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91
물론 일부러 자극적으로 각색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나는 처음 무희라는 캐릭터를 생각할 때, 살로메를 떠올렸당.}
살로메.
의붓아버지 헤롯왕 앞에서 춤을 춘 대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요구했다는, 신약 성서속의 인물. 그녀의 이야기는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각색되어 그녀가 의붓아버지 헤롯과 근친관계였다는 설정, 세례자 요한을 사랑한 나머지 그의 잘린 목이라도 얻어 키스하려 했다는 설정 등 수많은 변형된 버전이 생성된다.
어쨌건 그녀는,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팜므파탈 캐릭터 중 하나다.
‘나는 초선과 포사의 고사를 떠올렸는데.’
삼국지 여포전에 등장하는 초선은 사도 왕윤의 수양딸이다. 항간에는 왕윤이 여포를 미인계로 꼬여내 동탁을 죽이게 만들기 위해, 가장 아름다운 여자아이를 골라 재색을 겸비하도록 훈련시켰다는 설도 있다.
주나라의 마지막 왕 유왕의 비인 포사는, 너무나 아름답지만 웃음이 없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비단이 찢어지는 소리에 포사가 희미하게 웃음을 띠었고, 유왕은 포사의 웃음을 다시 보기 위해 전국에서 막대한 양의 비단을 거둬 찢게 한다.
거기에 싫증나 더 이상 비단찢는 소리에 웃지 않게 된 포사는, 어느 날 봉화가 잘못 울려 군사들이 허둥대는 것에 깔깔대며 웃었다. 유왕은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일부러 봉화를 거짓으로 울렸고, 실제 봉화가 필요할 땐 군사들이 모이지 않아 나라가 망했다는 이야기.
모두 역사 속의 유명한 팜므파탈, 혹은 경국지색들이다.
{흐음…조앙. 모두 응용해 보장.}
미호는 가장 인간적이고 통속적인 극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당연한 감정과 존재해선 안 될 감정이 섞여 치덕치덕하고 끈끈해지는, 인간들의 드라마틱한 관계를.
‘무희는 초선처럼 왕을 유혹하기 위해 훈련받았고, 살로메처럼 춤으로 단번에 왕을 매혹시킨 팜므파탈적인 여성.’
{그리고…포사의 고사로, 그녀의 ‘결함’을 만들장.}
‘결함…?’
왕의 결함은, 어린 시절 엄마를 잃은 것으로 인한 애정 결핍.
재상의 결함은, 어릴 때부터 타국의 첩자로 키워진, 신분과 처지에 대한 결핍.
그리고 무희의 결함은…
{타고난 성격적 결함. 무언가를 찢고 파괴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성격. 스스로도 이상하다는 것을 알지만 주체할 수 없는 파괴적 본능.}
‘아…!’
유명은 미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제안했던 세 번째 괴리.
똑같은 일을 보고도 자신의 득실이나 가치관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이는, 마지막 괴리의 변을 완성하기 위해…미호는 무희의 결함을 제시한 것이다.
‘알겠어! 자신에게 빠져드는 왕에게, 무희는 점점 더 잔혹한 짓을 요구하는 거야.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말도 안 되게 잔인한 짓, 예를 들어 비단을 찢는 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이젠 사람을 찢어달라고 하는 거지!’
{그렇당. 그걸 들어주는 왕을 보면서, 그녀는 자신의 뒤틀린 부분까지도 온전히 품어주는 왕을 보며 사랑에 빠지공-}
‘재상은 그런 왕의 모습에 더 왕을 경멸하게 되고!’
이제 생각의 합이 척척 맞아들어 간다.
그렇게 무희 살로메가 탄생했던 것이었다.
*
그 날 연습이 끝난 후,
‘미호 그런데 말이야.’
{옹?}
‘나 인격살인 때, 연기보고 꽤 놀랐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뎅?}
유명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어보자, 미호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한 발 뒤로 물러선다.
