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66
잘할 때는 좋아하던 이들의 시선이 차가워지는 것도 견딜 수 없었고, 사과할 방법조차 알려주지 않는 테레사가 가끔 야속했다.
······물론 태화는 도와줄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혼자 억울해하고 자존심 상하고 야속하게 여기는 것이었지만, 성효의 입장에선 나름대로 개연성 있는 사고였다.
태화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있는 성효를 바라봤다.
도대체 어떤 환경에서 크면 이런 식으로 자랄 수 있는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선배님······.”
“네.”
“제가······. 제가, 전에 실수했던 거 같아요. 죄송해요.”
성효가 파르르 속눈썹을 떨며 애처로운 목소리를 흘렸다.
아무리 사이가 나쁘더라도 마음이 누그러질 것 같은, 연약하고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모습이었다.
“성효씨.”
“그러니까 저 한 번만······.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
태화가 아무 말도 없자 잘게 흔들리던 성효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하는 서러움, ‘이래도 안 되는 건가’하는 불안, 그리고 ‘왜 다들 자기에게만 그럴까’라는 억울함이 섞인 눈물은 보는 사람이 다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로 기이한 마력이 있었다.
애처롭게 떨고 있는 여배우를 응시하던 태화가,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난 성효씨에게 사과받을 마음이 없어요.”
“선배님······.”
사과를 거절하는 태화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그것은 마치 ‘네가 사과하지 않아도 이미 화가 풀렸어’라 말하는 것 같아서, 성효는 약간 희열에 찬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어차피 성효씨는 뭐가 잘못인지도 모르잖아요.”
그것이 액면 그대로의 거절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 말이다.
“······네?”
성효는 이번에도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진심으로 눈물 흘리며 빌면 다 통했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다들 성효의 사과를 받아줬다.
그걸로 성효는 마음속 부채감을 지웠고, 또 필요한 것은 얻어냈다.
이 사과가 통하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왜, 왜 그렇게 절 미워하세요?”
성효는 약간의 가식마저 벗어던진 채 태화의 팔목을 붙잡고 절박하게 물었다.
슬럼프를 겪으면서 성효는 자신이 ‘가짜’라 믿었던 조연들 사이로 떨어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너무나 끔찍한 경험이었으며 제발 끝나길 바라는 악몽이었다.
도대체 이 답답한 곳에서 이들은 어떻게 버티는 것일까.
그렇게까지 조연 역할이 좋은 것일까.
본인들의 몸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걸, 왜 이 사람들은 모르는 것일까······.
슬럼프를 겪고 있어도 안목은 그대로였던지라 더더욱 괴롭게 느껴졌고, 지금껏 이해했다 생각한 ‘조연’들의 마음도 전혀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이 돼버렸다.
“전 그저 친구랑 싸운 것에 대해 상담한 것뿐이었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절 미워하세요?”
성효는 길 잃은 어린애처럼 매달렸다.
태화의 분노는 부당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가짜’라고 낮잡아 본 적 없었다.
가끔 주제와 위치를 모르는 이들에게 질려 그들을 무시한 적은 있어도, ‘가짜’도 진짜를 위해 필요하다는 걸 이해했으며, 그들의 존재에 감사했다.
태화는 ‘지금은 불가능해도 나중엔 가능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그럴 능력이 되는 이들에게나 통하는 말이었다.
그릇에 담길 수 있는 물이 정해져 있듯, 사람마다 가진 그릇의 크기는 달랐으니까.
단지 현재 채워져 있는 물의 양만 보이기 때문에 마치 노력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었다.
“태화 선배님도 저랑 같으면서······!”
울먹이던 성효가 기어코 제 안에 있던 말을 터뜨렸다.
데뷔작인 ‘태양을 품은 바다’부터 태화는 빛났다.
그는 재능이 넘치는 신인이었고 그것은 다른 범인(凡人)들이 넘을 수 없는 격차였다.
“내가, 데뷔 때부터 하나도 성장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아닐 텐데.”
“그거랑 이건 달라요!”
“같아요.”
절규하듯 소리 지르는 성효에게 태화는 단언했다.
눈물에 젖은 후배의 모습을 보고도 그의 모습은 여전히 담담했다.
“같다고.”
태화의 재능은, 축복 속 연습을 통해 그 숙련도를 빠르게 채웠다.
