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504
시간을 벌어달라고.”
‘그리고···.’”
요르문의 전력(全力)을 끌어내라고, 녀석은 부탁했다. 카일은 쓰게 웃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천 년을 살아온 고대의 리치를 베었다. 검은 폭풍 흑룡을 베었으며, 그릇된 신을 베었으며 최강의 검사를 베었다.”
이제 남은 것은 가장 거대한 별자리였다.”
한때 자신에게 축복을 내렸으며,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었고, 자신을 이곳까지 도달할 수 있게 만들어준 별자리를 바라보며 카일은 삼켰던 숨을 뱉었다. 인류에게 주어진 마지막 장벽이 제 앞에 있었다.”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이 베지 못한 것.”
마왕의 앞에 멈춰 서야만 했던 최강의 검사가 도달하지 못한 무대. 그 무대에 바로 선 지금 카일은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탁.”
카일이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동시에 라니엘이 사슬을 밟은 채 요르문을 향해 질주했다. 같은 속도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두 사람이 질주했다. ”
그들이 바라보는 그곳에.”
한때 가장 찬란했던 별이 있었다.”
요르문은 두 인간을 보았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진심으로 자신을 뛰어넘어 다음으로 향하고자 하는 두 인간을 바라보며 요르문은 씁쓸함을 느꼈다.”
한때는 자신 역시 저들처럼 달렸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부르짖는 전장에 달려들어 승리를 거머쥐었다. 신들의 대장군을 굴복시켰고, 만신들이 피워올린 전쟁의 불길을 꺼트리며 대륙을 질주했다.”
한때는, 자신 역시 저들처럼 살았다.”
믿어 의심치 않는 정의(正義)로 세상을 정의(定義)하고자 하였다.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만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신들의 손아귀에 놀아나지 않도록, 그리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을 바꾸고자 하였다.”
「갑시다, 요르문.」”
「다음 전장으로.」”
「다만, 우리를 부르는 곳으로요.」”
글레투스의 신념에 매료되어서, 그녀와 같은 꿈을 꾸며 앞을 향해, 다만 다음을 향해 나아가던 시기가 자신에게도 있었다. ”
한때는, 한때는, 한때는···.”
찬란했던 과거가 떠오르고 사라졌다.”
그 끝에 남은 것은 초라한 자신이었다. 모든 것을 잃고 과거에 집착하는 늙고 추레한 인간뿐이었다. 그 사실을 요르문이라 하여 모를 리가 없다.”
안다, 그 누구보다도 잘.”
자신은 이미 망가졌음을, 별은 이미 망가지고 말았음을, 세상은 병들어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다만 흘러가야 할 것들을 손으로 붙잡아 묶어두는 것에 불과하겠지.”
붙잡는다 하여 붙잡히겠는가.”
필시 흘러갈 것이다. ”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겠지.”
과거 만신(萬神)들이 변화를 거부했음에도 세상은 기어코 변했다. 인도자는 세상의 변화를 알리는 존재. 자신의 앞에 인도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이 세상이 변화할 때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가.’”
요르문이 쓰게 웃었다.”
어느새 자신은 그 누구보다도 혐오했던 만신들과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완벽했던 그들과는 다를지 모른다. 요르문은 인간이었으므로.”
이곳에 있는 것은 초라한 인간이다.”
늙고 추해져 버린, 한때는 찬란했던 영웅이다.”
초라한 인간은 자신이 틀렸음을 알고 있음에도 물러서지 못한다. 자신이 이루어낸 것들을, 자신에게 남은 것들을 지키고자 발버둥친다. 요르문은 자신의 몸을 휘감은 별자리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살아온 흔적.”
그녀가 살아간 흔적.”
그 모든 것이 이 하나의 별에 새겨져 있었다. 그렇기에 이 별을 자신은 놓지 못하는 것이리라. 소중한 것을 놓지 못할 때 인간은 어디까지고 추락한다. 요르문은 손짓했다.”
찢어지는 공간 사이로 신들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진정으로 자신을 뛰어넘고자 한다면, 그날 자신이 뛰어넘었던 무대를 넘어보아라. 그리 말하듯이 요르문은 만신(萬神)의 권능을 풀어놓았다. 범인의 눈에 그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도자의 눈에.”
라니엘의 눈에는 보였다.”
세상이 비명을 지르는 모습이, 공간이 찢어지고 섭리가 비틀리는 모습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추었다. 온갖 색채가 찬란히 빛났다. 찢어진 하늘의 저편에서 세상에서 잊힌 색(色)을 지닌 눈동자들이 형형색색으로 빛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라니엘은 웃었다.”
“아아.””
그녀가 신음했다.”
“안 그래도 탐났거든요, 그거.””
만신(萬神)을 떨어트린 자.”
제 이름을 장식할 칭호를 발견한 라니엘이 미소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녀가 사슬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찢어진 하늘의 너머에서 드러나는 건 요르문이 가진 권능들이다.”
꺼지지 않는 불, 전쟁을 부르는 뿔나팔, 거부하는 자, 미궁에 헤매이는 바람, 우뢰와 함께 떨어지는 이··· 이름 잃은 수많은 권능이 눈동자의 형태로 빛나고 있었다.”
저 모두가 요르문이 가진 무기들이다.”
