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265
〈 265화 〉 현실과 이상(2)
* * *
작전의 시행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베르타 협곡으로 진군할 준비로 기사들이 바쁜 가운데, 라니아는 막사에서 멀찍이 떨어진 들판에 가 있었다. 드넓게 펼쳐진 들판.
들판에는 돌무더기들이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었고, 라니아는 그중 하나에 걸터앉아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그녀는 턱을 괬다.
라니아 반 트리아스.
신분을 감춘 현자는 이제 찝찝하다 못해 아예 우울하기까지 하다. 들판을 바라보는 라니아의 눈은 어딘가 공허하다.
“······.”
그렇게 침묵하고 있는 라니아의 모습을, 혹여나 본래의 그녀를 아는 이가 보게 된다면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움을 표하리라.
“여기 계셨군요.”
그런 그녀에게 말을 거는 이가 있다.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 라니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들판을 건너온 갈라할이 있다. 라니아와 눈을 마주친 갈라할이 한순간 숨을 헛삼켰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무 일 없는데.”
더 묻지 말라는 듯한 모습이다.
무언갈 말하려다 말고 갈라할이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침묵 후 그가 꺼낸 것은 다른 주제다.
“요 며칠 동안 클로에를 가르쳐 봤습니다.”
라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갈라할과는 이미 이야기가 된 내용이었다.
‘별의 성질을 개화시키는 것.’
본래 별의 무구를 받고, 무구에 충분히 익숙해지고 나서야 개화할 수 있는 게 별의 성질이지만··· 클로에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련의 전부터 별빛을 다루고, 이미 성류(??)라는 형태로 별의 무구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결과는?”
“개화하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얼추 감은 잡은듯싶더군요.”
갈라할이 말했다.
“단순하지만 효율적입니다. 데스텔이나, 저처럼 조건이 붙은 게 아닌··· 카일과 같은 종류더군요.”
데스텔은 모방.
갈라할은 집속이다.
‘조건과 무대를 타는 성질이지.’
어디에 던져놔도 압도적인 출력으로 찍어누르는 카일과 달리, 데스텔과 갈라할이 운용하는 별빛은 다소 까다로운 조건이 붙어 있었다.
“카일의 것과 닮았다고?”
좋은 소식이었다.
라니아가 질문했고, 갈라할이 제 턱을 매만지며 말끝을 흐렸다.
“예. 제가 추측한 바로는···.”
잠깐의 뜸을 들인 후 갈라할이 말했다.
“증폭입니다.”
“···증폭?”
“가진 별빛에 비해 출력이 압도적입니다. 특이체질이란 건 들었지만, 솔직히 좀 놀랍더군요.”
갈라할이 쓰게 웃었다.
“출력만으로 따지면 저를 아득히 상회합니다. 카일과 견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별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네 명의 용사가 그것을 분배받는 형태임을 알고 있는 라니아로선 놀라운 일이었다.
‘출력이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정도 일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어찌 됐든 좋은 소식이었기에 라니아가 엷은 미소를 흘렸다. 그러나, 그 미소조차 갈라할이 보기에는 어색하다. 평소와는 다른 표정이었기에.
“라니아.”
결국 갈라할은 라니아에게 질문했다.
“당신, 데스텔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들었지.”
라니아가 턱을 괸 채 답했다.
“좆도 모르는 새끼가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데···.”
말투가 사납다.
날이 선 목소리이나, 목소리에 깃든 열기는 얼마 가지 못해 사그라들고 만다.
“그게 또 틀린 말은 아니라서, 나도 차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그게 짜증이 나.”
라니아가 고개를 돌려 갈라할을 보았다.
푸르스름한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있다.
“넌 데스텔을 어떻게 생각하냐?”
“데스텔 말입니까.”
갈라할이 흠, 하고 팔짱을 꼈다.
“글쎄요. 나쁘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데스텔은 너 엄청 싫어하던데.”
“하하. 다소 사이가 불편해지긴 했죠.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런 짓을 벌였으니까요.”
모든 기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갈라할은 데스텔의 얼굴에 주먹을 갈겼다. 저항이 없는 데스텔의 멱살을 붙잡은 채 소리 질렀다.
「취소하십시오.」
「의미 없단 말, 허무하단 말, 오늘 이곳에서 죽어나간 기사들을 모욕하는 그 말. 취소하라고 말했습니다, 데스텔.」
차마 견딜 수 없던 탓이었다.