‘그건, 네 마음에 들었다는 얘기지?’
{그…그렇다고 볼 수 있징?}
‘그럼…’
유명이 턱에 양 손을 받치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는다.
‘나 선물 안 줘?’
미호가 잠시 멈칫했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딜 나한테 보형이짓이냥!}
유명이 흠칫했다.
283 천상연이라고 아세요?
다음 날, 유명은 인터뷰 일정이 있어서 이동중이었다.
“꼭 호철이 네가 안 와도 되는데. 바쁘면 다른 직원 보내도 돼.”
“무슨 소리세요. 이건 저의 정당한 권리입니다!”
매니저 호철은 최연소 팀장으로 승진했다. 그래서 유명은 호철이 직접 올 필요는 없다고 만류했지만, 그는 결코 유명의 기사 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호철은 한참만에 보는 유명을 백미러로 넘어다 보았다.
그는 뒷좌석에 앉아 두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의 입가에는 보는 사람까지도 설렐 것 같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무슨 좋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선물은…좀 기다려랑.
-주긴 줄 거야? 어떤 건지만 알려주면 안 돼?
-…대본이당.
유명은 어제 미호가 알려준 ‘선물’을 떠올리고 있었다.
대본…!
몇 달 보이지 않던 동안 미호는 선계를 유람하며 유명에게 줄 대본을 썼다고 했다.
그 말에 자신은 펄쩍 뛰었었지. 조금만 보여주면 안 되냐고, 무슨 내용이냐고 매달렸지만, 미호는 알려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선계에서 써서 가지고 온 거면, 완성된 거 아냐?
-원래는 완성 됐었는데…좀 수정할 부분이 생겼당.
-수정? 그게 언제 끝나는데?
-이번 공연 끝날 때까진 완성될 거당.
무슨 내용일까?
음…이번 공연이 끝나면 미호에게 몸을 꼭 넘기려고 했는데, 미호가 꼭 내가 연기하는 걸 보고싶은 대본이라면 한 번은 더 연기하고 넘겨야 하나? 그런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설렌 미소가 흘렀다.
무엇보다도 대본의 내용이 너무 궁금했다.
“다 왔습니다!”
도착한 곳은 KBK 방송국. 오늘 유명은 이 곳에서 짧은 인터뷰가 있었다.
방송국에 들어서니 공기가 새롭다.
때와 려말선초 홍보를 위해 SBK의 토크 프로그램 에 출연했을 때 이후로, 한국 방송국에 직접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멈칫-
유명의 얼굴을 본 사람들마다 걸음을 멈추어 서고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연예인이 일반인만큼이나 흔한 방송국 내부였지만, 신유명의 등장은 커다란 사건이었다. 사람들이 고장난 차처럼 멈추어 서면서 여기저기서 추돌사고도 잇달았지만, 그에게 쉽게 말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가볍게 불러세워 팬이라고 인사하기에는 너무 비현실적인 인물인 것이다.
그 기묘한 침묵이 깨진 것은, 바로 이 인물이 나타났을 때였다.
“우왓! 유명씨!”
“안녕하세요, 반피디님! 저 온지 어떻게 아셨어요?”
“온 방송국에 소문 다 났을걸요. 방송국 정보력 어마어마합니다?”
유명은 그제서야 자신이 걸어온 길 뒤쪽으로 사람들이 빼곡이 몰려 서 있는 광경을 보았다.
반피디를 아는 몇 명이 다가와 유명에게 싸인을 청했고, 그에 힘입어 다른 사람들도 얼굴을 디밀기 시작했다.
“안 돼요, 안 돼! 에헤이, 이 분 바쁜 사람입니다.”
다행히 반피디가 유명을 잽싸게 채 가서 걸으며 물었다.
“유명씨, 요즘 뭐해요?”
“저…쉬는데요?”
