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13
〈 313화 〉 막간(1)
* * *
밤이 깊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제 머리칼을 빗어내리던 라니엘은 문득 창밖을 바라봤다. 쭉 펼쳐진 설원, 쏟아지는 별빛. 별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설원을 흘겨보던 라니엘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드넓게 펼쳐진 밤하늘.
그러고 보면, 낮에 보았던 그림자 용의 군주의 머리칼도 딱 저런 색이었던가? 그런 실 없는 생각을 하며 라니엘은 밤하늘을 보았다.
하늘에는 별이 떠있다.
백금색의 별은 찬란히 빛난다. 언제나처럼.
별을 바라보는 라니엘의 눈동자가 푸르게 번들거렸다. 아주 어렸을 때도, 잿빛의 차기 마탑주가 되었을 때도, 카일과 함께 여행길에 올랐을 때도··· 라니엘은 종종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빛나는 별은 언제나와 같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라니엘의 시선은 처음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그 시선은 더이상 무미건조하지 않다. 관심 없는 것을 보는 눈이 아니다.
“······.”
의문, 의심, 혹은 분노.
자신도 모르는 새에 눈살을 찌푸렸던 라니엘은 제 눈꼬리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마법사란 언제나 냉철하게 사고해야 하는 존재이며, 하나의 시각에 매몰되선 안되는 법이다.
그 사실을 곱씹으며 라니엘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직 결론 내리기는 이르다.
조금 더 생각해 보고.
확실히 제 두 눈으로 지켜본 다음에야 판단해야 하리라. 아마도 오랫동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리라.
정말로, 오랫동안.
2.
케넬 설원에 나타난 죽음의 칼 가니칼트.
피난민을 덮친 저주룡.
두 재난이 북부를 덮쳤으나, 죽은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피해는 후자에서 발생했으나, 그 자리에 나타난 켈르할름과 용사가 있었기에 피해는 최소한에 그쳤다.
‘지형이 뒤바뀌고, 이젠 케넬 설원이 아니라 케넬 협곡이라 이름 지어야 하겠지만 뭐···.’
죽음의 칼이 나타났는데 이 정도 피해에 그친 게 놀라울 지경이다. 재앙을 막아낸 라니엘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그렇다. 과거, 죽음의 칼을 막아낼 때는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의 희생을 감수해야 했으니까.
그야말로 위업이라 부를만한 일이다.
그 위업을 칭송하고자 북부에선 며칠간의 연회가 열렸다. 죽은 이는 추모하고 살아남은 이는 축복한다.
“원하는 만큼 먹고 마셔라. 그대들이 곧 북부의 자랑이다.”
그렇게 영웅들을 위한 연회가 한창인 가운데, 라니엘은 턱을 괸 채 자신이 앉은 테이블을 바라봤다. 가장 화려하게 꾸며진 4인석 테이블이나, 그곳에 앉아있는 건 라니엘 혼자뿐이다.
달그락.
옆에서 들려오는 접시 소리에 라니엘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고기를 씹고 있는 엘프가 있다.
“···아니, 너도 있긴 했지.”
“뭐라 했어?”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 이거 안 먹어? 그럼 내가 먹고.”
레미아가 라니엘 앞에 놓인 접시에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을 흘겨보는 라니엘의 눈동자가 차게 식다 못해 얼어붙었다.
“너 엘프 아니냐?”
“당연하지. 보면 몰라?”
“엘프는 채식주의라고, 과일만 먹고 산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아니냐?”
“엘프 차별적인 발언이네. 요즘은 엘프도 고기 먹어. 도대체 누가 그래?”
“너, 너 이 시팔련아. 너가 그랬어.”
마경에서 기껏 고기를 얻어다가 구워주니, 자신을 향해 식판을 던지며 레미아가 했던 말이었다. 엘프는 육식을 금하는데 고기를 왜 주냐면서.
“내가? 언제?”
뻔뻔한 레미아의 태도에 라니엘의 어금니가 뿌득 소리를 냈다. 라니엘은 접시를 집어 던지고 싶은 걸 꾹 참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해봤자 나만 화날 뿐이지.’
대화는 인간이랑 하는 거다.
저 글러 먹은 귀쟁이가 아니라. 인간이랑. 그렇게 분노를 다스린 라니엘은 고개를 돌려 제 앞을 보았다. 그곳에는 비어버린 두 자리가 있다.
성녀, 사라.
용사, 카일 토벤.
두 사람이 앉을 자리는 비어있다.