동료들의 죽음이 모욕받는 것을, 기사들의 낯빛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갈라할은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허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데스텔을 나쁘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때 그곳에서야··· 데스텔이 실언을 하긴 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갈라할이 짧게 숨을 뱉었다.
“무서워하는 것도,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을 때는 주의해야겠지만요.”
침묵을 지키던 라니아가 말했다.
“그 뒤로 데스텔은 변했잖아.”
라니아는 알고 있다.
“희생을 가볍게 여기고, 예전과 달리 높은 곳을 꿈꾸지도 않아. 현재에 안주하려 들고, 나아감을 멈췄잖아. 그럴 수 있음에도, 하지 않아.”
데스텔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다.
해야만 하는 놈인데, 하려 들지를 않는다.
빠득, 하고 라니아가 이를 갈았다.
“멈춰버렸잖아. 난, 그걸···.”
“라니아.”
갈라할이 나지막이 라니아의 이름을 불렀다.
“저는 데스텔이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란 소리죠.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건···.”
“사람에겐 각자의 방식이 있지 않겠습니까.”
각자의 방식이 있다.
갈라할의 말에 라니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가 단순히 데스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했기에.
“은퇴를 말버릇처럼 달고 살고, 희생을 가볍게 여기는 듯 말하지만 데스텔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답을 찾으려고 하지요. 그것을 알기에, 저는 데스텔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답을 찾으려 한다고?”
“그가 왜 아직 전장에 남아있겠습니까. 기사단장님께서 데스텔을 전장에 붙들어 둔 이유도, 감정적으로 대하는 것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라니아로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옳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마냥 틀렸다고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죠.”
객관적으로 봤을 때, 데스텔은 용사라 불릴만한 인물이 아니다.
때로는 희생을 강요하고, 본인은 겁쟁이처럼 숨곤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앞장서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때로는 아는 척 타인에게 설교를 늘어놓는다.
모순적인 인물이다.
모순적이지만.
“그게 인간이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인간이다.
“모두가 언제나 앞만 보고 달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멈춰 서고, 때로는 헤매고··· 때로는 좌절해 뒤로 물러설지도 모르죠.”
완벽하지 않기에.
“나약하기에, 약함을 알기에, 공포를 알기에.”
나약하고, 도망치고, 두려워하기에.
“그럼에도, 극복하고자 하기에.”
그럼에도 앞을 향하기에.
“인간인 것 아니겠습니까.”
인간이다.
그리 말하며 갈라할이 미소 지었다.
“제가 좋아하는 문장입니다. 구원의 용사, 가뉘르 님께서 남긴 문장이죠.”
멋쩍은듯 갈라할이 제 뒷목을 긁적였다.
“때로는 헤메고, 정체하겠지만··· 언젠가는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스스로가 그것을 바라는 한.”
“···이상론이네.”
“예에, 그렇긴 하죠.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고 물러서다가 아예 멈춰버리는 이들이 산더미만큼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라고 갈라할은 말했다.
“저는 믿습니다. 언젠가 그 모든 고뇌가 빛 볼 날이 있으리라고.”
그것이 갈라할이 지닌 신념이다.
현실을 마주하고도 굽히지 않은 신념.
신념을 입에 담는 갈라할의 눈동자는 빛난다. 백금색의 별빛을 머금은 눈동자는 용사의 눈이다.
“빛을 볼 날이 온다, 라.”
그 말을 곱씹던 라니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좋은 말이네.”
라니아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고민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우울하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맙다, 갈라할.”
바위에서 내려온 라니아가 말했다.
“덕분에 좀 편해졌어.”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라니아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의 눈동자가 푸르게 번들거렸다.
“······.”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라니아.”
갈라할이 입을 열었다.
“이번 작전이 끝나면 말입니다.”
라니아가 갈라할을 본다.
갈라할은 라니아에게서 다른 인물을 본다.
“라니엘과 만나볼까 합니다.”
“생각이 정리된 모양이야?”
“예,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습게도 생각이 정리가 되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갈라할이 쓰게 웃었다.
“라니엘, 그 친구도 상담이 필요한 것 같으니 말입니다.”
···상담이 필요해? 내가?
라니아가 멍하니 눈을 깜빡인 순간이다. 결국, 참다못한 웃음을 터뜨린 갈라할이 말했다.
“그런 얼굴로 있으니, 상담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뭐?”
