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by Tyrant RAW novel - Chapter 48
48화. 기꺼이 폭군이라도 되겠어
나의 당당한 조르기에 클레멘 장로가 입을 벙긋거렸다.
“옐리움은…… 대대로 역대 신왕 성하께 대물림되는 것으로…….”
“내 꼬라묘. 왜 빼소가눈데…….”(내 거라며. 왜 뺏어 가는데…….)
속상한 척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자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아빠가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감히…… 네 놈이 내 딸을 농락해?”
예기치도 못한 아빠의 개입에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나이스 타이밍!’
예상대로 클레멘 장로는 크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고.
“제, 제가 언제 황제 폐하를 농락하였-.”
“내 꼬 안 주면 이룸 안 바꼬!”(내 거 안 주면 이름 안 바꿔!)
나는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제가 파견된 조건은 분명히 신명을 인정-.”
“나눈 구런 거 몰라! 내 꼬 돌려조!”
“아, 저, 그…….”
“도두기다! 내 꼬 가져가써!”(도둑이다! 내 거 가져갔어!)
나는 막무가내로 떼를 쓰기 시작했다. 클레멘 장로는 난색을 표하며 쩔쩔맸다.
보다 못한 구스타프가 대화를 끝내는 것을 권하자 기다렸다는 듯 침실을 후다닥 빠져나가 버렸다.
“가따.”(갔다.)
히히. 만족스럽게 웃자 아빠가 나를 번쩍 들어다가 무릎 위에 앉혔다.
“역시 내 딸이다. 이렇게 똘똘하다니.”
“마자. 난 또또캐.”(맞아. 난 똑똑해.)
아무리 바지황제라지만 그래도 이 세계에 발붙이고 산 지 2년 하고도 몇 개월이 흘렀다.
‘엣헴. 그동안 헛산 게 아니라고.’
외교적으로 엮인 일이니만큼 일이 이렇게 마무리되지는 않을 테지만 일단 아벨라르도의 장로를 혼쭐낸 것으로 만족했다.
‘신명을 인정하는 대신 신성국에서의 내 위치와 권리를 보장받는다든가 하는 방법이 있겠지. 두고 봐라. 제대로 뜯어먹어 줄 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에 문득 잊고 있던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빠.”
“그래, 메이블. 아빠다.”
“오쯔까 오디 가써? 안 보이눈데. 공자까 가써?”(오스카 어디 갔어? 안 보이는데. 공작가 갔어?)
눈을 뜬 이후로 오스카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깨어났다고 하면 당장에라도 달려올 녀석인데, 찾아오지 않으니 덜컥 겁이 났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아빠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최근 들어 오스카가 고민이 있는 듯하더구나. 매일 같이 검만 휘두르는데, 일단 지켜보려고 내버려 두었다.”
“고밍? 무순 고밍?”(고민? 무슨 고민?)
아니, 아직 어린 꼬꼬마 녀석이 무슨 고민이 그리 깊어서 수련에만 매진한단 말인가.
집요하게 아빠를 올려다보았으나 아빠는 요리조리 내 눈을 피했다.
내게는 말하지 못할 무슨 일이 오스카에게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아빠는 내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것 같으니, 직접 가서 괜찮은지 확인해야겠다.
***
리산드로의 품에 안겨 훈련장 입구에 도착했다.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훈련 중인가 봅니다.”
“내료 조.”
바닥에 발을 디딘 나는 곧바로 훈련장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훈련장의 가장자리, 아무것도 없는 공터에서 오스카가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는지 온몸이 온통 땀과 모래로 범벅이었다.
평소의 오스카는 웃는 얼굴인데, 검을 휘두르는 오스카에게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처음 보는 얼굴.’
무감한 얼굴로 훈련에 열중한 녀석은 내가 지켜보고 있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오쯔까!”
결국 내가 먼저 이름을 부르자 녀석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돌아보았다.
쨍그랑.
손에 힘이라도 풀린 건지 오스카는 검을 떨어트렸다. 나는 헤헤 웃으며 양손을 흔들고 오스카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
오스카가 갑자기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가, 갑자기 왜 도망치는 거야?’
당황한 나는 멀거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뒤따라 뛰어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내 짧은 다리로는 오스카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오쯔까아!”
“오지 마, 메이블……!”
“왜애!”
헥헥.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열심히 뛰었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오스카가 점점 점이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뒤뚱뒤뚱 뛰던 나는 그만-.
철푸덕!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으엥. 아푸다…….”
너무 아픈 나머지 눈물이 찔끔 나왔다. 나는 잠깐 동안 훌쩍이다가 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았다.
