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17
〈 317화 〉 후배, 그리고 후예(3)
* * *
그림자 용의 주술사, 벨리알.
그에겐 가족이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어린 아들. 그 둘은 벨리알에게 있어 모든 것이었으며, 벨리알이 살아가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이름 있는 주술사였던 벨리알은 자질구레한 전장과 토벌전에 불려 나갔다. 벨리알은 그리 집을 나설 때마다 자신을 걱정하는 어린 아들의 어깨를 두들기며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죽지 않는다.
다 쓸어버리고 돌아올 테니, 걱정 마라.
허세는 아니었다.
벨리알은 뛰어난 주술사였고, 그가 발을 들인 전장은 빠른 속도로 정리됐다. 가족이 있는 병사들을 빨리 집에 돌려보내고자, 벨리알은 매 전장마다 최선을 다했고··· 그런 벨리알의 명성은 드높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유난히도 싸움이 빨리 끝난 어느날, 벨리알은 수도에서 터져 나오는 검은 파도를 보았다. 검성이라 불리는 기사단장이 파도를 베어냈음에도, 파도는 기어코 넘쳐흘러 인세를 뒤덮었다.
수많은 이가 파도에 휩쓸렸다.
수많은 이가 죽었다.
벨리알의 가족 또한 재해를 피해 갈 순 없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벨리알이 본 것은 구정물로 변해버린 아들과 아내였다. 그들은 죽었지만 벨리알은 죽지 못했다. 어린 아들과 약속한 대로 벨리알은 살아남았다. 벨리알은 약속을 지켰지만, 그의 가족은 그러지 못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
벨리알은 상실의 고통을 느꼈다.
고통 속에서 벨리알은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 그에게 용사가 찾아왔고, 벨리알은 고통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더는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어진 벨리알은 새로운 약속을 맺었다.
“아이가 웃을 수 있도록.”
즐겁게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나처럼 고통받는 이가 없도록, 가족 잃은 이가 없도록···.”
재해에 가족 잃은 이가 없는 세상을.
“나는, 그런 세상을 위해 싸우겠다.”
그것이 벨리알의 신념이다.
그런 신념으로 한평생을 살았다. 제 영혼마저 모조리 바치며 벨리알은 신념을 지켰다. 그리 맞이한 최후가 썩 좋지 않았음을 벨리알은 짐작할 뿐이다.
그렇게 수많은 시간이 흘렀다.
흐르고 흐른 끝에, 벨리알은 눈앞을 본다.
그곳에는 미래에서 온 소년이 있다.
자신에겐 머나먼 미래일 테지만, 저 소년에게 있어 자신은 머나먼 과거의 인물이리라. 고대를 살았던 주술사는 현재를 사는 어린 주술사를 본다.
카가가가가각!
소년이 팔을 휘두를 때마다 바람이 몰아친다.
몰아치는 바람의 결은 아직은 약하다. 용의 날갯짓이라고 부르기엔 미숙한 바람이리라. 허나, 미숙함 속에서 벨리알은 익숙함을 느낀다. 젊었을 적 자신이 다루던 바람도 저것과 같았으니.
미래에서 온 소년에게, 자신의 길이 느껴진다.
“과연.”
그 사실에 벨리알은 웃음을 흘린다.
‘이어졌군.’
결국 이어졌다.
수많은 시간이흐르고 흘러서, 자신의 이름은 잊히고 역사에서 지워졌더라도··· 자신이 남겼던 길은 결국 이어졌다. 남겨둔 길을 걷는 소년이 있다.
이 기적과 같은 일에 벨리알은 감사할 뿐이다.
감사해하며 벨리알은 입을 열었다.
“소년.”
그가 짧게 팔을 휘둘렀다.
몰아치던 바람이 한순간에 걷혔다. 전력을 다해 벨리알에게 달려들던 벨노아가 우뚝 멈춰선 가운데, 벨리알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법 성장했군. 아직 갈 길이 멀고, 내 모든 걸 전수해주고 싶긴 하지만···.”
