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e you the devil in the labyrinth? RAW novel - Chapter 176
미궁에 들어온 지 5일 째 되던 날.
여러 가지 많은 일이 있었지만 변화한 미궁에 나름대로 익숙해지고 있었다. 처음 보는 몬스터들이 불쑥 튀어나오기 일쑤였지만 모두들 차분하게 잘 상대했다.
“아, 그런데 류트 그 때 이상한 도마뱀들이랑 싸울 때 무슨 마법을 사용한 거야?”
모닥불을 피우며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던 중에 남궁민이 류트에게 물었다.
온몸이 핑크빛이었던 그 괴상한 놈들은 탐사 동안에도 특히 기억에 남는 놈들이었다. 나름 강했을 뿐더러 처음에 느꼈던 그 압박감이 엄청났으니까. 게다가 혀를 채찍처럼 공격해 온다는 방식도 상당히 기분 나빴다.
20m 높이의 천장에 녀석들이 붙어 있는 걸 발견하고서는 처음엔 어떻게 잡지,라는 생각부터 제일 먼저 들었다. 남궁민의 무기로는 아무리 뻗어 봤자 수 미터를 넘지 못한다.
하지만 류트의 마법이 그런 녀석들을 천장에서 내려오게 만들었다. 그 때는 어서 잡아야지 하는 생각 밖에 없었기에 신경을 안 쓰고 있었는데 지금 다시 와서 생각해보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남궁민의 물음에 류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다지 엄청난 마법을 사용한 건 아닙니다. 녀석들이 천장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천장의 마찰력을 없애서 강제로 떨어지게 한 거죠. 정말 그 때는 곤란했습니다.”
류트가 사용한 건 〈그리스〉 라는 마법이었다. 처음에는 안 통하면 어떻게 하지 싶었는데 효과는 만점. 류트도 내심 사용하면서 놀란 광경이었다. 플라망고 도마뱀은 류트도 몇 번 싸워본 적이 없던 것이다.
“오호. 그 상황에서 잘도 그런 생각을 했네? 똑똑한 걸 류트.”
“후후. 감사합니다.”
남궁민의 칭찬에 류트는 기분이 좋은지 쿡쿡, 웃으며 웃음을 흘렸다.
둘의 이야기를 들으며 유현은 일행의 얼굴을 차례대로 둘러보았다.
미궁에 진입하고 첫날은 괜찮았을지도 몰라도 그 이후로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언제 어디서 공격해 올지 몰라 매시간 긴장감을 유지해야 했다. 그걸 감안해도 모두들 크게 지친 기색은 없었다.
밤을 보낼 때만큼은 편한 휴식을 취하고 싶은 건지 온화한 분위기가 식사 시간 동안에는 계속해서 돌아다녔다. 유현은 지금 분위기를 깨기 싫었지만 슬슬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유현은 나직이 이야기를 꺼냈다.
“앞으로는 좀 더 힘들어질 거야. 이제 곧 모험가들과 접촉하게 될 테니까.”
유현의 이야기에 온화했던 분위기가 갑자기 무겁게 가라앉았다. 랑샤셴과 웃으며 담소를 나누던 이서연도 몸을 경직시키더니 곧 바로 정신을 차리며 유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오빠는 근처에 모험가들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송가연이 차분한 기색을 유지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 동안 모험가들의 흔적은 볼 수가 없었다. 발견한 거라고는 첫날에 아이언 호른의 웨이브에 강제로 휩쓸려온 고블린의 시체뿐이었다.
오늘도 아무런 수확 없이 몬스터들과 하루 종일 싸우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유현은 지금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미샤의 보고에 따르면 모험가들의 흔적이 발견된 건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아. 이제부터는 만날 수밖에 없겠지.”
유현의 말을 이해하면서 송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샤라 함은 신전에서 의뢰를 건넸을 때 만난 사람이겠지. 그가 전해 받은 보고가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밤부터는 특히 더 주의해야 할 거야. 불침번을 서는 건 이제부터 두 명씩 짝 지어서 할 거고. 그 탓에 자는 시간이 줄어들지도 모르겠지만 이유는 모두들 이해했겠지?”
