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99
난처한 듯 하얀 웃음을 지으며, 이규성이 9화의 대본을 보이콧했다.
*
“아니 규성씨 뭐가 문제에요?”
피디가 아랫 입술을 잘근 씹었다.
어제 5화 방영이 나갔다. 오늘 6화 방영이 나가고 나면 비축분은 2화밖에 없다.
무슨 말이냐면,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소리다.
“규민이 연기 못하는 걸로 나오잖아요. 배우한테 연기를 잘한다는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데, 아무리 가상이라지만 연기를 못하는 배우라는 설정은 곤란한데요.”
피디가 기가 막힌 듯 이마를 짚었다.
물론 기획서에 극중 배역 탁규민 역이 ‘연기를 못한다’라는 표현은 없었다. 하지만 ‘권도준이 연기력 탑인데 성격은 나쁜 남주’라는 설정이 있다면, 서브남주가 그보다 연기를 못한다는 의미가 당연히 함축되어 있는 것을 몰랐을 리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수준이 발연기 수준이라면 이미지에 안 맞다는 항의도 이해해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대본 위의 상황은 ‘평범한 연기력’의 탁규민이 ‘대단한 연기력’의 권도준에게 연기로 밀리는 상황일 뿐.
이 정도가 이해가 안 간다고?
아니, 그걸 대본 받은 직후도 아닌, 촬영 직전에 컴플레인한다고?
단번에 얼어붙은 촬영장 공기.
은수가 유명의 옷자락을 뒤로 잡아당겼다. 돌아보니 고개를 까딱한다.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남들이 이야기를 못들을 만한 한 쪽 구석으로 이동한 후에야 은수가 입을 열었다.
“이규성 꼬장부리는 거 반은 오빠 때문일걸요?”
“응?”
그 말을 듣고 나니 짐작가는 바가 있었지만 유명은 모르는 척 은수에게 되물었다.
“저 굿엔터 오기 전에 TW엔터 알바 가끔 뛰어서 그쪽 언니들한테 들은 얘기가 좀 있는데, 이규성 성격 쉣이래요. 특히 백승효한테 라이벌 의식이 굉장하다고.”
그 인성이 변하지는 않았구나, 유명이 놀랍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규성.
아이돌 뺨치는 인형같은 외모로 10대들의 광적인 팬덤을 등에 업은 스타 배우.
그 외모와 더불어 연기력도 수준급이었기에, 지금 방송가에서는 핫한 섭외 대상 중 하나였다. 단, 인기가 아닌 ‘연기’만으로 본다면 아직 완전히 주연급이라고 할 수는 없다.
“처음 연예학개론 대본 보고 권도준역 마음에 든다고 했었대요.”
그건 아니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이규성이 권도준역을 맡았으면 이 드라마 망했다. 이미지가 안 맞기도 하지만, 아무리 가상현실이라도 ‘탑배우’란 칭호를 얹을만한 연기력은 못 된다.
“어쨌든 육작가님 대본이고 또 권도준이 초반에 원체 싸가지없게 나오니까, 자기가 들어가서 인기역전 한 번 시켜볼까, 안되면 말고, 이러면서 호기롭게 들어온 모양인데…이건 뭐 주연도 아니고 조연한테 시선을 다 뺏겼으니···”
확실히···
지금 보형의 인기는 예상을 초월했다.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윤보형이라는 존재가 눈에 살짝 거슬리기는 했겠지만, 유명의 연기를 보기 전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봐야 조연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본인 비중 올리라, 더 캐릭터 부각시켜라, 지금 시위하는 거잖아요. 대 놓고 말할 수 없으니까 핑계 참 어이없다~”
몇년 후 벌어질 이규성의 스캔들이 떠오른다.
그의 전 매니저였던 사람이 퇴사 후 터뜨린 폭탄.
이규성과 몰래 대화한 녹음파일을 여러 개 공개했는데, 거기에는 매니저에게 쏟아지는 입에 담지 못할 욕설들과 함께, 그의 인성을 알려주는 내용들이 담겨있었다.
“야 —-야. 나 그거하기 싫다고 했잖아. 나 내일 다리 다쳤다- 그렇게 전해라? 뭐, 데리러 온다고? 이 —-가 월급 주는 사람을 –로 아나. 비밀번호 바꿔놓을 거야. 오기만 해봐 내가 널 짜르나 안짜르나.”
