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234
234화. 천룡귀환(天龍歸還)
“용문제자, 안에 있는가?”
문득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층 지치기는 했지만, 밝은 목소리였다.
소명은 다가가 직접 문을 열었다. 그 자리에는 오만 시름을 다 덜어서, 한층 속 편한 모습인 공노가 있었다. 그리고 공노 앞에는 똘똘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어서, 노인을 부축하고 서 있었다.
노인은 푸근한 미소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노인을 부축하는 아이는 아주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소명을 빤히 바라보았다.
“흐흐흐.”
“어이쿠, 참으로 살판난 얼굴이시오.”
“아이, 그럼. 살판 낫지. 내 수년 세월 동안 끙끙거리던 것을 딱 매듭지어 버렸으니. 에효, 이제는 속 편하게 하늘 갈 날만 기다릴 뿐이네. 크흐흐흐. 이게 다 자네 덕분일세.”
공노는 냉큼 받아서는 아주 시원한 얼굴로 웃었다. 괴팍한 성질머리야 어떻든지 간에, 자신을 짓눌렀던 사명을 완수하였으니.
지금의 공노는 못해도 십여 년 세월을 훅 날려버린 사람처럼 한층 야위어 있었다. 그래도 웃는 얼굴에는 화색이 그득했다.
노인은 문득 부축하는 아이를 가리켰다.
“참, 내 깜빡하였구먼. 아이야, 인사하거라. 여기 이 사람이 소림의 당대 용문제자란다.”
“예, 예! 저는 왕여정이라고 합니다!”
아이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빽 소리를 높였다.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소명은 뜬금없다 싶었지만, 쓰게 웃었다.
“왕 소협이시로군.”
“여기 이 녀석도 일단은 소림속가라네.”
“오호, 그렇습니까?”
“음, 아이의 아비가 본래는 남소림파 권사였다네. 헌데, 조실부모하였고, 친가 쪽으로는 따로 가족이 없어서 말이야.”
나름 복잡한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열하나, 둘이나 될까 싶은 왕여정은 별빛처럼 반짝반짝한 눈으로 소명을 빤히 보았다.
소림사의 용문제자에다가, 천하의 고수로 손꼽는 권야가 눈앞에 있다. 아이에게는 우상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소명은 왕여정의 눈빛을 마주하며 잠시 흐린 미소를 머금었다.
“소림의 속가라고.”
“예!”
“남소림은 그 기풍이 참으로 독특하지. 기회가 되면 성취를 보여 주겠는가, 왕 소협.”
“여, 영광입니다!”
바짝 긴장하여서, 왕여정은 목소리가 절로 크게 나왔다. 코앞에서 고래고래 고함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만큼 빳빳하게 굳은 왕여정이다.
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노는 둘 모습을 흐뭇하게 보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이고 참. 내 이럴 때가 아니지. 이것 받게.”
“뭡니까?”
“바깥소식일세. 특히 개방에서 전하는 얘기도 있다네. 낙양을 거쳐서 바로 이쪽으로 전해 왔다네.”
“흐음.”
공노는 소매에서 한 권의 비단서권을 꺼내 들었다.
비단에 유려한 필체가 세밀하게 남아 있었다. 소명은 그것을 받아들고서,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다.
받아서 바로 펼치자, 현 강호의 복잡한 정세를 잘 설명해 놓은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채 몇 줄을 다 읽기도 전에, 소명은 얼굴을 구겼다. 그리 좋은 소식이 없었다.
암중에서만 흐르던 마도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천하의 어느 곳이건, 영향받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작정하고 준비하였던 터이니.
“표정을 보아하니, 뭔 일이 있었는지 아주 알 만하구먼.”
문가에서 공노가 한마디 거들었다.
“후우, 마도가 말썽이군요. 아니, 아주 작정을 한 모양입니다. 천룡세가는 괜찮습니까?”
“본가 말인가. 뭐 마냥 괜찮다고는 할 수 없지. 천룡가회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원…… 몇 곳을 그만 잃고 말았네.”
공노는 굳이 감출 것도 없는 일인지, 씁쓸한 어조로 대꾸했다. 소명은 그늘을 드리운 공노의 주름진 얼굴을 흘깃 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덧붙일 수가 있을까.
“하이고, 그럼 쉬시게.”
“이것 하나 전해 주려고 직접 오신 겁니까?”
“뭐…… 그것도 그렇네만.”
등 돌리던 공노는 잠시 멈춰 섰다. 노인을 부축하는 아이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공노는 허리가 한껏 굽어 있었다. 그렇게 있다가 주춤주춤 몸을 돌렸다. 노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역력했다.
“노선배?”
공노는 두 손을 정중하게 맞잡았다. 그리고 힘든 모습에도 깊이 허리를 숙였다.
세월이 오래었음에도, 천룡에 대한 의리 하나로 십수 년을 버티어온 노강호가 이리 예를 차린다. 한 동작이 이리 무거울 수가 없다.
소명은 얼결에 두 손을 맞잡았다.
