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94
에서 인정받은 연기력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신상아는 실감나게 공포에 질린 가녀린 여성의 목소리를 흘렸다.
고작 테이블에 둘러 앉아 진행되는 대본연습이건만 그녀의 진지한 연기 덕에 살짝 풀려있던 분위기가 변했다.
‘훗, 이게 내 실력이라고?’
상아는 이채를 띠는 PD의 눈빛을 슬쩍 확인하고 속으로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해조의 캐스팅이 엄청난 열의를 보였던 원작가는 정작 여주인공인 서아영의 캐스팅엔 어울릴 만한 배우를 일곱이나 추렸다.
그 만큼 관심이 덜했다는 것이고 상아는 그 점이 분했다.
홍일점 일진 여학생 박미나를 맡은 이후, 급부상한 그녀를 이 정도로 무시한 경우는 없었으니까.
예능과 CF도 공격적으로 참여했던 상아는 작품만으로 승부했던 태화에 비해 빠른 속도로 인지도와 인기를 쌓았다.
인기와 함께 3년간의 노력이 다시 한번 조명되는 기회도 얻었고 톡톡 튀는 예능감 덕에 고정으로 들어가는 예능 프로도 두 개나 생겼다.
꿈에 그리던 신데렐라가 된 만큼 그녀는 재투성이 시절 받았던 시선이 다시 닿는 게 몸서리 칠 정도로 싫었다.
그렇기에 간접적 원인이 된 ‘거품투성이’ 이태화가 짜증났다.
‘어디 한번 해보시지?’
슬슬 그의 대사가 들어올 때가 되어 상아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태화를 훔쳐봤다.
그리고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가라앉았으면서도 묘한 열기를 품은 시선이 잠시 자신을 스친 것을 확인하고 그녀는 심장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리석은 미물이 주제도 모르고 귀한 이에게 달라붙는 구나. 떨어져라.”
태화는 능숙하게 사극에서 주로 쓰는 발성을 이용해 대사를 내뱉었다.
누군가에게 배우지 않았기에 처음엔 어색하던 울림은 거듭된 연습 속에서 연마돼 이젠 사극 전문 배우 못지않은 중후함과 음색을 자랑했다.
작중 해조는 무려 천 년 전 봉인 당해 오랜만에 인간 사회에 내려온 구미호.
아영을 만나기 전 조우한 인간을 현혹해 현대의 지식을 뽑아냈지만 그렇다 하여 원래 쓰던 발음이 순식간에 바뀔 리 없었고 그는 여전히 예스러운 말투를 사용했다.
“손쉽게 귀신을 쫒아낸 해조가 아영에게 다가가 기쁨이 섞인 미소를 띤다.”
“혜령, 드디어 그대를 만났어. 홀로 있는 나날이 쓸쓸하지 않았나?”
“어······.”
상아는 대사를 잊은 채 넋을 놓고 태화를 응시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잠시 잊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자신을 보며 달콤한 미소를 짓는 남자뿐.
그 외의 것들은 참 희미하게 느껴졌다.
······반응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 태화가 의아해하며 눈을 깜빡이기 전까지 말이다.
“······씨! 상아씨! 대사 해주세요.”
“아, 네? 네! 죄송합니다!”
약간의 짜증이 섞인 PD의 재촉을 듣고서야 상아는 자신이 넋을 놓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허둥대며 대사를 확인하고 기계적으로 읽었다.
적혀있는 글자를 발음 나는 대로 읽는 그녀의 머릿속은 참 복잡했다. 상아는 지금 자신이 왜 그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태화의 얼굴에 뜬 미소를 봤을 때 그냥 다른 건 아무래도 좋게 느껴졌다.
‘말도 안 돼. 무슨 미친 짓이야, 신상아.’
그녀가 생각할 때 자신은 신데렐라였다. 그것도 인기라는 왕자님까지 얻은, 유리구두로 행복해진 신데렐라.
해피 엔딩에 다다랐는데 갑자기 장르를 바꿔 돼지치기 왕자를 찍을 필요는 없었다.
