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Degree RAW novel - Chapter 108
108화. 샘물
잠시 후, 종령도의 머리를 스치는 사건이 있었다. 놀랍게도 승선령(升仙令)을 들고 대전인 의사전에 서있던 젊은 이가 눈앞의 인물과 겹쳐진 것이다.
“그때 승선령을 들고 입곡한 제자가 축기에 성공했단 말인가?”
“장문 사형께서 저를 기억하고 계셨군요. 그때 황풍곡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장문 사형의 덕입니다.”
상대가 자신을 기억해 내자 한립이 당황하지 않고 감사를 표했다. 종령도는 말끝마다 사형, 사형 거리는 상대의 어투에서 그가 이미 연기기 산수(散修)가 아니라 자신과 배분이 같은 축기기 수사라는 것을 자각했다. 그는 얼른 표정을 바로 하고 온화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저 장문인으로서 문파의 규정을 따랐을 뿐이네. 그런데 한 사제가 위영근의 자질을 가지고 축기에 성공했다니 이 소식이 전해지면 수도계가 떠들썩해지겠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종령도의 마음에 의혹이 짙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한립처럼 네 가지 속성이 혼합되어있는 위영근을 지닌 자로 축기에 성공할 확률은 정말 희박했다.
“저도 축기단 한 알로 축기에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 했습니다. 정말 천지신명이 보우하신 듯 합니다.”
한립이 농담처럼 한 말이 다시 장문인을 의아하게 했다.
“한 사제, 당초 축기단을 엽 사제의 질손에게 준 것으로 아는데 어디서 축기단이 생겼단 말인가?”
“헤헤! 장문 사형께서 주시지 않았다면 어디서 났겠습니까?”
“내가 말인가?”
“벌써 잊으셨을지 모르나, 금지 원행에서 돌아온 세 명이 축기단을 상으로 수여 받았고 제가 그 중에 한 명입니다.”
결국에는 한립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진지하게 답했다.
“설마 사제가 이 사숙님의 기명제자?”
“예. 이화원 사부님께서 금지 원정에서 기명제자로 거두어주셨습니다.”
“역시 그랬구만! 어쩐지 한립이라는 이름이 너무 귀에 익다 했더니 한 사제가 바로 두 해 전 이름을 날리던 이였어!”
그는 놀람이 커지며 말투도 자연히 사근사근해졌다. 상대가 축기에 성공했으니 금방 이 사조의 정식제자가 될 터였다. 그런 자와 척을 질 이유가 없었다.
‘정말 운을 타고났구나. 저런 자질로 축기에 성공하는 것은 매우 어렵거늘.’
종령도는 속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립과 기품 있게 몇 마디를 나누고는 명부를 가지러 사라졌다.
잠시 후 그는 옥으로 만든 얇은 서적을 들고 돌아왔는데 금빛의 먹을 이용해 빽빽하게 적힌 여러 이름들 바로 밑에 한립의 이름을 추가해 주었다.
이렇게 간단히 수속을 마치자 한립은 거처를 얻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여러 해 동안 이 일을 해온 종령도가 한립의 표정에서 생각을 읽고는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바로 저물대 에서 중계 영석 세 개와 하얀 안개로 감싸진 깃발 다섯 개를 꺼내 한립에게 건넸다.
“무엇입니까?”
영석들이야 대충 축기기에 성공한 제자들을 위한 장려금 정도일 것 같았으나 손바닥만 한 깃발들이 신기했다.
보통 법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종령도는 손을 뒤집어 역시 옥으로 만든 서책을 한 부 한립에게 주었다.
“영석들은 막 축기기에 오른 제자들에게 내려지는 문파의 상으로 앞으로는 매년 중계 영석 하나를 지급받게 되네. 다른 잡무를 전혀 맡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다섯 개의 미종기(迷踪旗)는 거처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물건으로, 각각에 담겨있는 길을 잃게 만드는 진법이 기본적으로 범인이나 야수의 침입을 막아주지.
물론 사제가 진법에 정통해 이런 것이 필요 없다면 사용하지 않으면 되네. 마지막으로 서책 안에 진을 설치하는 요결과 축기기 수사가 알아야 할 주의 사항이 적혀 있으니 돌아가 찬찬히 살펴보시게.”
“감사합니다!”