벨리알이 하늘을 가리켰다.
“시간이 그리 넉넉하진 않겠군.”
하늘은 쪼개지고 있었다.
지난번의 쪼개짐과는 다르다. 환상을 만들어낸 성배 자체가 부서지려 한다. 벨리알도, 벨노아도 이것이 마지막임을 직감했다.
“그럼···.”
“아쉽지만, 이게 마지막 가르침이 되겠지.”
벨리알이 쓰게 웃었다.
“잠시 걸을까, 소년.”
* * *
최초의 용사,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
검(?)으로 살았던 그에게 가족이라 부를만한 존재는 없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가니칼트는 검을 쥐었다. 검과 함께 살았다. 그에게 검은 친우이자 가족이었으며, 자기 자신과 같았다.
검으로 살아온 삶은 고독하다.
직위에 오르고 수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았지만, 가니칼트는 여전히 고독함을 느낄 뿐이다. 그가 걷는 길에는 그 혼자뿐이다. 그 누구도 가니칼트를 따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검의 성지에서 가니칼트는 동경의 대상일 뿐이었으며, 기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가니칼트는 검사들에게 있어 우상이지, 따라잡아야 할 존재로 여겨지진 않았다.
그렇기에 고독했다.
홀로서 외로운 길을 걸었다.
그렇게 길을 걷던 도중, 가니칼트는 한 소년을 마주했다. 과거 자신이 구해냈던 소년이다. 그 소년은 가니칼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제자로 받아줘.
당신한테 검을 배우고 싶어.
소년은 그리 말했다. 검이 어울리지 않다는 말에도 한사코 거부하며 검을 휘둘렀다. 휘두르고 휘두르며 가니칼트가 왕도에 머무를 때마다 쉬지 않고 찾아왔다. 그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게, 나의 검이야.」
「어깨너머로 본 당신의 검을 흉내 낸 나의 검.」
가니칼트는 뒤를 돌아봤다.
혼자뿐이라 생각한 길의 시작점에 누군가 서 있다. 소년이 길의 초입에 서 있었다. 소년과 자신 사이에 놓인 간극은 너무나도 거대해, 가니칼트에겐 소년이 작은 점으로 보일 뿐이지만···.
「언젠가, 당신에게 닿을 검.」
그래도, 확실한 무게를 가지고 그곳에 존재했다.
가니칼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평생 고독하리라 생각한 길에 나타난 소년을 가니칼트는 제자로 들였다. 소년에게 있어 가니칼트는 스승이자 아버지였으며, 같은 길을 걷는 선배였다.
‘닮았군.’
머나먼 미래가 흐른 지금 가니칼트는 제 앞에 선 소년을 바라본다. 소년은 제 선조와 꼭 닮아있다. 그 외모도, 무기를 휘두르는 방식도.
“···그런가.”
가니칼트가 라크의 도끼를 쳐냈다.
쳐내며, 그는 엷은 웃음을 흘린다.
‘아직도, 따라오려고 하고 있군.’
가니칼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작은 점으로만 보였던 소년은 어느새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다. 수많은 시간을 걸쳐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 다음으로, 다시 다음으로 이어가면서.
기어코 자신에게 닿기 위해서.
놀라우리만치 무식한 방식이나, 그 무식함과 우직함이야말로 가니칼트가 고집하던 방식이다.
‘그리고···.’
가니칼트는 라크가 휘두르는 도끼를 보았다.
‘이어졌군.’
무기는 다르다. 그 자세도 조금은 다르다.
그러나, 그것에 깃든 것은 자신의 검(?)이다.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스승으로서 자신이 보여줘야 할 것 또한 하나뿐이다.
“라크 반 그레이스.”
가니칼트가 라크에게 등을 돌렸다.
“검을 들고 따라와라.”
금이 간 하늘에 시선을 두지 않은 채, 가니칼트는 앞을 향해 걸었다. 그 뒤를 따라 라크가 걸음을 옮겼다. 라크의 손에는 어느새 검이 쥐어져 있었다.
