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83
〈 83화 〉 사상 최강의 시녀(1)
* * *
잿빛의 차기 마탑주, 레스티.
그녀는 모처럼 잿빛 마탑의 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평소처럼 고개를 숙이고 다니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쑥덕이는 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었다.
당당히 걸었다. 고개를 들고, 허리를 펴고 걷는다.
눈을 크게 뜨고 층계를 오르다 보면, 계단을 타고 새겨진 회로가 눈에 들어온다.
회로에 손을 얹고 갈 계층을 떠올린다.
잿빛의 차기 마탑주가 오르지 못하는 계층은 없다. 꼭대기, 장로(??)의 계층 바로 밑에 위치한 층을 떠올리며 레스티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
전(?) 차기 마탑주의 계층.
잿빛 마법사 라니엘의 집무실과 개인 연구실이 위치한 계층이다. 당연하게도, 이 계층을 지키는 마법사는 없다.
‘중요 자료는 잿빛 마법사가 전부 잠가두고 갔다고··· 했으니까.’
선반마다 걸린 잠금 회로가 반짝인다.
잿빛 마법사가 가진 열쇠가 없으면 열 수 없는 선반들이다. 선반에 새겨진 번호를 읽으며 레스티는 연구실을 돌아다녔다.
‘깔끔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연구실이다.
잿빛 마법사가 떠난 이후로, 이 연구실을 관리하는 이는 없었다. 그가 떠났을 때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은 연구실이지만···.
‘보통 이렇게까지 하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깔끔했다.
병적일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된 선반을 지나, 레스티는 A계열 선반의 앞에 섰다.
‘A3 라고 하셨지?’
A3 라인의 세 번째 서랍.
그 서랍의 앞에서 레스티는 로브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얼마 전, 라니아 교수님께 받은 열쇠다.
끼릭.
열쇠를 선반의 회로에 맞춰 끼워 넣는다.
그대로 열쇠를 돌리자 선반을 잠가둔 회로가 차라락, 해체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틱하고 무언가 걸리는듯한 느낌이 든다.
열쇠를 잡아당기자 선반이 열렸다.
선반의 안에는 종이봉투와, 회로가 새겨진 직육면체의 마도구가 들어있다.
‘···뭐야, 이게?’
종이봉투의 안에는 암호화된 서류가 가득하다. 회로가 새겨진 직육면체의 마도구는 마나를 불어넣어도 작동할 생각을 않는다.
‘망가졌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떨쳐냈다.
무려 잿빛 마법사가 남기고 간 물건이다. 그것도, 라니아 교수님께 부탁을 하면서까지.
‘나중에 쓰려고 만든 물건.’
이토록 쉽게 망가질 리가 없다.
레스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도구의 표면에 새겨진 회로를 읽었다.
눈동자에 백금색 빛무리가 일렁인다.
회로가 떠오르는 듯한 착각 속에서, 레스티는 회로에 비틀림이 있음을 깨달았다.
‘의도적인 비틀림.’
비틀림 위에 한 줄의 선을 긋는다.
회로의 개찬을 마치자, 마도구가 은은한 빛을 뿜는다. 그 방향을 본다. 빛이 향하는 곳은 잿빛 마법사의 집무실이다.
몇 중으로 잠겨있을 집무실이다.
그러나, 빛이 집무실의 문에 스며듦과 동시에 찰칵하고 잠겼던 문이 열렸다.
레스티는 집무실의 안으로 들어갔다.
마도구가 뿜는 빛은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한 장의 종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
레스티는 종이에 적힌 글귀를 본 순간 눈을 깜빡였다. 서류에는 꽤 충격적인 내용이 가득했다.
잿빛 마법사가 그러더라.
원로가 좆같게 굴면, 그 서랍에 담긴 걸 눈앞에 던져버리라고.
그 말을 떠올리며 레스티는 종이를 들어 올렸다.
“이걸 던지라니···.”
레스티는 쓰게 웃었다.
잿빛 마탑을 뒤흔들만한 정보가 눈앞에 있었다.
···이상이 내가 조사한 결과다.
증거는 A3 서랍의 문서에 암호화하여 보관해 두었다. 함께 동봉해둔 마도구를 사용하면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서류는 그런 글귀를 마지막으로 마무리 돼 있다.
