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149
왜 하필 ‘포도’겠는가?
“···아, 훌륭하군요.”
“자네가 데려온 동료들의 도움이 컸네. 자네가 고향에서 미치광이 소릴 듣는 것 같다만은, 그래도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놓으니 돌려받는 게 있군.”
“그들 모두 주군께 목숨을 빚졌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자네에게도 말일세.”
“···.”
“이 디오니소스 신상을 보게. 아이깁토스에서 온 대장장이들이 직접 목상 위에 금을 씌운 것이네. 이 증류기 또한 다른 아이깁토스인들이 만든 것이고.”
“기쁘군요.”
오소르콘은 진심으로 기뻐보였다.
“위대하신 분을 흠숭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펼 수 있는 장소가 이렇게 늘었습니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었다.
교외에 새로 조성된 거대한 과수원은 곧 디오니소스 신도들의 일자리가 되었다.
그들은 무르익은 과일을 수확함과 동시에, 이 비밀 양조장 겸 신전으로 ‘재료’들을 공급할 것이었다.
내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신도들을 한 곳으로 몰아넣으면서 통제와 감시는 더 용이해졌고, 이렇게 신도들 사이의 구심점이 늘어나면 대화의 여지도 커지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주군의 호의에 감사합니다. 반드시, 제 목숨 이상의 가치로 보답하겠습니다.”
오소르콘은 내게 순수한 호의를 받은 듯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자네는 지금도 내 도시에 충분히 많은 것을 해주었네.”
아이깁토스의 장인들과 나를 연결해준 것도 오소르콘이었고, 디오니소스 신도들이 엇나가지 않도록 중간에서 잡아준 것도 그였다.
“따지고 보면, 지금 이 도시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변화도 자네의 공로인 셈이지.”
“···그렇습니까?”
“그래.”
변화.
이 도시에 부족하던 빈자리가 메워진다.
아이깁토스에서 느꼈던 어떤 압도적인 벽, 그 거대한 격차를 조금은 허물어낸 듯한 기분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었다.
참을 수 없는 희열이 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
아이깁토스인들이 온 뒤로 짧고도 긴 시간이 지났다.
그들은 모두의 예상보다도 빠르게 안탄드로스 사회에 동화되었다. 아마, 자신들조차도 이리 될지는 몰랐으리라.
지금 이 연회 자리만 보아도 그 융화의 결과를 볼 수 있었으니.
스클레오스는 손으로 아이깁토스식 꿀케이크 하나를 집어든 뒤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으로 그를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그 옆에는 갖은 종류의 찜과 튀김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백리향과 딜 등등 온갖 허브를 다 때려넣은 소고기 스튜를 마시려 할 때쯤 스클레오스는 뭔가 새로 발견했다는 듯 내게 말했다.
“기묘한 음식들도 많고, 그리고 너도 마치 저들처럼 입었구나.”
스클레오스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발을 내밀어 보였다.
발끝 부분의 밑창이 기다랗게 튀어나와 위로 구부러진 샌들. 아이깁토스의 신발이었다.
거기에 더해 아이깁토스인 시종들에게 부탁해 할 수 있는 한 가장 화려하게 의복의 주름을 잡아놓았고, 향수를 뿌린 뒤 온갖 보석과 구슬로 몸을 휘감았다.
“저들에게 안탄드로스는 변방인걸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들은 이 땅이 자신들의 ‘급’에 맞지 않는다 생각하겠죠.”
“그만큼 저들이 중요하더냐?”
“아저씨는 대장간을 주로 관리하시니 모르겠지만, 아노이토스만 하더라도 저들이 온 뒤로 일이 반의 반으로 줄었다며 춤을 추더군요.”
“반의 반?”
“예. 반의 반.”
“그거, 신통하구나.”
“그렇죠.”
스클레오스는 가볍게 탄식하더니 도금된 목제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눕듯이 앉았다. 그 역시 아이깁토스에서 가져온 물건이 아니라 안탄드로스제였다.
“전란으로 아이깁토스와의 무역이 끊겼으니 어쩔 수가 없어요. 아카이아발 해적들은 더더욱 기승을 부리고 아이깁토스의 국내적 혼란도 마무리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 그 혼란에 네가 일조한···”
“우리의 도시를 위하여 건배.”
