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by Tyrant RAW novel - Chapter 271
7화. 에이단 아세라드의 일상
에이단 아세라드.
대륙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있을까.
몇 해 전 데블린 제국과 에르마노 제국 사이의 대전이 벌어지고, 에이단 아세라드 백작은 큰 공을 세워 데블린 제국의 모든 영토를 하사받았다.
데블린 제국은 아세라드 공국으로 명명된 후 대공이 된 에이단 아세라드 치세하에 있었다.
에르마노와 엇비슷한 땅덩이 크기인데도 독립하지 않고 공국으로 남아 있는 점에 의문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아세라드 대공과 에르마노 황제의 관계를 거론하면 금세 납득했다.
그러나 에이단이 아세라드 공국에 머무는 날은 극히 적었다.
그는 대부분 에르마노에서 지냈다.
사람들은 에이단이 자신 소유의 에르마노 수도 저택에서 머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에이단이 주로 머무는 곳은 에르마노 황성 별궁의 귀빈용 객실이었다.
그것도 황제가 머무는 본성에서 가장 가까운.
귀빈용 별궁이지만 에이단과 같은 건물에서 자겠다고 응하는 이는 없었다. 자연히 별궁은 에이단이 단독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오늘도 호위 시간이 아닌 시간, 그는 별궁에 마련해둔 임시 집무실에서 공국과 관련된 집무를 보았다.
에이단이 인장을 찍고 서류를 내밀자 이제 남은 서류가 없었다. 에이단이 물었다.
“마지막?”
“네!”
전 데블린, 현 아세라드 공국 출신인 신입 보좌관이 힘차게 대답했다.
문득 에이단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메이블이 있을 본성의 끄트머리가 살짝 보이는 위치였다.
‘어제 늦게 잠들더니, 또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닌지.’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찾아가 곁을 지키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호위 시간이 아니었다.
메이블은 에이단이 낮 중에 쉬는 시간을 어기고 찾아오면 불같이 화냈다.
불같이라고 해봐야 새끼 호랑이가 으르렁대는 수준이지만.
다행히도 밤에는 관대한 연인이었다.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에스테반의 눈을 피해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밤을 생각하면 지루한 낮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에이단이 본성만 하염없이 응시하자 슬그머니 눈치를 보던 보좌관이 쾌활하게 말했다.
“이번에도 일 처리가 정말 빠르십니다, 각하. 존경스럽습니다.”
“……그래.”
인간들의 일이라고 해봤자 크게 대단할 것도 없었다.
관리자를 세워놓고 일을 시킨다. 문제가 터지면 수습한다.
그게 전부 아닌가.
신인 에이단에게 그 모든 것은 하잘것없는 잡무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매일같이 집무를 보며 그 장단에 어울리는 건 역시 오로지 메이블을 위해서였다.
메이블을 생각하자 또다시 울컥 충동이 일었다.
‘보고 싶은데.’
몰래 찾아가서 보고 올까 고민할 때 아세라드 대공 앞으로 온 서신을 살펴보던 보좌관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각하. 아벨라르도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버려.”
“네!”
힘차게 대답한 보좌관이 신왕의 친서를 무참히 버렸다.
열어보지도 않은 친서는 고스란히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이런 에이단의 명령에 당황한 보좌관이었으나 이제는 놀랄 것도 없었다.
에이단이 매일같이 도착하는 신왕 미하엘의 서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으므로.
그도 처음부터 서신을 갖다버린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읽긴 읽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에이단에게 너무 혐오스러웠다.
[아드님. 아벨라르도에는 언제 들르실 겁니까? 언제나 아드님을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가.] [오늘도 대답이 없는 그리운 아드님께. 오늘 아벨라르도 하늘이 아름답습니다. 이 하늘을 신과 함께 감상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습니다…… (중략) 그래서 언제 아벨라르도에 오실 겁니까? 당신만을 그리워하는 아버지가.] [ㅇ이라도 보내주십시오.] [이 서신은 아벨라르도로부터 최초로 시작되어 일 년에 한 바퀴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고, 지금은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서신은 4일 안에 당신 곁을…….(후략)]갖가지 방법으로 관심을 끌어보려는 미하엘과 개의치 않고 개무시하는 에이단.
그야말로 창과 방패의 대결이었다.