그것도 진짜 왕자인지 별 거 없는 돼지치기인지 알 수 없는 인물을 상대로 말이다.
상아의 복잡한 마음과 자기합리화를 모른 태화는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이대로 가도 되는지 고민했다.
표정만 보면 화가 나서 홍조가 돈 것처럼 보였으나 시선이 마주쳤을 때 보였던 반응을 생각하면 색기를 감당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설마 그렇게 연습했는데 못 쓰게 되는 건 아니겠지······?’
태화는 불안한 눈으로 대본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상아를 응시했다.
작중 색기 담당이니 그에 걸 맞는 연기력을 선보이기 위해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상식 외의 궁극기라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면 참 실망스러울 것 같았다.
“난 혜령이란 여자가 아니에요. 도와준 건 고맙지만 전생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라면 불쾌하네요.”
그녀는 애써 옆에 있는 남자를 외면하며 새침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으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그럭저럭 참고 연기할 만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렇군. 미안하네. 전생의 그녀와 현생의 그대는 다른 인물인 것을. 내 감정에 빠져 그대에게 상처 입히고 말았어.”
“······.”
너무 안타까운 목소리에 상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태화를 바라봤다.
아스러질 것 같은 쓸쓸한 미소가 그의 얼굴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니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라 외치고 싶어 하는 혀를 꽉 깨물었다.
경국지색도 아니고 무슨 남자가 저런 표정을 짓는단 말인가.
‘진정해! 저건 다 화장빨이야, 화장빨······.’
“그래도 이렇게 만난 건 인연이니 그대의 근심을 약간이나마 덜어주고 떠나고 싶네. 전생과 달리 영안을 조절하지 못하는 듯 한데 한동안 그대 곁에 머물며 도움을 주면 안 되겠나?”
화장빨이라 되새기던 그녀는 침대 위에서 연인에게 속삭이는 것과 같은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목소리와 희미하게 올라간 입가, 그리고 천천히 내밀어진 손에 결국 함락 당했다.
본능에 진 상아는 욕망이 시키는 대로 그의 손을 덥썩 잡고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양손으로 꼭 잡는 것이, 누가 빼어 갈까 두려워하는 기색마저 느껴졌다.
“무, 물론이죠!”
“큼! 흠흠, 신상아씨.”
“아······.”
PD의 언짢음 섞인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상기하고 눈을 굴려 주변을 훑었다.
태화의 시선을 직접 받지 못한 주변 사람들이 상아가 보이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채 미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억울해······. 이건 내 잘못이 아니란 말이야.’
누구든 그 시선을 봤다면 그가 원하는 바를 이뤄주고 싶었으리라.
이것은 불가항력이었지 절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은 그런 변명이 통할만한 장소가 아니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주변에 사과를 건넨 뒤 절대 그의 얼굴을 보지 않게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 자신이 진 게 아니라고 되뇌면서 말이다.
끝
ⓒ 마늘소금
분함을 참아가며 속으로 이를 갈던 상아였으나 그녀의 다짐은 채 한 시간을 가지 못했다.
귀를 잠식한 목소리는 마치 피부를 타고 흐르는 초콜릿처럼 감미로웠으니까.
설상가상으로 착각이라 여길 수 없을 만큼 따가운 시선의 온도가 느껴졌다.
‘부, 부끄러워······.’
태화가 음흉한 눈으로 상아를 훑고 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집요하다기보다 나른해 보이는 눈빛을 했다는 걸, 그런 주제에 대단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무언가를 보듯 그녀를 바라본다는 걸 상아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점이, 그녀의 허리를 간질였다.
‘설마 이 사람 진짜 나 좋아하나? 하긴 내가 좀 잘나긴 했으니까······. 잠깐, 그럼 내가 갑인 거 아니야?’
너무 열렬한 시선을 받은 탓일까 이성이 반쯤 타버린 상아의 사고가 엉뚱한 쪽으로 튀기 시작했다.