2.
한참동안 사막을 걸었다.
끝없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던 사막에도 끝은 있다. 그것은 한 명의 주술사가 걸었던 길의 끝이다. 끊어진 길은 단애절벽과도 같다.
턱.
그 끝에 벨리알은 멈춰 섰다.
절벽의 아래로 모래가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세상의 끝이다. 이 너머로는 나아갈 수 없으며, 이것이 벨리알이란 인간이 맞이한 최후다.
벼랑에는 어둠이 꿈틀대고 있다.
그 어둠을 흘겨보며 벨리알이 고개를 돌렸다.
“여기는···?”
“내 최후겠지.”
벨리알이 담담히 말했다.
“나의 신께 내 최후에 대해선 들었을 테지?”
“···들었습니다.”
모든걸 바쳐 용이 되었다.
이 땅에 발을 디딘 그릇된 신을 떨어트리고자, 벨리알은 자신이 걸 수 있는 모든 것을 걸었다.
“당신께서 흑룡이 되셨단 사실까지도요.”
“많이도 들었군. 그래, 내 최후는 이성 잃은 짐승이 되었을 테지. 네가 내 앞에 있다는 건, 결국 내가 실패했다는 소리고.”
벨리알이 쓰게 웃었다.
“내가 재앙이라 불리게 됐다고 했나.”
“예.”
“많은 사람을 죽였을 테고.”
“······.”
“나는 지금 어떻게 됐지? 여전히 재앙으로서 악명을 떨치고 있나?”
“아뇨.”
벨노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흑룡은 토벌됐습니다.”
“···뭐?”
“저를 가르쳐주고 계신 스승님께서 흑룡을 토벌했습니다.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벨리알이 눈을 크게 떴다.
“토벌, 토벌이라.”
이윽고 벨리알은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이라는 듯이, 한숨 돌렸다는 듯이.
“정말 고마운 일이군. 정말로, 정말···.”
그리 중얼거린 벨리알이 벨노아에게 물었다.
“네 스승의 이름은 무엇이지?”
“라니엘 반 트리아스. 잿빛 마법사라고 불리시는 분입니다.”
“잿빛 마법사라, 과연.”
카르디 그놈도 해낸 모양이로군.
그리 중얼거린 벨리알이 크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양팔을 쭉 앞으로 뻗어 가볍게 팔을 풀었다.
“소년.”
벨리알이 벨노아를 돌아봤다.
“여기가 내가 맞이한 길의 끝이다. 이 길의 끝에서, 나는 네게 보여주고자 한다.”
이것이 마지막이 되리라.
마지막에 보여줘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뿐이리라. 길의 끝에 선 벨리알은 웃었다.
“잘 봐둬라.”
이것에 네가 언젠가 닿아야 할 경지이자.
“이게 네게 보여줄 수 있는 내 전부이니.”
내가 도달한 마지막이다.
탁.
벨리알이 절벽의 너머로 뛰어내렸다.
벨노아가 말릴 틈도 없이 그가 어둠 속으로 추락한다. 황급히 절벽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벨리알은 끝없이 펼쳐진 심연 속으로 사라진 뒤다.
도대체 무엇을 보라는 건가.
그렇게 벨노아가 눈을 깜빡이는 순간, 어둠 속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읏!”
직후 거센 바람이 불어온다.
아래에서 위로 메마른 바람이 불어왔다. 절벽 아래로 떨어졌던 모래들이 하늘로 솟구친다. 솟구치는 모래 사이로 거대한 무언가 다가온다.
쿠구구구구구궁!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무언가 솟구쳤다. 햇볕이 내리쬐던 사막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드리운 그림자는 거대하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모조리 뒤덮을 것처럼 거대한 그림자.
그림자의 주인이 하늘을 날고 있다.
벨노아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
그곳에는 한 마리의 용이 있다.
