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by Tyrant RAW novel - Chapter 302
38화. 그대에게 입 맞춰도 됩니까?
대망의 약속 날이 되었다.
가데니아 후작은 별 의심 없이 하녀와 호위를 대동하는 조건으로 외출을 허락했다.
시아나는 서신을 통해 에스테반과 정했던 약속 장소로 나갔다.
시간보다 더 일찍 나갔는데, 그곳에는 에스테반이 미리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찍이 선 시아나는 나무 그늘에 서 있는 에스테반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저렇게 차가운 얼굴을 한 사람이구나.’
홀로 있을 때의 남자는, 낯설도록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길가에 핀 소담한 꽃에도, 느리게 흐르는 강물에도, 불시에 날아오르는 새떼의 비산에도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애정이 전혀 깃들지 않은 온기 없는 눈.
한데 어째서인지 시아나는 그런 그가 외로워 보였다.
다리의 난간에 기대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시아나를 두 눈에 담자마자 차가웠던 인상이 확 바뀌었다.
에스테반은 예전에도 그랬듯 아주 반가운 사람을 만난 듯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오랜만입니다, 시아나.”
“마지막으로 뵌 지 며칠밖에 안 지났는걸요.”
“오늘을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너무 더디게 흘러서, 제게는 오랜만입니다.”
그 말에 시아나는 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벙긋거리다 결국 그만두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대놓고 수작을 부리는 것에는 면역이 없었기 때문에.
시아나의 하녀와 호위가 속닥거리며 에스테반을 흘긋거렸다.
“저 기사님 정말 적극적이네요. 그렇지 않나요, 경?”
“……마리 당신 눈에도 그렇게 보여요?”
“네.”
“말세다, 말세야.”
에스테반의 진짜 신분을 아는 호위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신음했다.
그의 주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불상사가 벌어질지 감히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후작 각하라면 날 죽이실지도 몰라.’
그러나 당장 눈앞의 황제가 더 무서운 법.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에스테반은 시아나와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행복했다.
그를 올려다보던 시아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 다치신 상처는 괜찮으신가요?”
“그대의 응급처치 덕분에.”
나지막한 목소리에 시아나는 에스테반의 시선을 피하며 두 손을 내밀었다.
“그럼 손수건을 돌려주세요.”
하지만 시아나의 손 위에 올라간 것은 손수건이 아니었다.
“깜빡 잊고 두고 왔습니다.”
에스테반이 제 큰 손을 시아나의 손 위에 턱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네?”
약속한 물건을 두고 왔다는 사람치고 지나치게 당당한 태도가 아닌가.
시아나는 큰 눈을 깜빡거렸다. 에스테반이 변명을 덧붙였다.
“잘 세탁하여 말려 두었는데, 그대로 두고 와 버린 모양입니다.”
“그러시면 정말로 안 돌려주셔도 괜찮아요.”
시아나가 이번에도 손수건을 돌려받길 거절하자 에스테반이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핏물 빼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시아나에게 꼭 돌려드리려고 열심히 세탁했는데…….”
“그, 그랬나요?”
“예. 혹시 식사하셨습니까?”
마치 수천 번은 연습한 듯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이었다.
시아나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마리가 두 눈을 빛내며 대신 대답했다.
“아니요! 아직 안 드셨어요!”
“잘됐군요. 그렇다면 저와 함께 식사해 주시겠습니까. 마침 근처에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시아나는 그런 물음에 거절할 수 있는 성격이 못 되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스테반은 어느샌가 잡고 있던 손을 끌어당겼다.
맞닿은 피부가 간질거리는 듯했다.
어째서인지 자신에게 호의적인 시아나의 하녀와, 눈치 보며 침묵하는 그녀의 호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
식사가 끝나고 에스테반의 권유로 두 사람은 포코시 강가를 거닐었다.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나룻배를 타며 웃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어느덧 어색함이 사라진 두 사람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발맞춰 걸었다.
“시아나는 외동이군요.”
“네. 그래서인지 가끔은 외롭기도 해요. 어릴 때는 언니가 갖고 싶다면서 아버지를 괴롭히기도 했대요. 에반 님은요?”
