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482
그 시체가 누구의 것인지 아일라는 알았다.”
아르카디아 최초이자 최후의 여왕, 아크리엘 클렌 아르카디아. 마왕의 모체가 된 여왕의 육체가 그곳에 있었다. 비어버린 그릇, 아마도 광인이 마왕을 유도하는 데 사용했을 시체.”
사락.”
그 시체를 향해 아일라가 손을 뻗었다.”
피어오른 별빛이 시체를 감쌌다. 개화하는 별빛이 시체를 바스러트리기 시작했다. 별빛은 자신들이 오랜 주인을 애도하듯, 부드럽게 꽃을 피워냈다.”
파스슥.”
시체가 바스러지고 남은 곳에는 백금색의 꽃잎들만이 가득했다. 여왕의 육체는 해방됐다. 남은 것은 여왕의 영혼뿐. 영혼이 위치한 것은 이곳의 정반대에 위치한 대륙의 끝자락이었다.”
『끝자락의 탑에 광인이 마왕을 불러낸 장치가 있을 거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부수면 마왕의 움직임에도 영향이 가겠지.』”
『그게 신호탄이 될 거다.』”
『마왕의 움직임에 변동이 생기면 난 너희가 성공했다고 판단할 거야. 그리고, 이 오랜 전쟁에 종지부를 찍겠지.』”
여왕의 육체를 해방함으로써 아일라는 신호를 보냈다. 대륙의 끝자락에 있을 라니엘을 떠올리며 아일라가 길게, 아주 길게 숨을 내뱉었다.”
“부탁할게요, 용사님.””
자신들의 무대는 막을 내렸다.”
이젠, 인류의 오랜 비원을 이룰 시간이었다.”
만마의 주인, 마왕(魔王) 토벌을.”
마왕의 육체가 소멸했다.”
그늘의 모체였던 아르카디아 마지막 여왕의 육신이 바스러졌다는 것은 곧 그늘이 목적을 잃어버렸음을 의미했다. 대륙을 가로질러 끝자락의 탑으로 향하려던 그늘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땅울림이 멎었다.”
하늘을 시꺼멓게 물들이던 구정물이 멈췄다.”
그늘의 움직임으로 하여금 발생하던 모든 현상이 일순간 정지했다. 목적을 잃어버린 그늘은 제자리에 멈춰선 채 거세게 파도쳤다. 파도에서 튀어나온 검은 손아귀들이 땅을 내려찍고 지면을 할퀴었다.”
—————.”
검은 구정물 사이로 솟아난 죽어버린 것들의 머리가 아가리를 벌려 울부짖었다. 땅과 하늘이 그릇된 신의 비명에 공명하듯 뒤흔들렸다. 제 육신을 되찾을 기회를 잃어버린 그늘은 다만 비명을 토해냈다.”
쏴아아아아.”
검게 물든 하늘에선 비가 내렸다.”
그늘이 할퀸 지면은 고랑이 되었고, 고랑을 타고 흐르는 비는 이윽고 강이 되었다. 검은 강의 위에서 그늘은 하염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하늘이 찢어지도록.”
그리고, 그 비명은 누군가에겐 닿았다.”
하늘 너머의 신도, 저 세상의 끝자락도 아닌, 그늘의 신전을 향해 다가오던 어느 인간에게.”
“······.””
라니엘 반 트리아스.”
잿빛 마법사가 말없이 마왕을 바라봤다.”
줄곧 움직이던 마왕이 멈춰 섰다.”
땅을 할퀴며 하늘을 향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그 비명은 온전히 들려왔다. 고막을 긁고 뇌를 뒤흔드는 것만 같은 비명소리.”
그 비명 소리를 흘려들으며 라니엘은 웃었다.”
멈춰선 마왕. 목적 잃은 마왕의 비명.”
라니엘에게 있어 그것은 하나의 신호였다. 대륙의 끝자락으로 향했을 토벌대가 임무를 완수했다는 신호. 그 사실에 라니엘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가니칼트를 쓰러트렸다.”
광인은 토벌됐다.”
더이상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없었다.”
어렵고 어려운 조건들을 모조리 돌파해, 이제 자신의 앞에 남은 적은 하나뿐이었다. 저 멀리서 출렁이는 마왕을 바라보던 라니엘이 이내 시선을 돌렸다.”
타닥, 타다다닥.”
그녀는 제 앞에 놓인 모닥불을 바라봤다.”
모닥불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카일을 보았다. 울부짖은 마왕을 바라보던 카일은 어깨를 으쓱였다.”
“네 제자들이 성공한 모양이군.””
“내가 잘 키웠다 했잖아.””
“그럼 남은 건 하나뿐인가?””
“그런 셈이지.””
남은 적은 마왕 하나뿐이다.”
그 사실을 곱씹으며 생각을 정리하다 말고, 라니엘은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웃음을 이해하지 못한 카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냐?””
“야, 생각해보면 웃기지 않아?””
라니엘이 흐으, 하고 길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결국 처음에 말한 대로 된 거잖아.””
“···처음?””
“네가 용사가 됐던 그날 말야. 그날, 네가 나한테 했던 말 기억 하냐?””
