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3
13화. 인연(因緣)을 보다
九層之臺는 起於累土라, 千里之行은 始於足下라.
아홉 층의 대도 흙 쌓음으로 시작하고, 천리의 길도 발밑에서 시작된다.
‘아아, 그렇구나.’
장 조장은 생각에 잠긴 소명의 모습을 흘깃 보았다. 생각보다 이르기는 하지만, 이참에 다른 것을 가르쳐 볼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넌지시 말을 건넸다.
“어험, 그러고 보니, 빨리 뛰는 법도 있는데…….”
“엣? 빨리 뛰는 데에도 법이 있나요?”
“그럼! 뭐, 지금 나는 보여줄 수 없지만…… 그래도 가르칠 수는 있지.”
소명의 눈이 새삼 반짝였다.
뭐든 좋았다.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익히고 단련하는 것은 때때로 찾아오는 갑갑함을 잊게 만들어 주고, 아울러 목편의 많은 문장을 더욱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부터 장 조장은 소명에게 빨리, 그리고 오래 뛰는 법을 가르쳤다. 이 또한 소림의 공부로, 철비각(鐵飛脚)이라 했다.
무학에서는 발을 쓰는 보(步), 몸을 가누는 신(身), 멀리 뛰는 경신(輕身), 이를 합쳐 보신경(步身輕)이라 하는데, 소림의 철비각은 기초적이나마 이 셋의 이치를 모두 담은 드문 공부였다. 또한, 각법으로서도 위력이 상당했다.
그리고 그 단련의 시작은 곤음수처럼 무식했다.
“으헤헤헥!”
“어허! 호흡이 얕다!”
넓은 묘실을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 소명에게 장 조장의 노호성이 날아들었다. 그는 묘실 복판에 편히 드러누워서는 소명의 몸이 휘청거리거나, 호흡이 흐트러지면 버럭버럭 호통을 쳤다.
그에 반해 소명은 죽을 지경이었다. 빨리, 오래 뛰는 것은 좋았다. 그러나 두 다리에는 몇십 근은 될 듯한 돌조각들을 단단히 묶고, 허리에는 제 덩치만 한 바위를 달고 뛰고 있었다.
“으, 으아다다닷!”
전부 합해서 무게가 얼마나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무식하지만 이렇게 무게를 더한 채, 바르게 뛰는 것이 철비각 수련의 첫 단계였다.
한참 후, 소명은 더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대로 뻗어버린 소명에게 장 조장은 슬쩍 다가갔다.
“살아 있냐?”
“으어…….”
죽어가는 소리로 소명은 아직 살아 있음을 알렸다. 숨죽여 웃은 장 조장은 소명의 입에 무슨 가루약을 털어 넣었다.
“케헥! 케헥! 이, 이게 뭐에요?”
무지하게 썼다. 지금껏 씹었던 풀 쪼가리나, 이끼에 못지않았다. 다 죽어가다가도 자리에서 펄쩍 뛸 정도였다. 장 조장은 담담하게 말했다.
“다 도움이 되는 약이야, 아무렴.”
“케에엑.”
철비각을 익힐 때 취하는 비약 중 하나였다.
심장을 강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데 말이 좋아 비약이지 실상은 흔한 약초 뿌리 몇을 말려서 가루로 만든 쓴 약에 지나지 않았다. 허나 지독한 쓴맛 덕분에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하기에는 효과가 좋아 낭인 생활 중에 꼭 챙기는 물건이었다. 장 조장도 어지간해서는 절대 손도 대지 않았다.
‘흐흐흐, 이렇게 쓰일 줄은 또 몰랐지.’
장 조장은 데구루루 구르는 소명의 모습을 보며 음산히 웃었다.
소명의 하루는 규칙적이었다. 아침에는 곤음수를 수련하고 낮에는 먹을 것을 구하러 사방을 뛰어다녔다. 저녁 무렵에는 철비각을 수련했다. 그리고 그만큼 빠르게 익숙해졌다.
장 조장이 처음 생각했던 것은 족히 반년이었다. 제풀에 지쳐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반년 후에 뛰어다닐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고작 삼 개월 만에 이전처럼 뛰어다녔다.
아니,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으음…… 이건 계산에서 어긋났는데.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녀석이냐.”
장 조장은 눈살을 찌푸린 채 머리만 벅벅 긁었다. 하기야 생각하면 곤음수를 한 달 만에 3성에 이르렀을 때부터 계산은 엇나간 셈이기는 하다.
“남몰래 무슨 영약이라도 처먹었나…….”
지쳐 널브러졌다가도 다음 날 되면 발딱 일어나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뛰어다니니. 하기야 그쯤이나 되니 경지에도 오르겠다.
