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19
〈 319화 〉 잿빛 마탑(2)
* * *
크렌벨 엘레노아라는 인물이 있다.
본래 그 또한 잿빛 마탑의 여섯 원로(??) 중 하나에 속했으나, 이제는 원로라는 이름 아래 크렌벨은 묶이지 않는다. 그는 원로가 아닌 장로다. 잿빛 마탑의 실질적인 마탑주와 같은 존재.
그럴 수밖에 없다.
크렌벨에겐 마탑주의 자리에 앉기에 충분한 실력도, 충분한 업적도 있다. 자격은 충분하나 그는 스스로 마탑주의 자리를 거부했다.
「잿빛 마탑주의 자리는 나 같은 범재가 앉을 자리가 아니다.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을 지닌 인물이 있다면, 그자는 필시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인물이어야 하리라.」
이 자리에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보다 더 어울리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마탑주의 자리를 크렌벨은 계속해서 거부했으나··· 권력을 가지지 않았을 뿐, 마탑주로서의 업무와 책임을 크렌벨은 전부 짊어졌다. 귀찮고 번거로우며 득 볼게 없어 모두가 거부하는 것.
그것을 오랜 기간 짊어졌던 크렌벨이기에, 마법사들은 경의를 담아 그를 장로라 부르는 것이다.
잿빛 마탑의 장로(??).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된 것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 * *
또각.
잿빛 마탑의 최상층으로 향하는 길.
길게 이어진 복도에 구두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달아 울려 퍼지는 구두굽 소리는 다급하다. 그 간격이 조금씩 짧아지고 있다.
그 걸음의 주인은 레스티 엘레노아다.
그녀의 보랏빛 머리칼이 나부낀다.
그녀가 입은 차기 마탑주의 로브가 요란스레 펄럭였다. 근래 마탑에서 철혈이라 불리며, 감정 없는 인형과도 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레스티다. 그런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마탑의 복도를 달리고 있다.
그녀의 뒤를 따라 걷는 비서로서는 당황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레스티의 출신과 장로와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썩 이상한 일도 아니다.
레스티는 크렌벨 엘레노아에게 거두어졌다.
크렌벨은 레스티의 양부이자 스승이며, 그녀에게 있어 은사와도 같은 존재다. 레스티의 자질을 처음으로 알아봐 주고 그녀를 긍정해준 인물.
그런 인물이 병상에서 일어났다.
그것도 몇 년 만에.
또각, 또각.
구두굽을 울리며 달리는 레스티는 새삼스레 지금 자신이 앞장서 걷고 있어서 다행이라 여겼다. 그 누구도 지금 자신의 얼굴을 보지는 못할 테니까.
뚝.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레스티는 걸음을 멈췄다. 반쯤 열려있는 문 앞에서 레스티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장로가 머무르는 방. 그리고, 몇 년 전부터는 병실이 되어버린 집무실.
반쯤 열린 문을 활짝 열었다.
그곳에는 초로의 노인이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온 레스티를 보았다.
“오, 레스티.”
노인이 인자한 웃음을 흘렸다.
“못 보던 사이에 많이 컸구나.”
한순간 레스티가 숨을 헛삼켰다.
지금과 같은 상황을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상상해보았다. 병상에서 일어난 장로와 눈을 마주하고 인사를 나누는 상상.
정말로 그때가 왔을 때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떻게 말할까?
상상속의 자신은 마탑주로서 어울리는 모습으로 장로를 마주했다. 오랜만에 일어나신 그분이 걱정하지 않으시도록 완벽한 모습으로.
그런 상상을 어찌나 많이 했는지, 현실에서도 그리할 수 있을 거라고 레스티는 생각해 왔다.
“···아.”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상상과 현실은 제밥 다른 법이다.
천천히 팔을 들어 올린 레스티가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완벽한 모습은커녕 표정을 관리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아무리 어른으로 있고자 한다 한들, 부모 앞에서 자식은 언제나 어린아이일 뿐이다.
“예, 장로님.”
레스티는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가 그리 말했다.
2.
“장로께서 병상에서 일어났다고 하시는구나.”
로셀의 말에 라니엘이 눈을 깜빡였다.
원로인 그가 장로라 부르는 인물이라면 한 명밖에 없다. 라니엘이 로셀에게 질문했다.
“크렌벨 님이요?”
로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렌벨 엘레노아.
오랜 기간 병상에 누워있던 장로가 눈을 떴다. 병상에서 일어나 몸 상태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다. 로셀은 그런 소식들을 짧게 요약해 전했고···.
“···불가능할 텐데?”
라니엘은 짧게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장로님께서 걸린 병은··· 고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지 않아요?”
그녀가 제 가슴팍을 꾹 누르며 말했다.
“그 왜, 그런 말 하잖아요. 영혼이 병들었다고.”
영혼이 병 들었다는 표현이 있다.