스클레오스는 순간 인상을 쓴다. 나 역시 근엄한 얼굴로 그에게 명령하였다.
“그대의 주군을 위하여, 건배에 응하라.”
“···당신께서 바라신다면야.”
우리는 서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부딪혔고 그 내용물 역시 깔끔하게 비웠다.
스클레오스는 꿀과 포도즙 등등을 섞은 주스 같은 것을 마셨고.
나야 뭐···
살짝 알싸한 뭔가였다.
그동안 바빴으니까, 사소한 일탈이다.
이것이 신문물이다! (절망편-1)
“147큐빗(Cubit, 팔꿈치부터 가운데손가락까지의 길이, 약 50cm), 158큐빗.”
“이쪽은 130큐빗에 162큐빗일세!”
“엉망이군. 대체 누가 이따위로 측량을 한 건지, 나 원.”
나.
내가 했다.
나름 밤을 새가며 인부들에게 통일된 길이 단위를 교육시켰고, 다같이 똑같은 자를 이용해 이것저것 측정하게 만드는 것부터가 과제였는데.
그 노고를 몰라주다니!
···라고 말하기에는 저들이 말하는 오차의 수준이 수치스러울 정도로 도를 넘기는 했다.
윗변과 아랫변의 길이가 32큐빗이나 차이가 난다면 오차가 16미터를 넘긴다는 말인데, 저 위에 곧장 공동주택을 지어 올렸으면 직사각형이 아니라 사다리꼴이 되는 것 아닌가?
“이런 망할! 세로 길이는 양쪽 변이 121큐빗에 173큐빗!!”
아니네. 사다리꼴이라니 택도 없었네. 그냥··· 어··· 사각형이다.
미국의 콜로라도 주가 지도에서 볼 때는 네모나지만, 당시 측량 기술의 한계로 실상은 697각형 형태라 했던가.
그보다도 훨씬 못한 측량 환경에서 어설프게 시도한 안탄드로스의 도시계획은 아이깁토스인들의 무수한 한탄과 비명 속에서 빠르게 수정되었다.
그렇게 측량사와 해방 노예들이 피를 토해가며 측량을 계속한 결과, 새로 지어지는 도시의 도로와 건물들은 마치 부정교합을 고친 치아처럼 반듯반듯했다.
아이깁토스인들의 활약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재고가 얼마라고?”
“금화가 43데벤(Deben, 약 91g) 정도, 철전이 72데벤 정도 됩니다.”
“···벽돌은?”
“벽돌의 경우에는 동쪽 창고에 34상자, 서쪽 창고에 47상자, 북쪽에 11상자으로 도합 92상자 정도 됩니다. 이 중 10분의 1을 제우스 신전에 증축용으로 봉납하라 하셨으니 9상자를 바쳐 놓겠습니다.”
“···어어.”
“왜 그러십니까, 주군? 혹시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닐세. 좋아. 아주 잘했네.”
일이 편해진다.
작은 마을의 촌장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하나 만나보고 문제를 조정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탄드로스는 작은 마을이 아니고 안탄드로스의 군주도 촌장이 아니다.
멀리 안 가고 아파트 입주자대표들만 살펴봐도 그렇다.
그 수준만 가도 직접 대면하는 사람보다 서류로 만나보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모든 문제를 직접 보고 듣고 해결하기에는 복잡성이 한계 이상으로 높아진다.
그때부터는 소위 ‘추상화’ 작업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물건과 사람들이 숫자가 되고, 그래프의 점과 선이 되어주어야 일이 진행될 수 있다.
이 시대에 당연히 그런 작업이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으니, 군주의 권력과 행정체계가 일정 범위 이상으로 뻗어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는 아니다.
“54묶음! 소나무 54묶음을 주문하지 않았습니까? 일단 갈라봐야 알겠지만 이 목재는 건물 하나도 다 못 짓고 그만둘 양 아닙니까?”
“그, 너무 그러지 마시고···.”
“이렇게 되면 안탄드로스의 군주께서는 4지구에 불이익을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제 값을 쳐드리기 어렵단 말씀입니다. 스스로 정한 목표치를 이렇게 어기시면 도시의 일이 어긋나지 않습니까?”
