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18
〈 318화 〉 잿빛 마탑(1)
* * *
성배가 박살 났다.
박살난 성배는 라크와 벨노아에게 스며들었고, 라니아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진 못했다. 하지만 라크와 벨노아는 안다.
‘길을 보았다.’
성배는 라크와 벨노아를 초인으로 만들어주지 않았다. 그저, 그들에게 길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까마득한 과거의 영웅이 걸었던 길.
그리고 그들이 마주한 결말.
성배에 재현된 영웅들은 자신이 걸어왔던 길의 너머를 가리켰고, 그곳이 너희가 걸어야 할 길이라고 말했다. 너의 길을 걸으라 조언했다.
‘나의 길.’
벨노아와 라크는 경지를 체감했다.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확인했다. 그 길의 끝에, 도달해야 할 경지를 보았다. 체감하고, 확인했으며 보았으니 남은 건 움직이는 일뿐이다.
눈을 감고 내면의 벽을 바라보면.
그것은 옛날처럼 그리 거대하지도, 결코 넘을 수 없을 것처럼 완벽하지도 않다. 넘을 수 있고 부술 수 있는 벽이 그 앞에 있다. 저 너머로 가게 될 날이 머지않았음을 둘은 직감한다.
“······.”
라니아는 말없이 두 사람을 흘겨본다.
그리곤 방금까지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던 성배를 떠올렸다. 빛으로 화(化)한 성배. 성배는 부러졌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라크와 벨노아에게 깃들어 있다.
그것이 저 두 사람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나, 부정적인 방향은 아니리라. 라니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대단한 놈들.’
제자의 성장이 라니아는 기껍다.
“수고했다, 둘 다.”
라니아가 벨노아와 라크의 목에 팔을 둘렀다.
허리를 살짝 숙인 채 라니아가 엷은 웃음을 머금은 채 두 사람에게 속삭였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 그치?”
라크와 벨노아가 짧게 몸을 떨었다.
라니아는 즐겁다는 듯 소리 내 웃으며, 두 사람을 끌고 숲 밖으로 나섰다.
‘이제 막 길의 초입에 섰을 뿐이지만···.’
머지않아 이들은 제 곁에 서게 될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길을, 자신보다 뒤에서 걷고 있는 제자들이 언젠가 자신의 곁에 설 미래를 라니아는 고대한다. 그날이 오기를 바란다.
라니아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빨리 와, 이놈들아.”
기다리고 있겠다.
너희보다 조금 더 앞에서.
2.
로얄 가드, 혹은 하운드.
왕가의 사냥개라 불리는 특수 부대인 하운드는 예로부터 수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주인은 왕가의 일원이요, 하운드간의 수준 차이가 그리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장이 없는 집단.
왕가가 아닌 그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집단.
하운드는 오랜 시간 그 전통을 지켜왔으나, 그 전통은 최근 한 인물의 등장으로 깨지게 된다.
“드디어 찾았네.”
가더(Guarder).
“반대쪽 입구는 틀어막았지?”
“예, 막아놨습니다.”
“그럼 됐다. 많이 갈 필요도 없어. 시체 치울 한 놈만 따라와라.”
1년간 세 번의 재앙을 막아선 인간.
젊은 나이에 초인의 경지에 오른 검사.
하운드의 전통을 깨고 수장 자리에 오른 칼트는 짧게 숨을 내뱉었다.
“빨리 치워버리고 오늘은 일찍 퇴근하게.”
오랜 야근으로 인해 피로가 누적된 칼트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칼트는 눈앞의 철문을 보았다. 이 철문 너머에 자신을 야근하게 한 범인들이 잔뜩 모여있으리라.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세상의 종말을 부르짖는 미치광이들.
마기에 손을 댄 흑마법사와 금기를 범한 주술사들이 만들어낸 단체. 추적자인 자신을 따돌리는 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단체이기에, 본거지를 찾을 때까지 칼트는 야근에 시달려야 했다.
‘기나긴 고난과 핍박의 시간.’
겪어야만 했던 모멸의 야근.
이제는 정시 퇴근으로 돌아갈 차례다.
스릉.
칼을 뽑으려다 말고 칼트가 잠시 멈칫했다.
칼로 베었다간 너무 쉽게 죽이고 만다. 정보를 캐내기 위해 몇은 살려둘 필요가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쉽게 죽여줄 생각은 없었다.
쿵.
칼트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지하수로를 따라 흐르던 물길이 크게 출렁인다. 두꺼운 철문이 삐걱댄다. 울림 속에서 칼트가 발로 철문을 걷어찼다.