“야. 나 그 스킨십 안한다고. 팬들 떨어져나가면 니가 책임질거야? –놈이 생각이 없어. 지난 작품에는 하지 않았냐고? 걔는 예뻤잖아. 그 정도면 매출 떨어지는 거 감수하지. —-가 이제 좀 기준을 알겠어?”
그 말투는 아주 조곤조곤하여 더 소름이 끼쳤다.
그 이후로 그는 연예계에서 매장되었지.
본인의 마음에 거리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격.
그걸 감싸고 있는 살가운 태도라는 포장.
그 포장이 어찌 단단했는지 그의 팬덤은 마지막까지 조작이라고 맞서다, 이규성의 인정 및 대국민 사과를 보고 나서야 등을 돌렸다.
“죄송합니다 피디님. 저희 배우가 원래 몸이 약한데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는지 쓰러졌어요.”
차에서 잠시 생각해보겠다던 이규성은, 결국 그럴싸한 핑계를 대며 촬영장을 떠났다.
피디가 처음으로 험한 욕설을 내뱉었다.
*
촬영은 진행되었다.
아니,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급박한 일정 때문에.
방학 피디는 다 집어던지고 싶은 것을 참으며, 이규성이 나오지 않는 장면들 위주로 컷을 따고 있었다.
중간에 육미영 작가와 통화를 했다.
“이규성이요? 그 미친 새끼가···”
듣자마자 걸쭉하게 욕을 지르는 육미영.
“걔 처음 봤을 때부터 좀 쌔했어요. 인사가 예의바른듯 음험하더라니. 어떡할까요 피디님, 탁규민 교통사고로 죽여버려요?”
작가가 펄펄 뛰자 오히려 피디의 이성이 돌아온다.
“일단 방송펑크는 안되니까요. 음…대본을 조금 조정해서 자존심 세워주면 링겔달고 투혼하는 척 나타날텐데, 그렇게라도 안될까요?”
“피디님도 아시잖아요. 걔가 그 장면이 마음에 안든다고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거. 서브남주가 완전히 묻혔다고 시위하는 건데, 아니 그럼 지가 잘하든지. 탁규민도 시청자들 심쿵할만한 대사들 꽤나 있었거든요?”
그것도 사실이었다.
당장 스케줄이 빠듯해서 한 수 접어주는 쪽을 권해본 것이긴 하지만, 방학피디도 본질적인 해결법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10화 초반 쪽대본 보내드릴테니까 그거랑 오늘거랑 일단 찍으시죠. 그리고 제가 촬영장으로 갈테니 자세한 건 만나서 상의해요.”
“하아…오늘따라 탁규민 분량도 많은데. 권도준과 둘이 붙는 장면이라 나중에 승효씨 스케줄 따로 또 빼야하는 문제도 걸리네요.”
“그럼 승효씨 바스트라도 다 먼저 따놓으시면요? 투샷만 나중에 찍으면 촬영시간 줄잖아요.”
“백승효씨도 감정 잡아야 하는데 아예 상대역이 없잖아요.”
“왜, ‘괴물신인’ 있잖아요. 앞에만 갖다놔도 백승효씨 분전할 걸요?”
피디가 무릎을 탁- 쳤다.
*
유명은 피디의 요청에 고개를 끄덕였다.
외우지는 못해도 대본을 들고 읽으며 대사를 받아주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대사를 입에 붙여는 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야죠. 다른 장면 먼저 찍고, 도준-규민씬 마지막에 찍을 테니까 그 사이에 대본 좀 보면 되겠어요? 헷갈릴 수 있으니 보형이 씬들은 아예 마지막으로 빼줄게요.”
“네. 그러면 괜찮습니다.”
유명은 한 구석에 주저앉아 탁규민의 대사를 읽기 시작했다.
‘연기를 못하는 연기라···’
재미있는 연기다.
제대로 하려면 연기를 잘 하는 연기 이상으로 어려운 연기.
탁규민 역은 권도준과 완전한 대치점에 있다.
제작발표회에서 백승효 왈, 권도준은 ‘권도준역’도 ‘권도준이 맡은 배역’도 잘 연기해야 해서 어렵다고 말했지만,
탁규민은 ‘탁규민역’을 잘 연기하면서 ‘탁규민이 맡은 배역’은 못 연기해야 한다.