장 조장은 자신이 가르친 바를 일심으로 행하는 모습을 보며 깊은 갈등에 빠졌다.
“한번, 제대로 가르쳐 볼까…….”
마음은 동했으나 아직 머리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것은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소명을 향한 장 조장의 눈길이 복잡했다. 그는 끌끌 혀를 한 번 차고는 눈을 돌렸다. 오늘따라 불편한 오른쪽 다리가 시큰거리며 아팠다.
“훅, 훅, 훅.”
소명은 숨을 다스리며 뛰었다. 팔다리에 매단 돌덩어리나, 허리춤에 묶어 끌고 있는 바위도 버겁지 않았다. 이전만큼 뛰고 달렸다. 이제는 쉬이 숨차지도 않았다.
달리기를 멈추고 숨을 돌리자 가쁘던 호흡이 이내 고요해졌다.
철비각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어쨌든 하루 온종일을 이리 뛰어도 너끈했다. 소명은 허리에 맨 끈을 풀고 한담으로 가 얼굴을 집어넣었다.
달아오르던 열기가 일시에 식어버렸다.
소명은 젖은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넘기고는 새삼 묘실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머무른 지, 반년이 가까웠다. 계절은 어느 틈에 바뀌어 높이 햇살은 점점 짧아지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 들고는 했다.
햇살은 한참 전에 저물었다. 흐릿한 달빛이 미미하게 비쳐 내렸다. 그날 이후 어둠에 눈이 밝아진 소명이었다. 흐릿한 달빛만으로도 멀리까지 볼 수 있었다.
“철비각도 이제 많이 익숙해진 것 같은데…….”
소명은 두 손을 아쉬운 눈으로 보았다. 철비각과 달리 곤음수의 성취는 멈췄기 때문이다.
장 조장의 말로는 3성에 올랐다고 했다. 그러나 이후로는 답보 상태였다. 아니, 오히려 퇴보하는 것 같았다.
사나흘 전부터는 수련을 할수록 점점 더 손이 아파왔다. 지금도 두 손이 지끈거렸다. 이래서야 언제쯤 저 바위를 부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막막하다.
소명은 애써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지금까지 고련한 것만도 어디야…….”
그러나 억지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고개를 든 소명의 눈에 북벽의 바위가 들어왔다. 어둠에 잠겨든 그것의 모습은 흡사 괴물처럼 보였다.
순간,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불타는 집, 피칠갑을 한 채 고문당하던 대일의 모습, 그리고 무력한 자신.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가슴이 갑갑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숨통이 콱 틀어막힌 것 같았다. 힘껏 숨을 토해보지만 진정할 길이 없었다. 가슴을 쥐어뜯었다. 버티고 선 무릎이 후들거렸다.
“으, 으으…….”
잔뜩 웅크린 몸에서 괴로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으, 으아아악!”
자리를 박찼다. 치뜬 두 눈에 섬뜩한 푸른 안광이 가득했다. 북벽의 바위에 달려든 소명은 그대로 주먹을 내질렀다.
텅! 텅! 텅!
괴성과 함께 묵직한 소리가 연이어 울리기 시작했다.
장 조장은 번쩍 눈을 떴다.
“얼씨구?”
일어난 그는 난리 치는 소명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맨손으로 바위에다가 주먹질이라니.
“저런 썩을 놈이, 이제는 하다하다 별짓을 다 하네. 사람 잠도 못 자게.”
왈칵 짜증을 내고는 돌아누웠다. 그러나 다시 잠을 청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 멈추겠지 했건만 소리가 점점 커져간 것이다. 조금도 힘을 잃지 않은 것 같았다.
쾅! 쾅! 쾅!
열이 스물이 되고, 스물이 일백이 되었다. 그러고도 계속해서 바위를 두들겨댔다.
잠이 다 달아나버렸다. 벌떡 일어난 장 조장은 당황한 눈으로 소명을 보았다.
“아니, 저놈이…… 정말 미쳤나?”
“아악! 아아악!”
두 눈을 시퍼렇게 물들인 채, 울부짖으며 난리 치는 저 모습이 발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그야말로 광기가 폭발하는 것 같았다.
장 조장은 마른침을 겨우 삼켰다.
곤음수가 제법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저런 막무가내에는 견뎌낼 재간이 없다. 과연 주먹이 다 깨어져 철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소명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야말로 미쳐 날뛰었다. 정신없이 두 주먹을 번갈아 내질렀다.
어이가 없어 멍하니 소명을 보던 장 조장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햇살이 비쳐들고 있다. 날이 밝은 것이다.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러다가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 것이다.
“그, 그만! 그만!”