주로 마법사들에게 일어나는 증상인데, 오랜 세월 동안 마도(??)를 걷다 보면 발생하는 질병이기도 했다. 원인도 그 치료법도 밝혀지지 않은 병.
“장로님도 그쪽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랬었지.”
“그런데, 병상에서 일어나셨다고요?”
“그렇다는구나.”
“으음···.”
라니엘이 제 턱을 매만졌다.
‘뭔가···.’
좋은 소식임은 분명하다.
장로, 크렌벨 엘레노아는 라니엘이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다. 출신과 신분을 가리지 않으며, 마법사의 본분에 충실한 인물.
그런 분이 병상에서 일어났으니, 분명 좋은 소식이기는 할 텐데···.
‘뭔가 좀 꺼림칙한데.’
이상하게도 찝찝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최근에 칼트가 처리했다는 사건도 그렇고, 시기상으로 맞물리는 사건들이 라니엘에게 자꾸만 이상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지금 잿빛 마탑에 가볼 생각인데, 너도 가볼 테냐?”
“음, 저는 나중에 따로 갈게요.”
“그래. 알았다.”
로셀이 자리를 뜨고 한참.
라니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그녀 또한 잿빛 마탑으로 향했다. 잿빛 마탑의 위가 아닌 아래를 향해서.
* * *
잿빛 마탑의 아래로 흐르는 지하 수로.
“부탁하신 대로 끌고 왔습니다.”
칼트가 라니엘의 앞에 흑마법사를 무릎 꿇렸다.
“조사 중이긴 한데 아직 제대로 밝혀진 건 없습니다. 워낙에 철저한 놈들이라서···.”
“그래?”
라니엘이 곁눈질로 흑마법사를 흘겨봤다.
어깨를 뽑아놨는지 팔은 축 늘어져 있으며, 아가리에는 재갈이 물려있다. 주문을 외우지 못하게 조치를 해둔 듯 싶었다.
‘손가락도 다 묶어놨네.’
하여간 마법사 족치는 방법을 잘 아는 놈들답다. 라니엘이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칼트에게 손짓했다.
“재갈이라도 풀어줘 봐. 일단 말은 하게 해야지.”
칼트는 군말 없이 재갈을 풀었다.
조치라 해봐야 결국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이 자리에 잿빛 마법사가 있는 한, 저 흑마법사가 아무리 기고 난다 한들 마법적 수단으로 변수를 창출해내기란 불가능하리라.
“더러운, 더러운 별의 노예 같으니라고!”
재갈이 풀리자마자 마법사는 소리를 질러댔다.
“종말! 약속된 종말이 온다. 너희 별의 신봉자들은 종말 앞에 무력할 것이야. 너희는···.”
언성을 높이는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라니엘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야, 어떻게 대사가 저렇게 똑같냐?”
“그러게 말입니다. 근 몇 년간 변하질 않는군요. 종말, 별, 그놈에 종언. 이쯤 되면 정해진 대본이라도 있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흑마법사의 입장에서야 있어 보이는 단어들을 조합해 만든 그럴싸한 문장일 테지 만, 여러 종말론자를 족쳐본 라니엘과 칼트의 입장에서야 늘 듣던 이야기일 뿐이다.
“야.”
라니엘이 발끝으로 흑마법사를 툭 건드렸다.
“내가 심문이랑 이런 거에 재능이 별로 없어. 귀찮게 끄는 것도 못하고, 손대중 두는 것도 잘 못한다.”
그러니까, 그리 중얼거리며 라니엘이 무릎을 굽히곤 흑마법사와 눈높이를 맞췄다. 평소에는 이렇게 적당히 윽박지르면 흑마법사들은 공포에 질려 있는 대로 다 털어놓곤 했다.
잿빛 마법사, 라니엘 반 트리아스.
그가 변절자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흑마법사들 사이에선 제법 유명한 편이었으니까. 라니엘은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하며 별생각 없이 흑마법사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묻는 거에만 잘···.”
“계집년이 입만 살았군.”
흑마법사가 입가를 틀어올렸다.
그리곤 퉷, 하고 피 섞인 침을 뱉었다. 침은 라니엘에게 닿지 않았지만 침을 뱉었단 행위 자체에 흑마법사는 의의를 뒀다.
꿈틀, 하고 라니엘의 눈썹이 움직였다.
“너 뭐라했냐?”
“귀가 먹었나?”
흑마법사가 소리 내 다시 말했다.
“입만 산 계집년, 이라고 했다. 손대중에 재능이 없어? 심문을 못해? 하! 허세도 적당히···.”
라니엘이 와,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미친 새끼네 이거?”
도대체 뭔 깡으로 이러지?
그리 중얼거리며 라니엘이 장갑을 쭉 끌어당겼는데, 칼트는 슬쩍 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옛날부터 라니엘은 심문에 재능이 없기로 유명했다.
심문이란 상대에게서 정보를 캐내는 것.