“여기 공씨 늙은이가, 소림사의 용문제자에게 다시금 감사의 말씀을 올리외다. 소림의 의기, 권야의 협의로 이 늙은이의 숙원을 풀어낼 수가 있었소이다.”
“아, 아니.”
노인은 제 할 말을 다하고서는 사뿐하게 소매를 털고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는 은근한 미소를 보였다.
“내 이제껏 제대로 예의를 갖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말이야. 흐허허허.”
“하, 노선배도 참. 어지간하십니다.”
“아무렴. 내가 일중괴(一中怪)라 하는 괴노일세.”
소명은 고개를 흔들었다. 공노는 아이의 부축을 받으면서 자리를 떠났다.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소명은 그제야 몸을 돌렸다.
읽던 비단 서권을 다시 펼쳤다.
묵묵히 읽어내리던 와중에, 소명은 퍼뜩 손이 멈췄다. 잘못 보았는가 싶어서 한층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잘못 본 것이 아니다.
“아니, 이게 무슨.”
성마교에서 원하는 것은, 존체.
그 한 마디가 한층 무겁게 다가왔다. 성마교에 대해서는 나름 겪어본 바였다. 무슨 미친 짓을 하더라도, 소명은 딱히 당황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광기로 이루어졌고, 광기로 유지되며, 광기로 끝이 나는 것들이니.
무슨 짓을 저지른다고 한들, 놀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존체라니.
소명은 비단 서권을 늘어뜨리고서, 잠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존체, 존체란 말이지. 그건 또 뭐야?”
지금 성마교를 이끌고 있는 좌현사 그는 광기로 휩싸인 작자였지만, 그 속내는 실로 독사와도 같아서 이해득실을 명확히 하는 자였다.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고, 한번 움직인다면 그만한 이유가 명백하다는 뜻이었다.
성마라는 광기 속에서 그러한 냉정함을 지녔다니. 더욱 미친 인간이다. 그런데 그런 작자가 빤히 답이 보이지 않는 일에 섣불리 독아를 들이대지는 않을 터.
천산에서도 그러했다.
그때에, 소명과 위지백, 두 사람이 우연이라도 지나지 않았다면. 천산파는 물론이거니와, 천산남북로 일대에 시체가 그득하였을 것이다.
그런 사정을 알기에, 소명은 더욱 얼굴을 구겼다. 비단 서권을 움켜쥔 채 방 안을 서성거렸다.
* * *
새가 울었다. 가을이 짙어서인지, 부쩍 하늘을 오가는 철새 무리가 자주 보였다.
강남을 향해 날아가는 철새의 무리는 저들끼리 시끄럽게 지저귄다.
호충인은 등용문의 정원에서 뒷짐을 지고 있었다. 나름대로 대오를 갖추고서 날갯짓하는 철새를 한참이고 지켜보았다.
선 굵은 얼굴에는 피로감이 짙어서인지, 눈 아래가 우묵했고, 한층 볼이 홀쭉했다. 보풀이 일어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새가 울었다. 가을날이 가까워서인지, 부쩍 하늘을 오가는 철새 무리가 자주 보였다. 날이 추워서인가, 강남 가는 철새의 무리는 저들끼리 시끄럽게 지저귄다.
호충인은 등용문의 정원 한 곳에서 뒷짐을 지고 있었다.
원림 망향정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부인을 위해 전대 등용문주가 지었다는 곳으로, 후원에서도 상당한 규모를 차지하고 있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하여도 전혀 돌보지 않아서, 시들어 쇠락한 채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 정성이 들어가서 그래도 정원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고 있었다. 아직도 손 볼 곳이 하나둘은 아니었지만, 폐허나 다름없는 옛 모습은 없었다.
호충인은 때때로 이곳을 찾아왔다. 연이은 격무로 숨 돌릴 틈이 없었지만, 굳이 틈을 내었다.
마도의 암약을 제거했다지만, 대신이라고 할지. 마도는 이제 노골적으로 기척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굳이 하남에서만의 일이 아니었다.
“따로 근거지랄 곳이 없는 자들이니. 전황을 파악하기가 여간 어렵지가 않습니다.”
호충인은 어려움을 그대로 토로했다.
“흐음, 그렇더냐.”
“거, 힘들겠다.”
심각한 호충인이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사뭇 심드렁했다. 아니, 관심이 없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러고는 딱! 소리가 크게 울렸다.
“장이야! 장! 장이닷!”
“아니, 이런! 이런 치사한 수를!”
“어허, 치사라니. 그 무슨 서운한 말인가. 잠자코 장이나 받으시게. 으하하하!”
전 등용문주, 문심룡은 들으라는 듯이 크게 웃어젖혔다. 그 앞에서 머리를 움켜쥐는 것은 호경한이었다.
한쪽은 하남 일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떨친 무인이고, 또 한쪽은 그와 함께 양천호격이라는 위명으로, 언제고 하남을 대표하는 권사로 손꼽히는 고수였다.
세월이야 어떻든, 한때에 군신에 가까웠던 사이는 이제 같이 늙어서, 장기판 하나에 서로 웃고 웃었다.
