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58
“타이트샷들은 대부분요. 하지만 점프같은 동작들은 프로 발레리나를 대역으로 세우게 될 겁니다.”
“왜요? 은퇴한 지 시간이 많이 지났나요?”
“그것보다는, 은퇴 이유가 발 부상 때문이라서요.”
아아, 그래서.
-춤을 출 수 있는데 어째서 발을 잘랐지?
빨간 구두를 읽은 여주인공의 감상은 그녀 자신의 감상이었구나…
작품 전반에 깔린 비애의 출처를 그제서야 이해한 기분이 들었다.
유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뵐게요. 들를 데가 있어서요.”
유명은 기도한과 헤어진 후, 집주변의 한 장소에 들렀다.
딸랑-
“어서오세…어?”
그 곳을 지키고 있던 한 여성은, ‘남성’의 방문에 깜짝 놀랐다.
이 곳은 젊은 남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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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한 여자
[아라베스크 발레학원]수원에 위치한 한 동네 발레학원이다.
주로 어린이 발레를 가르치며, 간혹가다 성인 발레 코스가 개설되기도 한다. 주로 체형교정을 원하는 직장인 여성이나, 아이들을 웬만큼 키워놓고 몸매 관리를 시도하는 젊은 엄마들이 대상이다.
딸랑-
“어서오세…어?”
발레를 전공하고 어느 중소발레단의 단원까지 되었었지만, 30대 초반에 은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작은 발레 학원을 오픈한 원장은,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젊은 남자의 방문에 당혹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젊은 아빠라기에도 너무 젊다. 스타일이 산뜻한 것이 아무래도 대학생이다. 그는 고개를 꾸벅하고 숙이더니, 더욱 어울리지 않는 말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혹시 발레를 배울 수 있을까 해서요.”
“네? 어…음…발레를요···남자분이 배우시면…좋죠, 좋긴 한데···”
어찌나 당황했는지 원장의 말이 더듬더듬 나왔다.
그러자 젊은 남자가 웃으며 설명했다.
“본격적으로 배우겠다는 건 아닙니다. 연기 지망생인데 발레리노 역 캐스팅을 준비하고 있어요. 기술이 필요한 동작들은 대역을 쓰겠지만, 어느 정도 발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서요.
“아…그렇군요.”
그제서야 원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혼자 학원을 지키던 차에 들어와 발레를 가르쳐달라고 하는 남자. 너무 멀끔하게 생겨서 설마 하면서도, 신종 변태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스물스물 올라오던 차였다.
그런데 배우라···
스윽-
원장의 눈이 예리하게 남자를 훑었다.
운동을 한 몸이다. 일반적으로야 좋은 몸이라고 하겠지만···
“어느 정도까지 원하시는 건가요? 흉내만이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발레 무용수의 근육은 일반적인 근육과는 달라서 얼마나 표현이 될지···”
“그게 핵심입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최대한 발레리노로 ‘보이는’ 근육을 만들고 싶어요.”
원장의 얼굴에 조금씩 흥미가 감돌았다.
발레 교사라기보다는 유치원 선생님 같은 일만 하다가, 오랜만에 그럴싸한 ‘일감’을 받은 프로의 눈빛.
“들어오세요.”
원장이 앞장서서 들어간 곳은 발레 바와 벽면 거울이 가득 채워진 연습실.
반질반질한 바닥에 올라서기 전에 유명은 신발을 벗고 맨발로 섰다.
“벗어보시겠어요.”
원장은 말을 던진 후에 아차, 했다.
일반인에게 프로 시절의 버릇이 나왔다. 이유를 설명이라도 하려는 차에, 남자가 너무나 당연한 듯이 옷을 하나씩 벗는다.
자켓이, 니트가, 티셔츠가 감정없이 하나씩 제거되었다.
원장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는, 그는 바지 안에 입고 있었던 운동용 타이즈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다.
미리 준비를 하고 온 모양.
“준비성이 철저하시네요. 거울 앞에 정자세로 서 보실까요.”
원장은 한 바퀴를 돌아가며 유명의 몸을 면밀히 뜯어보았다.
“운동을 좀 하셨네요?”
“네, 본격적으로 한 건 아닙니다만, 매일 조깅과 기본적인 웨이트는 거르지 않았고, 연기 연습할 때마다 체력과 밸런스 훈련은 병행합니다.”
흐음···
“완전히 만들어진 몸은 아니지만, 보통은 이 정도면 관리가 잘 되고 보기 좋은 몸이라고 하겠죠. 그런데 발레에서의 근육은 좀 달라요.”
원장이 걸치고 있던 가디건을 벗자 레오타드의 상의가 드러났다. 그녀는 등을 곧게 펴고 목을 길게 늘렸다. 그리고 한 손으로 앙바(*En Bas: 발레의 기본이 되는 동작. 커다란 항아리를 안듯이 팔을 둥글게 아래로 모은 자세) 동작을 취했다.
등 쪽의 능형근과 광배근이 단단히 수축되며, 승모근이 길게 늘어난다. 팔이 한계까지 길어 보이는 마술.
“발레의 기본은 근육을 길게 뽑는 거에요. 몸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관절에서 근육을 길게 뽑아내야 해요. 처음엔 힘을 완전히 빼는 데 익숙해져야 근육이 뽑히죠. 그걸 단단하고 강하게 만드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에요.”
유명이 원장을 따라 앙바를 시도해보았다. 쉽지 않다.