태화가 저런 눈빛을 보내는 게 다 그녀를 ‘진짜’ 사랑해서이며 그렇다면 그의 저런 태도를 우월한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대처하면 된다―. 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무섭기만 했다면 그냥 시선을 피하고 애써 무시했으리라. 하지만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어 외면한 것이지 사실 상아는 그의 열기 어린 시선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아직 1년도 안 된 신인이라고. 나랑 비교도 안 되는데 피할 필요 없어.’
보고 싶다는 본능과 제대로 된 연기를 하려면 그냥 닥치고 대본에 얼굴 박고 있으라 외치는 이성 속에서 결국 본능이 승리하자, 그녀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자기합리화를 하며 도발적인 눈으로 태화를 응시했다.
‘흥, 그렇게 내가 좋나? 보는 눈은 있어서.’
“방이 하나 밖에 없으니까 거실에서 지내요. 방엔 절~대 출입금지. 알았죠? 그리고 이 눈, 확실히 떼어 줘야 해요?”
그녀는 새침한 표정을 한 채 집에서의 규칙을 읊었다. 시선을 마주해도 아까 느꼈던 이상한 기분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조절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에서 보였던 기세가 단발성이었다 단정 지은 상아는 조금 후련해진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그를 향해 웃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좀 쓸만하긴 해도 역시 자신이 원탑이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당연한 것을.”
‘역시 나래 누나랑 신상아는 다르네.’
나른한 목소리로 대사를 뱉은 태화는 연습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정신을 차린 상아를 보고 만족했다.
너무 쉽게 넋을 놓고 연기를 벗어나는 모습이 불안하게 느껴졌었는데 단순히 무방비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고일 뿐, 벗어나는 시간이 짧았다.
익숙하지 않은 것뿐이라면 빠른 시일 안에 적응하고 그의 유혹어린 연기에도 꿈쩍하지 않으리라.
첫 만남에선 해조의 색기에 얼굴을 붉혔던, 그러나 곧 받아들이는 한계점을 올려 작정하고 유혹하지 않을 때의 그를 훈련 덜 된 애물단지 애완여우로 여기던 여주인공, 서아영처럼 말이다.
‘박미나 역이랑 살짝 겹치지만······. 뭐, 그럴 수 있지.’
연기력으로 인정받은 신상아이나 그녀의 역할 연기는 자존심강하면서도 가끔은 여린 모습을 보이는 새침한 캐릭터로 한정돼있었다.
연기 폭이 좁다는 의미였지만 그래도 주황과 노랑 수준의 변화를 통해 각각의 인물들을 특색 지었기에 이름이 알려진 후에도 ‘틀에 찍은 연기만 하는 배우’란 평은 피했다.
호흡을 맞추면서 획일에 가까운 연기가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그래도 갈고 닦은 색기를 받아쳐 준다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등선을 포기했어도 약속을 어긴 적은 없어. 그대가 바라는 바는 반드시 이뤄 줄 터이니 그 동안 잘 부탁해.”
김효신도 그렇고 상대 배우 운이 좋다 생각하던 태화는 연습 중 처음으로 제대로 된 색기를 풍긴 채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상아를 바라봤다.
자극을 심하게 주면 더 빨리 적응해 주진 않을까 기대하면서.
그리고 그 기대는 엉뚱한 결과를 낳았다.
“아······.”
그녀는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지금까지 1:1로 다가오는 시선 속에 열기를 품었다면 눈앞에서 웃고 있는 태화는 확 피어나 향기를 풍기는 라넌큘러스를 닮았다.
시선이 마주 하지 않은 이들조차 그의 변화한 표정을 보고 얼굴을 붉힐 정도로 진한 유혹의 향기가 상아와 상아의 뒤편을 덮쳤다.
그렇게 여성들을 홀리던 차, 가만히 상아를 바라보던 태화는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에 붙은 검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어차피 대사도 다 끝났겠다, 이물질이 묻은 위치가 신체 부위와 꽤 거리가 있다는 걸 깨닫고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상아의 머리카락에 붙었던 김 조각을 떼어냈다.
“뭔가 묻으셔서, 수고 하셨······?”