그 문장을 읽어내리던 레스티는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듯한 글씨체인데?’
영문모를 익숙함을 느끼며, 레스티는 서류를 봉투에 함께 넣었다. 그렇게 집무실을 뜨려는데, 책상에 놓인 액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책상에는 두 개의 액자가 놓여있다.
한 장은 어린 시절의 잿빛 마법사와, 로셀 원로가 찍은듯한 사진이다.
그리고 다른 한 장은.
‘···누구지?’
누군지 모를 소년과, 잿빛 마법사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속 정체 모를 소년의 눈동자는 죽어 있었다.
소름 끼치는 눈동자다.
적어도, 그건 같은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아니었다.
2.
“뭐···라고?”
저택에서 커리큘럼을 정리하다 말고, 로셀은 고개를 들었다.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제1 왕녀님의 호위를 하게 되었다고?”
“네, 스승님.”
“갑자기?”
“아마, 제4 왕녀님이 절 추천 하신 모양이에요. 대뜸 찾아와서 그렇게 말씀하시던데요.”
“음, 으음···.”
로셀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제1 왕녀가 누구인가? 여장부의 기질을 타고난 별종 중의 별종이다. 정치계에 관심이 없고, 관여도 하지 않는 로셀이지만··· 르뤼엘 왕녀에 대한 소문은 종종 듣곤 했다.
‘···그분이 도대체 왜?’
로셀은 침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너는 괜찮으냐?”
“사흘 정도만 곁에서 지키면 된다 하니, 아카데미 일에도 지장없고 괜찮지 않을까요?”
···그걸 묻는 게 아닌데?
왕녀가 직접 호위 명령을 내렸는데, 아카데미가 별 대수겠는가.
“아니, 그걸 묻는 게 아니라···.”
“예?”
“아니다, 되었다. 네가 괜찮다면야 뭐···.”
로셀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걱정하는 게 의미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왕궁이 모략과 계략이 판을 치는 마굴이라 경고를 해줄까 싶기도 했지만···.
‘애초에, 그게 통할까 싶군···.’
마탑의 마법사들과 피 터지는 혈투 끝에, 차기 마탑주에 오른 아이다. 처세술은 모르겠으나, 어쭙잖은 정치질에 시달릴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로셀은 눈앞의 제자를 흘겨본다.
마경이라 불리는 전장에서 숱한 거물들을 사냥하고, 재앙들과 마주하며 살아 돌아온 아이다.
마굴(??)이 아닌, 마경(??).
그런 전장에서 귀환한 제자에게, 자신의 조언이 유용할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다른 쪽이 걱정되는군···.’
로셀은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라니엘.”
“네, 스승님.”
“조용히, 최대한 조용히 마무리 짓고 오거라.”
“네?”
“만에 하나라도, 수틀리면 다 엎어버려야지··· 같은 생각은 하지 말란 뜻이다.”
그 말에 무언가 찔린 듯, 라니엘이 흠칫하고 어깨를 떤다.
‘정답이었는가···.’
로셀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따라 한숨이 느는 기분이다. 정말로.
3.
제 1 왕녀 르뤼엘의 호위역.
내가 맡게 될 임무를 생각해보자니, 전장에서의 일이 꽤 많이 떠올랐다.
‘호위 임무를 맡은 적···은 거의 없었지 아마?’
그랬을 거다.
내가 속한 용사파티는 별동대와 같은 식으로 운용되곤 했으니까. 최전선을 떠도는 우리에게 호위 임무가 내려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자체가 엄청난 손해니까.’
어디 한군데에 묶여있는 것 자체가 곧 손해다. 하물며, 호위 임무라면 말 할 것도 없다.
‘구출 작전이라면 또 몰라도 말이야.’
그래도,우리에게 딱 한 번이지만 호위 임무가 하달된 적이 있었다. 그것이 고대 리치, 스케발과 관련된 일 이었으니까.
아마도, 내가 기억하기로는 신성 결계를 유지하는, 델로힘 교단의 추기경 호위 임무였을 것이다.
결계를 정면에서 뚫기를 포기한 스케발은, 결계를 유지하는 추기경의 거주지에 낙인을 찍고 아예 침입을 시도했었다.