“서쪽 도로 일부를 수리하는 데 금화 330개 정도가 들어갈 예정입니다. 일단 도로 수리를 위해 모아놓은 금화 중에서 해당 비용만큼을 차감하겠습니다.”
마치 내 두뇌가, 팔다리가 확장된 것만 같은 기분이다.
기본적인 산수와 작문이 가능한 수준의 인재들은··· 그 질에 상관 없이 단순히 양이 늘어난 것만으로도 큰 효과를 불러왔다.
안 그래도 도시 곳곳이 급격한 팽창으로 성장통을 겪고 있던 차였다.
그 상황에서 도로를 깔고, 건물을 짓고, 자재를 마련하고, 무엇보다도 사람을 부리는 일 자체가 쉬워진다.
“아노이토스, 어떤가?”
“어떻다 말씀드릴 것도 없이 최곱니다! 아이깁토스인들이 사무를 봐주니 자재 공급도 안 밀리고 중간에서 장난치는 놈들도 손쉽게 골라 족칠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아이깁토스인들이 온 뒤로 도시의 풍경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공동주택 3채, 남서부에 건설되었습니다.”
“현재 해당 지역에 233명을 이주시키는 중에 있습니다. 전부 미시아에서 온 루위인들입니다만.”
“그대로 진행하지. 아, 또···”
“하티인 공동체는 따로 수용하였습니다.”
“···어, 그래.”
다만, 삐걱대던 기계에 기름칠을 한 듯 모든 일들이 매끄럽게 굴러간다.
‘뭔가 아쉬운데···’라고 평소 느끼던 것들이 하나하나 충족되는 감각이었다.
그리스어를 할 줄 아는 몇몇 이들이 아교처럼 그들과 안탄드로스 사회를 연결했고, 그리스어를 모르는 이들은 하티어와 네샤어로 소통하하며 새로운 땅에 적응해갔다.
부디 저들 중 반절만이라도 정착해주길 바라며, 나는 집무실에서 잠시 눈을 감았고.
“파리스 님? 아이깁토스에서 온 서기관들이 알현을 요청합니다.”
“그 중 누구? 보통 대표자로 오던 인물이···”
“아킬라입니다.”
“아, 그래.”
곧 쉴 틈 없이 또 다른 업무가 들이닥친다.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아모시스와 오소르콘이 챙겨다 준 아이깁토스인들의 복식을 챙겨입는다. 잠시 감겼던 눈을 비비며 방을 나선다.
하늘하늘하게 비쳐보이는 옷, 호리호리한 근육질의 남성이 다른 늙고 젊은 남성들의 앞에 서 있었다. 근육질의 남성이 내게 절하자 다른 이들 역시 머리를 조아렸다.
“···저는 아이깁토스에서 글이나 끼적이고 하급 법관 노릇하던 아킬라라고 합니다. 제 뒤에 있는 이들 모두 아이깁토스에서 법관으로 일하던 이들입니다.”
“알고 있네. 이미 자네의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았으니. 동료들을 모아다 내게 달려온 게 자네라지. 고맙네.”
법관은 겸양을 떠는 것인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내게 고개 숙였다. 그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입을 열었는데, 아마 고관들 앞에 자주 서는 하급 관료로서의 습관인 듯했다.
“아닙니다. 그저 구차한 목숨을 구할 길을 찾다 보니 그리 되었을 뿐이지요. 치하받을 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내게 이야기하고픈 것이 있다고?”
“그러합니다. 파리스 님과 위대한 군주에게 필요한 것을 논하고자, 이 비천한 이가 감히 궁전에 몸을 들였습니다.”
적당히 비굴하고, 적당히 정중하게 고개 숙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고민했다.
어디 보자··· 서기에다가 하급 법관인 자가 내게 건의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법률과 재판에 관한 문제인가?
일단 안탄드로스의 군주로서 내가 다스리는 인구가 그리 많지 않으니, 아이깁토스처럼 체계화된 법률과 법원 체계가 필요할지는 잘 모르겠네.”