두 손으로 물품들을 받아 든 한립은 얼른 인사를 전했다. 앞으로 꼭 필요한 것들을 지급받았으니 만족스러웠다.
잠시 사소한 이야기를 나눈 한립은 인사를 하고 의사전을 나섰다. 원래는 당장 황풍곡을 나서서 산맥을 돌며 거처를 만들만한 곳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법기에 올라 종령도가 준 서책을 보고는 바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법기의 방향을 돌려 다른 방향을 향해 날아올랐다.
’기린전(麒麟殿)’이란 예사롭지 않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가 향하는 곳은 황풍곡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들 중 하나였다. 바로 황풍곡 내에서 전문적으로 영수를 기르고 길들이는 곳이었다.
영수(靈獸)란 사실은 요수였다. 그저 요수를 수도자가 잡아다가 길들이면 영수라 불렀다. 기린각에 있는 영수들은 대부분이 일급 영수였다.
소수의 이 급 영수가 있긴 했으나 다른 수도자가 맡겨놓은 것들이라 마음대로 부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급의 영수들도 문파의 일들을 한결 수월하게 해주곤 했다. 대표적으로 사람을 태우거나 문을 지키며 영초를 찾고 적을 공격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한립이 이런 기린각을 찾은 것은 쌍동서(雙瞳鼠)라 불리는 요수를 위해서였다.
생긴 것은 그저 보통의 쥐였지만 태생적으로 신기가 어린 눈을 가지고 있어 종영도가 준 서책에서 적당한 거처를 찾는데 도움이 될 거라 추천한 영수였다.
본래 일급 중계 요수인 쌍동서는 두 쌍의 동공을 통해 손쉽게 안개나 하천 수풀 등 수도자의 시선을 막는 장애물들을 꿰뚫어 보았으며 천성적으로 영기가 넘치는 곳을 좋아해 구멍을 뚫어 은신처로 삼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훈련을 잘 받은 쌍동서는 황풍곡 제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립은 이전에도 일을 보러 기린각을 다녀간 적 있어 이곳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가 풀이 푸르게 자라난 언덕에 내려서자 저계 여제자 하나가 바로 다가와 예를 올렸다.
“사숙, 영수를 이용하러 오셨습니까?”
바로 용건을 묻는 열 예닐곱의 소녀의 얼굴에 기대감이 어렸다.
“남은 쌍동서가 있으면 한 마리 데려가 이틀을 쓰려한다.”
“있습니다. 당연히 있지요! 제가 바로 한 마리를 데려오겠습니다.”
여제자가 신이 나서 대답했다.
여제자가 영수를 데리러 들어간 후 한립은 응객대 앞에 서서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가 서있는 영수산(靈獸山)은 정상을 제외하면 도처가 다채로운 색깔의 금제가 걸려 있었다.
진법으로 구역을 나누어 각각이 영수들의 서식지가 되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적어도 천 마리는 넘는 각기 다른 영수가 살고 있었다.
여제자는 한립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품에 주먹만 한 짐승을 품고는 금제가 쳐진 구역들 중 하나에서 나와 이쪽으로 달려나왔다.
“이 녀석이 쌍동서로 하루에 저계 영석 한 개를 주시면 빌려 가실 수 있습니다.”
그녀는 가만히 짐승의 털을 쓰다듬더니 한립을 향해 공손히 말했다.
“그럼. 3일 동안 빌려가마.”
“예. 3일 후에 사숙께서 쌍동서를 놓아주시면 자기가 알아서 기린각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동안 이 녀석을 잘 좀 대해주세요. 토리과(土梨果)를 무척 좋아하니 시간이 날 때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소녀가 영석 세 개를 받고 영수와 하얀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영수를 안고는 소녀의 배웅을 받으며 법기에 올라섰다.
이제 서북쪽을 향해 날아갈 차례였다. 하늘을 날아오르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얌전히 품에 안긴 쌍동서에게 시선이 갔다.
이 영수는 정말 쥐와 비슷해 작은 몸에 갈색의 털들 자라나 있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 커다란 두 눈이었다.
큰 눈망울은 정말 사소한 차이였지만 쌍동서를 극히 귀여운 얼굴로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그 눈에서 은은히 오색의 빛깔이 반짝이니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립처럼 혼자 지내는 것이 익숙한 인물도 그 귀여운 모습에 한 마리 키우고 싶다는 마음이 샘솟았다.