그새 상큼한 분위기로 바뀌어 손에 있는 김을 보이려던 태화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순간 멈칫했다.
“어?”
멍하니 ‘아, 김이 묻었었나······.’라는 멍청한 생각을 하던 상아는 이상하게 축축한 느낌에 손을 인중으로 가져갔다.
날씨는 춥고 난방을 하곤 있어도 약간의 감기 기운이 있던 터라, 맑은 콧물이 비강 밖으로 살짝 흐른 것이라 여겼더랬다.
조금 부끄럽지만 그래도 색이 없는 액체니 보이진 않았을 거라 생각하며 입가를 가리듯 슬쩍 인중을 쓸어 만진 것을 확인한 그녀는 자신의 손을 확인하고 심하게 동요했다..
가늘고 고운 손가락 끝엔, 붉은 핏자국이 찍혀있었다.
“어어! 상아씨 코, 코피 나요!”
순간 사고를 멈춘 그녀가 본인의 손가락을 응시하는 사이 정신을 차린 이들이 허둥대며 난리를 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떡해!’를 외치는 이들도 있었고 정신을 차리고 휴지를 찾는 이도 있었다.
마침내 그녀의 매니저가 다가와 휴지로 코와 입가를 가려주자 드디어 상황이 입력된 상아의 눈이 물기로 젖었다.
“저, 저 잠시 만요.”
부끄러움에 몸 둘 바 몰랐던 그녀는 일방적인 말을 남긴 채 재빨리 회의장을 벗어났다.
대본 리딩이 끝난 탓에 예정된 휴식시간이 왔지만 신상아의 코피로 인해 분위기는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아하하, 저희 상아가 요즘 일정이 빡빡해 피곤했나봅니다. 자주 코피가 나서 병원에 가볼 생각이었는데 하필······. 죄송합니다 PD님.”
“뭐, 죄송할 거 있습니까. ······촬영하기에 몸은 괜찮은 겁니까?”
“물론 이죠! 드라마 크랭크인하곤 드라마 일정에 집중할거라 한 동안 무리한 여파가 온 것뿐입니다. 하하하······.”
과장되게 웃으며 피로 탓으로 돌리는 그녀의 매니저를, 스텝들은 안쓰럽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는 어떻게든 과로로 몰아가고 싶어 했으나 방금 전 사고는 누가 봐도 ‘너무 흥분해서’ 난 코피였으니까.
‘너무 강했던가.’
사건의 원흉인 태화는 자신의 볼을 문지르며 상황을 떠올렸다.
축복 속의 서아영은 정말 작정하고 색기를 폴폴 풍겨야 동공이 흔들렸으며 고작 이 정도 유혹으론 뺨만 살짝 붉혔다.
조절했으니 자신만만했던 상아도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무리였던 것 같다.
‘진짜 포기해야하나?’
제 능력을 백분 보일 수 없다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완벽에 욕심을 부려 촬영에 지장을 줄 순 없다.
복잡한 마음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의 곁에 현규가 다가왔다.
“태화야, 괜찮다면 신상아씨에게 잠시 가봐.”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배우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을 때, 매니저는 나직한 목소리로 조언했다.
연예계 전반의 소식을 듣고 있는 현규는 신상아가 얼마나 뒤끝 있는 성격인 지 잘 알았다.
또한 그 상대가 자신보다 아래라 생각하고 있을 때, 당사자가 직접 와서 달래주지 않으면 촬영 내내 얼마나 피곤하게 구는 지도 알았다.
신상아에 대한 설명을 듣고 태화는 알겠다는 말을 남긴 후 천천히 그녀가 사라진 방향으로 움직였다.
빠르게 침몰한 그녀에게 실망한 건 사실이라도 촬영에 지장이 생겨선 안됐다.
한 번 거절하면 그걸로 ‘어쩔 수 없지! 나만 갔다올게’를 외치려던 현규는 너무 아무렇지 않게 가버리는 태화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그런 방황도 잠시. 현규는 이내 얼굴을 굳히며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