안탄드로스 일대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자기들끼리 해결하도록 둔다. 그 지역의 장로든 촌장이든 알아서들 처리하도록 둔다. 그 뒤에야 장로들이든 나든 개입하는 것이지, 내가 모든 걸 다 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이깁토스처럼 명문화된 법률과 법관 조직은 지금의 규모와 사회 복잡도로 보자면 불필요한 장식에 불과했다.
만일 그와 관련한 조언을 하려는 것이라면 나는 적당히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아닙니다.”
“흠? 그럼 무슨 이야기지?”
내 말에 법관은 조심스러운 미소를 드러내며 두 손을 모은다.
솔직히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아이깁토스인들이 따먹기 좋은 과실을 가져다줄 줄로만 알았다.
또 이 도시에 마술을 부려 어떤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줄 것이라고.
“긴 이야기입니다만···
일단 걸으면서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아니었다.
그리고 이때까지,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
나는 다른 법관들을 궁전에 놔둔 채 대표로 나선 남자와 길을 나섰다.
“···아!”
궁전 근처의 분수를 구경하는 법관의 얼굴에는 경이감 비슷한 빛이 어려 있었다.
“정말 놀랍습니다. 특히 저, 바다의 신으로 보이는 조각상의 힘과 위엄이 느껴지니 참 아름답습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 때문에 궁전을 드나드는 아이깁토스인들 또한 분수대 주위에 멈춰서서는, 멍하니 중력을 이겨내는 물줄기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이 도시의 시민들이 포세이돈 님을 흠숭하는 마음으로 만든 것이니, 자네도 동전 하나 던져보고 가겠나? 항해를 하든 뭘 하든 행운을 얻을지 모르잖나?”
내 말을 들은 법관은 “그래서 수반에 저리 동전이 많았던 게로군요.” 같은 소리를 웃으며 중얼거리더니, 품속에서 은화 하나에 입을 맞추고 던진다.
3층 수반 가장자리에 아쉽게 맞고 떨어진 동전이 그 아래쪽 수반에 퐁당, 하고 잠긴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법관이 조용히 중얼거린다.
“과연··· 안탄드로스를 보고 많은 이들이 에게 해의 황금이라 하더니, 이 때문이었군요. 신들이 사는 곳 같습니다.”
조용히 탄성을 터뜨리며, 새하얗게 빛나는 대리석 조각과 그를 감싸는 물줄기를 두 눈에 담는다.
아무래도 아이깁토스인들에게 안탄드로스는··· 아직 야만인과 해적들의 소굴이다.
그들의 정착을 유도해내려면 이 도시에 대한 인식이 ‘야만인 둥지’ 이상으로 개선될 필요가 있었다.
“일단 대로를 따라 내려가보지. 괜찮겠나?”
“예, 좋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데려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이 이런 명소 관광이었는데, 그게 꽤 효과 있었는지 아이깁토스인들이 단체로 헤파이스토스 신상이나 분수대, 공중 수로 주위를 기웃거리곤 했다.
“이 아름다운 도시가, 이 변방 다른 곳의 야만과 대비를 이루며 서 있는 모습이라니! 신들께서도 이 도시를 살 속의 진주처럼 어여삐 아끼시겠군요.”
물론 아직까지는 ‘야만인 도시 중에서 가장 번화한 곳’ 수준으로 생각하는 듯하지만, 이곳에서의 삶에 익숙해진다면 또 생각이 달라질 지 모른다.
자신들의 손으로 이 도시를 바꿔나가면서, 애정을 붙인다면 말이다.
아.
생각해보니, 내가 글 쓸 줄 아는 아이깁토스인들은 적당히 여유롭게 서기 일이나 맡겨놓았는데 이렇게 나를 알현하러 왔다는 건···
“정말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오물 냄새 따위 맡아지지 않고, 길거리는 깨끗하며, 사람들은 굶주리지 않습니다. 훌륭한 군주가 있기 때문에 이 평화로움이 이어집니다.”
‘문명인’의 시선으로 무언가 부족한 것이 감지되었다는 뜻이리라.
“과찬일세.”
“아닙니다.”
내가 고개를 돌려 아이깁토스에서 온 법관을 바라보니,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는 도로 위로 거인의 척추뼈처럼 뻗은 수로를 보면서, 시간을 알리며 망치를 두드리는 헤파이스토스 신상을 구경하면서 순수한 즐거움에 차 있는 듯했다.
