체적인 묘사보다 그 후에 있는 선문답을 닮은 대화가 더 중요한 장면이다.
당연히 대본에도 ‘입을 맞춘 후 더운 숨을 내쉬며 정열적으로 서로를 바라본다’라는 설명이 전부였고, 그 뒤에 ‘정사 후 침대에 누운 살로메와 티에리’라는 문장이 시작됐다.
그러나 축복에서 겪은 일은 달랐다.
살로메의 탈을 쓴 무사(Musa)는 태화에게 강도 높은 접촉을 요구했으니까.
색기에 비해 너무 담백하다고 비난했고, 왜 뒤로 빼냐고 불평을 터뜨렸으며, 위아래를 뒤집어 덮치려 들기도 했다.
물론 키스 후 서로를 바라보고 있으면 평소처럼 공간이 재구성되었다.
‘······장난이 너무 심했지.’
‘젊은 연인의 노래’는 전체 관람가였다.
프랑스 영상물 등급 중 12세 미만도, 16세 미만도 아닌 전체 관람가.
솔직히 베드신이 껴 있는데도 어떻게 전체 관람가인지 의문이 들었으나, 개방적인 나라라 그런 것이라 애써 이해하자면 못할 것도 없었다.
‘딱히 중요한 장면이 아니라 다행이지만······ 왜 그랬는 진 여전히 모르겠네.’
과거 그런 일이 없었기에 더더욱 알 수 없던 장난.
태화가 의도를 알지 못해 고민하고 있을 때, 그의 얼굴을 보고 있던 장마르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긴, 동양은 수위에 엄격했지.’
사실 프랑스의 등급은 다른 나라와 기준이 조금 달랐다.
가끔 내부에서 문제가 제기되는 작품도 있으나 대부분은 ‘표현의 자유’라는 권리 아래 허용됐다.
공포물을 제외한 장르에 관해선 상당히 관대한 잣대를 들이댔고, 주변 국가에서 그런 프랑스의 자유를 방종이라 욕했다.
‘이 친구 표정이 기대되는군.’
몰래 카메라는 아니지만 이 젊고 매력적인 청년에게는 그와 비슷하게 느껴지리라.
각오가 부족한 게 잘못이라 생각하며 장마르크는 더없이 선한 표정으로 준비하고 오란 말을 뱉었다.
***
나래는 신중한 얼굴로 태화의 상체 음영을 더했다.
빈틈없는 몸 관리로 인해 육안에 비친 육체는 훌륭했지만 카메라를 통해 평면에 담길 땐 그 느낌이 바뀌기 때문이다.
“음, 좋네. 머리는 살짝만 흐트러트리자.”
윤곽 화장까지 마친 나래는 한 걸음 물러서 만족스러운 심정을 드러냈다.
허벅지에 살짝 달라붙는 스트레이트 핏 청바지를 입은 태화가 허리를 약간 숙이자, 그녀는 단정하게 고정되어 있던 머리를 헤집었다.
“방탕아 같은 게, 전에 카메오로 수영장 장면 촬영할 때랑 또 다른 느낌이야. 아니, 그때보다 훨씬 좋아.”
태화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며 슬쩍 오른쪽 입꼬리만 올렸다.
태화가 맡은 티에리 도우는 미소를 지을 때 항상 오른쪽 입가만 움직였다.
비대칭으로 올라간 입술은 명백히 비웃음으로 보였으나,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눈썹과 깊어지는 눈빛은 비슷해 보이는 미소마다의 온도 차이를 드러냈다.
“다녀올게요.”
“그래.”
준비를 마치고 청바지에 스니커즈를 신은 태화는 카메라들이 비추고 있는 현장으로 다가갔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던 레베카가 환한 웃음으로 그를 맞이했다.
「자기, 오늘따라 더 섹시하네.」
「고마워.」
「청바지 광고하면 좋을 거 같아. 자기는 엉덩이가 매력적이거든.」
「······아, 그래.」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태화가 웃음으로 얼버무리자 레베카는 까르르 웃으며 곱게 눈가를 접었다.
「자기가 없으면 섭섭해질 거야. 오늘 날 위해 멋진 하루를 만들어 줘.」
그녀는 사랑을 고백하는 소녀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레베카를 보며, 태화는 베드신을 찍는데도 하나 긴장하지 않는 그녀의 프로다운 모습에 감탄했다.
「리, 버클을 풀면 좋겠군. 너무 금욕적이야. 지퍼도 반쯤 내리고.」
살짝 드로즈 밴드를 노출시키라는 말에 태화는 청바지의 버튼을 풀고 적당히 옆으로 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