고룡의 마법사를 따라간 그들은 열흘 남짓이 지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한 장의 편지만이 도착했을 뿐이었다.
「오래 걸릴 것 같다.」
「기다리지 마라.」
「때가 되면 알아서 돌아 올 테니.」
카일의 친필로 쓰인 편지였다.
결국 연회는 주인공을 빼놓은 채 진행됐고, 카일은 연회가 끝나는 그날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 * *
“아, 라니아 교수님.”
나는 술잔을 기울이 다 말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라크가 서 있었다. 아직 몸이 다 낫지는 않은지 절뚝거리며 라크가 내게 다가왔다.
“연회는 잘 즐기고 계십니까?”
내가 술잔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술은 맛있네. 같이 마실 놈이 없어서 좀 아깝긴 하지만 말야.”
내가 빈자리를 눈짓했다.
레미아는 이곳에는 먹을 게 잘 안 온다며, 연회의 중심 쪽 테이블로 옮겨갔다. 그 덕에 4인용 테이블에는 나 혼자 앉아있는 참이었다.
“너도 앉아.”
“에, 그럼···.”
라크가 빈자리에 앉았다.
나는 남은 술을 홀짝이고선 입을 열었다.
“몸은 좀 괜찮고?”
“괜찮습니다. 오히려 다들 놀랍니다. 이렇게까지 빨리 부상이 회복될 줄은 몰랐다고.”
“그야 그렇겠지.”
내가 피식 웃었다.
“너도 이제 반쯤은 용사니까.”
“···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너 성지의 중심에서 검 뽑았잖아?”
라크가 성지의 중심에서 뽑아낸 검(?).
그것은 초대 용사 가니칼트가 쓰던 검이자, 최초의 성검이다. 대량의 별빛이 깃든 그것을 라크는 쥐었고, 성검은 라크를 제 주인으로 인정했다.
“성검 쓰면 그게 용사지 또 뭐야?”
“그런 겁니까?”
“그런 거지.”
문득 북부의 탑에서 보았던 문구가 떠올랐다.
“누군가 승리의 상징이 된다면, 누가 그를 보고 위안을 얻는다면, 그가 걷는 길이 올바르다면··· 그 자가 곧 용사다.”
내가 라크의 어깨를 두들기며 씨익 웃었다.
“네가 얻게 된 그 검의 원래 주인이 한 말이야. 그 말에 따르면, 너도 용사가 된 거지.”
이번 싸움에서 라크의 역할은 컸다.
라크가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로 수명을 다시 한번 천칭에 올려야 했을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됐다면.
아마도, 그곳이 내 마지막 무대가 됐을 확률이 높았다. 나는 정말 죽음을 각오했었으니까.
“고맙다. 라크.”
“예?”
“이번 싸움에선 네 역할이 컸다. 내 눈에는 너도 용사였어. 덕분에 살았다.”
나는 라크에게 술잔을 건넸다.
“한잔할래?”
“아니, 저는 아직···.”
“어허. 어른이 주면 그냥 받는 거야.”
그렇게 술잔에 술을 넘치도록 채우고 있자니, 누군가 테이블에 다가왔다. 술 먹이는 걸 제지하러 온 전사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에 있는 건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는 전사들이 아니었다.
벨노아와 클로에.
이번 연회에서 가장 많은 시선을 끈 두 사람이, 나를 바라보며 쓰게 웃고 있었다.
“혼자 앉아 계시길래 와 봤어요.”
“저희는 그런 독한 술 못 마십니다, 교수님. 페일리아 부인께서 여기 따로 준비해 주셨더라고요.”
벨노아와 클로에가 자리에 앉았다.
벨노아는 손에 든 샴페인을 잔에 채워 클로에와 라크, 그리고 내 앞에 한 잔씩 내려뒀다.
“저희는 이걸로 한잔하겠습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고 챙, 소리를 내며 네 개의 잔이 맞부딪쳤다. 술을 마시는 건 처음인지 일단 입에 털어놓고 보는 라크와, 깨작깨작 마시는 클로에, 허세를 부리며 홀짝이는 벨노아를 보며 나는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아하.”
애들이긴 하구나.
‘그리고.’
잘 성장해 가고 있구나.
그 잠깐 사이에 순식간에 성장해버린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꼭 늙은이가 된 기분마저 든다. 나는 쓰게 웃으며 잔을 기울였다.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3.