“거, 장기 두는 사람 어디 갔는고?”
살살 약 올리는 모습이, 예전의 등용문주의 엄중한 모습을 떠올리기란 아무래도 무리이겠다. 그러나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호경한은 팔짱을 끼고서 한참 끙끙거렸다.
장기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호충인이 가까이 와 있든, 뭐라고 하든 조금도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호충인은 마냥 복잡했다.
“참 두 분도, 해도 너무하시네.”
“너무하기는. 훈수 둘 것도 아니면, 멀뚱히 서 있지만 말고 가서 목축일 것이라도 챙겨 오너라.”
“아이고, 문주. 지금 하남이 어렵다니까요.”
“언제는 안 어려웠는 줄 아느냐.”
“그도 그렇습니다만.”
“에잉, 젊은 놈들. 그저 발 빠르게만 움직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지. 어떤 것은 에워싸고 지켜보고 있을 줄도 알아야 하는 게야. 달리 타초경사라고 하겠느냐.”
“그렇지, 그렇지. 말씀 잘하셨습니다. 뱀을 잡으려거든, 첫째로 놀래지 말아야 하고, 둘째로는 뱀이 어디를 노리는지 파악해야 하는 법이지.”
“뱀이 노리는…….”
호충인은 고개를 잠시 세웠다. 그저 당연하게 마도가 일어나면 막는다고만 생각했다.
한번 기세를 떨치면 못해 천만의 목숨이 사그라지고, 산하가 인혈로 젖어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헌데, 그것들이 왜, 무엇을 노리는지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호충인 자신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친우들도 마찬가지. 마도의 암수를 밝혀내고, 막아내는 데에 급급하였기 때문이었다.
등용문 후계에 손을 뻗은 이유는 무엇이었고, 강시당을 휘하에 두려고 한 것은 또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심지어 황궁에까지 검은 손이 닿아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호충인은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뒤섞였다. 무언가를 알 듯하면서도, 선뜻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라.
그런 와중, 등용문의 영애였던 문혜선이 들어섰다. 예전의 화려한 차림이 아니었다. 경장 차림에 머리에는 영웅건을 둘렀고, 허리 뒤에는 원앙쌍도(鴛鴦雙刀)를 좌우로 차고 있었다. 당당한 여협의 모습이었다. 문혜선 또한 등용문의 주요한 당주를 맡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문혜선은 장기 두는 부친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사뭇 심각한 모습이다.
“문 당주.”
“문주! 개방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개방에서?”
호충인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손님은 개방 한 곳이 아니었다.
때가 꼬질꼬질하였지만, 그래도 훤칠한 얼굴의 젊은 걸개가 있었다. 그 옆에는 한 덩치를 자랑하는 무승 한 사람이 같이 있었다. 호충인은 문주의 집무실에서 손님을 맞이했다.
“아니, 본산의 나한 아니십니까.”
개방 거지도 거지였지만, 호충인은 무승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저 덩치에 위맹한 기색이라니. 뭘 굳이 초립을 눌러쓰고 있었는지 전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얼굴을 가린 무승은 슬쩍 고개를 숙였다.
반장한 손이 두툼하기도 하였다.
“아미타불. 호 문주를 뵙소이다. 본산의 법공이라 하외다.”
나한당의 수좌나한, 법공이 산에서 내려온 것이다.
소림 나한 법공도 그렇지만, 개방의 젊은 거지도 그렇게 간단한 신분은 아니었다. 장이호(長耳虎), 귀가 긴 호랑이. 무려 방주 직속인 용호풍운의 젊은 호랑이였다.
개방이 나한과 함께 등용문을 찾아온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마도의 일이었다.
호충인은 장이호의 이야기를 듣기가 무섭게, 짙은 눈썹을 바짝 세웠다.
“존체? 존체라?”
“그렇습니다. 호 문주. 개방에서 알아낸 바로는 존체를 찾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 하더이다.”
“존체라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호충인은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도가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새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이때에 들은 뜻밖의 소식이다.
그런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호충인은 곧 고개를 들었다. 법공이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서, 굵은 염주알을 살살 돌리고 있었다.
“법공 나한께서는 혹여 짐작 가는 바가 없으신지.”
“응? 하, 하하하. 빈승이야 뭐. 그렇지요. 하하하.”
법공은 멋쩍게 웃었다. 그러면서 슬쩍 턱을 돌렸다. 난처한 기색이다. 같이 하산한 사제, 법현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라면 머리가 잘도 돌아가는 편이라서 뭐라도 그럴듯한 말을 해줄 텐데.
지금 법공은 근질근질한 손을 참느라고 애만 쓸 따름이었다.
나한당에서, 아니 지금 소림사에서 호승심 하나로는 누구나 첫째로 손꼽는 것이 법공이었다. 그런 법공이 등천비호군이라고 하는 새로운 고수를 마주하였는데, 어찌 가슴이 들뜨지 않을쏜가.
속으로는 불호를 몇 번이나 되뇌면서 속을 다잡는 차였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