그러나 보기에는 이렇게 온순해 보이는 쌍동서도 사실은 일급 중계의 요수였다. 커다란 눈 이외에도 강철도 씹어 먹을 이빨과 돌을 뚫고 들어가는 발톱을 갖고 있었다.
그는 품에 안긴 영수의 귀를 쓰다듬으며 낄낄거렸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장난기 어린 청년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그대로 하루를 꼬박 날아가자 결국에는 태악 산맥의 서북쪽 외곽지역에 도착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백리 정도를 더 가면 원무국 국경으로 수선문파인 천성종(天星宗)의 구역이었다.
천성종 역시 황풍곡처럼 시장을 마련해 놓아 서로가 동서로 마주보는 형상이었다. 서쪽 이백 리 방면으로는 월국과 건주를 통틀어 가장 작은 지역인 계주(溪州) 인근이었다.
이곳은 유일하게 칠대문파 중 어느 곳도 주둔하고 있지 않았는데 황토 고원과 가파른 비탈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사막지대가 계주 영토의 사분의 삼 정도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인구수도 십만 명에 불과했고 물자와 인력이 부족한 지역을 어떤 문파들도 탐내지 않았다. 한립이 굳이 여기까지 와서 거처를 정하려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이곳은 태악산맥에서도 비교적 황량한 곳으로 원무국과 계주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동문의 수도자들이 자주 지나다니지 않았다. 그의 수행에 방해를 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둘째, 이곳은 천성종의 시장과 멀지 않아 약재나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손쉽게 거래를 할 수 있었다. 황풍곡 시장처럼 누가 자신을 알아볼까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고 말이었다.
이런 이유로 한립은 그다지 영기가 충만하지 않은 곳을 찾은 것이다. 다른 축기기 제자들은 보통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영기가 가장 농후한 지역을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면에 내려서서 미리 준비한 목줄을 갈색 생쥐에게 걸었다. 너무 빨리 사라져 놓칠 염려에서 였다. 그리고 작은 주머니에서 갈색의 열매를 꺼내 먹여주었다.
눈깜짝할 새에 토리과를 먹어 치운 쌍동서는 힘이 나는지 재빨리 풀숲으로 사라졌다. 한립이야 목줄을 따라 차분히 그 뒤를 쫓으면 되었다.
한립은 지금 험준한 절벽 아래에서 백 여 장에 이르는 높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손에 든 밧줄이 정말 협소한 틈을 따라 절벽 속으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틀간 적당한 곳을 물색하던 쌍동서가 이 절벽에 이르자 돌연 흥분을 해서는 쏜살 같이 작은 틈새로 사라졌다. 이미 팽팽하게 당겨진 줄에 한립은 호기심이 커졌다. 바로 저물대를 뒤져 은색의 검을 꺼내 들었다. 한 손으로 밧줄을 꼭 쥐고는 바람처럼 은검을 휘두르자 마치 두부를 썰어내듯 돌이 베어지며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입구가 생겼다.
그는 바로 방어막을 만들어 온 몸을 감쌌다. 줄이 당기는 방향을 따라 검을 휘두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니 떨어지는 돌가루나 먼지가 물의 속성인 방어막 때문에 그에게 닿기도 전에 밀려났다.
이런 식으로 한 시진이 넘게 들어가니 벌써 수십 장에 이르는 초라한 통로가 형성되었다. 그가 다시 한 번 칼을 내리치자 돌연 ‘촤르륵’ 돌무더기들이 쏟아져 내리며 앞을 가로막던 바위가 뚫려나갔다.
기쁜 마음에 돌덩이들을 치우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안에는 십여 장은 될 법한 천연 동굴이 형성되어 있었고 농염한 영기가 진동을 하고 있어 한립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의 시선이 밧줄을 따라가자 이 암석 동굴의 중앙에 물이 퐁퐁 샘솟는 샘이 하나 있었고 뜻밖에도 쌍동서가 작은 샘 안에서 물을 즐기며 헤엄치고 있었다.
“뭐지?”
그가 자세히 살피니 이 농염한 영기의 근원이 저 샘인 것 같았다. 서둘러 다가가 손으로 샘물을 떠 관찰해 보았다.
‘이곳은 영안천(靈眼泉)이 틀림없어!’
# 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