콰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철문이 뜯어져 나갔다.
한참을 날아간 철문이 안에서 농성을 준비하던 주술사 몇을 뭉개버리고서야 멈춰 섰다.
“허, 허어어억!”
숨을 헛삼키는 주술사들.
온갖 실험의 흔적.
그것을 한눈에 살펴본 칼트가 뿌득, 소리를 내며 제 주먹을 가볍게 털었다. 수면 부족으로 인해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요사스레 빛났다.
“찾았다, 바퀴벌레 새끼들.”
쾅!
칼트의 신형이 쏘아졌다.
그 경로 상에 주술사 여섯 정도가 서 있었는데, 그들의 목이 한 바퀴 돌아가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일 초가 채 되지 않았다.
우득, 콰직. 쾅!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한 채 그들의 몸이 고꾸라진다. 무언갈 깨부수고 으스러트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길 한참, 정적이 찾아왔을 때는 피떡이 된 주술사들이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딱, 따닥 소리를 내며 이를 맞부딪치는 흑마법사들 또한 이미 전의를 상실한 지 오래다. 회로를 그리지 못하도록 그 손가락을 짓밟은 채, 칼트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정리하고 돌아가자.”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리 중얼거리는 칼트의 모습에, 하운드는 조용히 마른침을 삼킬 뿐이다.
가더(Guarder), 하운드의 수장.
칼트가 그 직책을 맡게 된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저런 광경을 보고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 * *
“너 평소랑 좀 달라 보인다?”
라니엘이 칼트를 가리키며 물었다.
핏발이 선 퀭한 눈동자로, 고개를 꾸벅이며 졸던 칼트의 모습이 익숙해진 라니엘이다. 그런 라니엘에게 지금 제 앞에 앉아있는 칼트의 모습은 썩 낯설었다.
윤기가 좔좔 흐르는 피부.
퀭하긴커녕 광채마저 나는 눈동자.
“그래 보입니까?”
심지어 그 목소리마저 생기가 넘친다.
이미 죽은 좀비마냥 갈라지던 목소리가 아니다. 라니엘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칼트가 홍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어제 간만에 푹 잤습니다. 제가 몇 시간이나 잔줄 아십니까 선배님? 들으시면 놀랄 겁니다.”
“몇시간 잤는데?”
“무려 여섯 시간을 잤습니다.”
···여섯시간?
“사람이 평균적으로 여섯 시간은 잠을 자 줘야 한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섯시간 꽉꽉 채워서 잤는데, 세상에 몸이 개운한 거 있잖습니까?”
여섯 시간.
적은 수면 시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많다고 하기에도 미묘한 수면 시간이다.
“어 그러냐···?”
“히야, 이렇게 오래 자본 게 얼마 만인지. 눈을 뜨고 바라보는 아침 해가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지 뭡니까?”
평소에 어떤 삶을 살고있는거냐, 너.
왠지모를 죄책감을 느낀 라니엘은 자신이 먹으려고 사왔던 빵을 슬쩍 칼트쪽으로 밀었다.
“···너 먹어라.”
“예? 뭔 일입니까. 선배님이 제게 이런 것도 다 주시고. 원래 옆에서 혼자 다 까드시지 않았습니까? 먹어보라고 권하지도 않고.”
“그냥 너 먹어. 많이 먹어.”
“뭐 주신다면야···.”
칼트가 빵을 씹으며 홍차를 홀짝였다.
그 표정이 어찌나 편안해 보이는지, 라니엘은 속으로 앞으로는 일을 좀 덜 시켜야겠단 생각을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선배님.”
“어. 뭔데?”
칼트가 보고서를 꺼냈다.
“제가 이번에 조직 하나를 치우면서 찾은 연구물인데요, 이게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칼트가 어젯밤 깨부쉈던 바퀴벌레들의 소굴에서 발견해낸 연구물이다.
“흑마법사와 주술사들이 합작한 거 같긴 한데, 그놈들이 종말론자였단 말입니다? 뭐 불 꺼진 시대가 온다니 뭐라니···.”
그리 중얼거리는 칼트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라니엘은 칼트가 건넨 보고서를 보았다. 쓱쓱 기록을 훑어보던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거···.”
“뭐 아시는 거 있습니까?”
“진짜 별거 아닌데?”
라니엘이 툭툭 보고서를 건드렸다.
