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e you the devil in the labyrinth? RAW novel - Chapter 6
내 시선이 멈춰 있는 그곳에는 어딘가 중세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복장의 인간들이 죽어 있었다. 허리춤에 낡은 장검을 메고 있고, 그들이 껴입고 있는 체인 메일들은 도저히 현대에서 볼법한 장비들이 아니다.
영화에서나 볼법한 모습들이 눈앞에 있다. 그걸 보면 그 누구라도 이곳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세계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시체들 중에서 특이한 것은 무장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상할 정도로 가벼운 차림새의 여성이 하나 있었다. 검과 방패를 들고 있는 이들과 달리 이질적인 가벼운 복장 상태 때문인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그건 얇은 로브로 몸을 가린 채 지팡이를 들고 있는 젊은 여성이었다. 지팡이는 결코 무기로 쓸법해 보이지 않았고, 로브 또한 움직이기에 불편해 보이는 복장이었다.
아마, 사제 클래스의 인간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에 꽤나 끔찍하게 살해당했는지 로브 안의 그녀의 몸은 온통 찢겨져 윤간 당한 듯한 흔적들이 가득했다. 짙은 흰색의 액체는 아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게 맞는 걸까.
그녀의 마지막은 그다지 좋지 않았을 것이다. 모험가들에게서 인간에 대한 자비심을 느끼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치 나치 시대의 독일인들이 유대인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끔찍하게 죽은 인간들의 시체가 있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그다지 큰 감흥은 없다. 어차피 저것들 모두가 요정들이 꾸며낸 환상일 테니까.
어쩌면 예전에 실제로 있었던 참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오래 전의 이야기겠지. 옛날에 있던 일을 가지고 슬퍼하지 않듯, 나 또한 그렇다.
지금 내 눈에 들어오는 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었다.
비록 핏물이 묻어 있고, 여러 가지로 망가진 흔적이 많지만 쓸 만한 갑옷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중에서 체인 메일이 제일 유혹적이었다. 찝찝하지만 저걸로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못 입을 것도 없다.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는 석궁도 마음에 들었다. 튜토리얼 시작 때 주어지는 무기 중에는 석궁이 없었다.
여기서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챙기는 이들이 몇이나 되겠냐마는.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신경 쓰고 있는 건 저 시체들이 가지고 있을 나침반과 지도였다. 도망치느라 바빴던 아이들이 시체에서 제대로 물건을 획득하고 갔을 거라고 기대가 되지는 않는다.
나중에 제대로 현실을 알게 될 때 쯤 지도와 나침반을 찾기 위해 열심히 시체를 찾아다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조금 먼 이야기다.
하지만 시체에게서 물건을 회수하기 전에 먼저 겪어야 할 이벤트가 있었다. 시체만 봐서는 이제 이 세계에 온 플레이어들이 현실을 완전히 알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는 요정들이 준비한 이벤트가 하나있다.
‘또 봐야하는 건가.’
그게 뭔지 알고 있는 나였지만 피하기는 어렵다고 느껴졌다. 내가 그렇게 한숨을 내쉬며 포기하려는 순간 시체들 사이에서 희멀건 연기가 치솟아 나에게 덤벼들었다.
목숨을 위협하려는 공격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나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자 눈앞으로 메시지 창이 하나 떠올랐다.
[죽은 이들이 남긴 기억의 조각을 엿봅니다.]기억의 조각. 나도 그다지 많이 경험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을 엿본다는 건 메시지 창에 나온 그대로 죽인 이들의 기억을 엿 본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죽기 직전 그들이 경험했던 걸 느낄 수 있다고 해야 할까.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감각 속에서 이루어지며,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결국 어떻게 포장하든 간에 이것은 죽는 순간의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거니까. 죽는 감각을 경험해보는게 기분 좋을 리가 없다. 그걸 좋아하면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게 분명하다.
조각이 내 몸에 닿자, 몸의 감각을 잃고 허공으로 부유하는 듯한 기분 나쁜 감각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 감각에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어느새 내 주위로 펼쳐진 것은 비명소리가 가득한 전투의 현장이었다. 현실은 아니지만 거짓도 아니다.
“도망치지 마! 지금 여기서 처리하지 못하면 계속 녀석들이 늘러 붙게 될 거야! 싸워!”
검과 방패를 든 채, 누군지 모를 핏물로 전신을 색칠한 남자가 고성을 질렀다. 그 소리에 지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간들이 고개를 퍼뜩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핏발 선 두 눈들. 얼마나 오랫동안 자지 못했는지 그들의 눈은 붉게 충혈이 되어 있으며, 뺨은 해골마냥 초라하게 변해있다. 파티장으로 생각되는 남자의 고성이 전의를 되찾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다지 큰 변화는 있을 것 같지 않다.