‘2회차 인생 체면이 있지, 넘어졌다고 울면 안 돼.’
넘어지면서 쓸린 건지 무릎이 따끔거렸다.
“아이구.”
혼자 끙끙대며 일어나려는데, 내 앞에 짙은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자 어두운 표정의 오스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메이블. 괜찮아?”
“웅.”
“내 손 잡고 일어나.”
나는 망설임 없이 오스카가 내민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러자 녀석이 움찔, 몸을 떨었다. 내가 일어서자마자 오스카는 서둘러 내 손을 놓으려고 했다.
꽈악. 나는 한 손을 더 동원해서 오스카의 손을 세게 쥐었다.
“메이블…….”
“나 왜 피해써?”
“…….”
“피한 고 맞네.”
나는 오스카를 빤히 응시했다. 녀석은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도 못하고 내 시선을 이리저리 피했다.
“오쯔까. 이제 나 시러?”
“그럴 리가 없잖아, 메이블. 내가 어떻게 너를 싫어해.”
“군데 왜 도망쳐써.”
“그건…….”
우물쭈물하던 오스카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촉촉이 젖은 녹색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내가…… 자격이 없어서.”
“먼 자격.”
나는 불퉁한 얼굴로 오스카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지켜준다고 했다가 못 지켜줘서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면 한 대 때려야지.’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오스카가 대답했다.
“너를 지켜준다고 말해놓고, 지켜주지 못했잖아.”
“허어…….”
어쩜 이렇게 내가 예상한 그대로 말하는 건지. 나는 주먹을 말아 쥐고 오스카의 어깨를 퍽, 하고 때렸다.
“메, 메이블?”
오스카가 당황하며 나를 불렀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오스카를 쏘아보았다.
“바부야.”(바보야.)
“어?”
“몽총이. 똥깨. 얼가니. 오쯔까눈 진짜루 몽총이야.”(멍청이. 똥개. 얼간이. 오스카는 진짜로 멍청이야.)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그런 나쁜 말 쓰면 못 써.”
“왜 못 써! 쓰꺼야!”
내가 막무가내로 소리를 치자 오스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떼를 쓴 적이 한 번도 없어서인지 놀라울 법도 했다.
“오빠만 동생 지키라눈 법 오디써? 동생두 오빠 지키 쑤 이써!”
나는 두 손으로 오스카의 손을 꼭 붙잡았다. 오랫동안 검을 휘둘러서인지 손이 거칠어져 있었다.
내가 쓰러졌던 동안 혼자 자책하면서 얼마나 검을 휘둘러댔던 걸까. 마음이 불편했다.
“……서루서루 지쿄 주는 게 가족이자나.”
“메이블…….”
“그로니까 나 피하지 마.”
사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오스카가 나를 피하는 건 당연했다.
내가 아무 믿음을 주지 못했으니까. 늘 넘치는 애정을 퍼부었던 오스카와 달리 나는 매번 부담스러워하며 피하기에만 급급했다.
아빠에게도 오스카에게도 못 할 짓이었지.
오스카에게 하는 말이지만,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피하지 말자고.
“메이블 너는 정말…….”
어째서인지 오스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잠시 후.
포옥. 따뜻한 품이 나를 껴안았다.
방금까지 검을 휘두르고 있던 터라 땀 냄새가 조금 났지만, 그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나는 헤헤 웃으며 오스카의 허리를 마주 안았다.
“아푸루두 내가 지쿄주깨, 오쯔까.”(앞으로도 내가 지켜줄게, 오스카.)
“그건 내가 할 대사잖아, 메이블.”
“내 꼬야.”
“그래, 그래.”
우리는 나를 찾으러 온 리산드로가 부를 때까지 꼭 껴안고 있었다.
그렇게 줄곧 외동이던 내게 처음으로 진짜 오빠가 생겼다.
열 살도 더 어린 오빠가.
***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두 쌍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불쌍한 구스타프, 그리고 아빠.
나는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냈다.
“에이당 내 호이기사 시켜조.”(에이단 내 호위기사 시켜줘.)
“……!”
아빠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표정을 수습하고는 다정하게 웃었다.
“식사는 맛있게 했느냐, 메이블?”
“에이당 내 호이기사 시켜조.”
나는 말을 돌리려는 얄팍한 수법에 넘어갈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빠가 앓는 소리를 내더니 제 이마를 짚었다.
“그건 곤란하다, 메이블.”
“오째소?”(어째서?)
“에이단은 데블린의 악마라고 불릴 정도로 잔혹한 학살을, 그러니까…….”