“음……. 누님이 한 분 계십니다.”
“와, 부러워요.”
“결혼하면서 랑가르드로 떠났는데, 연락을 못 한 지 제법 오래되었습니다.”
“그리우시겠어요.”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좋아하는 음식, 어릴 때 겪었던 일, 인상적인 책의 구절, 며칠 전 있었던 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덧 포코시 강가의 하늘이 분홍색으로 온통 물들었다.
나들이 나온 사람들마저 귀가한 지금 강가의 저녁은 고즈넉했다.
헤어질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에스테반은 시아나와 마주 보고 섰다. 그는 다소 긴장했다.
“그럼 다음번에 꼭 손수건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다음을 기약하는 그 말에.
“알겠어요.”
시아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에스테반은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 짧은 접촉에 시아나의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무언가 시작되고 있었다.
애틋하고, 간질간질하면서,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어떤 감정이.
***
다음번 만남 때도 에스테반은 뻔뻔하게 말했다.
“들고 온다는 걸 그만,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만남 때도.
“잊었네요.”
그다음 날도…….
“깜빡했습니다.”
“네…….”
아무리 이성에 대한 눈치가 없는 시아나라도 에스테반이 일부러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핑계였다. 어떻게든 시아나를 만나기 위한 그럴싸한 구실.
그런데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건 그 말을 듣는 자신의 마음이었다.
‘싫지 않아.’
시아나도 내심 에스테반과 만나는 날을 기다렸다는 것이었다. 얼마든지 에스테반의 거짓말에 어울려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었다.
손수건이라는 두 사람 사이의 핑계가 있는 한 만남은 지속되었다.
그 기세를 몰아 에스테반은 적극적으로 시아나를 유혹했다. 서로 마음만 고백하지 않았다뿐이지 연인 사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아나 몰래 미리 전체를 빌려놓은 카페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디저트와 차를 주문했다.
“시아나. 크림이 묻었습니다.”
“여기요?”
시아나가 크림이 묻은 반대쪽 입가를 닦자 에스테반이 엄지로 그녀의 입가를 훔쳐내었다.
“아니요. 여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제 손가락을 핥는 에스테반의 모습에 시아나는 풋 웃고 말았다.
당연히 시아나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할 거라 생각한 에스테반은 당황했다.
“시아나?”
“그러는 에반 님도 크림이 묻었어요.”
“아. 여기 묻었습니까?”
“아니요. 여기!”
시아나는 에스테반이 했던 그대로 그의 입가를 엄지로 닦아주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핥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에스테반의 얼굴은 화르륵 붉어졌다.
그런 에스테반의 반응에 시아나가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에스테반은 예쁘게 접히는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시아나에게 그만 입을 맞추었다.
쪽.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접촉에 여지없이 시아나의 두 눈이 커졌다.
“아.”
시아나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동그란 눈으로 에스테반을 바라보았다. 그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크림이 묻어서.”
“그 핑계는 이미 끝났어요, 에반 님.”
“……시아나 그대가 웃는 게 예뻐서.”
그렇게 말하는 에스테반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시아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꾹 눌렀다.
이내 에스테반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시아나. 그대에게 입 맞춰도 됩니까?”
짧은 키스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오히려 갈증이 더 밀려들 뿐이었다.
온몸이 바스러지도록 끌어안고 싶다. 숨이 멎을 정도로 입 맞추고 싶다.
에스테반은 들끓는 충동을 억누르며 시아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훈련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본능을 주체할 수 없는 사냥개처럼.
시아나와 적지 않게 만나며 에스테반은 어렴풋이 확신했다. 그녀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 거라고.
이윽고 시아나는 두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
그 순간 참고 있던 에스테반의 인내심이 다 했다.
덜컹-.
자리에서 일어난 에스테반이 테이블에 한 손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 시아나의 뺨을 감쌌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는 그녀의 숨결을 온전히 취했다.
***
마침내 시아나와 연인 사이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도 전에 에스테반은 고민에 빠졌다.
‘슬슬 내 신분을 밝힐 때가 되었는데.’