그것이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점에서, 유명의 판단에는 탁규민 역이 훨씬 어렵다.
‘그 점을 잘 어필만 했더라도 훨씬 화제가 되었을텐데···’
연기를 못하는 연기조차 잘한다며 더 화제가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물론 이 가정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바로 연기력.
‘보통 때라면 남의 역을 대신 연기하면서 이렇게 힘주지 않았겠지만···’
지금 유명은 봐줄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실제로 나올 장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돌아온 이규성이 쪽팔릴 정도로는 연기해 볼 생각이다.
연기를 못하는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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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에게는 습관이 있다.
-형 왜 대본 그페이지를 보고 있어요? 거긴 보형이 대사 없잖아요.
-아…그냥 봤어. 하하···
원생에 배역을 받으면 대사는 고작 몇 줄.
새하얀 대본에 띄엄띄엄 그어져있는 형광펜이 황량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하나의 역할을 추가로 골랐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때로 그것은 널리 알려진 명대사를 가진 주인공이기도 했고,
-나는 부채값을 아끼려고 부채를 펴놓고 얼굴을 흔든다네.
극 중에 잠깐 얼굴을 내미는 개성강한 단역이기도 했다.
그렇게 1321개의 작품.
자신이 맡은 1321개의 역과 맡지 않았던 다른 1321개의 역.
그 수많은 역들이 배우 신유명의 연기의 배리에이션을 지탱하고 있다.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이번 대본에서도 ‘나라면 어떻게 연기했을까’를 짚어 보았던 배역이 ‘탁규민’ 역할.
탁규민.
연예학개론의 서브남주.
그에 대해 유명이 받은 인상은, 연예인이 어울리지 않게 보드라운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규민, 몰려드는 팬들을 보고 살짝 한숨을 짓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운다.
-항상 뛰어다니는 하나를 보고 애처로운 듯 미소짓는 규민.
권도준처럼 연기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과 열정이 지랄맞은 성격마저 커버해주는 귀족과도 아니고,
김하나처럼 본인이 원해서 근성있게 이바닥에 뛰어든 잡초과도 아니며,
류준경처럼 자신에게 모이는 시선을 즐기는 여왕님과도 아니다.
그는 예쁜 얼굴과 나쁜 집안 사정 때문에 연예계에 발을 들였지만, 인기가 부담스럽고 부족한 재능에 자조하는, 그럼에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려 발버둥치는 ‘보통 사람’.
자신이 버는 돈에 대한 대가를 치르려 화사한 미소를 띠우는 ‘프로 연예인’.
그렇기에 ‘보통 사람’ 하나가 실수하고 힘들어할 때마다 진심으로 그녀의 얘기를 들어주는 ‘보통 남자’.
탁규민 또한 무척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화려한 연예인의 탈을 쓴 보통 남자라는 갭을 잘 표현할 수 있다면 시청자의 공감과 사랑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캐릭터.
탁규민 역에 이규성. 굿 캐스팅이었다. 화려한 연예인의 탈이라는 의미에서는.
하지만 그가 소박한 보통 남자의 내면을 잘 보여주지 못했기에, 그저 그런 서브남주로 묻히고 말았던 것이다.
‘나라면···’
관건은 극중에서 탁규민이 맡은 ‘문신 월공’의 역할에 인간 탁규민의 유약함을 흩뿌리는 것.
유명은 잠시 바깥세상으로 열린 눈과 귀를 닫아놓고 탁규민의 내면세계와 동화하기 시작했다.
*
백승효는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오늘 씬은 쉽지 않았다.
권도준의 배역 ‘은성군’과 탁규민의 배역 ‘월공’이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는 씬.
이 씬에서 권도준의 연기는 탁규민을 압살해야 한다.
‘이규성. 매번 미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더니 결국···’
늘 웃는 낯을 하고 다니기는 했지만, 이규성의 심사가 꼬여 있는 것을 백승효도 모르지는 않았다. 별로 관심없던 배우라 무디게 넘겼을 뿐이다.
그런데 하필 권도준의 연기가 가장 잘 살아나야 하는 이 씬에서 파업이라니.
‘그리고 대역은 저 친구···’
백승효가 대기 중인 신유명을 바라보았다.
신경쓰인다. 이규성보다 훨씬 더.
화면에야 자신만 잡히겠지만, 그가 어떻게 탁규민을 연기할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