단계라는 벽을 마주했을 때, 보상이나 후원의 힘을 통해 넘은 경험이 많았다.
그러나 굳이 축복을 이용하지 않았을 때도 그의 숙련도는 성장을 거듭했으며, 보상과 후원의 도움 없이 단계를 뛰어넘기도 했다.
벽은 특별한 능력이 없어도 넘을 수 있다.
그 방향을 알기 힘들어 가이드가 없으면 평생이 걸릴 수 있지만, 확률은 그녀가 말한 것처럼 0이 아니었다.
“하긴 내가 너랑 친한 사이도 아니고 거기까지 설득할 의리는 없지.”
본심을 말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건 한 번으로 충분했다.
그 힐난 속에서 ‘캐트시’에 출연했던 임승혁은 자신이 부족했던 점을 깨달았고, 천성효는 그렇지 못한 것뿐이다.
“애도 아니잖아.”
천성효의 나이는 스물넷.
이미 주민등록증에 잉크가 말라도 진즉에 말랐을 성인이었다.
머리가 모자란 사람도 아니고 친하지도 않다.
태화가 배려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한 번도,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가끔 있는 돌연변이 같은 상황을 일반화하는 건 불공평해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믿어.”
어느새 반말로 돌아선 태화는 ‘그럴 리가 없는데’란 말을 중얼거리는 성효를 보며 팔짱을 꼈다.
가끔 자신이 직접 보고 겪지 못하면 백날 말해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예외가 발생할 수 있고, 자신이 생각한 세계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한, 평생 바꿀 수 없는 성질이었다.
성효에게서 시선을 뗀 태화는 시간을 확인했다.
여러 번의 NG로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니 자정을 넘기지 않으려면 슬슬 돌아가야 했다.
“천성효씨의 생각은 이제 됐으니까 눈물 닦고 나와요. 촬영해야죠.”
“······.”
“가짜 진짜를 논하기 전에 프로잖아요.”
그러니 무섭든 아니든 당장 무대로, 카메라 앞으로 돌아와라.
태화의 위협 아닌 위협에 억울함을 호소하던 성효가 가늘게 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끝
ⓒ 마늘소금
태화가 혼자 돌아오고 성효의 매니저가 안절부절못하며 가봐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 눈시울이 붉은 성효가 약간 창백해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딱 봐도 운 것 같은 얼굴이라 사람들은 불편함과 호기심이 섞인 시선으로 태화와 성효를 힐끔거렸다.
울고 있던 후배를 상냥한 선배가 다독여 데려온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계속 실수하는 후배를 다그친 것일 수도 있다.
연예계에는 후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으며 아무리 성격 좋다고 소문난 연예인들도 본성은 알 길이 없었다.
때문에 태화를 보는 눈빛도 복잡하게 갈렸다.
비록, 그것을 태화 앞에서 드러내는 멍청이는 없었지만 말이다.
“좀 오래 걸렸네.”
“어쩌다 보니 그리됐어요.”
태화는 현규에게 말을 얼버무린 채 촬영을 준비했다.
현규에겐 성효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할 수 있었으나 이곳에는 보는 눈이 많았다.
“그럼 이어서 가자고!”
담배를 피우면서 기분을 전환한 것인지 PD가 약간 들뜬 목소리로 스텝과 배우들을 다독였다.
작은 회의실에 배우들이 아까와 같은 배열로 자리했고, 곧이어 슬레이트의 날카로운 소리가 촬영장에 울려 퍼졌다.
“······환자의 수술을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그를 위해선 손부터가 익숙해져야겠죠.”
“와-. 굉장하시네. 손이 익숙해져야 한다니. 다른 환자를 발판 삼을 줄 아는 태도가 참 훌륭해요?”
삐딱하게 앉아있던 태화가 박수를 치며 보드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조롱했다.
시우와 한배를 탄 시도였으나 그는 한 명의 VIP 환자를 위해 다른 환자들의 수술이 부속품 취급당하는 걸 참지 못했다.
그것이 같은 ‘팀’으로 묶인 의사가 낸 의견일지라도 말이다.
웅성거리는 목소리 속에 ‘누가 저 인간을 회의실에 들여보냈어?’란 속삭임과 굴러온 돌에 대한 조롱이 섞였다.
김윤성 진료담당부원장 역을 맡은 원로 배우는 허허로이 웃으며 가늘고 차가운 눈으로 태화를 위아래로 훑었다.