“어린아이들은 비교적 쉽게 교정돼요. 성인 여자분들은 그나마 낫죠.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여성의 관절은 남성보다는 유연성이 좋은 편이니까요. 하지만 성인 남성이 몸을 새로 만드는 건 쉽지 않아요. 그래도 하고 싶어요? 어차피 대역이 있다면서 그냥 쉽게 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녀의 질문에 유명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네. 하고 싶습니다. 캐스팅에 떨어질 수도 있겠지만, 근육에 대해 이해해 두면 다른 배역들에라도 도움이 되겠죠. 그런데 개인레슨은…많이 비쌀까요?”
처음으로 그 나이다운 질문을 하는 남자에게 원장이 웃음을 지었다.
“아니에요. 저도 재밌을 것 같아요. 의외의 도전에 얼마나 따라오실지 의욕이 솟구치네요. 저희 성인반 레슨비만 받을게요. 이따 사진이나 같이 찍어주세요. 나중에 성공하시면 걸어놓게요 후훗.”
유명의 깊숙한 인사와 함께, 그 날 바로 지도가 시작되었다.
한 시간 남짓 후, 의외의 코어 근력과 밸런스 감각에 원장이 감탄을 금치 못했고, 유명은 생각해 온 다른 주문을 꺼냈다.
“저, 한 가지 더 도와주셨으면 하는 게 있는데요.”
*
12월 23일 화요일.
폭설이 아침에서야 그쳤다.
유명은 얼어붙은 손을 녹이며 충무로의 길을 걸었다.
목적지는 ‘블루필름’이라는 중소 영화사.
영화사의 의도야 알만하다.
썩 달갑지는 않을 것이다. 대본이 좋다고는 하지만 상영관을 대폭 점유하고 돈을 벌어다 줄 종류의 영화는 아니니, 결국 일만 늘어나는 것일 테니까.
그래도 규모가 작으니 투자자들 눈치를 볼 테고, 이 자비영화 제작도 떠맡았을 것이다. 최소한 제작비 문제는 없을 테니까.
빠앙- 빵-
눈의 여파로 도로가 무척 혼잡하다.
거의 도착해서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주변의 시선이 한 쪽으로 쏠린다. 유명도 뭔가 하는 마음에 같은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여자다.
키가 170에 근접해보이는 늘씬한 여자는 이 추운 날씨에 아슬아슬한 가죽 미니스커트와, 등이 파인 루즈한 스웨터를 입고 있다.
긴 웨이브 머리가 등허리까지 닿는다. 온통 눈으로 하얀 세상에 짙은 레드 립스틱이 홀로 선명해 보였다.
부연하자면, 아슬아슬한 여자다.
반경 50m 주위의 남자들의 시선이 모조리 그녀에게 달라붙어 있다.
한 손에 커피를 들고 걸어오는 그녀는 잿빛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덧없이 허무한 눈빛에 남자들 태반의 목젖이 꿀꺽 흔들렸다.
‘음···?’
유명의 시선이 그녀에게서 떨어지려다 다시 한 번 머물렀다.
걸음걸이가 특이하다···?
살짝 팔자걸음이지만, 다리가 곧다.
그녀가 머리를 한 바퀴 쓸어 한 쪽 어깨 앞으로 넘긴다.
그 때 드러난 승모근의 높이가 낮다. 긴 목과 어깨까지 그린듯이 떨어지는 곡선.
그리고, 서 있는 유명을 지나쳐 갈 때, 패인 상의의 넥라인에서 등 근육의 움직임이 선명히 보였다. 결이 정확하게 갈라지는 등의 근육들.
‘발레리나네.’
그 몇 가지 단서로, 유명은 그녀의 직업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일주일간 발레 학원에 부지런히 나간 성과. 셜록 홈즈라도 된 기분이다.
‘무용수들도 밖에서의 모습은 다르구나. 하기야, 취향은 다양하니까.’
그것이 유명의 마지막 감상이었고, 초록불이 들어오자 유명은 금세 잊고 앞으로 전진했다.
약 한 시간 후, 경합장에서 그녀를 다시 보게 될 것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영화사 옆 건물 1층의 커피숍에서 유명은 도한을 만났다.
약속시간 한 시간 전 마지막 체크를 위해서.
“다른 배우는 이름이 뭔가요?”
“권성한. 발레를 전공했지만 프로로 가지 않고 연예계로 발을 돌린 케이스로, 아직 단역, 준조연 급입니다. 유일하게 조연을 맡았던 영화에선 무용수 역할이었다고 합니다.”
기억에 없는 이름이다.
어느 정도 흥행하거나 작품성이 있다 싶은 영화는 죄다 섭렵해왔던 유명이 기억하지 못한다면, 크게 연기로 성공하지는 못한 배우 같았다.
“그런데 자유연기, 도대체 뭘 하려는 겁니까?”
“이따 보세요.”
기도한이 며칠 전부터 해온 질문을 다시 물었지만 유명은 답변을 피했다.
지정 연기의 팬텀 대사는 어차피 감독과 유명이 함께 완성해나가야 할 부분이라 같이 연습해 왔지만, 자유 연기만은 연기자의 몫으로 남기겠다는 유명의 고집이었다.
그것은, 이 부분만은 기도한 감독에게도 ‘완성본’을 보여주고 싶다는, 유명의 치기이기도 했다.
“슬슬 올라가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