연회가 끝난 후 나는 곧장 왕도로 복귀할 준비를 했다. 북부에서의 일정은 끝났다. 애초에 학기 중에 일어난 일이었고, 북부에서의 일에 대해 자세히 들려주어야 할 사람이 제법 있었으니까.
그렇게 떠나기 전에 나는 백색 마탑을 잠시 들렸다. 마탑이 내게 지원해준 물건이 많았으니까.
“아, 왔어요?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마탑에 도착하자 나를 반긴 것은 해맑게 웃고 있는 백색 마탑주였다. 그 웃음이 이제는 부담스러울 지경이라, 나는 무심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뭡니까?”
“뭐긴요.”
“아니, 왜 마중까지 나와 있어요? 마탑주나 되시는 분이.”
“귀인을 모시는데 당연히 마중 나와야죠?”
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백색 마탑주는 한걸음 내게 다가왔다. 그걸 몇 번 반복하다가, 내가 손을 뻗어 백색 마탑주를 제지했다.
“그, 대금 지불하러 온거거든요?”
“대금? 아, 필요 없어요. 그런거.”
“···예?”
백색 마탑주가 환히 웃었다.
“죽음의 칼을 못 막았으면 백색 마탑이 통째로 날아가는 거고, 애초에 그거 한번 본 걸로도 만족하는걸요?”
그거라니?
내가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백색 마탑주가 양팔을 쫙 펼친 채 반짝거리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세계수와도 같은 거대한 나무!”
그녀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하늘 높게 뻗어 나간 빛의 기둥. 한눈에 담기도 어려울 만큼 거대한 회로···! 수천, 수만 개의 주문이 동시에 뿜어내는 섬광···!”
백색 마탑주가 성큼성큼 내게 다가와, 내 손을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
“그걸 본 걸로도 전 만족해요.”
“어, 어어···.”
“뭐, 백색 마탑으로 끌어들여? 내가 오만했죠. 무슨 소리야 그게? 스승으로 모셔야지.”
그녀가 마탑 안쪽을 가리켰다.
“대금은 됐고, 우리 잠깐만 이야기할까요?”
“아니, 됐···.”
“그러지 말고. 잠깐만···.”
“아니, 일단 이거 놓고···!”
“쿠키! 커피! 맛있는 걸 잔뜩 차려놨으니까 조금만 시간을···!”
몹시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손길을 때고 도망치려 하니 백색 마탑주는 기어코 내 옷깃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것도, 마탑의 마법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제발! 조금만!”
급기야 눈밭에 엎어져 애원하기까지 한다.
차마 그 울먹이는 목소리마저 외면하긴 어려웠다.
* * *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풀려난 라니엘은, 퀭한 눈동자로 마차에 올랐다. 정신적인 피곤함을 느끼며 마차의 등받이에 라니엘은 몸을 기댔다.
“어으···.”
피곤하다.
몹시도 피곤하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라니엘이 눈을 감았다.
북부에 올 때는 사라와 함께였지만, 왕도로 돌아갈 때는 혼자이리라. 사라와 카일에게선 아직도 별다른 연락이 없었으니까.
왕도로 돌아가면 할 일이 많으리라.
우선 라크와 벨노아가 시련을 치르도록 준비해야 할 것이고, 클로에가 물려받은 갈라할의 능력인 ‘집속’에 대해서도 연구해봐야 하리라.
‘그리고 또···.’
그렇게 눈을 감은 채 라니엘이 해야 할 일을 떠올리고 있을 무렵이다. 끼이익, 하고 문이 열렸다. 문을 연 것은 마부였다.
“어? 아가씨 언제 왔소?”
“···예?”
마부가 라니엘에게 물었다.
“아까 저쪽으로 뛰어가시지 않았소?”
“···제가요?”
라니엘이 눈을 깜빡였다.
마부가 가리킨 방향은 라니엘이 온 곳과 반대되는 방향이었다. 라니엘은 자신이 온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 이쪽에서 왔는데요?”
“어라? 이상하다···.”
마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번 눈을 깜빡인 마부가 아, 하고 탄식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아, 다시 보니 아가씨하고 차림새가 좀 다르구만. 아가씨가 좀 더 어려 보이기도 하고.”
마부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라니엘은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본 것은 마부가 가리켰던 방향이다.
찍힌 발자국은 없었다.
“아가씨, 닮은 자매분이라도 있으쇼?”
“없습니다.”
“그래? 이상하군···.”
“잘못 보신 모양이네요.”
중얼거리는 마부를 뒤로하고, 라니엘은 마부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그곳은 쿠락트 산맥이다.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