푸른 하늘과 대비되는 검은 비늘이 번들거린다. 거대한 날개가 움직일 때마다 모래가 쓸려나간다. 벨노아는 넋을 놓은 채 창공의 지배자를 본다.
땅에 그림자를 드리운 용.
가장 완벽한 생명체.
흑룡, 벨리알.
벨노아를 내려다보던 고룡이 서서히 몸을 움직인다. 거대한 체구가 움직일 때마다 바람이 미친 듯이 몰아친다. 밀려드는 바람에 눈을 뜨기조차 힘들 지경이다.
[눈을 떠라.]들려오는 목소리에 벨노아가 눈을 떴다.
어느새 제 옆에는 그림자 용의 군주가 서 있다.
시련에 들어온 이후 줄곧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녀가, 지금에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저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고한 그림자 용의 모습이니.]용이 포효를 터뜨렸다.
고막이 찢어질 거 같은 굉음 속에서, 벨노아는 눈을 부릅뜨고 하늘을 보았다. 머나먼 과거에 살았던 영웅이 최후에 이른 경지를 목도한다.
용의 입에 화염이 넘실거린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을 향해 흑룡은 불을 내뿜는다. 섬광과 함께 열기가 짓쳐든다. 용이 뿜어낸 화염은 불길이 된다. 불로 만들어진 길이 어둠을 불사 지른다. 마치, 세상의 끝을 알리는듯한 모습이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의 너머로 길이 열린다.
끊어진 길의 너머에 새로운 길이 이어진다.
그 길은 아직 멀다. 너무나도 멀어서 닿을 수 없다. 하지만, 그곳에 길은 존재한다. 무너지는 세상에 만들어진 자그마한 길을 벨노아는 보았다.
그리고.
흑룡이 날개를 펄럭였다.
몰아치는 바람이 벨노아를 감싼다. 무너지는 세상에 뚫린 길을 향해, 벨노아는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그렇게, 시련은 무너져 내린다.
무너지는 시련.
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용은 벨노아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그 고고한 용의 모습을 벨노아는 제 두 눈동자에 아로새긴다.
결코 잊지 못할 풍경이었다.
* * *
협곡의 끝에 가니칼트는 멈춰 섰다.
그곳에 놓인 것은 끝이다.
앞으로 나아갈 수없이 막아선 끝.
세상의 끝에 선 가니칼트는 제 검을 움켜쥐었다.
“네 검을 보았다.”
가니칼트는 말한다.
그것은 라크에게 전하는 것이자, 머나먼 과거 자신의 제자가 되어주었던 아이에게 전하는 말이다.
“거친 검이더군.”
투박한 검이었다.
“사람을 상대하기 위한 검이 아니다. 자연을 상대하기 위한 검이었어. 검사에게 어울리는 검은 아니었다. 아니었지만.”
가니칼트가 칼을 늘어트렸다.
“우습게도, 그것이 내게 답을 주더군.”
가르침을 주려 했을 텐데, 도리어 가르침을 얻었다. 그레이스가 자랑하던 그 아이만의 검(?). 그것이 가니칼트에게 답을 주었다.
“내가 베야 할 것은 실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베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하늘 위에 자리한 신이자, 이 땅에 내려온 그릇된 존재다. 존재해선 안 되는 것. 존재할 수도 없는 것. 나는 그것을 베어내야만 했다.”
있었기에, 고뇌했다.
“그 끝에 찾은 답이 이것이다.’
가니칼트가 짧게 숨을 내쉰다.
내던진 칼을 왼손으로 낚아챈다. 한쪽 눈을 감고, 오른팔을 축 늘어트린다. 그 몸은 온전하나, 라크의 눈에 가니칼트는 한쪽 팔과 눈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검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검술은 수없이 발전해왔다.
더 나은 자세, 더 나은 일격, 더 완벽한 검로.
그것을 바라며 수많은 이들이 검에 매몰된 삶을 살았다. 그 끝에 그들이 추구한 것이 무엇인가? 자신이 추구해야 했던 검(?)은 무엇인가?
