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91
그는 명실상부한 영화광이었다.
영화보는 것이 직업이면서도 휴가 중에 이렇게 또 영화제에 와 있을 정도로.
그는 한국으로 날아오기 전, 신중하게 참가작들을 뜯어보고, 꼭 보고싶은 작품들을 예매했다.
그 중 Ballerina high라는 영화는, 애매하게 기준선에 걸려 티켓팅을 무척 고민했던 작품이었다.
그는 발레 애호가이며, 을 쓴 소설가 가스통 르루의 빅 팬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두 가지의 조합이 극상의 마리아주로 빛날 것인가, 혹은 눈뜨고 보지 못할 괴팍함을 선사할 것인가.
무척, 무척 고민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이 영화를 관람목록에 넣었다.
‘드디어···’
그는 오래된 영화관의 한 객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이제 9회차인 신생 영화제이지만 관객들의 열정은 꽤나 뜨겁다. 오늘도 어김없이 객석이 꾸역꾸역 메워진다.
그리고, 불이 꺼졌다.
쿵- 쿵- 알 수 없는 파열음이 들려오며 영화가 시작된다.
시작은 그림동화.
그도 잘 아는 안데르센의 이야기.
Karen went to church wearing a pair of red shoes.
[카렌은 빨간 구두를 신고 교회에 갔습니다.]예쁜 일러스트가 이어지는 가운데 쿵- 쿵- 규칙적인 소음이 이상하게 귀에 거슬린다.
[구두는 계속 춤을 춥니다. 밤낮으로, 비가오나 눈이오나.]밤낮 (쿵-) 으로 비가 (쿵-) 오나 눈이 (쿵-) 오나.
[들판과 덤불과 장벽을 통과하면서.]들판 (쿵-) 과 덤불 (쿵-) 과 장벽 (쿵-) 을 통과하면서.
단어 사이사이에 처박히듯 자리하던 소음은,
[그녀는 결국 사형 집행인을 찾아가서 발을 잘라달라고 부탁합니다.](쿵—-)
커다란 도끼가 내려치는 순간, 거대한 파열음으로 몸을 부풀리며 발목을 잘라냈다.
소리가 순식간에 화면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완전한 정적 속에 잘린 발만이 해맑게 춤을 춘다.
[카렌은 양발이 사라졌지만, 잘린 발은 계속해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마지막 한 줄이 고전적인 글씨체로 타이핑되자,
화면이 반투명하게 디졸브되며, 카렌의 망연자실한 얼굴이 책을 읽고 있는 여주의 얼굴과 오버랩된다.
“춤을 출 수 있는데 어째서 발을 잘랐지?”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을 앙다물고 책을 덮어버린다.
이어지는 연습실 씬.
‘지저스···’
그가 처음 감탄한 것은, 발레리나였다.
동양인인데도 밸런스가 극상인 발레리나. 목이 가늘고 길며 전체적인 선이 여리다. 백조가 무척 어울릴 것 같은 가련한 여성.
영상은 연습실의 어두운 감정들을 담아낸다.
발레 애호가인 그는 알고 있다. 발레가 보기처럼 아름답기만 한 예술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발레를 볼 때 오페라 글라스를 준비한다. 아름다운 아라베스크를 유지하기 위해 부들부들 떨리는 허벅지 근육, 가장 적절한 각도로 깜브레를 할 때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한 줄기 땀을 글라스를 통해 감상한다.
아름다움으로 포장되어 있는 고통과 인내의 흔적까지 발레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는 진정한 발레 애호가.
그런 그이기에, 연습실 장면에서 그는 양 손을 꽉 붙들었다.
‘멋있다. 아름다운 게 아니라 멋있는 장면이야.’
장면들이 어지럽게 교차된다.
한 명이 쥬떼를 하면, 현란하게 오가는 곁눈질이 인서트 되고 보란듯이 더 높아지는 쥬떼.
악무는 이, 떨리는 근육, 발가락이 부서질 듯 각이 바짝 선 푸앵트.
“연습 열심히 하네?”
입술이 클로즈업된다. 일상적인 인사에 꿰메어진 칼날.
긴장들이 쌓이고 쌓여 여주 Hwaran(화란)의 압박이 극에 달한 날,
극장의 문이 잠겼다.
가장 늦게까지 절박하게 연습했던 발레리나를 남겨두고.