그것을 고하면서도 유현은 일행의 얼굴을 한 번씩 훑었다. 그런 유현의 시선에 그 누구도 의문을 표하지 않는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유현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이제 오늘 불침번 순서를 정해볼까.”
*
불침번을 정하는 싸움은 나름대로 치열했다. 당연히 모두가 맨 앞과 뒤를 가지고 싶어 했는데 결국 제일 앞을 가져간 건 류트와 남궁민이었고 제일 마지막은 송가연이었다.
본래 짝을 지어서 불침번을 서야하는 것이 옳지만 마지막은 송가연 혼자서 하기로 했다.
애초에 일행의 숫자가 조금 안 맞는 것도 있었고, 어차피 송가연이 불침번을 설 때쯤이면 이미 유현은 일어나 있는 시간이었다. 게다가 미정령들이 언제 빛을 되찾을지 모르기에 마지막에 불침번을 선다는 건 상당히 애매한 일이었다.
결국 남은 건 중간쯤으로 길유미와 랑샤셴이 짝을 이루어 유현보다 앞서 두 번째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어느새 차례가 되어 유현은 몸을 흔드는 손길에 천천히 눈을 떴다.
잠기운에 시야가 검게 점멸하던 것이 여러 번 반복되더니 이윽고 뚜렷하게 시점이 잡혔다. 그러자 시야에 들어오는 건 어딘가 조마조마한 얼굴을 하고 있는 랑샤셴이었다.
유현이 눈을 뜨자 랑샤셴은 긴장한 듯 입술을 달싹이고는 힘을 내서 말했다.
“유현 차례가 되었어요.”
“…너무 긴장하지마. 당연한 일 가지고 깨우는 거니까.”
“그래도.. 역시 조금..”
유현의 말에도 랑샤셴은 어딘가 부끄러운 듯한 표정과 함께 쓴웃음을 지은 채 시선을 피했다.
유현은 그녀에게 푹 자라고 말한 뒤 몸을 일으켰다. 때 마침 길유미의 손길에 잠을 깬 이서연이 눈에 들어왔다. 몸을 일으키며 잠기운에 몸이 비틀거렸지만 겨우 바로 잡는다.
유현은 먼저 불침번 서는 곳으로 가서 이서연을 기다렸다.
약간 멍 한 얼굴로 천천히 다가오는 그녀에게 유현은 물었다.
“역시 피곤한가?”
“조금은요… 죄송해요…”
힘없이 대답하는 이서연을 보며 유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먼 거리를 움직이는 것도 있겠지만 매 싸움마다 마법을 사용하니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곤할 것이다. 그럴 때는 결국 잠을 자는 게 답이었지만 환경이 따르지 못한다.
나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옆에 앉는 그녀에게 유현은 말했다.
“정 안되면 애들에게 부탁해 볼 수도 있어. 너무 무리할 거 없으니까.”
이서연이 몸을 움찔 거렸다.
“그,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그 정도는 아니니까.. 그리고 애들에게 너무 폐가 되고…”
유현의 말은 어딘가 잠이 확 깨는 이야기였다. 그의 친절은 고맙지만 그렇게 될 경우 일행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두렵다. 그들이 굳이 화를 내지는 않겠지만 미안한 건 미안한 거다.
첫날에도 일행의 배려에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이서연의 반응에 유현은 잔잔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힘들면 말해. 파티의 중요한 사제가 갑자기 쓰러지면 그것 나름대로 곤란하니까.”
“네…”
이서연은 유현의 상냥한 배려에 감사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어쩐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그것이 그가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다른 한쪽으로는 그 상냥함에 기대려고 하는 감정을 죽이려고 노력했다. 일행들 사이에서 특별 취급을 받는 건 상당히 거북한 일이었다. 이서연은 그의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대로 시간이 정처 없이 흘러간다.
이서연은 간간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유현의 옆얼굴을 몰래 살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의 시간은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그녀는 이런 시간이 나쁘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아무런 소리 없이 고요함만이 주변을 지배하고 있는 이곳에서 오로지 느낄 수 있는 서로 간의 미약한 숨소리뿐이었다.