하지만, 저것은 다른 이에게서 강탈한 것들. 라니엘이 보고자 하는 요르문의 전력은 저딴 눈동자들이 아니었다. 라니엘이 요르문을 흘겨봤다.”
‘내가 봐야 하는 것은···.’”
요르문만이 지닌 것.”
그가 이 눈동자들을 떨어트릴 때 사용한, 지금 요르문이 왼손에 쥐고 있는 저 별자리야말로 자신이 봐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저 별자리는 지금 온전한 힘을 내보이고 있지 않았다. 마치 별자리를 바라보는 자신을 경계하듯 형태와 구조를 숨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라니엘은 카일에게 부탁한 것이다.”
요르문의 전력을 이끌어내 달라고.”
자신을 경계할 여유조차 사라져, 저 별자리가 가진 힘을 온전히 쓰게끔 만들어달라고. 그 바람에 답하고자 카일은 요르문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부탁한다 카일.””
그리 중얼거리며 라니엘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선, 길을 가로막는 잊힌 신들을 모조리 떨어트리고자.”
저 하늘 위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1초에도 몇 번이고 번뜩이는 섬광과, 울려 퍼지는 굉음,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불과 번개들. 하늘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은 하늘뿐만이 아니다.”
한때는 하늘의 지배자였으나 찢어진 날개로는 더는 자유로이 날 수 없게 되어, 땅 아래로 내려온 용이 있다. 땅에 발을 디딘 채 고룡(古龍)은 입을 벌려 신의 분노를 토해낸다.”
불길이 땅을 휩쓸었다.”
폭풍이 고룡의 도시를 뒤흔들었다.”
불길을 휘감은 폭풍이 휘몰아치며 대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땅이, 하늘이 비명을 내지른다. 그리하여 천지가 요동치는 가운데··· 그런 땅과 하늘을 가로지르는 이들이 있다.”
부러진 성창을 든 채 데스텔은 달렸다.”
고룡을 향해 달려들었다. 불길을 가르고 열기를 견디며 고룡의 몸에 올라타 그 위를 종횡무진 내달렸다.”
검붉은 번개를 끈 채 라니엘은 하늘을 향해 투신했다. 제 몸을 하늘에 내던지며 라니엘은 신들의 눈동자를 찢어발겼다.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을 먹어치우듯이, 그녀의 손에 휘감긴 번개가 하늘을 검붉게 물들였다.”
땅에 선 고룡의 핏물이 하늘로 튀어 올랐다.”
하늘에서 신들의 비명이 땅으로 흘러내렸다.”
고룡의 피와 신들의 비명이 마주하는 곳, 땅과 하늘의 사이에서 카일은 달렸다. 터져나가는 공간, 밀려드는 수많고 수많은 주문을 베어 가르며 카일은 질주했다. 눈을 부릅뜬 채 카일은 숨을 뱉어냈다.”
일견 여유로워 보이는 신(神).”
여전히 제 모든 수를 드러내지 않은 존재.”
저자에게서 여유를 빼앗고자 카일은 검을 고쳐 쥐었다. 칼날을 따라 한없이 예리한 검기가 솟구쳤다. 평범한 검격으론 상처조차 입힐 수 없는 상대. 그런 상대를 어떻게 허물어야 하는가.”
그 방법을 카일은 알고 있었다.”
이것저것 따질 것 없었다. 저쪽이 숨긴 패를 까지 않는다면, 이쪽이 먼저 보일 뿐이다. 카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너지는 신전에 바로 선 요르문을 바라보며 카일이 칼을 등 뒤로 늘어트렸다.”
울려퍼지던 굉음이, 번뜩이는 섬광이, 땅에서 솟구치던 화염의 폭풍이.”
그 모든 것이 일순간 정지했다. 그리하여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카일은 눈앞을 보았다. 하나의 길이 보였다. 단 하나의 검로(劍路)가 시야에 들어왔다. 제 눈동자에 비추는 길을 따라 카일이 검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고자 했다.”
콱.”
무언가 카일의 검을 붙잡고 있었다. ”
카일이 눈을 부릅떴다. 휘두르려 했던 자신의 검을 별자리가 옭아매고 있었다. 시야를 돌리면,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요르문이 있었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건 카일 뿐만이 아니었다.”
“섭리를 거스르는 일격은 그대만의 전유물이 아니야. 그대가 처음으로 이룬 위업도 아니지.””
요르문이 손짓했다.”
“그걸 만든 건 내가 처음이었다, 애송아.””
별자리가 한순간 번쩍였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순간, 검을 움켜쥔 카일의 손목이 비틀렸다. 팔이 꺾이고 살이 찢어져 검붉은 피가 튀었다.”
하늘에서 신들이 피를 흘리고.”
땅에서 고룡의 피가 솟구치는 가운데.”
하늘과 땅의 사이에서 인간의 피가 길게 튀었다.”
별자리에 휘감긴 손이 비틀렸다.”
거센 물길에 휩쓸리듯이 비틀림은 검을 쥔 손가락에서 시작하여 팔목으로, 팔목에서 오른팔 전체로 퍼졌다.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팔이 꺾였다.”
부러진 뼈가 살갗을 찢고 튀어나왔다. 검은 피가 길게 튀어 올랐다. 튀어 오르는 핏물과 함께 길게 늘어졌던 시간이 제 속도를 찾았다.”
후두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