“즐거움과 경이가 가득한 땅입니다. 만일 고향으로 돌아가 이곳의 광경을 이야기로 써서 전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반의 반밖에 믿지 못할까 걱정이군요.
이 도시의 찬란함은 세상에 널리 퍼질 필요가 있습니다.”
난 그제야 그의 ‘아름다운 도시’ 운운하는 말이 단순히 아첨이 아님을 깨달았다.
“다른 모든 동료 법관들, 장인들, 서기들이 저와 이야기해보고는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이 도시의 아름다움은 보존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아이깁토스인들의 판단이었고, 또 앞으로 나올 어떤 이야기의 서두였다.
“말만으로도 고맙군.”
“말만 이어진다면, 그는 겉치레일 뿐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래서 저희는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도시의 군주께 제안을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제안이라?”
“예.”
법관은 걸음을 멈추었다. 도시 외곽의 어느 광장이었다. 제우스가 찬란한 번갯불을 들고서 지상의 인간들을 내려다 보는 석상이 가운데 서 있었다.
“쿠마트(Kumat, 고대 이집트인들이 이집트를 일컫던 말), 아니 아이깁토스는 문명이 오래된 땅입니다.”
“알고 있네. 수백년이라는 말도 그 땅의 역사를 가리키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하지.”
“아, 역시 박학하신 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깁토스의 중심이 무엇인지도 아시겠지요.”
나일.
지구상에서 가장 긴 강.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부터 앞으로 3,000년 뒤까지, 이집트를 지중해에서 풍요로운 땅으로 만들어낸 이집트의 척추.
아이깁토스인들은 한 해를 세 계절로 나누었다. 나일 강의 범람기인 아케트(Akhet), 나일 강의 물이 빠지고 농토가 드러나는 농번기 페레트(Peret), 그리고 수확기인 셰무(Shemu).
아이깁토스인들의 삶과 시간은 나일 강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말씀하신 대로 강물이 실어다준 비옥한 흙 위에서 우리 사람들은 농사짓습니다. 그리고 땅이 힘을 소모하면 다시 강물은 범람하여 새 흙을 가져다주지요.
허나, 나일 강은 위대한 만큼 얌전하지 않습니다.
소베크(Sobek, 나일 강의 신)께서 악어의 머리를 취하신 데서도 알 수 있지요. 언제 나일 강이 그 향하는 방향을 바꾸고 뒤틀지는 오직 신들만이 아실 터입니다.”
내가 알기로··· 그 번성하던 피람세스 역시 나중에 가면 나일 강이 방향을 바꾼 뒤로는 그저 흙투성이 땅이 되어 몰락한다.
나일 강에 의존하여 세워진 문명은 강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 무너질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허나, 그럼에도 아이깁토스의 문명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강을 따라 진주처럼 꿰인 도시들과 그들을 하나로 묶는 왕조는 비록 하나둘 무너지거나 모습을 바꿀지라도 언젠가 다시 찬란한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지금껏 약 2,000년 동안이나, 그리고 앞으로 1,000년은 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아십니까?”
“글쎄. 잘 모르겠네.”
“그 아무리 위대한 파라오라도 언젠가 그 영혼은 인간의 몸을 벗어나게 됩니다. 바(Ba, 영혼을 이루는 개인의 인격)는 육신에 남더라도 카(Ka, 영혼을 이루는 영적 에너지)는 저 멀리 떠나지요. 어떤 고결한 귀족도, 신관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남는 것이 있습니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법관이 나를 향해 돌아본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장인들이 남습니다.
하급 서기, 대장장이, 도기 장인, 보석 세공인들 말입니다.”
“그건···”
“그건 그들이 어떤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귀족 가문들은 흥성하고, 왕조는 바뀌더라도 그들의 조상과 같이 그들은 돌을 깎고 도자기를 구우며 파피루스를 만들며, 주민들의 머릿수를 세릴 겁니다.”
이제야 나는, 그의 의도를 짐작한다.
“이 도시는 위대합니다. 무너지기에는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허나, 이 도시는 저희가 알던 그 어느 도시와도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온 식자들은 그 비결이 무엇인지 밤낮으로 토론했습니다.”
법관이 나를 바라본다.