에이단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문가로 향했다. 그가 쓰레기통 옆을 지나는 순간 미하엘의 서신이 순식간에 타오르며 잿더미가 되었다.
대기하고 있던 보좌관이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산책.”
산책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혹시라도 메이블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이었다.
우연히 마주친 거라면 혼내지 않을 테니까.
***
에이단은 홀로 정원을 거닐었다.
붉은 눈동자가 상념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았다.
끔찍하게 느껴졌던 금제의 속박이 이렇게 기꺼울 줄 누가 알았을까.
이 몸뚱이가, 혈액이, 행하는 호흡이, 신의 힘이나 신의 힘이 아닌 검은 기운이, 전부 메이블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면 더없는 충만감이 들었다.
‘당신의 것.’
떨어져 있는 지금도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보고 싶다는 충동을 달랠 수 있었다.
“말만 해, 에이단. 바로 금제 풀어줄 테니까.”
그러나 배려심은 넘치지만 눈치가 조금 없는 메이블은 틈만 나면 에이단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어 했다.
그럴 때마다 에이단은 번번이 거절했다.
마음 약한 메이블이 그를 내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금제로 온전한 신의 힘을 찾을 수 없어도, 신성력에 노출되었을 때 끔찍한 고통이 따라도 아무 상관없었다.
에이단이 괴로울수록 메이블은 더욱 그를 연민하고 사랑하게 될 것이므로.
‘리카벨리 거리에 유명한 디저트 가게를 가고 싶어 했는데.’
바쁜 메이블 대신에 디저트를 사 오는 게 어떨까 고민하던 그때였다.
“저어, 아세라드 대공 각하.”
에이단의 걸음이 뚝 멎었다.
낯선 기척이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말을 걸 줄은 몰랐다.
고개를 돌린 에이단의 시야에 들어온 건, 긴 백금발을 늘어뜨린 청초한 여인이었다.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산책을 나오셨나 봐요.”
“…….”
“마침 저도 산책을 하고 있던 참이랍니다.”
“…….”
“혹시 괜찮으시다면 함께 거닐어도 될까요?”
에이단이 무응답으로 일관했지만 레이디는 꿋꿋하게 함께 산책하기를 권했다.
“소문대로 과묵하시네요.”
역시 에이단은 대답이 없었다.
그의 무정한 시선에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깨물던 그녀가 용기 내 외쳤다.
“사실 오래전부터 대공 각하를 지켜봐 왔어요……!”
수도의 유력 가문의 영애인 그녀. 짝사랑의 역사는 길었다.
소녀일 때 국경에서 전공을 세우고 돌아오던 에이단의 화려한 귀환을 보았을 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에이단을 지켜보곤 했다. 아버지를 졸라 황성에 들어와 몰래 훔쳐본 세월이 얼마나 길었던가.
그때마다 에이단은 황제와 함께 있었다. 별것도 아닌 주제로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고, 대단치도 않은 것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에이단의 시선은 늘 메이블에게 향했다. 그러나 메이블은 언제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각하를 곁에 두고 보잘것없는 들꽃에 시선을 주시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언제나 각하께서는 폐하만 바라보고 계시는데.’
순수한 동경은 점점 질투로 변했다.
제삼자의 눈으로도 명확히 보이는 애정의 차이에 자신이 차인 것처럼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저렇게 대단한 분의 사랑을 받으면서 폐하께서는 왜 똑같이 되돌려주지 않는 걸까.
“폐하께서는 늘 바쁘시잖아요. 그래서 대공 각하를 외롭게 만드시곤 해요. 그렇죠?”
애타는 마음으로 물었지만 에이단의 서늘한 시선만 닿을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혼자 나와 계신 거잖아요.”
“…….”
“폐하와 헤어지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다만 제가 대공 각하를 위로해드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돌려 말하지만 결국은 바람을 피우자는 이야기였다.
‘허튼소리.’
에이단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선 그녀를 지나쳤다.
말을 섞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괜한 시간을 낭비하고 말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빠졌다.
다시 별궁으로 향하는 에이단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오늘도 가엾은 소녀의 진심을 짓밟았구나, 에이단.”
“오스카, 네가 할 말은 아닐 텐데.”
본의 아니게 고백을 엿들은 오스카가 흥미로운 듯 웃으며 그를 응시했다.