‘상황이 너무 불리해. 나라도 이건 어떻게 할 수 없겠어.’
“고블린들이 너무 많습니다. 대장!”
“버텨! 일단 버티는 거다!”
그들의 주위로 수십이 넘는 고블린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숲이 품고 있는 어둠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그것들은 마치 잘 숙련된 암살자들을 보는 것만 같았다.
검과 검이 교차되고,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화살들을 막기 위해 방패를 들어올린다.
하지만 우악스럽게 쏟아지는 화살의 비에 끝내 한 인간이 무너져 내린다. 그걸로 대치하던 균형은 무너진 듯 싸움은 급격히 한쪽으로 쏠리게 되었다.
진영에 틈이 생겨났다. 그것도 치명적인 빈틈. 고블린들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비집고 들어가 더욱 잔혹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은밀하게 움직이는 고블린들은 차례차례 인간들을 죽여 나갔다. 그들은 전쟁에 패배해 도망치는 인간들을 쫓는데 숙련된 모험가들이었고, 며칠간 잠도 자지 못하고 도망친 인간들은 너무 지쳐 있었다.
처음부터 불리하게 시작된 싸움. 그 흐름은 한 사람 혼자서 바꿀 만 한 것도 아니었고, 결국 그 끝은 정해져 있었다. 파티장은 죽어나가는 파티원들을 보며 표정을 처참하게 일그러뜨렸다.
죽어나가는 동료들을 보며 파티장은 분노보다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분노보다는 동료의 죽음에 슬픔이 먼저 앞서는 것이다.
“아…아아아…!”
어느새 혼자 남은 파티장은 목울대를 떨며 슬픔을 토해낸다.
이윽고, 마지막에 남은 건 파티장 하나 뿐. 어느새 그의 주위로 고블린들은 인기척 하나 숨기지 않고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승리에 대한 확신 때문일까.
울고 있는 남자를 보며 고블린들은 조롱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우리에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멍청한 인간들.
-키리릭. 이것들 목에 걸려 있는 현상금이 무려 100골드입니다 대장.
-저 인간한테 죽은 수가 꽤나 된다며? 잘하면 네임드까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들에게서 사소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오며, 남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경박한 웃음이 걸리기 시작했다. 고블린들은 명백히 방심하고 있지만 반전을 노릴만한 요소는 되지 못했다.
수십의 고블린들이 한 인간에게 달려든다. 방패를 들며 덤벼드는 한놈한놈 상대해보지만 의미 없는 발버둥이다. 팔과 다리에 단검이 쑤셔 박히고, 등줄기로 여러 개의 화살이 덤벼들자 남자는 끝내 무릎을 꿇었다. 싸움은 끝이 났다.
남자가 피를 토하며 주위에 쓰러져 있는 동료들의 시체를 바라보는 것으로 기억은 끝이 났다.
“여전히 마음에 드는 기억은 아니야.”
마치, 자신이 그날의 싸움을 겪은 것처럼 몸이 욱신거린다. 등줄기가 오한에 떨리고 있다.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손끝을 말없이 주시하던 나는 피식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시체들에서 물건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죽은 남자에게서 체인 메일을 벗겨내 내가 입었다. 그리고는 나침반과 지도를 찾기 위해 시체를 뒤진다.
나침반과 지도를 찾던 중 고블린들에게 윤간당해 죽었을 사제에게는 포션을 회수 할 수 있었다. 그다지 질 좋은 포션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중요한 싸움에서 한 번 더 움직일 힘을 줄 수는 있겠지.
이곳을 앞서 발견했을 플레이어들은 방금 전 기억들을 보고 급히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린 게 분명했다. 포션마저도 회수하지 않고 움직이다니.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시체를 뒤지고 있을 때였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침반과 지도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본래라면 시체를 뒤지면 나올 텐데. 요정들이 실수를 할리가 없으니 답은 하나였다.
‘누가 가져갔다?’
나는 작게 혀를 차며 굽히고 있던 무릎을 피고 몸을 일으켰다.
찰칵.
석궁을 장전하는 무거운 쇳소리가 숲을 울린다. 나는 잠시 주위를 훑어보았다. 숲의 어둠 속에서 당장이라도 고블린들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싶은 기분이 들었다.
…역시 방금 전 봤던 기억 때문일까.
하지만 아직까진 숲은 조용했다. 수풀 안을 누군가 은밀히 내돌아다니는 미약한 소리도 없이 숲은 침묵만 유지한 채 음침한 분위기를 을씨년스럽게 풍기고 있다.
“일단 계속 쫓아 가볼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장전한 석궁을 등에 메고는 나는 자리를 떴다. 좀 더 아이들을 쫓아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