“인격살인 메이킹 보고 내가 땅을 쳤잖아요. 그 때 따라붙어서 어떻게든 다큐 배우 3부를 찍었어야 하는데! 그걸 놓치다니!”
“하하…”
반피디는 유명을 약속된 스튜디오에 안전하게 배달한 후, 다음에 꼭 보자고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안에 있던 인터뷰 담당 기자가 깜짝 놀라 유명에게 허리를 숙였다.
*
‘와…무슨 분위기가…’
기자는 숨이 턱 막혔다.
옆에 선 일반인을 오징어로 만들어버린다는 배우 A씨, 인간의 미모가 아니라는 모델 B양, 가만 있어도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는 가수 C군. 하고많은 난다긴다하는 연예인들을 보아 왔지만…이렇게 배우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사람은 처음 본다.
“안녕하세요, 기자님.”
인사하는 장면이 4D 스크린을 보는 것 같다.
바로 전날 인격살인을 재관람한 기자는, 눈 앞에서 움직이는 유성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저렇게 부드러운 웃음을 짓는 것을 보면 은성같기도 하다.
“네…넵! 영광입니다, 신유명 배우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신유명은 정말 인터뷰를 따기 어려운 배우였다.
홍보를 위해서라도 영화 개봉 전에는 인터뷰를 해 주기 마련인데, 도무지 홍보할 필요가 없는 배우이다보니 인터뷰를 잘 해주지 않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인터뷰를 못한 이유는, 영화개봉일과 연극개연일이 동일하다보니 연극 연습이 너무 바빠서였지만, 기자가 그런 디테일까지 알 리는 만무했다.
기자가 조금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인터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인격살인이 개봉한지 3개월이 지나서도 박스오피스 1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기염을 토하고 있어요. 기분이 어떠세요?”
“재관람 횟수가 많은 편이라고 하더라구요. 관객분들께 무척 감사하고 있습니다.”
문도석이 태원시네마 전무직을 사임하고 검찰조사를 받기 시작한 이후, 태원시네마는 대국민사과를 하고 인격살인을 전폭적으로 스크린에 깔았다. 원래도 1위였던 인격살인의 성적은 더 쭉쭉 올라갔고, 이제 Mimicry의 성적을 위협할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인터뷰는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인격살인의 해외반응에 대한 유명의 소감, 촬영 중 에피소드…약 20여분 간 기자는 인터뷰를 하는지 팬미팅을 하는지 모를 기세로 질문을 마구 쏟아냈다.
그리고 끝나 갈 시간.
“연극이 영화의 상위 호환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연극에도 엄청난 관심이 쏟아지고 있어요. 해외에서도 러브콜이 많이 들어오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재상연 계획은 없으신가요?”
“네, 지금으로서는 없습니다. 인격살인은 충분히 연기했고, 이젠 또 다른 작품을 하고 싶어요.”
“아쉽지만 다른 작품이라는 말에 또 귀가 혹하네요. 혹시 고려 중인 작품이 있으신가요?”
사실은 이미 준비 중인 작품이 있다. 유명은 미호와 만들고 있는 공연을 떠올렸다.
아, 고려 중인 작품도 있지. 유명은 미호가 준비한 ‘선물’도 떠올렸다.
하지만 어느 쪽도 지금 밝힐 수는 없는 상황.
“아니요. 일단 푹 휴식을 취하고, 좋은 작품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네. 무슨 작품을 하든, 유명씨의 다음 작품을 모두들 고대할 거에요.”
“감사합니다.”
얼추 마무리가 되었나 싶었는데, 기자가 조금 망설이다가 질문 하나를 던진다.
“그런데 신유명씨 혹시 천상연이라고 아세요?”
유명이 그 이름을 듣고 살짝 당황한다.
그것을 모른다고 해석한 것인지 기자가 설명을 시작한다.