‘그 침입에서 추기경을 보호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보다 정확히는 내가 맡은 임무였다. 스케발을 상대하는 건 나 혼자인 편이 더 수월했으니까.
‘난리도 아니었지.’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나는 쓰게 웃었다.
복도를 가득 채운 회로, 끝도 없이 덮쳐드는 결계와, 마수 소환 회로에서 솟구치는 마수들을 때려 잡는는 건 몹시 귀찮은 작업이었다.
그때, 나는 삼 일 밤낮을 꼬박 새워야 했다.
그 미친 해골바가지는, 잠도 자지 않는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격을 해댔으니까.
‘그래서, 그 뒤로 호위 임무라면 치를 떨었던 거 같은데.’
덤으로 스케발에 대한 짜증도 몹시 늘었고 말야. 그다음 전장에서 스케발을 만났을 때는, 바닥에 그 두개골을 처박고 주둔지를 아예 횡단했었다.
‘하여간 좆같은 해골바가지 새끼.’
나는 생각을 갈무리하며, 짧게 숨을 내뱉었다. 어느새 왕성에 가까이 와 있었다. 나는 곧장 왕성으로 향하지 않았다.
‘전달받은 곳은 여기가 아니니까.’
미리 받아두었던 쪽지에 적힌 곳으로 향했다.
본녀에겐 믿을만한 인물이 딱 둘 있다.
그곳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둘 있었다.
하나는 내 호위 기사 루그란트이며.
“오셨습니까.”
둘은 시녀장, 사를라인이다.
“안내하겠습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곳은 내게도 익숙한 곳이었으며, 내가 출입이 가능한 곳이었다.
‘왕가의 도서관.’
내게 그곳의 출입증이 있는 걸 알자마자, 르뤼엘 왕녀는 그를 이용했다. 아직 개장하기 전의 도서관에는 시녀장과 호위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나는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왕성에 이런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으슥한 통로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왕녀님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들이 문을 가리켰다.
문을 열자 퀘퀘한 냄새가 풍겨왔다.
제대로 된 접견실이 아니다.
물품 보관 창고나 돼 보이는 곳이었는데, 그런 장소와 전혀 안 어울리는 한 인물이 나를 반겼다.
“왔는가, 교수.”
제 1왕녀 르뤼엘.
그녀는 오크통에 걸터앉은 채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내가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그녀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음 같아선 접견실 하나를 빌리고 싶으나, 궁에는 오라비의 눈과 귀가 된 것들이 좀 많아서 이런 장소를 택했다. 그대가 이해해라.”
그리 말하며, 왕녀는 옆에 올려두었던 옷가지를 내게 내밀었다.
“받아라.”
“···뭡니까 이게?”
“일단 받거라.”
나는 떠밀리다시피 받은 옷가지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냐는 듯한 눈길을 보내자, 르뤼엘 왕녀가 입을 열었다.
“말했지 않나. 보는 눈이 많다고.”
“예.”
“그러니 위장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가 내 품에 들린 옷을 가리켰다.
“그러기 위한 옷이다.”
펼쳐보아도 좋다는 듯, 왕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품에 들린 옷을 쫙 펼쳐봤다.
펼쳐본 옷은 단정했다.
검은색이 바탕이 된 옷이다. 거기까지만 보면, 그닥 이상한 옷이 아니었지만··· 함께 딸려 나온 하얀 천을 보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게 무슨 옷인지.
‘이거 시팔···.’
메이드 복 아닌가?
하얀 천은 누가 봐도 앞치마다. 이걸 함께 입었을 때, 어떤 모습이 될지는 눈에 훤히 그려진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앞을 바라보자, 르뤼엘 왕녀가 웃음을 흘린다.
“오늘부터 사흘간, 그대는 본녀의 시녀가 된다.”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가장 가까이에서 본녀와 마주하기에는, 그리고 별궁을 그대 뜻대로 돌아다니기엔 그편이 가장 수월할 테니까.”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이걸 나보고 입으라고?’
때려죽여도 입기 싫은 옷이 눈앞에 있었다. 이 옷을 껴입고, 내가 찻잔을 나르는 장면 따위를 상상해 보았다.
“오···.”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때려치울까?’
진지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