“그럼 그런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야, 잠깐만. 방금 그게 무슨···.”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죠.”
갈라할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라니엘.”
라니아가 눈을 부릅떴다.
직후 라니아가 뭐라 말하든 말든, 갈라할은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그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라니아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뭐야.”
역시 알고 있었잖아.
그 사실을 깨달은 지금, 라니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갈라할 앞에서 뱉었던 말들을 더듬어 보는 일이었다. 혹시라도 지난번 켈르할름 때와 같은 사건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다행이 제 얼굴에 금칠한 전적은 없다.
그 사실에 내심 안도하며··· 라니아는 제 미간을 꾹꾹 눌러댔다.
“이상하다, 왜 자꾸 들키지···.”
숨긴다고 숨겼는데, 어째서?
모두가 그 답을 안다.
오직 그녀만이 모르는 답이었다.
2.
베르타 협곡 섬멸전.
수백년동안 재앙으로서 군림하던 흑룡, 벨리알이 끝끝내 인류의 손에 쓰러진 곳. 그리하여 승리의 상징과도 같은 곳으로 여겨지는 곳.
비록 전선이 후퇴한 지금에야 마왕군의 땅이 되었다지만, 한때는 인류의 희망이 싹텄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에 수많은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지시받은대로 기사들은 대열을 유지한 채 협곡을 향해 진군한다. 초원을 건너 정면으로 진군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협곡의 양옆에서 밧줄을 내던지며 강하를 준비하는 기사들도 있다.
급습, 그리고 섬멸.
이번 작전의 핵심이 되는 단어다.
작전을 위해 데스텔은 몇 달 전부터 꾸준히 미끼를 뿌려뒀다. 이제는 뿌려둔 것을 수확할 시간이다.
“개시.”
데스텔의 전음과 함께 작전은 시작된다.
한순간에 몰아닥친 마왕군을 후려치기 시작한다. 이곳에 모인 건 동부 전선에서 짬밥을 먹을 만큼 먹은 기사들이다. 용골병을 상대하는 법도, 사령술사를 상대하는 법도 질리도록 알고 있다.
수많은 기사들이 한 몸처럼 움직인다.
『대열을 유지하라!』
『침착히, 신속하되 침착해라!』
『확실히 머리를 터뜨려! 빌어먹을 사령술사들은 머리를 터뜨려야 살아나지 않는다!』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된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작전 성공의 신호에도, 데스텔은 무표정이 전황을 관찰할 뿐이다. 여기까진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다.
데스텔은 한참 전부터 이 작전을 계획했다.
정찰을 반복했고, 자신이 놓친 것은 없는지 몇 번이고 다시 계산했다. 계산 끝에 나온 답을 데스텔은 신뢰한다. 괜히 기사들을 갈아가며 전선을 무리하게 확장한 게 아니다.
‘지금뿐이다.’
그렇기에, 확실히 해야 한다.
데스텔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인다. 데스텔의 어깨에는 어느새 백금색의 외투가 둘러져있다.
성의(??), 혹은 성복.
별빛이 데스텔의 전신에 감돌고, 이윽고 시야에 모여든다. 데스텔의 동공이 확장된다.
모방하는 것은, 명궁(名?)이라 불렸던 용사 에프타. 천리밖도 꿰뚫어 본다고 알려진 에프타의 재능이 데스텔의 육신에 깃든다.
한순간에 확장된 시야는 전장을 드넓게 관망한다.
핏발이 선 눈동자로 전장을 확인하던 데스텔이 눈살을 찌푸렸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명백한 변수다. 이윽고 전음이 데스텔의 귓가에 시끄럽게 울린다.
『————, 조우!』
『———자의, ———!』
들려오는 목소리는 난잡하다.
난잡하되 소리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다. 변수가 발생했단 뜻이다. 데스텔이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도.
완벽에 가까운 작전을 세우더라도.
이곳은 마경(??)이다.
온갖 예측불허한 변수가 난무하는 곳.
그것을 알기에 데스텔은 당황하지 않는다. 변수가 발생했을 때를 대비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를 위한 작전 또한, 준비되어 있다.
“속행한다.”
데스텔이 손을 들어 올렸다.
예상외의 변수가 발생한 상황, 하나의 변수로 모든 작전이 꼬일 수도 있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데스텔이 선택하는 방법은 언제나 하나였다.
전음이 울려 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