“이게 약간 도시괴담같은 이야긴데, 2003년 전국연극제에서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준 배우가 있었다네요. 그런데 알고보니 당시 주연 배우가 다쳐서 지나가던 행인이 대신 연기한 거고, 그 사람은 이름도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졌다네요. 그걸 본 관객들이 천상의 연기라고 천상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번 인격살인을 보고 천상연이 혹시 유명씨가 아니었나…하는 의견들이 넷상에 나오고 있거든요. 사실 얘기 자체가 좀 허무맹랑하긴 하죠?”
말하다보니 자신이 생각해도 황당하다고 여겨진 것인지, 기자가 말끝을 흐린다.
유명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혀요. 제가 천상연은 아니지만, 저도 그 날 그 자리에 있었거든요.”
“…!”
“정말 대단한 배우였습니다. 지금의 저보다 훨씬 더요. 그 때 그 연기를 보았기에, 저는 지금도 노력할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기자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유명의 고백을 듣고 있었다.
*
1막 3장, 침실.
왕은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아있다.
강렬하고 폭이 좁은 빛이 여러 줄기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 주변을 농염하게 춤추며 헤집는 살로메. 그녀의 몸이 빛을 스치면 보이고, 다시 어둠으로 잠겨들기를 반복한다.
“살로메, 어디 있느냐.”
“전하는 훌륭한 군인이시죠. 적을 점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옵니까.”
“방비할 틈을 주지 않고 급습해야지.”
그 말이 끝나자 마자, 살로메의 손등이 레오도의 목덜미를 스친다.
“지금 제가 그리하고 있사옵니다. 눈을 뜨지 마셔요.”
“허억…그리…그리 급습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항복이다.”
꺄르르, 맑은 웃음소리가 멀어졌다가 다시 낮은 숨소리를 머금고 레오도를 급습한다. 반경이 넓었던 원이 점차 좁혀져 들어오고, 거의 왕에게 근접한 상태로 그녀의 춤이 계속되자, 결국 견디지 못하고 눈을 뜬 왕은 와락 그녀를 끌어안는다.
“이러시면 전하의 패배입니다…?”
얄밉게 눈웃음을 지으며 왕의 허리를 다리로 끌어안아 매달리는 그녀의 모습은, 어느 사내도 녹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천하의 요부였다.
딸깍-
유명은 bgm을 끄고 나서, 혀를 내둘렀다.
“…너 정말 장난 아니다.”
“예로부터 구미호가 작정하고 꼬시는데 넘어가지 않는 상대는 없었지.”
“…위험한 종족이야.”
유명의 말에 미호의 웃음이 터졌다.
연습 중이라 여전히 살로메의 모습인 미호가 즐겁게 웃는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공간이 환히 밝혀질 정도로 반짝반짝 빛났다.
그 모습을 보고 유명의 마음이 찌릿했다.
‘너무…즐거워 보여.’
연습을 시작한 이후, 미호는 예전보다 부쩍 자주 웃었다.
그 웃음이 정말 어린아이같이 천진난만하여, 가슴이 저릿해진다.
‘얼마나 제대로 된 연기를 해보지 못했으면, 고작 연습에도…’
연기에 재능이 넘치는 배우가, 오랜시간 제대로 연기해 볼 기회를 얻지 못했을 때.
그 갈증이 어떤 것인지 유명만큼 잘 아는 사람은 드무리라.
그렇기에, 미호의 저런 신나는 표정 하나하나에도, 마음이 아파오고 마는 것이다.
“멍때리고 뭐하냐?”
“…아니야.”
“너도 꼬셔봐라.”
“…응?”
“내가 했던 연기, 너도 해보라고.”
*
유명은 치명적인 남자가 되어, 상대를 유혹하는 연기를 몇 번이고 거듭했다.
상대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성체의 미호는 아니었다.
“이걸…꼬셔보라고?”
미호가 지정한 유혹 상대는, 연습실 바닥을 닦는 밀대 걸레.