움찔, 하고 카일이 어깨를 떨었다.”
십년도 더 전의 일이었으며, 이제 와선 부끄러운 기억이 된 일이었다. 그 뒤에 자신이 행했던 행동들을 생각하자면 더더욱.”
“···기억한다.””
용사가 됐어, 라니엘.”
마왕을 잡자. 나와 함께 마왕을 잡으러 가자.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위업을 세우는 거야.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게끔.”
자신이 내뱉었던 말들을 곱씹으며, 카일도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가당찮은 말들이었으니까.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던 소년의 치기였으며, 만용이었고 망상에 불과한 말들이었다.”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시기지.””
현실을 바라보지 못했던 소년이 꾸었던 꿈이다.”
소년 홀로선 결코 이루지 못할 꿈. ”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카일, 너 마왕이 어떤 존재인 줄은 아냐? 재앙이 어떤 존재인 줄은 또 알고? 그건, 애당초 잡으라고 만든 게 아니야. 불가능하다고.」”
꿈을 꾸는 소년에게 현실을 알려주고자 길게 말을 늘어놓던 마법사가 있었다. 그러나 마법사는 결국 소년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후우.」”
「알았어. 알았다고.」”
한숨을 내뱉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법사는 소년을 따라 여행길에 올랐다. 그 과거를 떠올리며 카일은 쓰게 웃었다.”
“내가 말했던 것들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이었는지, 네 말을 들을 때는 몰랐는데···.””
“현실로 겪으니까 좀 달랐지?””
“그렇지. 현실은 동화 같지 않았으니까.””
여정에 올랐던 소년과 마법사는 현실을 마주해야만 했다. 전장은 동화가 아니다.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사람이 죽는다. 책임이 생긴다. 누군가의 희생, 주어진 책임, 어깨에 쌓여만 가는 무게···.”
현실을 마주할수록 꿈은 멀어져갔다.”
어깨는 무거워지고 걸음은 느려졌다.”
소년은 포기함으로써 청년이 됐고, 마법사는 주저앉은 청년의 멱살을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청년을 대신하여 길을 열었다. 책임을 졌다. 의무를 다했다.”
“마왕을 잡자고 말한 건 나였는데···.””
카일이 라니엘을 바라봤다.”
처음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지만, 라니엘은 여전히 라니엘이었다. 길을 알려주었던 마법사.”
“정작 걸어간 건 너였지. 내가 포기했던 꿈을 계속 붙잡고 있던 것도 너였고.””
“뭐, 멀리 돌아간 것뿐이잖아.””
라니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결국에 다시 여기로 돌아왔으니까.””
그녀가 웃었다.”
“생각해보면 그래. 돌고 돌아서, 좀 많이 먼 길을 걸어오긴 했지만··· 결국 그날 네가 말한 것처럼 된 거잖아.””
모든 재앙을 쓰러트리고 마왕의 앞에 도달했다.”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위업을 세웠다. 카일 토벤도, 라니엘 반 트리아스도 마찬가지다.”
소년은 청년이 됐고, 청년은 검사가 되어 그 누구에게도 대체되지 않는 특별한 존재가 됐다. 청년은 용사로서는 마왕의 불멸을 베었고, 검사로서는 가장 강한 검사를 꺾어내며 위업을 새겼다.”
마법사는 현자가 됐고, 현자는 용사가 되어 인류의 앞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다. 용사로서는 모든 재앙을 토벌하여 인류를 인도했고, 현자로서는 고대에서부터 이어진 영웅들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었다.”
저마다가 저마다의 삶을 살았다.”
흔들리고, 망설이고, 후회했을지언정, 돌고 돌아 처음에 바라보았던 장소까지 도달한 곳이다. 모닥불을 사이에 둔 채 두 사람은 소리 내어 웃었다. 카일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중간과정을 싹 다 날려 먹고선, 결국 ‘말했던 대로 됐잖아?’ 라니. 좀 그렇지 않냐? 라니엘.””
“뭐 어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는데.””
라니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날 네 말 한마디로 시작했던 게, 결국 여기까지 왔잖냐.””
많은 일이 있었다.”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배웠다. 여정의 시작과 지금 사이에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일들이 가득했지만, 그것을 라니엘은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우리가 여기에 있단 거지.””
라니엘이 모닥불을 가리켰다.”
그들이 모닥불을 피우고 신호를 기다린 곳은, 그늘의 신전이 위치한 마경의 끝자락이다. 결국 마경의 가장 깊은 곳까지 그들은 도달한 것이다.”
철 없던 소년의 망상이 현실이 됐다.”
소년의 꿈을 인도자는 이곳까지 끌고 왔다.”
성장하고 성장한 끝에 도달한 종착지다. 저마다의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카일이 모닥불을 밟아 불씨를 꺼트렸고, 라니엘은 길게 숨을 내뱉으며 몸을 풀었다.”
—————!”
두 사람은 저 멀리서 울부짖고 있는 마왕을 바라보았다. 과거에는 가끔씩 이런 풍경을 떠올려 보곤 했었다. 성장하고, 강해지고 강해진 끝에 마왕의 앞까지 도달한··· 머나먼 미래의 모습을 그려봤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더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