“흑마법사들이 하는 거 있잖냐. 제물 바쳐서 자기 마나를 늘리는 거. 그냥 그거나 하려던 거 같은데?”
“···그렇습니까?”
“왜, 뭐 걸리는 거 있냐?”
“그게 말입니다, 선배님.”
칼트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놈들 본거지 찾는 게 좀 많이 어려웠습니다. 제 능력을 알고 있는 것 같은건 둘째치고, 있을 만한 곳을 다 뒤졌는데 없더군요.”
그랬는데 말입니다.
“본거지 위치를 찾고 나니까, 못 찾는게 그럴 만도 하더군요. 설마 그런 곳에 자리 잡았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으니 말입니다.”
“어디였는데?”
칼트가 답했다.
“잿빛 마탑의 지하에 흐르는 수로였습니다.”
3.
차기 마탑주, 레스티.
잿빛 마탑의 권력을 휘어잡고, 원로 여럿을 쫓아낸 그녀는 이젠 마탑주나 다름없다. 단순히 그녀가 권력을 휘두를 뿐이라면 잡음이 나왔을 테지만, 그녀가 휘두르는 권력에는 마땅한 실적이 따랐다.
지난 1년간 레스티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
잿빛 마법사가 사라진 아래, 꾸준히 하락세를 걷던 잿빛 마탑은 올해 처음으로 상승세를 그렸다. 다시 한 번 잿빛 마탑은 위를 노리고 비상한다. 이 흐름의 중심에는 레스티 엘레노아가 있었다.
때로는 과감하게 쳐내고.
모두가 실패하리라 예상한 부서에 투자해, 상상치 못한 이익을 끌어낸다.
그녀의 눈은 언제나 본질을 꿰뚫었기에, 그녀의 앞에서 겉만 번지르르한 결과물 따윈 무의미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결국 마탑의 마법사들은 레스티의 자질을 인정하고 만다.
잿빛 마법사에 버금가는 인재다.
잿빛 마탑이 다시금 날아오른다면, 그 중심에는 반드시 레스티 엘레노아가 있을 것이다. 그런 평가 속에서 레스티는 마탑의 관리를 이어가고 있다.
“······.”
집무실에서 서류를 확인하다 말고, 레스티는 문득 창밖을 바라봤다. 잿빛 마탑의 최상층에 위치한 집무실에서는 수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 집무실에서 그녀는 문득 과거를 떠올린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의 일. 자신을 거두어준 마탑의 장로(??)와 함께했던 시절의 기억이다.
「언젠가, 네가 이 자리에 오르는 날이 기대되는구나. 레스티.」
크렌벨 엘레노아.
잿빛 마탑의 중심이 되는 장로이자, 마탑주와 같은 위치에 앉아있던 인물.
「모두의 인정을 받은 네가 당당히 이 자리에 앉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달리 뭐가 필요하겠느냐? 그게 나의 꿈이다.」
또한 레스티의 재능을 인정해주고, 그녀의 양아버지가 되어준 은인. 자신의 은사를 떠올리며 레스티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빨리 일어나주심 좋을 텐데.”
정체불명의 병에 걸려 오랜 세월 앓아누운 크렌벨 엘레노아는 여전히 의식불명의 상태다. 하지만, 그 상태도 천천히 호전되고 있으니 머지않아 눈을 뜰 수 있으리라. 레스티는 그리 믿었다.
레스티는 눈을 감은 채 미래를 그려본다.
‘그분이 일어나신다면.’
병상에서 일어나서 지금의 자신을 봐준다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씀하지 않을까.
훌륭하구나, 레스티.
네가 자랑스럽다.
그리 말씀해주신다면 참 좋을 텐데.
그렇게 레스티가 미소를 흘리는 가운데, 누군가 집무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노크조차 하지 않는 무례함에 레스티가 한마디 하려는 순간이다.
“마, 마탑주 님!”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가 소리쳤다.
“장로님이, 크렌벨 장로님께서 눈을 뜨셨습니다!”
레스티가 숨을 헛삼켰다.
* * *
“있잖아, 칼트.”
“뭡니까 선배님. 목소리가 왜 그럽니까? 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십니까?”
칼트가 식겁하며 제 몸을 뒤로 뺐다.
“선배님이 그런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를 때면, 제게 아주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뭔 개소리야?”
“개소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디 제 믿음을 배신하지 말아 주시길 간곡히···.”
“됐고.”
라니아가 탁, 하고 테이블을 쳤다.
생긋, 미소 지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나 부탁 하나만 하자.”
칼트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