병원 의사들의 적대적인 시선이 이시도를 향하고 그를 데려온 유시우가 곤란해지는 장면.
그러나 작게 입술을 시근거리던 유시우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일어서서 여론을 휘어잡고 수술의 집도의를 이시도로 갈아 치우며 환자에게도 좋고 다른 이들도 함께 엿 먹이는 6화의 백미.
좌중을 제 입맛대로 이끌어야 하는 유시우의 대사가 고작 초등학교 반장 선거 수준의 박력밖에 지니지 못했다며, PD가 성효에게 계속 NG를 준 부분이었다.
“이시도 선생의 말이 날카롭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도 생각하네요.”
자리에서 일어난 성효가 조곤조곤 대사를 뱉었다.
듣기 좋은 목소리였으나 이번에도 급류를 만들기보단, 급류에 휘말리기 딱 좋은 애매함이 느껴졌다.
‘이러다간 또 컷 당할 텐데······.’
태화는 잔잔한 성효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민했다.
이 파트는 유시우의 단독 대사로 처리되었고, 그렇기에 더 어려운 장면이었다.
평소의 천성효라면 모를까, 현재의 그녀로선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기 힘든 난이도.
‘······난폭한 방법을 써야 하나?’
태화가 성효에게 가진 유감은 많았다.
그러나 그것이 상대를 괴롭히고 싶다는 가학적인 감정은 아니었으며, 태화는 한껏 약해져 있는 후배의 자존심을 철저히 짓밟을 정도로 잔인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냥 NG가 나도록 내버려둬야겠다 결론지으며 그는 삐딱한 시선으로 성효를 응시했다.
그리고 보지 않으면 좋을 것을 발견했다.
‘······이런.’
담담하게 대사를 읊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한 번도 실패 안 해본 사람에게 이 상황이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하는 건 당연했다.
실패에 실패가 거듭될 때마다, 성효의 연기력은 점점 더 최악을 달리리라.
‘작품을 망칠 순 없지······.’
이번 드라마를 실패하는 편이 성효에겐 약이 될지 모른다.
자신이 들어갔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믿는 오만함이 꺾이고, 조금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볼 계기를 줄지 몰랐다.
한동안 힘들진 몰라도 성효가 쌓은 커리어는 한번 실패해서 무너질 허상은 아니니 재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근데 내가 거기까지 생각해줄 필요는 없잖아?’
태화는 성효에게 더 나은 길이 어떤 건지 알았다.
비록 그녀 자신이 지금 도움을 바라더라도, 내버려두는 편이 성효의 미래에 더 도움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단지 태화 본인의 커리어에 흠집을 내가면서까지, 그리 해줄 의리가 없었을 뿐이다.
“저런 애송이 때문에 성월의 이름에 먹칠하는 것보다 낫잖아? 난 당신들이 책임 회피하기 딱 좋은 외부 인력이고.”
태화는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성효의 대사를 가로챘다.
유시우의 입을 통하는 것보다 날 것 같은 말투였으나 이시도의 캐릭터와는 잘 어울렸다.
“······허허, 이시도 선생. 모두가 함께 있는 자리인 만큼 예의를 지킬 줄 알아야지.”
원로 배우답게 김윤성 역의 채만석이 재빨리 대사를 받아 장면을 이었다.
만석도 성효가 무너지면 무너졌지, 지금 상태에서 혼자 서지 못할 것을 깨달은 배우 중 하나였다.
이번에 NG가 나면 촬영 일정이 얼마나 꼬일지 눈치채고 있었다.
“아, 죄송. 내가 외국에 오래 있어서 한국어를 잘 못 해요.”
적절히 대처해준 만석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태화는 뻔뻔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이시도는 의사들이 정치질하는 것을 혐오했으며 장유유서란 단어를 쓰레기통에 버린 인물이다.
나이 많고 직위가 높다고 해서, 김윤성에게 숙이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야, 아줌마.”
몇 마디를 더 뱉어 배우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것을 확인한 후, 태화는 구두코로 성효의 발목을 툭툭 쳤다.
대사를 빼앗기고도 멍하니 있던 성효가 그제야 눈을 깜빡이며 태화를 쳐다봤다.
‘여기까지 왔는데 NG는 안 되지.’
그는 속으로 혀를 차며 부러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