아무래도 아이에게 죽음이라는 의미를 전달하기 어려운지 아빠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구스타프를 슬쩍 보며 책임을 전가하려고 했다. 구스타프는 울상을 짓더니 한숨을 내쉬며 내 앞에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폐하. 에이단은 아주 위험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많이 아프게 했어요. 그런 사람을 폐하의 옆에 둘 수 없습니다.”
완곡하게 돌려 말하려는 구스타프의 노력이 묻어나는 대사였다.
나는 해맑게 웃으며 그런 어른들의 동심을 파괴했다.
“나는 안 주겨. 그니까 갠차나!”(나는 안 죽여. 그러니까 괜찮아!)
“…….”
“…….”
할 말을 잃은 두 사람을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구 에이당 업써쓰면 시셰오 못 자밧짜나. 공노는 인정해조야지. 강자 치급은 구만 도.”(그리고 에이단 없었으면 시세로 못 잡았잖아. 공로는 인정해줘야지. 간자 취급은 그만 둬.)
내 소신 발언에 구스타프와 아빠가 쨍하니 얼어붙었다. 당연히 내 발언에 대해 고심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내 딸이 너무 똑똑해서 큰일이다, 구스타프.”
“……세기의 천재십니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즐기십시오, 폐하.”
“……잉?”
이들은 전혀 다른 포인트를 짚고 있었다!
“아빠! 구수따푸!”
발을 쾅 구르며 외치자 그제야 이들은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도도도 달려가 아빠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간절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안 드러주꺼야?”
두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들어주마. 뭐든 다 들어주마. 에이단이고 뭐고 원하면 네 것이다, 메이블.”
“와!”
강력한 반대가 무색하게도 승낙은 너무도 빨랐다.
***
에이단이 내 호위가 되는 것에는 한 가지 조건이 붙었다. 언제 어디서든 리산드로의 시선이 닿는 범위 안에서 움직일 것.
딱히 수상한 짓을 할 예정도 아니라 그 정도 조건은 문제도 아니었다.
나는 에이단과의 정식 대면 장소로 정원을 골랐다. 나는 양이와 함께 에이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너무 일찍 각성을 했어, 메이블.]‘치유 능력 말하는 거지?’
[응. 아직 네 몸으로는 무리야. 그래도 나름대로 희소식이 있어.]‘뭔데?’
[활성 신성력이 늘어났으니까…… 나를 황성에 데리고 갈 수 있지! 나 이제 황성 결계 뚫을 수 있어!]양이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기대감에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자신을 간택하라고 몸을 비비던 길냥이가 생각나서 키득키득 웃었다.
“아냐. 가치 가자, 양이야. 우리 이제 가치 사눈 고야.”
[드디어 이 거지같은 숲 생활에서 탈출이다!]방방 뛰어다니며 기뻐하는 양이의 모습에 마음이 짠해졌다. 괜찮은 척했으면서 사실은 숲에서 지내는 게 불편했던 모양이다.
[신난다! 신난……!]신나하던 양이가 갑자기 꼬리를 홱 치며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의 뒤쪽이었다.
몸을 돌리자 언제 온 건지 에이단의 모습이 보였다.
“캭!”
양이가 하악질을 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사악한 기운이 느껴진다!!! 메이블, 피해!]나는 호들갑을 떠는 양이를 무시하고 에이단을 올려다보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안뇽, 에이당.”
어둠보다 더 짙은 머리카락, 갓 짜낸 피처럼 새빨간 눈동자.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덤덤한 그의 눈빛이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나는 녀석에게 벤치 자리를 권했지만 그는 한 걸음 물러나는 것으로 거절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오또케 아라써?”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말이지만, 알아듣지 못하지 않으리라. 내 예상처럼 에이단은 동요가 없었다.
“쥐들이 근처에 처음 얼쩡거릴 때 기운을 심어두었습니다. 그 흔적이 따라간 곳이 폐하의 침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추측했을 뿐입니다.”
“끙…….”
나름대로 들키지 않을 법한 감시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앞으로 능력을 쓸 때 주의가 필요하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구래. 그곤 알게써. 다루고 자자근 대체 모야?”(그래. 그건 알겠어. 다르고 자작은 대체 뭐야?)
“시세로입니다.”
“…….”
“…….”
서늘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에이단을 응시했다. 줄곧 나를 똑바로 보던 그는 이번만큼은 내 시선을 피했다.
‘알려주려 했다는 노력이 가상하니까, 넘어가자…….’
큼, 헛기침을 하자 에이단이 입을 열었다.