라니엘이 하는 것은 심문이라기보단 차라리 고문에 가깝다. 그리고, 보통 그 경우에 정보를 털어놓기 전에 상대가 반병신이 된다는 것 또한 칼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심문도 글렀군.’
칼트가 그리 생각하는 와중이다.
뻐억!
흑마법사의 머리가 휙 돌아갔다.
그 입에서 치아 몇 개가 튀어나와 허공을 날았다.
3.
흑마법사 자켈은 눈을 깜빡였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뺨에서 감각이 없었다. 통증이 느껴지진 않은데, 아래를 내려다보면 피 섞인 침이 흐르고 있다. 그것은 어디로 이어져 있는가?
‘내 입.’
자신의 입에서 피 섞인 침이 흐른다.
입술이 터지고 턱을 움직여보니 이물감과 함께 위화감이 느껴진다. 치아 몇 개가 부러져 입안을 돌아다니는 것을 자켈은 그제야 눈치챘다.
콱, 하고 누군가 자켈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고개 들어.”
그리고 억지로 고개를 들게 만든다.
그리하여 자켈은 눈앞의 소녀와 다시 시선을 마주한다. 귀족가의 아가씨쯤으로 보이는 소녀다. 그 말투도, 몸짓도 건장한 남자를 흉내 내는 것 같아 우습게 보이던 소녀.
처음 그녀를 봤을 때 자켈은 저 소녀가 하운드에 막 들어왔거나, 견학이나 왔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몸짓이 하운드라 여기기엔 너무나 어설펐으니까.
하지만···.
“길게 말 안 한다.”
자켈은 소녀의 눈동자를 마주한다.
“왜 여기를 골랐고, 여기서 무엇을 했으며, 언제부터 했는지.”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번들거린다.
“설명해.”
섬뜩한 푸른 눈동자에서 자켈은 본능적인 공포를 느낀다. 턱이 떨리는 와중에도 자켈은 이 상황을 길게 끌어서는 안 됨을 직감한다.
그가 묶인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마지막까지 아껴두려 한 주문이지만, 공포 앞에 판단이 흐려진 자켈은 곧장 주문을 발현하려 한다. 그렇게 손가락으로 지면을 찍으려는 순간이다.
콰직!
“크아아아아아아악!”
라니엘의 구두굽이 자켈의 손가락을 짓밟았다.
밟는데 그치지 않고 짓이기듯 소녀가 구두의 밑창을 바닥에 끌었다. 자켈의 손가락 또한 덩달아 이리저리 비틀렸다.
“끅, 끄으윽!”
자켈이 신음을 내며 고개를 숙이는 순간, 소녀의 손이 다시 자켈의 머리칼을 낚아챈다. 그 시선을 억지로 자신에게 향하게 만든다.
“헛짓거리하지 마라.”
자켈은 이를 악문다.
눈앞에 불똥이 튀는 고통 속에서 자켈은 제 혓바닥을 굴린다. 수가 다 떨어진 마당이다. 자켈은 곧장 각오를 다졌다.
‘고문을 당하다 정보를 불어버릴 바에는···.’
차라리 자결을 택하리라.
콱, 하고 자켈이 제 혓바닥을 씹었다. 그것을 신호 삼아 새겨진 주문이 빛을 발한다.
“별의··· 노예들에게···.”
자켈이 눈을 부릅뜬 채 입가를 틀어올린다.
혓바닥에 새긴 회로가 점멸했다. 터져 나오는 빛이 자켈의 눈과 귀에서 새어나오고, 그 섬광이 폭발로 변하려는 순간이다. 자켈은 자신의 마지막이 될 대사를 입에 담았다.
“위대한 선지자의 철퇴···.”
허나, 그 말은 끝을 잊지 못한다.
“아주 지랄을 한다.”
콱, 하고 라니엘의 손아귀가 자켈의 턱과 입을 한 번에 움켜쥐었다. 그리곤 그대로 손을 휘둘러 자켈의 머리를 바닥에 찍었다.
콰앙!
머리를 뒤흔드는 충격에 자켈의 시야가 한순간 점멸했고, 시야가 원래대로 되돌아왔을 때 자켈은 주문이 강탈당했음을 깨달았다.
“수법이 다 똑같아. 꼭 뭐라도 숨기고 있다는 것처럼 쪼개다가, 수틀리면 혓바닥 씹고 죽으려 하지.”
그녀가 질리다는 제 손바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방금까지 자켈이 자결을 위해 쓰려던 마나가 뭉쳐져 있다. 그것을 콱, 하고 움켜쥐는 것만으로 라니엘은 주문을 무효화시킨다.
“그게 되겠냐?”
흩어지는 주문.
“되겠냐고.”
라니엘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결을 위해 준비해둔 마지막 수마저 사라졌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켈은 모르지 않는다.
“너 못 죽어.”
그녀가 자켈을 똑바로 바라본다.
푸른 눈동자가 반달처럼 휘었다.
“다 불기 전까지는.”
악몽과도 같은 눈동자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