장 조장은 절뚝거리며 크게 외쳤다.
소명은 두 손의 고통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파랗게 광기에 휩싸인 두 눈은 오직 바위의 일점에 꽂혀 있었다. 움켜쥔 두 주먹은 핏물로 온통 붉었다.
‘다 부숴버리겠어! 다!’
그간 쌓이고 쌓인 모든 심화가 머릿속을 하얗게 불태우는 듯했다.
그 순간, 한목소리가 머리를 크게 때렸다.
-미워하지 마라, 소명아. 미워하지 마.
“끄윽!”
마지막으로 내치려던 주먹이 움찔하고 멈췄다. 멍한 눈으로 앞을 막아선 바위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주먹을 내지른 바위의 일점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환영처럼 대일의 웃는 모습이 보였다.
“…….”
소명은 굳어버린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뒤에서 장 조장의 거친 외침이 크게 울렸다.
“그만, 그만! 그만하라고, 이 미친놈아!”
신경질적인 외침이었다. 그는 성큼 다가와 소명의 어깨를 잡아챘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
“…….”
버럭 다그치는 말에 소명은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쩍! 쩌적!
소명의 주먹이 때린 일점에서 큰 균열이 일더니, 곧 바위 전체로 퍼져갔다. 이내 거대한 바위벽이 우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으헛!”
장 조장은 돌 먼지와 무너지는 조각들을 피해 후다닥 물러섰다. 그러나 소명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는 무너지는 바위를 바라보았다.
초점 없던 눈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 어어?”
벌린 입에서 멍한 소리가 새었다.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한 것이다. 빤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크게 당황한 장 조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 아저씨?”
“야, 위, 위에!”
“위?”
머리 위를 가리키며 외치는 모습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소명의 얼굴에 큰 그림자가 드리웠다.
묵직한 돌 조각이 떨어지고 있었다.
“꽥!”
피할 정신도, 겨를도 없었다. 쾅! 소리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대로 나자빠졌다.
“아, 아이고오…….”
소명은 머리를 흔들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 돌 조각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장 조장은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괜찮냐?”
“예, 뭐…….”
“햐, 이런 미친…….”
장 조장은 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뒤늦게 정신 차린 소명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늘어뜨린 두 손은 피투성이였다.
“썩을 놈. 손 병신 되지 말라고 가르쳐 놨더니. 되레 손을 이 지경으로 만드냐!”
버럭 성을 내자 소명은 장 조장의 속도 모르고 헤헤 웃었다.
“헤헤…….”
“웃지 마, 정들어.”
장 조장은 뿌득 이를 갈았다.
소명은 장 조장에게 소리란 소리를 다 들었다. 할 말이 없었다. 자신도 왜 그 난리를 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바탕 속을 털어낸 듯이 가슴이 가벼웠다.
입가에 절로 홀가분한 미소가 맺혔다. 그 얼굴에 장 조장의 입에서 다시 타박이 튀어나왔다.
“웃지 말라니까!”
“예, 헤헤.”
“흐이그.”
한숨 푹 내쉰 그는 약초를 으깨어 손을 돌보았다.
“다행히 뼈는 멀쩡하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누워 있어라. 먹을 건 내가 구해 오마.”
“……예.”
눈치를 보니 더 말했다가는 한 소리 들을 것 같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누웠다. 소명에게는 몇 개월 만의 휴식이었다. 누운 채, 멍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스며드는 빛살이 새삼스러웠다.
“헤, 헤헤…….”
두 손이 끔찍하게 아프고, 돌 조각에 맞은 머리도 욱신거렸지만, 그래도 웃음이 나왔다.
어쩐지 눈가가 뜨거웠다. 그래도 웃음이 나왔다. 대일의 마지막 한마디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눈가가 뜨거웠다.
“헤, 헤헤.”
젖은 웃음소리가 실없이 흘렀다. 크게 숨을 들이켠 소명은 누운 채 중얼거렸다.
“아버지, 나 미워하지 않을게요. 미워하지 않을 거예요.”
다짐하듯이 그렇게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한참 후에 흘깃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부순 북벽 바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뒤에 다시 거대한 바위가 길을 막고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 또한 언젠가는 부수고, 또 부수어 나갈 것이다.
소명은 숨을 고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오래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더 어색했다. 한참을 멍한 채, 눈만 깜빡거렸다. 그리고 결국 몸을 일으켰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일어나 앉아 손가락을 꿈틀거려 보았다. 통증이 짜릿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뭐, 이 정도면…….”
우뚝 자리에 선 소명은 두 손을 맞잡으며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손과 발이 천천히 허공을 가르며 움직였다.
그것은 금강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