“저도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뭔데?”
“마지막으로 보냈던 쪽지 내용, 무슨 의미입니까?”
“아앗…….”
‘ㅗ’ 말인가. 차마 그 뜻을 이실직고할 수 없었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충 둘러대었다.
“어, 움……. 대충 알게따는 뜻?”
“그렇군요.”
나는 소심하게 덧붙였다.
“자주 쓰눈 표혀는 아냐. ……사시른 쓰묜 안 대.”
혹시라도 에이단이 그 모음을 남발할까 봐 심히 걱정됐다. 그런 내 모습이 수상했던 걸까. 에이단의 눈빛이 의미심장해졌다.
“욕입니까?”
“어……니?”
으악! 나는 속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저게 대체 무슨 대답이야!
그런데 에이단의 대답은 참으로 담백했다.
“알겠습니다.”
뭐가 알겠다는 걸까? 어쨌든 더 걸고넘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행인 일이었다.
서로에 대한 사소한 궁금증은 해결했다. 사실 지금부터가 가장 중요한 용건이었다.
“내가 왜 너룰 호이기사로 정핸눈지 안 궁그매?”(내가 왜 너를 호위기사로 정했는지 안 궁금해?)
내가 에이단을 곁에 두기로 결심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괴한의 무리가 황실 행렬을 습격했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 배후에는 데블린 제국이 있었다.
내 잠재신성력을 강제로 개방시킨 것은 아벨라르도 신성 왕국.
그리고 그 능력을 강제로 사용하게 만든 것은 데블린 제국.
각각 따로 음모를 꾸민 것일 수도, 혹은 짜고 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랬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건, 두 나라의 존재가 나의 평온한 삶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이었다.
“에이당. 내게눈 네가 피료해.”(에이단. 내게는 네가 필요해.)
“…….”
“난테 데부링에 대해소 알려 조.”(나한테 데블린에 대해서 알려 줘.)
“알겠습니다.”
에이단은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나는 부러 친절하게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데부링을 뿌셔 버릴 꼬야.”(데블린을 부숴 버릴 거야.)
혹시나 딴생각을 품지 않도록.
데블린을 버리고 적국에 망명을 요청한 자.
나는 이 소년이 데블린에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일찍이 눈치챘다. 그건 악감정에 가까웠다.
“가치 뿌술래?”
그래서 제안했다. 함께 데블린을 박살 내자고.
‘우리는 제법 좋은 파트너가 될 거야.’
에이단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좀처럼 감정에 미동 없던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은 것처럼 보였다.
“바라시는 대로 저를 이용하십시오.”
“조아.”
그렇게 나는 안락한 노후를 위한 중요한 패를 얻었다.
과거 적국의 개였던 아주 위험한 패를.
***
그날 밤, 나는 악몽을 꾸었다.
지난 생의 가족들이 나를 버리는 꿈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충격적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버림받는 건 더 이상 두렵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를 두렵게 만든 건 그 다음 장면이었다.
“너 같이 징그러운 건 내 딸이 아니다.”
“이 손 치워, 메이블.”
야멸차게 내 손을 떨쳐내고는 뒤돌아 버리는 아빠와 오스카.
엄청난 충격에 나는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꿈은 머지않아 일그러졌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지켜보던 아빠와 오스카였다.
‘역시 꿈이구나.’
꿈은 현실의 반영이니, 나는 그 꿈처럼 버림받을까 봐 늘 전전긍긍했던 걸까.
“메이블, 괜찮아? 나쁜 꿈을 꾼 거야?”
“이리 오거라, 메이블. 아빠가 안아주마.”
따뜻한 품에 안기자 놀랍도록 마음이 진정되었다. 아빠와 오스카는 내가 완전히 괜찮아질 때까지 곁을 지켰다.
푸르스름한 새벽이 지나 햇살이 비치는 아침이 올 때까지.
그런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딱히 대단한 황제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가능한 폐위가 된다면 그것 나름대로 좋았다.
하지만 누구든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건드린다면.
‘기꺼이 폭군이라도 되겠어.’
***
영원할 것만 같던 것도 시간만큼은 이기지 못한다.
서랍 속에 소중히 간직한 연미색의 편지도, 책 사이에 끼워 놓은 네잎클로버도, 작은 동물이 품고 있던 나무열매도, 결국에는 모두 삭아 부스러지기 마련이다.
나의 하루도 마찬가지였다.
소중할수록 빨리 닳아 사라지듯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만 갔고, 정원의 나무들은 여러 번 옷을 갈아입었다.
어느덧 삼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