결국에 답은 단순하다.
수없이 분화하고, 수없이 많은 갈래로 뻗어 나가 저마다의 결실을 맺은 검술. 그러나 그 뿌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남는 것은 하나 뿐이다.
“검이란, 베기 위한 것.”
수백, 수천, 수만 년이 흘러도 변치 않을 것.
“베고자 하는 것을 반드시 베어내는 것.”
그것을 이룰 수 있다면 형(?)은 무의미하다.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한평생 완벽에 사로잡혀 살아왔던 검사는 제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나서야 신을 벨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놓는다.
베기 위해서, 제 모든 것을 버린다.
“형태 따위 필요 없다.”
베고자 하는 일념을 검(?)에 담는다.
나의 칼은 닿는 모든 것을 베어 가르리라.
형태 없는 검은 하늘 위의 별조차 베어낼지니.
“이것이, 검의 극한이다.”
형태가 없는 검이기에 무형검(無??).
섭리를 거스르는 검이기에 역천(??).
서걱.
형태없는 검이 휘둘러졌다.
한줄기의 선이 세상을 양단한다.
길을 가로막은 세상의 끝마저 가니칼트의 칼은 베어낸다. 거대한 참격에 세상이 비스듬히 잘려나가고,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개념도, 상식도, 섭리도, 법칙도.
모든게 무너져 내린다.
무너져 내리는 세상에 바로 선 검사가 라크를 돌아본다.
“라크 반 그레이스.”
그가 투구를 벗었다.
그렇게 드러난 것은 인간의 얼굴.
또한, 제자를 보는 스승의 얼굴이다.
“지금 본 것을 잊지 마라.”
라크가 천천히 고개를 내린다.
그 시선은 자신이 손에 쥔 대검을 향한다. 그것은 대검이 될 수도, 가느다란 세검이 될수도, 하물며 도끼도 될수 있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것은 형태 없는 검이다.
성지에서 그레이스가 라크에게 보여준 기술.
그것의 원본(??)이 되는 기술을 라크는 보았다. 저 기술을 라크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이해해야만 하리라.
꾸욱.
라크가 검을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가니칼트는 엷은 웃음을 흘린다.
“그 마음가짐을 잊지 마라.”
가니칼트가 팔을 뻗었다.
그 손끝은 베어진 세상의 끝을 향한다.
그곳에는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 있다.
“너의 길을 걸어라.”
나에게서 이어진 너의 길을 걸어라.
네 방식으로 끝을 맺어라.
그것이 스승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니.
“정진해라.”
라크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리곤, 가니칼트를 지나쳐 길의 끝으로 걸어간다. 이것이 저 검사와의 마지막 만남이리라. 다시 만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스승이 아닌 베어야 할 적이리라.
라크는 가니칼트의 검(?)을 심상에 아로새긴 채 시련을 빠져나간다. 볼 수 있는 것은 전부 보았다. 이다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힘만으로 이루어야 하는 일이리라.
3.
쩍, 쩌적.
라니엘은 제 손에 쥔 성배를 보았다.
성배에 금이 간다. 금이 가다 못해, 아예 쪼개지기 시작한다. 끝이 왔음을 짐작한 라니엘이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구우웅.
울림을 낳는 빛의 우물에서 벨노아가 빠져나온다. 뒤이어 라크도 시련에서 튕겨져 나왔다. 그것은 시련의 성공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패라고 부를 수도 없다.
진동하던 빛의 우물이 박살 난다. 덩달아 성배 또한 부서진다. 부숴진 성배는 빛의 입자가 된다. 그 입자는 방향을 가진 채 흐른다.
사락.
두갈래로 나뉜 빛은 각각 벨노아와 라크에게 깃든다. 그것은 이 성배를 만들었던 옛 영웅들의 의지이자, 그들이 걸었던 길과도 같다.
머나먼 과거에 끊어진 길.
그 길의 다음을 이어서 걸을 이가 선택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