이서연은 유현과 단 둘이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았다.
문득 어느 순간인가 유현의 얼굴 옆면을 멍하니 쳐다보던 이서연이 입을 열었다.
“…오빠는 여기로 오기 전에 뭐하고 있었어요?”
“…여기로 오기 전에?”
무언가 생각지 못한 질문에 유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건 눈치 채고 있었지만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며 한 동안 뜸들이던 유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지. 목표 없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오빠는 여행을 좋아 했나 보군요.”
유현의 대답에 이서연은 그저 해맑게 웃었다. 꽃이 만개한 것처럼 그 화사한 얼굴을 보며 유현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유현은 여행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아무런 미련 없는 세상에 공허함을 느끼며 돌아다니고 있었을 뿐.
단순하게 말하면 시간을 죽이고 있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저희가 소환되던 그 날 오빠도 비행기를 타고 있었네요. 그 때도 역시 여행 때문이었나요?”
이서연은 아직 선명하게 기억한다. 비행기를 타고 학교 친구들과 여행을 가던 날의 두근거림을. 조심히 다녀오라는 여행 전날, 어머니의 잔소리도 귓가에 선명히 맴돈다.
‘우우우우…’
갑자기 어머니의 말을 떠올려서 일까. 이서연은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꺼낸 이야기기에 자신이 우울해지자 어쩐지 바보 같아졌다.
생각해보면 처음 유현에게 질문을 던진 것도 무언가 이상했다. 여기로 오기 전에 뭘 하고 있었냐니. 애초에 그런 걸 물어볼 이유가 없는데도.
자신의 말을 후회하면서도 이서연은 힐끗 유현을 쳐다봤다.
유현은 어딘가 얼굴이 붉게 변해 있는 이서연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너희랑 똑같이 제주도에 가고 있었지. 사실 비행기를 한 번 쯤은 타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런데… 나는 여행을 좋아하진 않아.”
“네?”
유현의 말에 이서연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유현의 마지막 말에서 어쩐지 무거운 감정이 느껴진 것이다. 그건 슬픔 같은 게 아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우울해지는 심연 같은 공허함이었다.
“내가 여행을 떠나던 건 단순히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였어. 그 때 나는 아무것도 할 게 없었거든. 어떻게 보면 생각을 하는 게 싫었기에 몸을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야.”
“…………”
유현의 목소리에 이서연은 붕 떠오르던 감정이 추락하는 걸 느꼈다. 어쩐지 물으면 안 될 걸 물어 본 게 아닐까. 그녀는 내심 후회하는 감정이 더욱 심해졌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이유현에 대해 잘 몰랐다.
온갖 위험 속에서도 손을 뻗어주던 사내였지만 정작 아는 건 없다. 알고 있는 건 이 세계에 소환되고서의 이야기들 뿐. 그가 진정으로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 사실에 이서연은 복잡한 심정을 느꼈다.
묻고 싶어졌다. 이서연은 유현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기에 묻고 싶었다. 별로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무서울 정도로 직감하고 있지만 묻고 싶다는 감정이 가슴 안팎에 치솟았다.
그녀는 몇 번이나 입술을 떨며 망설이다가 주먹을 꽈악 쥐며 가슴에 대고는 힘을 내서 입을 열었다.
“오빠한테 무슨…”
…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작은 소리가 났다.
“……………..”
그 소리에 유현의 분위기가 칼날 보다 날카롭게 세워져, 이서연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 거렸다. 차갑게 식어 있는 유현의 시선이 동굴의 입구에 향한다.
현재 일행이 있는 곳은 작은 동굴이었다. 미궁 안에서 이런 곳은 좋은 휴식 장소였다.
하지만 그 뜻은 다른 생물체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소리.
이서연은 갑자기 바뀐 유현의 분위기에 숨을 죽였다. 말 하려고 했던 것을 강제로 입구멍 안속으로 집어넣으며 유현의 눈치를 살핀다.
한 동안 입구를 응시하던 유현은 이서연에게 작게 속삭였다.
“일행을 깨워. 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