황제의 연인이라는 사실 이전에 에이단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두려워하는 자들이 많았기에 고백을 받는 횟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러나 오스카는 달랐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고백을 받고는 했다.
우스갯소리로 제국의 모든 결혼 적령기 레이디들의 고백을 다 받았을 거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오스카는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난 결혼 안 할 건데?”
이성에게 관심이 없는 오스카는 단 한 번도 연인을 만든 적이 없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메이블이었다.
메이블의 건강. 메이블의 식사. 메이블의 일정. 메이블의 안위. 심지어 메이블의 남자친구까지!
실로 광적인 동생 사랑이 아닐 수 없었다.
의외인 점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다며 물고 늘어지는 에스테반과 달리 오스카는 에이단을 메이블의 연인으로 인정했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에 에스테반이 얼마나 배신감에 치를 떨며 날뛰었는가.
오스카는 자신이 에이단을 찾아온 이유를 상기하고는 말을 이었다.
“부황께서 이번에 또 일 꾸미시던데. 석 달은 아세라드 공국에 처박혀 있게 만들 거라고.”
“…….”
에이단의 냉랭한 시선이 오스카에게 향했다. 지레 찔린 오스카가 어색하게 웃으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난 왜 그렇게 봐? 나는 네 편이야. 이렇게 밀고하러 왔잖아.”
아무 관련이 없는 척하고 있지만 에스테반의 방해 공작에 오스카도 동참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이후에 사건이 벌어졌을 때를 대비해서 미리 발을 빼두는 거겠지.
에이단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하게 웃고 있는 오스카에게 턱짓했다.
“따라와.”
“어, 어딜?”
“연무장.”
연무장. 즉, 대련이라는 명목하에 합법적으로 팰 거라는 의미였다.
오스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살려주세요, 아데스 님.”
오스카가 간절하게 빌었지만 에이단은 못 들은 척 연무장으로 향했다.
‘기껏 알려줬더니!’
에이단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보던 오스카는 그가 얼굴을 돌리려 하자 황급히 웃는 얼굴로 바꾸었다.
신을 친구로 두는 건 참 피곤한 일이었다.
***
주홍색 노을이 지고, 이내 땅거미가 지상을 뒤덮었다.
에이단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기나긴 기다림의 끝을 의미하는 신호였으므로.
그는 황혼의 어스름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맞으며 익숙하게 발코니로 도약했다.
미세한 인기척에 곧바로 발코니 문이 활짝 열렸다.
“어서 와, 에이단!”
어릴 때와 다름없이 언제나 환하게 맞아주는 자신의 주인. 에이단은 망설임 없이 메이블을 꽉 끌어안았다.
체구가 작은 메이블은 장신인 에이단에게 폭 파묻히고 말았다.
힘을 사용해 손대지 않고 발코니 문을 닫은 에이단은 메이블의 얼굴에 짧게 여러 번 입을 맞추었다.
거침없는 애정행각에 메이블이 푸스스 웃었다.
“으휴, 이 뽀뽀 귀신.”
“키스 귀신 하면 안 됩니까?”
“모, 못하는 말이 없어!”
부끄러운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메이블이 에이단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얼마나 약한 힘인지 간지럽지도 않았다.
금세 진정한 메이블이 에이단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오늘은 뭐 했어?”
“오스카와 대련했습니다.”
“내일 오스카가 또 나한테 한탄 늘어놓겠다.”
“그럼 말하십시오. 또 대련하면 되니까.”
“오스카 그만 괴롭혀.”
“오스카가 나를 괴롭힌 건데.”
“착한 오스카가 그럴 리가 없어.”
“억울합니다.”
소소한 대화가 이어졌다.
메이블은 킥킥 웃으며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읽던 책을 펼쳤다.
에이단은 메이블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그녀의 다리를 벴다. 책에 집중한 메이블의 예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얼마든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몇 분간 팔랑팔랑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평온한 침묵을 가르고 에이단이 요구했다.
“만져 주십시오.”
그러자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검은 머리칼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나른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에 안온하게 흘렀다.
에이단은 눈을 감았다.
남들은 모를 테지. 단둘이 있을 때 메이블이 내어주는 곁이 얼마나 달콤한지.
굳이 알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혼자만 독점하고 싶었으니까.
부드러운 손길이 이어졌다.
행복한 일상이었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