헉- 헉- 허억-
카메라는 화란의 시점이다.
불안함에 과도하게 들이마시는 숨소리를 배경으로, 흔들리는 카메라 워크가 정신없이 이미지들을 잡는다.
자주색의 튜튜.
쓰러질 듯한 각도로 쌓여있는 무대 장치.
핏물에 절어있는 토슈즈.
화면에서 터져나오는, 소름끼치는 금속성의 비명
아아아아악–
비명에 화답하듯이, 만월의 달빛 한 조각이 그녀의 발치에 슬쩍 떨어지고,
“아이야, 길을 잃었니?”
팬텀이 등장했다.
*
‘우수한 촬영감독과 최상급의 발레리나의 조합이라. 물론 지휘는 감독의 솜씨겠지.’
그는 감탄하고 있었다.
뉴 커런츠는 신인감독의 처음, 혹은 두 번째의 장편이 참가할 수 있는 분야라고 들었다. 그런데 화면의 퀄리티와 배치 모두 노련한 감독들 뺨치게 기가 막힌다.
‘강박적으로 꼼꼼한 성격의 감독임에 분명해. 여주인공은 발레의 퀄리티에 비해 연기는 좀 아쉽지만…보길 잘했군.’
그렇게 여유로운 생각을 하고 있던 그의 눈에 처음으로 팬텀이 들어왔다.
화사한 달빛을 몸에 끼얹고 나타난 발레의 천사.
그런데, 그의 말투가 무척 미묘하다.
“아, 너 백조 군무를 하는 아이 중 하나구나. 이름이 뭐였더라?”
오마주라더니, 팬텀을 완전한 선인으로 표현한 것인가?
팬텀 오브 오페라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외울 정도로 잘 알고 있음에도, 처음에는 그에게 속고 말았다.
로우 앵글(*아래에서 위를 향하는 각도)에서 팬텀을 잡자, 실링에서 떨어진 빛이 그의 머리에 어리어 후광같이 빛난다.
그런데 왜,
“그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한 가지 알려주마.”
‘인연’이 ‘필연’으로 들리는가.
한국어를 알지 못해 자막을 읽고 있는데도, 아주 잠깐 한 단어가 발음될 때 스쳐지나간 오싹함.
그는 아무것도 알 지 못하는 여주에게 경고하듯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백조의 호수가 끝나고 다음 공연, 지젤일 거야.”
지젤이구나.
그렇다면, 결코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없는 비극.
그는 저 발레리나의 지젤과 저 팬텀의 알브레히트가 참을 수 없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는 잠시 후, 경악하게 된다.
팬텀의 지젤은,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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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erina high
“윤화란. 1막과 2막의 지젤 연기는 완전히 달라져야 해. 이걸 봐.”
팬텀이 지젤의 시연을 보인다.
화란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가 아예 지젤의 독무를 춘다.
la- lala-
익숙한 지젤의 테마곡이 흘러나오고 그가 포지션을 잡는 순간,
외국인 남자는 눈을 의심했다.
스크린이 한 겹 필터를 씌운듯이 까무룩하다.
눈을 뜨고 주시하고 있음에도, 잠시 딴 생각을 하면 시야가 흐려질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더욱 눈을 부릅뜨고 화면을 쏘아보았다.
생동감을 주욱 짜내어 버린 것 같이 파리한 지젤.
평생 수십 번의 지젤을 봐왔음에도 저렇게 유령같은 지젤은 본 적이 없다.
필터겠지. 무슨 필터일까.
젊었을 때는 본인도 많은 영화의 제작에 참여했었는데도 감이 오지 않는다. 도대체 어떤 필터가 초점이 선명하면서도, 관객에게는 흐리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것인지.
그런데 그 스산함이, 아름답다.
아름다운 공기를 보고 있는 듯 하다.
공기가 떠밀리고, 아름다움에 감정이 실린다. 슬픔.
자신을 버린 알브레히트를 유령이 되어서도 잊지 못하는 지젤의 애달픔이 둥둥 떠다닌다.
정신없이 그 춤에 몰입해 있을 때, 발레의 한 프레이즈가 엔딩을 맞이했고,
음악이 끝나자 팬텀은 순식간에 존재감을 부풀렸다.
“이렇게 지젤의 2막은 움직이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스산함을 표현해줘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