문어발도 아닌, 수십가닥의 발을 뻗치고 뻣뻣한 몸을 수직으로 세운 ‘상대’를 유명은 전심전력으로 유혹해야 했다.
차라리 밀대걸레보다는, 상대가 없이 마임으로 연기하는 편이 몰입이 잘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유명은 불평없이 여러 번 유혹하기를 반복했다. 자루를 놓으면 쓰러지니, 거리를 늘이고 좁힐 자유도 없이 한 팔 간격 안에서 연기를 해야 했다.
“비켜봐라.”
미호가 다가오더니, 유명과 바톤터치를 했다.
그리고 그녀의 시범을 본 유명은 입을 쩌억 벌렸다.
“…전하.”
손등이 살짝 닿을 때는 상대를 어루만지는 것 같았고, 몸에서 한참 띄워 거리를 벌렸을 때는 마치 애를 태우는 것 같았다.
그녀가 움직이는대로 살아있는듯이 움찔거리는 밀대걸레는, 정말 그녀에게 반하기라도 한 것처럼 시의적절한 타이밍에 그녀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고, 애절하게 매달렸다.
뭐지…왜 진짜 저 사물이 생명이 있는 듯한 착시가 드는 거지…?
“알잖아? 타이밍이다. 상대는 무생물이니까, 상대의 움직임과 리액션까지 네가 컨트롤해야지.”
“다시 해볼게.”
연습을 하는 중간에도, 이런 식으로 예고없이 미호의 레슨이 이루어졌다.
그럴 때면 유명은 초집중해서, 조금이라도 더 미호의 연기에 근접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유명이 미호의 연기에 한 번 더 전율을 느끼는 순간이 왔다.
살로메의 잔혹한 성격이 드러나는 1막 5장을 처음 연습하는 날.
“시작할까?”
“콜.”
살로메의 무릎을 베고 왕이 누워있다. 그녀는 무릎에 얹힌 왕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국무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왕은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상태. 음향으로 목소리가 잔향처럼 들려온다.
(전하- 카타니아 공국과의 전쟁은 아직 시기상조로…)
그 목소리를 떨쳐내듯이, 살로메가 왕의 귀 옆에 손부채질을 한다.
레오도가 흠칫 몸을 떨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아름다운 줄만 알았더니, 너는 희안하게도 내 어머니를 많이 닮았구나. 어머니도 나를 이리 눕혀서 내 얼굴에 손부채질을 해 주셨지.”
(전하. 군수물자 모집으로 인한 각지의 원성이–)
“그러십니까.”
“내게 위안이 되는 것은 너희 남매뿐이야…”
다시 한 번 살로메의 손부채질에, 음성이 점점 줄어든다.
그리고 왕의 눈이 거의 감기려 할 때…
“전하, 가만히 계셔보시옵서. 잠자리가 전하의 뺨에 앉았습니다.”
갑자기 그녀의 음성이 어둑해졌다.
284 뭔가 이유가 있겠지
잠자리.
흔히 동심의 천진난만함과 잔혹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상징.
살로메는 두 손가락을 살며시 내려, 엄지와 검지로 곤충의 접은 날개를 잡아챈 후, 왕과 자신의 사이 즈음에 손을 두고 잠자리를 빤히 쳐다본다.
그 시선의 끝에 무릎을 베고 누운 왕의 눈동자가 걸린다.
그는 누운 채로 그 시선을 마주본다.
그녀의 손가락의 옅은 움직임만으로 파닥거리는 잠자리가 실제로 보이는 것만 같다. 시선 너머에 닿은 그녀의 눈 속에 잠긴 자신의 모습이, 왕인지 잠자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녀가 쳐다보는 것은, 잠자리일까 왕 자신일까.
“네 이놈.”
낮은 목소리로 짐짓 꾸짖는 그녀의 목소리가 내리는 곳은, 잠자리일까 왕 자신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