에스테반은 시아나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시아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황제 폐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물음에 시아나가 미미하게 눈가를 찌푸렸다. 시아나답지 않은 부정적인 반응에 에스테반은 순간 제 두 눈을 의심했다.
‘잘못 본 게 분명해.’
하지만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무정하신 분이죠. 피도 눈물도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에스테반이 아무리 긍정적으로 해석해 보려고 해 봐도 소용없었다.
시아나는 황제를 꺼리는 듯했다.
에스테반은 엄청난 위기감을 느꼈다.
‘소문이 좋지 않기는 하지만, 시아나마저 그렇게 생각할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소문을 단속해 둘 것을.
그러나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위기에 몰린 에스테반이 서둘러 자신을 변호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황제 폐하는 소문과는 다른 분이십니다. 친절하시고, 상냥하시고, 또…….”
시아나 또한 황제를 둘러싼 소문을 온전히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파시피카를 대하는 황제의 태도로만 놓고 봐도 그를 적대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런가요? 하지만 딱히 알고 싶지 않아요.”
상냥한 목소리로, 시아나가 딱 잘라 대화를 끊었다.
“……예.”
면전에서 박대당한 에스테반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차이지도 않았는데, 차인 기분이었다.
그는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시아나를 웃으며 바라보면서도 고뇌에 잠겼다.
‘어쩌다 신분을 숨기게 되었더라.’
처음 마주쳤을 때 시아나가 하녀복을 입고 있어서, 황제인 것을 알면 달아날까 봐 제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시아나가 가데니아 후작의 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혹시 자신이 부담스러울까 봐 기사라고 둘러대었다.
더구나 대외적으로 파시피카와 이혼 발표가 나지 않았으니 밝히기 난감하기도 했다.
서서히 친밀해지면서 말하려고 했는데…… 황제를 꺼릴 줄이야.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시아나는 황제를 제법…… 아니, 아주 많이 싫어했다. 꺼리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사실을 숨길 수는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황제의 탄신 연회에 가데니아 가문 또한 어김없이 참석했다.
그때 시아나가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는 것보다 최악인 것이 있을까.
어떻게든 그전에는 제 신분을 꼭 밝혀야 했다.
“휴…….”
눈앞이 막막해진 에스테반은 시아나를 품에 안았다. 시아나는 다정한 손길로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내요, 에반.”
“……네, 시아나.”
고뇌의 원흉의 위로에 에스테반은 더욱 심란해졌다.
***
황제의 탄신 연회를 며칠 앞둔 어느 날, 파시피카와 에스테반의 이혼 소식이 수도에 쫙 퍼졌다.
이혼 발표를 유예한 그동안 파시피카는 가문 내 제 세력을 안정적으로 구축하여 당당하게 도노반 공작가에 돌아갈 수 있었다.
날 선 송곳니를 숨기고 있던 맹수의 귀환이었다.
에스테반은 파시피카와의 서류상 정리를 완전히 끝마치기 위해 도노반 공작가에 들렀다.
사실 보란 듯 파시피카를 만나면서 그녀에게 힘을 실어 주려는 의도도 존재했다.
모든 서류 정리를 끝마친 에스테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노고가 많았네, 레이디 도노반.”
황후가 아닌 호칭에 파시피카는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도노반 공작저 밖으로 나오자 걸치고 있던 망토가 거친 바람에 펄럭였다. 에스테반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날씨가 영 좋지 않군.’
먹구름이 구물거리는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처럼 흐렸다.
“구스타프. 마차는?”
“예. 아까 불렀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폐하.”
“미리 준비했어야지.”
“황제 폐하께서 너무 일찍 나오신 겁니다.”
구스타프가 은근히 툴툴거리며 대답할 바로 그때였다.
멀찍이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에스테반은 고개를 돌렸다.
“황제, 폐하……?”
그곳에 시아나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파리한 안색의 시아나가. 호박색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얼룩져 있었다.
“……!”
에스테반과 시아나의 두 눈이 허공에서 엉켰다. 뒤늦게 사태를 깨달은 에스테반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시아나!”
시아나는 뒤돌아 달렸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